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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1일부터 12일 1박 2일간 소성리 투쟁, 이에 대한 우리 목소리가 너무 없고 비난하는 목소리만 난무합니다.
직접 싸운 한 사람으로 그때 상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빼앗긴 우리 땅에도 봄은 오는가
소성리 1박 2일 투쟁기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2017년 2월 27일 롯데이사회는 국방부가 소유한 남양주 땅과 성주 롯데골프장을 교환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국방부는 그 땅을 미군에게 주고 미군은 이 땅에 철조망을 치고 사드를 들여왔다.
지난 5월 연휴 기간에도, 아니 대통령 선거 당일에도 사람들이 소성리를 지키러 간 것은 그곳이 미국 땅이 되었고, 저들은 한국의 공휴일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시간표대로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충격이었다. 저렇게 쉽게 우리 땅이 미국 땅이 되는가? 그런데 어떻게 우리 김천 시민들은,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기네 땅 일부가 미국 것이 되었는데도 그렇게 무감각할 수 있는가?
그러고 보니 일제 강점기에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을까? 일부 싸우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현실에 순응하여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그래도 촛불시민들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조금씩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니 기대를 걸게 되었다. 기대하고 실망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는 했다. 박근혜가 탄핵되었을 때도, 또 탄핵이 인용되었을 때도,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도 우리는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물론 그 기대는 번번이 좌절되곤 했다. 그래도 한반도에 훈풍이 부는 듯해 또다시 기대를 갖게 되었다.
사드는 북핵 방어용이라 했으니 비핵화가 실현된다면 여기 더 이상 있을 명분이 없어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잊고 있었다, 사드 기지는 미국 땅인 걸. 그들은 자신들이 공짜로 차지한 이 땅에서 절대 불편하게 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마침내 국방부는 공사 장비를 들여보내 3개월간 경찰을 상주시켜 공사를 하겠다고 했다.
이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그들은 치밀하게 작전을 전개한 듯하다.
먼저 조선일보를 비롯한 소위 ‘보수언론’이 떴다. 그들은 주민들 방해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긴장했다. 아, 날이 따뜻해지니 이제 공사를 하겠다는 신호구나.
이어 국방부는 언론에 공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브리핑을 했다.
‘장병들의 복지’를 위해서라 했다. 지붕에 누수가 되고 거주 공간이 협소하고 열악한 환경이라 했다.
뉴스민을 제외하고 어느 언론에서도 이것이 미군을 위한 복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드 기지에 거주하는 400명 중 200여 명은 미군이다. 이들은 출퇴근도 불편하고, 음식을 해먹기도 불편하고, 거주 공간도 부족하단다.
당연하다. 소성리 주민들은
“하늘의 길은 막을 수 없어도 내 땅 앞으로 미군과 미군을 위한 기름과 같은 것은 지나다닐 수 없다.”
고 했다. 사실 소성리를 지키는 것은 그들의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국군을 위한 부식차량과 의료 시설은 막지 않았다. 그들도 내 자식이나 손자 같은 대한민국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달랐다. 저 치욕의 4월 26일, 썩소를 날리고 동영상을 찍어가면서 유유히 들어가던 미군 장병들은 소성리 어른들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자신들이 자주 가던 곳에 미군 기지가 만들어지고 미군 무기가 들어오고 그곳을 국군이 지키는 이 현실을 마주하고 소성리 어른들은 치욕에 떨어야 했다. 그건 이웃한 김천 농소면 주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상대는 거대한 미국이다. 그 미국의 뜻에 따라 우리 국방부는 기어코 공사해야 한다고 했다. 더구나 사드를 고정화시킬 패드도 깔고 이런 저런 공사를 하고나면 ‘임시’ 배치한 사드는 ‘완전’ 배치된다. 남북 정상회담, 북미회담과 같은 평화로 가는 분위기에 이 무슨 찬물을 끼얹는 일인가? 더구나 사드를 배치할 때 뭐라고 했나? 북핵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 하지 않았던가?
“북핵 핑계 사라졌다. 사드 공사 중단하라!!” 구호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사드를 반대하는 6주체(김천, 성주 소성리, 원불교, 대경대책위, 부울경, 전국행동)로 구성된 사드철회 평화회의에서는 고민을 한 끝에 국방부에 지붕 보수 공사나 오폐수 공사 등은 진행하되 주민들이 참관하게 해달라고 제안했지만(사드와 관련한 공사인지 확인하기 위해) 군사 지역이라 민간인은 안 된다고 거절당했다.
그리고 12일 새벽에 공사 장비를 들이기 위해 4천 명의 경찰이 소성리에 들어온다고 한다. 와서는 3개월간 상주하며 공사한다고 한다.
그렇게 운명의 날을 앞둔 11일, 저녁 촛불집회에 나가면서 짐을 챙겼다. 혹시 잃어버릴지 모르니 새로 산 패딩잠바를 두고 헌 패딩잠바를 입었다. 큰 담요도 챙겼다. 그리고 책도 잃을 것을 대비하여 계간지를 넣었다. 보조 밧데리도 넣었다.
집회 분위기는 비장했다.
다음날이 600회 촛불집회인데 “600회 선물이 공사 강행이란 말인가?”라며 울분을 토했다.
이길 수 없다는 절망감도 들었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는 일, 달려가야 했다.
집회를 마치고 소성리로 들어가는 길. 캄캄한 밤길만큼이나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경찰이 보이지 않았다. 삼거리에 늘 있던 경찰차마저 한 대 빼고는 다 사라졌다. 방송차나 화장실차도 없다.
더 불안했다. 뭔 작전일까? 우리들이 수적으로 열세인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 그러고 보니 예전 8천 명, 6천 명 동원되던 때보다는 동원되는 경찰 숫자가 적다. 4천 명이 적은 수는 아니지만 말이다.
이번에 저 장비들이 들어가고 나면 우린 얼마나 기운을 잃고 실의에 빠지게 될까?
야속했다. 롯데골프장을 국방부에 넘기고 피해자인 양 행세하는 롯데도 미웠고, 그 롯데에서 일하면서 한 번 반대 목소리도 내지 않았던 직원들도 미웠다.
롯데는 노동조합도 없나?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망하지 않는다. 직원들을 자르면 그만이니. 사드로 인해 피해를 입으면 구조조정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왜 그 전에 노조가 나서서 한마디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왜 저 사람들을 잡아들이지 않느냐고 호령하는 ‘보수’언론도 밉고, 툭하면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흔들며 “김정은이 사드 반대하라고 시키드냐?”던 박사모나 서북청년단도 미우나 가장 야속한 것은 자기네 땅을 미군에게 맡기고 안보와 평화를 얻는다 생각하는 우리 국민이었다.
소성리에 도착하니 사람들로 붐볐다. 낮에 수요연대집회에 참석했다가 머무른 사람들과, 소성리에 또다시 경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문규현 신부도 오셨고, 황동환 신부도 낮부터 와 있었던 것 같다. 퇴직하고 농사짓는 작은 파도님도 낮 집회를 마치고 가서 농민회원들과 오겠다고 하더니 먼저 와서 웃으며 인사했다. 기록팀 새하늘 새땅님은 포항에서 달려 왔다가 자정이 넘어 다시 마음만 두고 몸은 떠났다. 출근해야했기 때문이다.
우리 젊은 엄마들도 와서 있다가 아이들 때문에 나가야 했다.
여성들은 마을회관에서 자고, 컨테이너 건물에는 남성들이 자면 된다고 했다. 1시가 넘어 농소 언니들 옆에 누워 잠을 잤다.
2시 쯤 일어나라고 했다. 3시에 진밭교에 모인다 해서 조금 더 잤다. 30분 후 이제 나가야 한다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머리 위에 북두칠성이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단단히 차려 입었지만 공기는 차가웠다.
진밭교에 올라가니 철제틀이 놓여 있고 사이사이에 앉으라 했다. 아까 마을회관에서 여러 사람들이 낑낑 대며 들어 나르던 것이 이것이었구나.
나는 맨 뒤로 갔다. 사진도 덜 찍히고 덜 무서울 것 같아서였다. 자리는 푹신했다.
어둠 속에서 집회가 시작되었다.
노래도 부르고 발언도 하는데 갑자기 날이 환해지고 다리 옆 계곡에 물이 졸졸 흘러가고 벚꽃이 활짝 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속절없이 미국에게 넘겨주고 그들의 편의를 위해 자국민을 짓밟고 공사하려는 자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언론인에게 화가 났다.
아직 경찰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간 보는 거 아닌가 했더니 지금 추풍령에 버스 30대가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 김밥과 빵이 돌았으나 먹히지가 않아 반 정도 먹고 가방에 넣었다. 조는 사람에,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 등 조금 느슨한 분위기였다.
앞에는 대회를 진행할 수 있도록 트럭이 무대로 쓰이고 그 앞에는 남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었다.
원불교 교무들이 맨 앞자리에 앉고 소성리 어르신들이 그 뒤에 앉았다.
내가 앉은 맨 뒤에도 남자들이 지키고 있고, 트럭 두 대가 놓여 있었다. 그 트럭 너머에도 젊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트럭에는 ‘북핵핑계 사라졌다. 사드공사 중단하라!’는 글씨가 붙여져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트럭 밑에 우리 김천 사람이 드러누워 최후까지 버틸 각오로 있었다.
우리 수야 겨우 150명 정도. 경찰은 3, 4천 명. 그들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민간인인 우리로서는 당할 수밖에 없다. 제주 강정마을의 비극을, 밀양 송전탑의 비극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날이 밝으니 우리가 앉은 곳에 있던 자리에 그물이 놓였다고 그걸 쓰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목을 낼 수 있도록 가위로 자르고 파일로 그물과 틀 사이로 묶기도 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떠났을 때라서 그물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사이 경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6시 30분에 원불교 평화기도회가 열렸다. 조용히 경을 읽으며 함께 고개 숙여 절을 했다.
김천, 성주와 더불어 투쟁의 선봉에 서서 싸우는 원불교 교무님과 교도들. 내 앞쪽에 앉아 있는 원익선 교무는 참 조용하고 학구적인 분이다. 그분이 조용히 눈을 감고 결연한 자세로 있는 모습이 겁 많은 나로선 큰 위로였다. 생각해보니 9월 7일 저 새벽에 경찰이 한 사람씩 끌어낼 때도 내 옆에 앉은 교무님이 나지막이 부르던 노래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원불교 기도회가 끝나고 이제 개신교 예배가 진행되었다. 예수살기 목사님과 장로님이 트럭에 올라가 진행했다.
원불교가 교세가 작아 성지에 사드 무기가 들어오는 굴욕을 겪었다면, 그 원불교에 따뜻한 손길을 내민 예수살기 소속 목사들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들이나 정의평화위원회 신도들의 격려와 응원은 감동이었다. 그 때문에 나 또한 오랜 냉담 생활을 청산하고 소성리 천주교 상황실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반 정도는 뒤로 돌아 앉아라 했다. 내 자리가 갑자기 앞자리가 되었다. 물론 트럭 앞뒤와 난간 쪽으로 젊은이들이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좀 불안했다.
젊은 엄마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후딱 밥 차리고 애들 깨워 학교 보내고 왔다고 한다. 비어있는 자리에 들어온다. 내 자리를 내주고 한 칸 앞으로 갔다. 두 자리가 비어 있어 난간 바로 옆 맨 끝에 앉았다.
그러는 동안 해가 떠올라 더워지기 시작했다. 간밤에 덮어썼던 큰 담요를 말아 가방에 넣었다. 패딩잠바도 벗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데 뒤에 앉은 젊은 여성이
”추워서 아플 수는 있어도 더워서 아프지는 않아요.“하면서 그냥 입으라 했다.
다리가 경사져 뒤로 돌아앉으니 자세가 너무 불편한데 옷을 입고 가방을 메니 조금 불편이 가셔지기에 그대로 입고 가방을 메었다. 좀 있으니 밀짚모자도 돌았다. 소성리에서 작년 여름에 사람들이 예쁘게 색칠도 했던 모자였다.
다음으로 미사가 진행되었다. 농소 아가페 언니가 앞에 가서 소성리천주교 상황실에서 미사 때 쓸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책자를 들고 왔다. 미사는 황동환 신부와 김동건 신부가 진행했다. 돌아앉아서 하는 게 불편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햇빛이 눈부시고 뜨거워 옆으로 비켜 앉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데 경찰들이 다리 밑에 에어매트를 깔기 시작했다.
“저거 뭐야? 우릴 저 밑으로 집어던지려는 거야?”
“다리쪽으로 몰아 떨어뜨리려는 걸까?”
우리는 불안해서 수군댔다.
그러는 사이 경찰들이 몇 번 화이바를 썼다 벗었다, 일어났다 앉았다를 하며 우리 애를 태웠다. 지난 몇 번의 경험으로 우린 경찰들이 화이바를 쓰고 일어나면 진압이 시작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경찰들은 우리를 어떻게 진압할 것인가 난감해 했다고 한다. 쇠사슬로 묶었을까봐 그걸 끊을 준비를 해왔는데 이런 이상한 틀 속에 있으니 한참을 고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예상보다 진압 시간이 늦어졌던 모양이다.
한 시간이 넘도록 해산 방송이 나오더니 10시 30분 쯤 드디어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먼저 트럭 앞뒤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 주로 젊은 남자들이 대상이었다. 이들을 밀어내고 트럭 사이 좁은 틈으로 해서 우리 쪽으로 들어오기 위해서였다. 트럭은 밀어낼 수 없었다. 좁고 비탈진 곳이라 잘못 밀리면 대형사고가 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압이 시작되는 걸 보고 어느새 미사를 집전하던 김동건 신부가 달려와 트럭 위에 올라앉았다.
한 젊은이가 난간 위에서 필사적으로 경찰이 밀려들어오는 걸 저지했다. 우리는 소리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이는 반쯤 부러진 사무여한 깃발에 의지하여 난간에서 경찰에 저항했다. 여럿이 에워싸서 자칫 다리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보다 못해 국가인권위원회 조끼 입은 사람을 불러서 호소했다. 그는 경찰을 헤집고 들어가더니 젊은이를 끌고 나왔다. 사람들이 너무 황당해서
“아니, 경찰 폭력을 물려 달랬지 누가 사람을 끌어내라고 했나?”며 항의했더니
”이 사람이 너무 위험해서요. 제 임무는 그겁니다.”하고 설명했다.
“경찰이 물러가면 안 위험해요!”
우리는 그렇게 따졌다. 그러는 사이 경찰은 어느새 우리 지킴이들을 다 몰아내고 트럭 앞과 우리가 앉아 있는 사이 좁은 공간 앞을 가득 차지했다.
이제 앉아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남자 경찰들이 내 앞자리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 하기에
”야! 우리 여자야! 남자처럼 보이나?“ 항의했더니 여경들이 투입되었다. 그 여성을 끌어내려 하면서 남자 경찰들이 내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들을 지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난간을 왼 손으로 부여잡고 버텼다. 경찰의 구둣발에 팔이 미끄러지면 경찰의 다리를 잡았다. 저항하던 앞 사람이 끌려 나갔다. 이제 내 차례다. 경찰 둘이 나를 에워쌌다. 저 9월 7일 다섯이서 에워쌌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무장하고 에워싸는 그 자체가 폭력이었다. 숨 막히던 그 공포.
또 다시 그것이 시작되었다.
뒤에 있는 남자 경찰은 구둣발로 내 팔과 등을 짓누르며 지나가려 하고, 앞에 있는 여자 경찰 두셋은 내 무릎을 짓누르며 나를 좁은 틀에서 끌어내려 했다. 나는 왼손으로는 난간을 부여잡고, 오른 손으로는 그물을 잡아당기며 버둥댔다. 틀 밑에 내 두 다리가 있으니 그들도 내 다리를 끌어올리는 데는 애를 먹었다.
경찰이 내 두 무릎을 누르니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주위에 마침 기자가 보이기에 소리를 쳤다.
“사진 찍어 주세요! 기자님! 기자님! 이 사람들 좀 찍어주세요!”
기자가 오니 잠시 멈칫 했다. 하지만 기자가 나에게만 있을 수 있나. 여기저기서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가고나면 또 공격이 시작됐다. 이번엔 국민TV라 적힌 카메라를 든 사람이 보였다.
”악! 살려주세요! 국민TV! 국민TV!“ 하니까 사람들을 헤치고 가까이 와서 찍어주었다. 또 조금 주춤했다.
그러더니 의사와 간호사가 왔다.
”나오세요.“하고 의사가 말했다.
뭐야? 아까 국가인권위원회 사람과 똑같이 말하잖아?
사람들이
”왜 나오라고 하나? 경찰을 좀 물러가게 해 달라!“고 호소하니
”그건 우리가 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나와서 치료받으세요. 병원 가실래요?“
”병원은 가야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안 갈래요.“
했더니 현장지휘관처럼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할 거냐? 치료 받을 거냐? 아니냐?“고 독촉했다.
내가 안 나가겠다 하니 의사와 간호사는 나가고 다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한 다리가 들려졌다. 나는 한 다리를 틀 밑으로 넣고 버텼다. 만약 들면 다리가 다칠 위험이 있었다. 빈 옆자리에 들어온 여경이 나를 못 끌어내니 교대가 이루어졌다.
그는 나가면서
”에이 씨! 내가 이럴려고 경찰이 되었나?“ 투덜댔다. 마음이 짠했다.
그 자리에 다른 경찰이 들어오면서 옆 자리 쪽으로 다리를 뻗은 현정님을 밟았다. 나는 다시 국민TV를 불렀다.
그 사이 한둘 경찰이 내 옆으로 지나갔다.
또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위로 들려고 했다. 패딩잠바와 가방이 위로 들려졌으나 다 들려지지 않았다. 소리를 치는데 입안이 말라 혀가 굳어져 발음이 잘 안 되었다.
그러는데 갑자기 대경대책위 김찬수 대표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오며 나를 불러댔다.
“이리 나오세요!” 소리를 쳤다.
응? 나오라고? 난 아직도 버틸 수 있는데? 이거 어떡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뒷자리 여성들에게
”찬수씨가 나오라는데 나 나가도 될까?“하니까
”예, 그만 하면 됐어요. 이제 그만 나가셔도 돼요. 우리가 할게요.“
대답하는 여성의 눈에 약간 눈물이 글썽인 것 같았다. 나중에 옆에 있었던 젊은 엄마들이 ‘자신들이 그 끝자락에 앉아 버텨주지 못한 걸 무척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하는 걸 들었다.
나가려 보니 빈 옆자리에 이미 여성 경찰 둘이 들어와 있었다. 내가 나가면 이들 차지가 된다는 생각에
”니들이 나가야 나간다.“고 했다.
몇 번 실랑이 끝에 지휘관이 여경들을 나오라 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김찬수 대표가 보였다. 그를 불러 손을 붙잡고 자리에 앉혔다.
”이 자리 사수해요.“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입이 마르고 가래가 끓어올랐다. 오른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의사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양 무릎이 아팠으나 오른쪽만 말했다. 왼쪽은 원래 아픈 데라서였다.
생각보단 괜찮았다. 파스를 바르고 다른 여성들과 그늘에 있다가 계곡을 건너서 끌려나온 다른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경찰들이 미리 작전을 짜면서 잘 건널 수 있도록 해놓았던 것 같다.
입안이 바짝 말라 컵라면을 먹으라고 주는 걸 거절하고 물만 들이키고 있는데 왼쪽 무릎이 쑤시기 시작했다. 무릎을 걷어 올리니 부어 있었다. 의사를 찾아 앰블런스 쪽으로 가니 경찰이 길을 비켜주었다. 의사가 없으니 안에 타고 있으라는 걸 그냥 밖에 서 있으니 누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김천 사람이니 김천의료원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누굴까? 물어보니 이름을 안 댄다며 차는 가버렸다.
원불교 천막 옆에는 전기선을 빼고 한 통신사 기자가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 기자가 나를 동정하면서도
“장병들이 열악한 상황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미군 기지가 제일 많아요. 평택엔 세계에서 제일 큰 기지도 있는데, 여기 땅을 공짜로 또 줬어요. 그런 건 생각지 않나요?”
“미군이 철수해야 해결 되겠네요.”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미군이 철수한다면 벌벌 떨잖아요. 당장 북한이 처내려온다 생각하니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런 사람은 일부예요.”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있으니 경찰이 빠지기 시작했다. 가는가 싶었더니 다른 경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밥 먹고 교대하는 거란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새벽 3시 이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배 고파 하는데 천주교 신자인 듯한 여성이 “해가 너무 뜨거우니 밀짚모자를 좀 가져다주면 안될까?” 요청했다. 이미 원불교 신도가 마을회관에 가지러 갔는데 없는 모양이었다.
김성혜 교무가 나와서 경찰 관계자를 불렀다.
너무 덥고 해가 뜨거워 시위대의 다수를 차지하는 어르신들이 힘드니 어떻게 협상해서 경찰을 물릴 수 없겠는가 제의했다.
김천, 성주, 소성리 등등 대표들이 모여 의논했다. 결과 ’경찰은 철수하고 작년 11월에 들어가 있는 장비는 빼내되 새 장비가 들어가는 것은 다시 의논해서 협상하자‘고 결정되었다.
그래서 우리 점심밥도 배달되고 경찰도 조금 빠지는 것 같았는데, 조금 있다가 다시 경찰이 전진 배치되었다. 윗선에서 강경하게 나왔다고 한다. 이해는 되었다. 어쨌든 미군기지 공사를 완공해야 하는데 날짜 며칠 미루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아까는 조금 자유롭게 대열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제 나온 사람은 못 들어가게 막았다. 화장실에 간 사람은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다시 김성혜 교무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기 주민들은 새벽 3시부터 밥도 못 먹고 뙤약볕에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여러분들은 밥을 먹고 기운이 펄펄 나는데 여기 주민들은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가고 있습니다. 나가면 안 들여보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보는 앞에서 소변, 대변을 봐야 하나요? 화장실은 보내줘야죠.”
한참 있으니 일단 경찰을 철수시키고 들어간 장비를 빼낼 트레일러는 들이기로 합의가 성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3일간의 평화였다. 3일 후에 또다시 사람들은 소성리로 달려가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기뻐했다. 비록 내일 지더라도 오늘 얻은 작은 승리에 한껏 만족해했다. 만세도 불렀다.
사람들이 철수하는 동안 두 신부는 나머지 미사를 진행했다.
미사가 끝나고 우린 경찰이 아직 앉아있는 곳을 지나 돌아왔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그 경찰들이 달고 있는 태극 마크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성조기를 휘두르는 사람들을 볼 때보다 더 가슴 아팠다. 저렇게 태극기를 달고 우리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을 위해서 자국민을 짓밟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슬펐다. 더구나 그들이 밀어내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부모 또는 조부모들 세대가 아닌가.
저녁에 집회 나가니 JTBC가 와서 생방송을 했다. 촛불집회 600회 되는 날이라니까 왔다고 한다. 600일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단단하게 단련시켜 왔다.
’보수‘언론들은 우리가 좌익 이념을 가지고 현실에 적용시키는 양 보도했다. 그런데 이념이 먼저 있을 수 있나?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난 자본주의가 좋으니 자본주의 국가에서 태어나야지”한 적이 있었나?
그저 태어나 보니 분단된 조국의 남쪽이었고, 오랫동안 공산주의와 북한을 미워하도록 교육받았고, 그래서 나라에 저항하는 것은 곧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되도록 자제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검열하며 불편한 삶을 불편한 줄 모르고 살아왔다.
사드가 들어오면서 이 삶은 더 이상 이전의 삶과 같아질 수 없었다.
주민 동의를 얻고, 국회 동의를 얻고, 사전에 환경영향평가를 해야 하는 등의 이 모든 법절차가 미군주둔의 편의를 위한 법인 소파(한미행정협정)에는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 했다. 심지어 롯데골프장을 미군에게 공여한다는 사인이 있기 전에 미군 중장비가 들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국가가 우리들을 그 수가 적다하여 간단하게 팽개치고 미군을 위한 편의 시설을 짓고 임시라 해놓고 단단히 고착화하려는 것을 우리는 안 된다고 외치고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 거대한 미국에게 “이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피부와 몸매는 달라도 당신들처럼 생각하고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다른 시민들과 자리에 나왔고, 점차 날이 길어지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이 자리를 나가도 머리수를 채워야겠다는 그 한 가지 생각만으로 이곳을 지켜왔다. 이런 우리가, 내가 불순하고 불온한 사람들인가?
김천 농소는 6, 70대가 많다. 내 나이가 60대 초반인데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이 많다. 그 언니들이 매일 촛불을 켜러 나온다. 오빠들이 매일 촛불을 켜러 나온다. 그 중에는 월남에 참전한 분도 있다. 그 오라버니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을 하면 아군이든 적군이든 다 비참해지는 겁니다. 전쟁은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골에서 4, 50대는 젊은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온갖 힘쓰는 일을 다 하고 있다. 매일 집회 준비를 하고 뒷정리를 하고, 새벽에는 농소에서 군부대로 넘어가는 할깃재를 지키기도 한다. 비상 상황이 벌어지면 소성리로 달려가 길목을 막기도 하고, 시위대 가장 앞에서 투쟁하기도 한다.
혁신도시라 부르는 율곡동은 가장 젊은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김천의 평균나이를 낮추고 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은 “내 새끼는 내가 지킨다”며 적극적으로 자기 할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있다.
이런 우리들이 빨갱이이고 좌익분자인가?
늘 우리를 지역이기주의자라 부르는 ’보수‘언론들이 이럴 땐 ‘어디서 원정 온 시위대들’이라 한다. 우리는 자기 지역에 무서운 무기가 들어와서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삶이 바뀌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누군들 병이 나면 고치려 하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다만 그 과정에서 좀 더 성숙해지고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각자의 몫이 되는 것이다.
다음날 일어나니 왼쪽 어깨에서부터 갈비뼈까지 아팠다. 왼쪽 어깨는 움직이기도 어려웠고, 가슴팍이 아파 기침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왜 이럴까 생각해보니 뒤에서 힘센 남자 경찰이 지나가려고 마구 짓뭉갰고, 앞에서는 끌어내려고 눌러대어서였다.
저녁엔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와 보니 여기저기 멍 자국이 보였다.
신문엔 북한이 5개 조건을 들어주면 비핵화를 하겠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전략무기 철수’였다. 사드는 전략무기이다. 그러면 철수되는 걸까?
하지만 지난 12일 반출장비는 상황실 자료 확인 결과 국방부 주장과 달리 모두 미군 장비(17. 4.20반입)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물론 국방부는 “작년 11월 21일 반입된 공사 장비다. 민간장비이므로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방부에서는 공사를 강행하겠다고 여전히 주장했단다. 평화회의는 지붕 수리, 오폐수 공사까지만 용인한다고 했다. 별로 협상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미국이 “북한의 요구대로 하지 않겠다”는 신호라고 보는 분석이었다. 그러니 우린 또다시 지겨운 싸움을 몇 달 동안 되풀이해야 할지 모른다.
분단된 땅에서 군사 안보상 주권이 없는 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사드 반대 싸움이 어려운 것은 이것이 독립운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식민지와 다름없다는 것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고 월요평화미사를 집전하던 한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국 땅에서 순응과 복종의 삶을 살아갈 때도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광야‘
아직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이곳에서 우리는 그렇게 백마 타고 올 후손을 꿈꾸며 오늘 이렇게 촛불을 들고, 필요하면 저항하려 달려가는 그 작은 행동이라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는 패색이 짙다고 생각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이 길을 걸어가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