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혹은 곡선의 이미지(시인 이은봉) ― 박정호의 메조틴트 판화들

[여운 이준호]

알 혹은 곡선의 이미지 ― 박정호의 메조틴트 판화들

                                                  글 : 시인 이은봉(광주대 교수)

박정호 作 La Conception  12X18 메조틴트

화가에게 풍경의 선택은 세계관의 선택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풍경의 선택은 대상의 선택과 다르지 않다. 이는 결국 화가의 세계관이라는 것이 선택하는 대상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대상의 선택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점은 박정호의 메조틴트 판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원래 메조틴트 판화는 기존의 그림을 복제하는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지금은 메조틴트 판화 자체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색조와 분위기 때문에 개성적인 예술형식이 되어 있지만 말이다. 박정호의 판화에 드러나 있는 형상들이 사실적인 분위기를 지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이 때문이다. 본래 복제의 한 방식으로 자리했던 것이 매조틴트 판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이러한 점은 당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의 판화에 드러나 있는 존재들이 매우 독특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때의 아우라는 알 혹은 곡선의 이미지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 혹은 생성의 내포를 함유한다. 생명 혹은 생성의 내포를 갖는 것은 본래 시간의 운행 속에서 존재하기 마련이다. 박정호가 「작품 1」에서 시간의 운행을 상징하는 모래시계를 포섭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박정호 作 작품 1  Le Sablier  12X18   메조틴트

이 판화는 모래시계의 상부에 존재하는 생명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부에 존재하는 죽음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이는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생노병사의 과정과 곧바로 대비된다. 뿐만 아니라 생노병사의 과정은 그의 판화에서 춘화추동의 이미지와도 호응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생명의 현상에서 죽음의 현상으로 이행되는 시간의 과정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작품 22」에 의해서도 확인이 된다. 이에 따르면 박정호가 자신의 판화작업을 통해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탄생 성장 소멸의 과정, 즉 생노병사의 과정, 이를테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박정호의 작품에 함유되고 있는 시간의 현존은 거의 대부분 생성의 과정, 즉 생명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에 치우쳐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정호 作 작품 22  Les Quatre Images   44X9  메조틴트

생명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과 관련하여 그의 판화에 맨 먼저 불거져 있는 이미지는 둥근 것들이다. 둥근 것들이라고 추상화하여 말한 그것들을 구체화하여 말하면 알몸과 알이라고 할 수 있다. 알몸과 알은 그것이 공히 생명의 실제라는 점에서 그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판화에서 알몸과 알은 함께 존재하기도 하지만 따로 존재하기도 한다. 알몸과 알이 함께 존재하는 그의 판화는 이른바 난생설화가 주는 기이한 아우라를 거느리기고 있어 주목이 되기도 한다. 「작품 23」이나 「작품 24」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박정호 作 작품 23  La Conception  28X14 메조틴트

박정호 作 작품 24 La Conception 16X25  메조틴트

박정호의 판화에 드러나 있는 알몸과 알의 이미지는 일단 활기 있는 힘과 에너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알몸과 알의 이미지는 남성보다는 여성의 생산과 생식을 상징한다. 이는 무엇보다 예의 알몸과 알의 이미지가 젖가슴, 엉덩이, 아랫배, 허벅지, 어깨, 무릎 등의 이미지를 통해 현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호가 이처럼 여성적 이미지에 대해 집착하는 이유는 비교적 단순하다. 그것이 생산과 생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판화에 드러나 있는 여성적 이미지는 그 나름의 생태적 이상을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판화에서 생명 혹은 생성을 상징하는 알몸의 이미지는 알만이 아니라 잎이나 꽃 등 식물의 이미지와 함께 하고 있어 더욱 주목이 된다. 이들 이미지와 함께 하고 있는 작품들 역시 지향하는 의식은 물론 마찬가지이다.

이때의 식물의 이미지는 그것이 문명의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존재라는 점에서 그의 판화가 지향하는 세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문명이 만드는 어긋난 코스모스보다는 자연이 만드는 활기 있는 카오스를 동경하는 것이 이들 판화의 세계라는 것이다.

알몸이나 알, 곡선은 일단 살아 있는 이미지, 움직이는 이미지를 갖는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이들 존재가 살아 있다는 것, 움직인다는 것은 순환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박정호의 판화에 드러나 있는 순환의 형식은 無와 有의 변증법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말하는 無와 有의 변증법은 반야심경에 나타나 있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순환형식과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지적은 결국 그의 판화에 함유되어 있는 순환의 형식이 지극히 동양적인 특징, 나아가 불교적인 특징을 갖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의 판화에 나타나 있는 순환의 형식이 늘 연기의 법칙과 함께 하는 인연의 고리를 상기시키는 점도 이를 잘 증명해준다.

그의 판화에서 因緣의 고리, 좀더 자세히 말해 因과 緣의 고리는 우선 음양의 조화, 곧 흑백의 조화를 통해 나타난다. 주로 전기의 작품에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 흑과 백의 이미지가 절묘하게 결합되면서 비의적이고 신비적인 분위기를 산출하는 것이 일련의 그의 판화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판화가 포섭하고 있는 자연의 이미지이다. 물론 이때의 자연의 이미지는 그동안 잎이나 꽃의 모습을 취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그의 판화에서 잎이나 꽃은 주로 알몸의 이미지와 함께 하면서 生殖의 본능을 상징해온 바 있다. 이를 계절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면 지금까지의 그의 판화는 대부분 봄과 여름의 이미지를 담아왔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작품 110」을 넘기면서 그의 판화에는 일련의 변화가 일어난다. 잎이나 꽃으로 대표되는 봄과 여름의 이미지가 차츰 그 중심을 열매(과일)로 대표되는 가을의 이미지를 넘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의 봄과 여름의 이미지에서 가을의 이미지에로의 전이는 박정호의 의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박정호 作  작품 112  감    10 X 10  메조틴트

그의 판화에 드러나 있는 열매(과일)의 이미지는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식욕의 본능을 상징하기도 한다. 물론 열매(과일)가 지니고 있는 식욕의 본능은 알몸, 알, 잎, 꽃이 지니는 성욕의 본능과 비교ㆍ대조되는 가운데 자신의 의미를 현현한다. 따라서 성욕과 함께 하는 이미지 또한 식욕과 함께 하는 이미지로 그 중심이 바뀔 수밖에 없다. 사과, 체리, 오렌지, 배, 감, 포도, 호두 등 열매(과일)의 이미지가 그 실제의 예이다. 이들 열매(과일)의 이미지는 그것이 식량의 하나라는 점에서 완두콩, 땅콩, 딸기 등 야채의 이미지를거느리기도 한다.

박정호 作  작품 132 딸기  15 X 15    Mezzotint

이처럼 그의 판화를 구성하는 중심 대상의 이동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순환하는 시간 때문이다. 순환하는 시간이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욕망의 이미지를 성욕에서 식욕으로 전이시키는 근본원인이라는 뜻이다. 식욕으로 전이된 욕망의 이미지, 곧 열매로서의 과일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식욕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끈다.

식욕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열매(과일)나 야채의 이미지는 잎이나 꽃이 지니는 봄이나 여름의 내포가 아니라 가을의 내포를 갖는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인 만큼 아름다고 풍성한 이미지를 지닐 수밖에 없다. 박정호의 판화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가을의 이미지는 대체로 채색의 화사함으로 드러나고 있다.

성욕을 상징하는 봄과 여름의 알몸, 알, 잎, 꽃의 이미지가 흑백의 원초적 리비도에 의지한다면 식욕을 상징하는 가을의 열매(과일)나 야채의 이미지는 채색의 원숙한 화사함에 의지한다. 「작품 134」 「작품 143」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 무렵의 판화에 채색된 연꽃이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것이 일종의 깨달음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열매의 내포에 닿는다고 할 수 있다.

박정호는 지금 자신의 판화에서 각종 열매(과일)나 연꽃으로 상징되는 삶의 지혜나 깨달음을 담아내고 싶은 것이다.(2007. 4. 4목 - 4. 13금, 화랑 AKA: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283-38 )

이은봉 시인 카페 : 돌과 바람의 詩에 옮김.

원본에 작품이 실리지 않아 박정호 작가의 동의를 얻어 옮긴이 임의대로 작품을 게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