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이어지는 정명훈의 레코딩 행보
합창으로 전하는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
정명훈이 현재 맡고 있는 직책은 아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 이렇게 셋이다. 그중 마지막 타이틀이 차지하는 비중은 나머지에 비해 커 보인다. 앞의 두 악단에 쏟는 정성도 대단하지만, 레코딩 대부분이 로마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DG에서 정명훈의 위상이 예전에 비해 크게 축소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속속 발매되는 산타 체칠리아 악단과의 굵직한 종교음악 프로젝트를 보면,
그는 여전히 레이블이 원하고 또 애호가들이 원하는 스타 지휘자란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정명훈이 산타 체칠리아에 부임하면서 로마에는 처음으로
콘서트 전용 홀이 생겼다. 그즈음 그는 새로운 콘서트홀에 적용할 음악의
방향을 종교 합창으로 잡았다.
“로마에서 종교곡 프로젝트에 임하고 있습니다만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티칸 2000년 역사는 처음부터 음악의 흐름 그것일 테니까. 또
하나, 클래식 음악의 원류는 거의 교회 음악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팔레스트리나의 지휘를 시작으로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됐습니다.”
정명훈의 결심은 음악원이 훌륭한 합창단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것은 레이블이 갖고 있던 아이디어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지휘자와 악단은 1997년 8월 교황의 파리 공개 미사 때 바르톨리, 보첼리와 녹음한
‘종교 합창’ 앨범을 시작으로 종교음악 순례에 나섰다. 이듬해 터펠의 음원을 보충한 2집이 발매되면서, 이 두 음반에는 몬테베르디에서 풀랑크에
이르는 명종교 합창의 선곡이 이뤄졌다.
거기에는 비발디의 ‘글로리아’에서 약동하는 현의 표정 등 호감 주는 트랙이 많았다. 같은 해 발매된 포레의 ‘레퀴엠’은 떠오르는 두 스타 바르톨리와 터펠을 솔로로 기용해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에 못 미치는 범작. 솔리스트 음성이 곡 자체에 어울리지 않았을 뿐더러, 정명훈의
해석이 피상적인 접근에 머물렀다. 반면 보첼리와 녹음한 ‘종교 아리아집’은 노래에 대한 정명훈의 천부적인 감각을 일깨워주는 호연이었다.
이렇듯 부침을 거듭하는 정명훈의 종교음악 프로젝트는 올해도 계속된다.
2001년을 여는 신작 두 편은 바칼로브의 ‘미사 탱고’와 베르디의 ‘네 개의 성가’. 그 타이틀이 말해주듯 ‘종교성’의 음악적 구현에서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 루이스 바칼로브는 칠레의 시인 네루다와 이탈리아 청년의
우정을 그린 영화 ‘일 포스티노’의 영화음악을 담당하여 1994년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바 있는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그가 1997년 만든 ‘미사 탱고’는 미사 형식을 자국의 탱고 리듬에 풀어낸 합창곡이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라미레스의 ‘미사 크리올라’와 비슷한 시도라 볼 수 있다.
레코딩계 두 화두, 탱고와 베르디를 오가며
그는 미사 텍스트를 스페인어로 옮기면서 앞의 몇 구절만
가사로 선택했다. 그것은 특정 교인들만을 위한 음악이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작곡가가 처음 정명훈에게 작품의 유럽 초연을 제의했을 때, 지휘자의 첫 반응은 ‘미사
뭐라고요?’였다고 한다. 제목에서 비롯된 의구심은 악보를 보면서 점차 놀라움으로 바뀌어갔다.
“곧 어떤 감정… 인간적인 요소를 느꼈습니다. 이 음악의
힘은 쉽게 친숙해질 수 있으면서도 높은 음악성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독창자인 도밍고 역시 비슷한 느낌을 공유했다. 이렇게 정명훈과 도밍고는 흔쾌히 리허설에 나섰고 1999년 4월 로마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음반은 유럽 초연이 있기 2개월 전에 녹음된 것이다. 정명훈이 말했듯 곡은 흡인력이 강하다. 쉽게 기억되는 멜로디, 고전적인 음악 구조, 단순한 가사는 들을 때마다 새로운 감흥을 부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편을 지배하는 탱고 리듬과 탱고 하면 빠질 수 없는 악기 반도네온. 키리에 서두에 읊조리는 반도네온의 레치타티보는 고정 악상이 되어 반복된다. 평이한 솔로의 노래, 흥겨운 합창, 선명한 관현악이 전곡을 꿰며 상쾌함 가득한
음반을 만든다. 관현악으로 편곡된 피아졸라의 탱고 명작인 ‘탱고 랩소디’와 ‘리베르탱고’ 두 편도 신선하다.
한편 베르디 앨범은 지난해 9월 녹음된 따끈한 신보. ‘아이다’ 이후 베르디가 종교음악 작곡가로 변신을 꾀하고 쓴 ‘네 개의 성가’가 핵심 레퍼토리이다. 여기서 정명훈의 해석은 템포를 느리게 잡고 악상에 침잠하는 품이다. ‘스타바트 마테르’의 흐름은 안정감 있고, ‘테데움’의 그레고리오
성가 주제의 조형과 그 변형이 만족스럽다.
반면 합창단의 양감이 부족해, 가령 ‘성모 찬송’의 호모포니는 그다지 두텁게 들리지 않는데, ‘탱고 미사’에 비해 떨어지는 녹음 상태도 한몫 했다. 음반에서 가장 인상적인 곡은 레미지오가 부른 ‘오텔로’의 아베 마리아이다. 그는 정명훈의 전곡 녹음(DG)에서 데스데모나를 맡은 스투더보다
힘에서 뒤지지만 정갈함에서 앞선다. 베르디가 요구한 ‘소토 보체’로 시작하여 피날레의 Ab에 이르는 과정에 다면의 음성 연기를 맛볼 수 있다.
2000년은 바티칸이 ‘성년’(聖年)을 선포한 뜻깊은 해다. 그를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에서 정명훈의 역할이 컸던 것은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을 옆에 끼고 있다는 점이 정명훈과 산타 체칠리아 악단의 종교음악에 큰 힘을 실어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올해
계획된 녹음은 아직 없지만 든든한 배경이 있는 한 정명훈의 종교음악 시리즈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정명훈은 올해 말 발매될 도밍고의 베르디 아리아집(DG)을 게르기예프와 나누어 반주한다.
이재준 | 음악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