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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울산지역에서 여러 교회를 섬긴- 정덕생목사
우리 울산과 경남지역의 초기 선교 시대에, 매우 많은 활동을 한 분 가운데, 정덕생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당시의 대부분의 모든 사역자들처럼, 처음에 선교사의 조사로 사역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 되어서 곧 장로로도 일하였고, 결국에는 목사가 되어서 큰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특히 초기 우리 울산 지역의 선교사로 오셨던 손안로, 왕길지 선교사 등과 함께 울산뿐 아니라, 경남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했는데, 실로 경남 지역에는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을 만큼, 그는 이 우리 지역의 교회 설립과 복음화의 초석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교훈을 배워보겠습니다.
1. 출생과 세례
정덕생(鄭德生, 1881-1949)은 1881년 8월 30일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 283번지에서 정재진(鄭在鎭)과 오성결(吳聖潔)의 5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했습니다. 본 이름은 정치영(鄭致榮)이었으나 1911년 7월 15일부로 덕생으로 개명했습니다. 어릴 때는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다른 형제들은 불교도로서, 후처를 두기도 하고 술도가를 경영하기도 했으나 덕생은 놀랍게도 기독교 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어떻게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없어서 확신 있게 말할 수는 없으나,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왕길지 선교사를 비롯한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1900년에 내한한 왕길지(G. Engel) 선교사는 경남 동부지역인 송정, 기장, 병영, 울산 등지를 정기적으로 순회했는데 이때, 그를 만나서,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왕길지 선교사가 순회전도할 때, 기장군 철마면 안평(安平) 마을에 가서 전도하여, 1902년에 안평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정덕생의 집은 안평교회 건너편에 있었기에, 호주선교사들과 접촉을 통해 개종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동래군 안평교회가 성립하다. 초에 박신연(朴信淵), 정덕생(鄭德生), 정희조(鄭喜祚), 정덕선(鄭德善), 박도주(朴道柱) 등이 신교(信敎)함으로 교회가 성립 되니라.”
이 기록이 정확하다면 정덕생은 21세 때, 혹은 그 이전, 곧 1902년 이전에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는 우리는 이 정덕생의 등장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순회전도가 매우 큰 결실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대와 환경을 초월해서, 전도란, 전도자가 대상자를 찾아가서 만나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2. 그의 활약
정덕생은 신앙과 동시에, 자기 모교회가 되는 안평교회 설립에 관여하였고 이때부터 그는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06년 2월부터 유급 조사로 안평교회 전도사로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주지한 대로, 손안로 혹은 왕길지의 조사(助師)로 활동하였습니다. 이 때, 그가 또한 부산으로 내려와서 왕길지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는 부산진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아마도 그의 특출한 재능을 눈여겨본 왕길지 선교사가 그를 신실한 사역자로 키우기 위해서, 보다 가까이 두려고 데리고 간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정덕행은 왕길지 선교사의 조사로서, 그와 함께 경남지역 일대를 순회하면서, 이 지역 복음화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1905년에는 기장 동부교회, 동래읍교회(현 수안교회), 통영의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 의령의 서암교회를 선교사와 함께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1906년에는 왕길지와 더불어 양산읍교회, 함안읍교회, 그리고 함안의 부봉교회와 백산리교회 설립에 관여하였고, 1908년에는 왕길지와 함께 동래군(현 부산) 장전리교회(현 철마교회)와 금사교회 설립에 관여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송정교회(1909), 두구동교회(1911), 동래 신평교회(현 칠암교회), 동래군 화전리교회(1913) 등의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앞으로 세심한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정덕생은 경남지역에서 무려 40여개 처의 교회 설립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우리 울산에서도 반천교회에서 1929~1938년까지 순회목사로 목회한 것을 비롯하여 언양제일교회 제 1대 목사로 재직하는 등, 여러 군데서 그의 사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1910(1911...?)년에, 정덕생은 장로가 됩니다. 그리고 1911년 9월 18일 대구 남문교회당에서 개최된 제5회 조선로회(독로회)에 정덕생은 경남 대리회를 대표하여 김봉명, 김응진, 리윤팔, 이현필, 심취명 장로와 함께 장로 총대로 참석한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가 노회(독노회)에 총대로 참석한 최초의 기록입니다. 1911년 12월 6일 부산진교회에서 경상노회가 창립될 때도 정덕생은 장로총대로 참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놀라운 열정은, 조사로 그리고 장로로 봉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보다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하고, 1912년 3월 6일 대구남문교회당에서 모인 제1회 경상노회에서 신학입학을 청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덕생은 김기원, 서성오, 김공명, 박영조, 정재순, 김상삼, 박성애, 박덕일, 김응진 등과 함께 ‘다시’ 신학교 입학을 허락 받았다. 노회록에서 새로 입학하는 이들과 구별하여 정덕생 등을 ‘다시 허락했다’는 기록을 볼 때 정덕생은 이미 입학하였으나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잠시 휴학을 하고, 그 뒤에 다시 복학하기 위해 청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열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1912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정덕생은 3년간의 교육을 받고 1915년 제8회로 졸업하였습니다. 정덕생은 졸업과 동시에 신학준사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신학교를 졸업한 해인 1915년 6월 20일에, 대구동산성경학교에서 개최된 제10회 경상노회에서 서정오, 정재경과 함께 강도사로 인허를 받게 되고, 놀랍게도 그는 이 노회에서 곧 바로, 목회자로 청빙을 받게 됩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긴, 그 당시에는 일군도 귀했기에, 정덕생처럼 경험받고, 뛰어난 인재는 청빙 요청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덕생은 “부산 영주동(현 초량교회), 자갈츄(현 항서교회), 영도, 아치셤(조도) 네 교회에서 월급 20원씩을 작정하고 사택까지 제공받기로 하고, 청빙을 받아가게 됩니다. 위임예배는 1915년 7월 13일에 영주동교회(초량교회의 전신)에서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어 정덕생은 1915년 7월부터 부산의 4교회인 초량교회, 항서교회, 제일영도교회, 그리고 조도교회의 담임목사로 일하게 된 것이다. 선교사의 조사로 순회전도자의 길을 가던 그는 이제 안정된 정착목회자로 일하게 된 것이다.
탁월한 정치적 역량도 과시하다
그 이후 그의 역량은 목회뿐 아니라, 교단의 정치적인 부분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나서, 정덕생은 1912년 9월 1일에 조직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때 경상노회를 대표한 총대로 참석한 이래 장로 총대로, 목사로서 노회나 총회에 총대로 참석하는 등 경상도 지방 교회 지도자로 눈부시게 활동하게 됩니다. 특히 경남노회 제1회(1916. 9)와 4회(1917. 12)시에는 서기로, 제6회(1918, 12)와 16회(1924. 1)와 17회(1924. 7)에는 노회장으로 피선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당시로 볼 때에, 학적으로도 다른 목사들에 비해 우수했습니다. 1917년 9월 1일 소집된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6회 총회에서 신학교육부는 정덕생목사를 일본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로 한 일을 보고하고 이를 채용한 일이 있는데, 즉 “졸업생 중 이년 이상 시무한 이 중에 정덕생씨를 신호신학교에 입학케 하오며....”라고 보고한 것을 보면, 신학교육부는 정덕생을 유망한 교회지도자로 간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그는 고베신학교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 일 것입니다. 이처럼 비록 체격은 작았으나 명석하고 지혜로웠던 정덕생 목사는, 부산경남 지역 초기 사역자로 이 지방 복음운동의 초석을 쌓았던 인물로서 많은 능력을 가진 자였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당시에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겪어야 했던 피지배의 시대적인 아픔 가운데서, 민족의식 또한 강해서, 그는 안희제가 세운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운동 단체들도 지원하였고, 또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광산업에 투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실로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귀한 인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광산없에 빠지면서 정덕생목사의 일생에 큰 오점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와 같이 모든 방면에서 탁월했던 정덕생목사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독립운동 자금 조달의 와중에서 광산업에 손을 대게 되고, 그 일로인해서, 목회에도 큰 타격을 주게 되면서, 그는 이단 시비를 비롯한 온갖 구설수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큰 시험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가 겸손한 자로 늘 조심하여 살아야 할 이유를 여기서 보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다름 아닌 <물질>에 관련된 문제에서 사단이 발생한 것입니다.
2. 그의 오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덕생목사가 1917년에, 장로회 총회의 파송을 받아 일본 고베(神戶)신학교에 유학생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교포 교회를 운영하는 등 선교활동도 하면서 학문에도 전념하였으나" 그 부인의 신병으로 귀국, 다시 초량교회를 섬기게 되는데, 그가 시무하는 동안 초량교회는 30∼40명의 교인이 240∼250명으로 증가되어 초창기의 기초가 다져졌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요 역사였지만, 또한 삼일운동 이후 절망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초량 교회에 나온 사람들 중에는, 독립운동에 열심하던 백산 안희제 선생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통해 자금을 모아서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주던 자입니다. 그리고 초량교회에 나오면서는 담임목사인 정덕생 목사와 함께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위기가 발생한 것인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정덕생 목사가 1922년, 초량교회 예배당을 신축, 헌당식을 거행하는 그 해 2월경에 "대정 8년(1919) <제령 위반 피고사건>에 연루되어서, 평북 중강진 경찰서에 압송되어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50일 만에 돌아오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1919년에 일어났던 3 1운동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사실, 이당시만 해도 교회 내부적으로는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민족 독립운동에 모든 백성들의 염원이 하나로 모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나 목사가 그런 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자랑스럽기까지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백산무역주식회사' 즉, 백산상회가 1927년에 해산되고, 안희제도 만주로 망명하여 급기야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고 하니, 예상치못한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당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1933년 9월 초에 회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2회 총회>의 기록에 의하면, "졍덕생목사는 딴 교파를 세우고 나아갓슴으로 본 로회로서는 권증 죠례 54조에 의하야 그 셩명을 로회명부에서 제명하얏사오며"라고 보고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정덕생 목사가 "딴 교파를 세우고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리하여 정덕생 목사 문제는 1933년 1월 3일 31회 경남노회가 부산진예배당에서 회장 주기철의 인도로 회집되었을 때 노회적으로 표면화되었습니다. 결국에는 노회에서 제명되는 일까지 겪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고, 기록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예민한 부분은 "딴 교파를 세우고 나갔다"(총회록) "불법당파를 망라하여 조선예수교회라 명칭"(노회록)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당시 우리나라 장로교회에서는 1918년이후, 다양한 소종파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즉 이단적인 기류가 서서히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당시 총회나 노회에서 예의저주시하고 있던 종파는, 황해도 지방 김장호(金庄鎬)의 '조선기독교회'와 대구 이만집(李萬集)의 '조선기독교회'였습니다. 이들은 반선교사 내지는 자치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선교사들 중심으로 가르치는 평양신학교의 신학노선과 달랐고 선교사들의 지도를 충실히 따르는 장로교회의 신앙노선과도 이념을 달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들이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분파되었다는 점에서는 정덕생의 '조선예수교회'도 궤를 같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단의 지도부가 일차적으로 우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정덕생목사가 사용했던 '조선예수교회'라는 명칭만 해도 그 당시의 기류를 감안해보면, 충분히 오해를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명명되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명칭은 바로 그 해(1933) 1월 3일에 한국교회사의 최초의 이단자로 알려져 있던 이용도(李龍道)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창립된 새 교단 '예수교회'의 이름을 연상케 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정덕생의 '조선예수교회'와 이용도의 '예수교회'는 이름이 유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단 시비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정덕생목사에 대한 노회의 책벌이, 단순히 주일 성수나 목사로서 광업에 종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또 그가 과거 민족운동을 도왔다던가, 직접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게는 신앙노선상의 갈등을 책벌문제의 핵심으로 삼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결말은 이렇게 경남노회가 엄중한 책벌을 가하고 그것을 총회에까지 보고하였지만, 노회는 계속 그의 귀순을 권고하면서 정덕생과 접촉하여 1935년 6월 4일 부산 항서예배당에서 회집된 35회 경남노회에서는, 특별위원 3인을 택하여 정덕생씨를 권면하여 본 노회에 돌아오게 하기로 가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의에 따라 정덕생목사의 사과와 회개를 받은 후에, 1935년 12월 3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회집된 경남노회에서 다시 복직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로써 약 4년간 끌었던 정덕생 목사 문제는 일단락을 짓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어느 교회사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목회를 중단하고 광산업에 투신한 일로 치리를 받고, 교회와의 관계가 단절된 일은 불행한 일이었다.”
3. 그의 말년
이처럼 정덕생 목사가 살았던 시기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실질적으로 받던, 가장 피곤한 시절이었습니다. 특히 목회와 아울러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간여하다보니, 물질적인 어려움도 많이 겪었을 것이며, 그로 인해 광산업에 연계되면서, 결국 물질의 시험(?)에 빠져 교계 갈등으로 증폭이 되고, 그 와중에서, 노회와의 관계, 정치적 반대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한국 교계에서 배제되는 수모와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 극적으로 다시 회복이 되고 노회원으로 복권이 되었지만, 그가 이런 어려운 일들을 다 겪고 났을 때가 55세 정도 되었을 때이며, 그가 별세한 때 나이가 1949년인데, 그의 인생의 후반기 14년간의 기록에 대해서는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말년을 쓸쓸하게 보낸 것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지금 그의 묘는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 산록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기의 그 놀라운 활약을 했던 정덕생목사였지만, 그의 말년에 큰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나마 그가 그 모든 일에 대해서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알고 회개하고 뉘우쳐서 다시 복귀가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그 뒤로 별로 예전처럼 두드러진 활약은 못하고 목회의 막을 내리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도 이유야 왜 없겠습니까? 할 말이야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큰 풍파를 겪게 된 것은, 참으로 후세대인 우리에게는 항상 조심하고, 항상 겸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교훈을 정말 강력하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형통하다고 끝까지 형통하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 안에서 계속해서 머물러야만 인생의 경기, 신앙의 경기에서 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덕생 연표
1881. 출생
세례
1905. 기장 동부교회, 동래읍교회(수안교회) 설립에 관여
1906.2~ 유급 조사로 안평교회 전도사로 봉사 시작.
1910(1911?) 장로 장립
1911. 9. 18 제5회 조선독노회에 경남대리회 대표로 (장로 총대)로 참석.
1912(?) 평양신학교 입학.
1913. 9. 7. 제2회 총회에 경상노회 장로 총대로 참석.
1915. 평양신학교 졸업
1915. 7. 13. 4개교회(초량교회(~1915~1925.11), 항서교회, 제일영도교회,조도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이 해에 목사 안수 받음.
1916. 제 1회 경남노회 서기로 선출.
1917. 6. 26. 제 3회 경남노회에 목사총대로 참석
1922. 2. 제령 위반으로 피검됨(옥중 수난)
1925. 12. 29. 초량교회 시무 사면
1925. 11. 부산진교회 2대 목사로 부임. 그러나 동아일보 19933. 1.17일자 기사에 의하면, 부산진교회에서 분리되어져 나온 부산교회로 부임한 것으로 되어 있음.
1933. 경남노회에서 제명됨
1935.12.5. 노회로 다시 복귀됨.
1949. 소천
첫댓글 초량교회 세미나 참석중. 다시 정목사님 얘기를 기록을 통해 보게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