<기독교강요> 의 저술 목적
칼빈은 왜 <기독교강요>를 썼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첫 째입니다.
머리속에 삼각형을 한번 그려보십시오.
그 맨 위 첫째 꼭지점에 하나님, 그리고 아래 왼쪽 둘째 꼭지점에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마주 보는 오른쪽 셋째 꼭지점에는 믿음을 놓으십시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봅니다.
그런데 직접은 볼 수 없고, 오직 성경이란 거울을 통해서만 봅니다.
믿음은 성경에 비치는 하나님을 실제처럼 보는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계속 그럼 믿음을 강화시켜줍니다.
그런데 <기독교강요> 는 믿음의 눈을 밝혀주는 안경 같은 것입니다.
믿음이 성경을 바르고 확실하게 보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따라서 성경이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목적입니다.
성도는 믿음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길을 비취주는 등불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기독교강요>를 배우면 배울수록 성경에 대한 이해가 더 밝아지고 더 확실해집니다.
당연히 <기독교강요>를 공부하는 사람은 이 어둡고 험한 세사을 걷다가 넘어지는 일이 휠씬 줄어듭니다.
밝은 등불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 다음 세 번째 목적입니다.
천주교의 실패는 교회가 성경을 전횡적으로 해석했다는 데 있습니다.
교황을 위시한 교회 <조직> 와 교회의 전승이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왜곡하고 억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반대로 성경이 교회를 다스리고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성경 해석의 안내자와도 같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성경에 대한 해석을 바르게 해줌으로써,
교회의 순결성과 교회의 생명력을 견고하게 붙들어 줍니다.
정리해 볼까요?
칼빈이 평생 목숨 걸고 <기독교강요>를 쓴 목적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믿음을 위해서, 둘째는 생활을 위해서, 셋째는 교회를 위해서입니다.
<기독교 강요> 의 출간 역사
그러면 이제 <기독교강요>의 초판부터 그 마지막 판까지의 역사를 대강 흝어봅니다.
1534 년 1월 칼빈은 드디어 방랑자로서의 인생을 출발합니다.
파리대학 총장 니콜라스 콥의 부임 연설문을 써주었던 그는 그 연설 파동으로 대학 기숙사에서 쫓겨나
도망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동안의 긴 신부 수업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가 그의 나이 약관 23세였습니다.
이리저리 숨어다니던 그는 바젤에 도착합니다.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숨어 지내던 그는 그 역사적인 도시 바젤에서 드디어 붓을 듭니다.
바젤은 독일, 푸랑스, 스위스의 경계에 있는 도시로서 유명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이미 당시보다
20년 쯤 전에 헬라어로 된 신약 성경을 발행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천주교 신부들만 읽을 수 있도록 모든 성경은 라틴어로만 되어 있었지요.
거기서 그는 <기독교강요>초판을 발행합니다.
물론 라틴어로 썼습니다.
천주교의 우두머리들을 겨냥했다고 볼 수 있지요.
루터의 소요리문답처럼 십계명, 사도행전, 주기도문, 세례와 성찬, 그리고 천주교의 다섯 성례라고 하는 것들,
그리고 성도의 자유와 교회, 징계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총 6장으로 되어 있는 간단한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책은 즉시 당시의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칼빈을 종교개혁자들의 챔피언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였으니까요.
조숙한 천재였지요.
그 뒤 그는 스위스 제네바로 숨어들어갔고, 종교개혁이 소개된지 2개월밖에 안 되던 제네바에서 그는
파렐이라는 개혁가에게 설득과 강요를 받아 제네바의 개혁을 주도하게 됩니다.
칼빈은 1536년에서 1538년까지 약 3년 여 동안 열심히 제네바를 성경적 도시로 만들어갑니다.
처음엔 제네바 시민들이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깨끗하고 신선했으니까요.
하여튼 천주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칼빈을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개혁이 좋기는 한데 너무 깨끗이 하자고, 너무 바로 하자고 그러니까 싫었습니다.
결국 칼빈을 쫓아내버립니다.
29세의 총각 칼빈은 다시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도망간 곳이 스트라스부르그입니다.
여기서 그는 1541년까지 지내게 되는데, 그동안 그는 상상치도 못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선 그는 독일의 종교개혁가 부처(Bucer)를 만납니다.
칼빈은 이 사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또 거기 도착한 그 다음에 곧바로 <기독교강요>제2판을 냅니다.
6장이던 강요를 17장으로 대폭 늘렸지요.
물론 라틴어로 썼는데, 이 때 그의 문장은 최고의 것이라는 극찬을 받습니다.
제네레파 카톨리와의 논쟁이 실렸고, 어거스틴, 부처의 영향이 많았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다음해, 그러니까 1540년에 드디어 결혼을 합니다.
경건하고 지혜로운 여인 이드레트 드 뷔르를 만나게 되지요.
과부였고 칼빈이 목회하던 교회의 성도였습니다.
이미 자녀들도 있었고 매우 병약해서 칼빈과 나란히 '거어다니는 쌍둥이 병원' 이었습니다.
칼빈은 그녀를 극진히 사랑했고 그의 아내 역시 극심한 가난중에서도 최선을 다해 남편을 도왔습니다.
늘 싸우고 도망다녀야 했던 칼빈은 결혼을 통해 큰 안정을 얻었습니다.
결혼한 신랑은 기분이 좋아서였을까요? 다음해에는 그는 드디어 프랑스어로 <기독교강요>를 출판합니다.
이 프랑스어판 <기독교강요> 는 칼빈을 프랑스 산문의 아버지로 올려놓았습니다.
명백하고 위엄이 있으며 간결한 특징을 갖고 있지요.
이 프랑스어판 <기독교강요> 는 루터의 유명한 독일어 성경보다도 그 영향력이 더 직접적이고 광범위했다고 합니다.
라틴어 성경만 읽었던 당시 유럽과 프랑스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이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당시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그는 이 시기에 프랑스어로 된 시편집을 만들어냅니다.
찬송가집이지요.
그러는 동안에 스위스 제네바는 다시 칼빈을 지도자로 초청합니다.
이래서 칼빈은 1541년 다시 제네바로 돌아갑니다.
장마다 절로 세분화하다
제네바로 돌아간 그는 이전보다 더 강력하고 체계적으로 제네바 시민들을 가프치고 도시를 개혁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또 다시 지곡한 아픔이 찾아옵니다.
1542년 아내에게서 낳은 귀한 두 살바기아들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일로 깊은 상처를 받게 되지만, 그는오히려 "교회의 모든자식이 다 내 자식" 이라며 더 열심을 내어 일을 합니다.
1543년 다시 새로운 판 <기독교강요>를 발행합니다.
17장에서 21장으로 확장했고, 여기에 실린 많은 인용문들은 그가 얼마나 끊임없이 연구했는가를 보여줍니다.
1545년에는 프랑스어판을 또 발행합니다.
1인 10역의 벅찬 업무에 시달리며 정신없이 지내던 그는 1549년에 또 한번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것입니다.
원래 병약했던 아내는 오랜 병고 끝에 칼빈 곁은 떠납니다.
결혼하고 나서 겨우 9년이 지났을 때 였습니다.
칼빈은 너무나도 크게 상심했지만, 오히려 더 열심히 일에 파묻힙니다.
놀랍게도 그는 아내가 죽은 다음해에 다시 제 4판<기독교강요>를 발행합고 다음해에 곧 프랑스어로 출판하는데,
이때 장마다 절로 세분화시켰습니다.
이 책은 불티나게 팔렸답니다.
드디어 1559년 칼빈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이 나오게 됩니다.
그가 죽기 5년전이지요.
당시 그는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항상 오늘내일 오늘내일 했답니다.
특히 학질의 일종인 사일열이란 중병에 걸려 목숨이 경각에 달렸었는데, 그는 그럴수록 더 미친듯이 <기독교강요>
개정 작업에 몰두 했답니다.
죽기 전에 좀더 완전한 책을 세상에 내옿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의 가슴은 항상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그가 1559년에 라틴어판,1560년에 프랑스어판으로 최종판을 내놓았을 때, 세상은 다시 한번 감짝 놀랐습니다.
여기서 그는 전체 21장이던 책을 80장으로 대폭 늘렸고, 좀더 쉽고 완벽한 구조로 제 구성했습니다.
전체를 4부로 나눴는데, 1부는 창조주 하나님 2부는 구세주 예수님, 3부는 성령 하나님,
그리고 4부는 교회의 순서로 다루었습니다.
이 첵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지금도 세계의 각 언어로 계속 번역되고 있습니다.
역경과 고난의 열매
자, 이쯤에서 정리를 한번 해봅시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는 우선 고난의 열매입니다.
도망, 가난,질병, 오해, 아들과 아내의 죽음, 로마교회와 이단들과의 끝이 안 보이는 싸움들, 이러한 고난의
밭에서얻은 열매들입니다.
그는 <기독교강요> 만 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책들을 썼고, 특히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성경 전체에 대한 탁월한 주석을 쓰기도 했습니다.
또 그의 <기독교강요>는 초판부터 최종판까지 23년이란 평생이 걸린 작업이었습니다.
놀라운 애정과 열정과 수고가 담긴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6세에 썼던 초판의 내용과 그가 완숙해진 경지에서 쓴 최종판의 사상적 내용이 거의 같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에 가까운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이론이 성경에서 나왔고, 그의 성경 해석은 오직 성경으로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 해석들이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지만, 칼빈의 해석은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 해석한다 " 는 원칙을
철저히 따랐습니다.
아무튼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모든 개혁신학의 총체(SUMMA)가 되었습니다.
개혁교회를 개혁교회답게 거듭나게 하는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