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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노동정치연대 회원 중 한 분인 '포로자'(필명)님께서 연재 중인(2009년~현재) 역사 속 '오늘'을 양해를 구해 이 공간에서 연재합니다. 포로자라는 필명은 연재를 하다보면 언젠가 나오는 글에서 밝혀집니다.
이 연재글은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시기를 정해놓지 않고 연재해 오던 글입니다. 지금은 필자의 사정에 의해 잠시 중단되어 있는 상태이구요.
벌써 몇 년 전에 쓴 글이기 때문에 현재와 조금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퍼왔습니다.
그리고 쓴 시점에 따라 글의 분량이 다르고, 날짜순으로 연재하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점은 널리 양해해 주시고, 필자가 아직 연재중이기 때문에 (1)편 이후에 (2)편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이 역시 시기가 맞다면 그대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필자에게 댓글로 독촉을 하실 수는 있겠지요 ^^
부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으로 제공되기를 바랍니다.
첫번째 연재하는 글은
예순 두번째 오늘 '2월 27일'
영국노동당(1)-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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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두 번째 “오늘”
2월 27일 :
영국노동당(1) - 국민승리 21, 민주노동당
조금 늦었네요.
그리고 참 오랜만에 쓰는 것이기도 하네요.
변명같지만 이거 한 편 쓰기가 점점 어려워지더라구요.
두 편으로 나누어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전에 처럼 다 써놓고 나서 두 편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우선 한 편 쓴 것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2편을 언제 올린다고 장담을 못하겠네요.
노력하겠습니다.
진보정당운동이 참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고민하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해야할 말이 많았는데 2편에서 더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12년 전, 오늘, 2월 27일, 안개가 자욱했던 런던의 풍경을 <영국노동당사>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900년 2월 27일, 화요일 아침의 런던은 언제라도 빗방울로 변할 것 같은 무거운 안개에 잠겨 있었다....... 안개는 이미 런던시가의 구석구석에 진주해 있었고 언제라도 도시의 일상을 공략할 만반의 태세를 끝낸 듯이 보였다. 안개에 눌린 도시의 미명은 며칠 전 보아(Boer) 전쟁의 한 전투에서 거둔, 전쟁발발 이후 최초의 승전이 가져다 준 감격조차 여지없이 잠재우고 있었다. 새벽안개에 지레 위세가 가물해진 가스등 아래로, 파링돈 가(街) 메모리얼 홀엔 애초부터 승전보와는 무관한 듯한 비장한 눈빛의 사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사내들 대부분은 거친 올이 선명한 천으로 된 모자를 눌러쓴 검소한 차림이었다. 사내들의 숫자는 총 129명, 이들이야말로 불과 20여년 후에는 전통의 자유당을 제치고 보수당과 더불어 영국의 또 다른 양당정치를 주도해 나갈 노동당, 그 창당을 위한 대회의 주역들이었다. 이들은 노동조합과 런던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3개 사회주의 단체들, 즉 페이비안협회(Fabian Society), 독립노동당(Independent Labour Party), 사회민주연맹(Social Democratic Federation)의 대표들이었다......... 대회는 외부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소집되고 진행되었다. 돌아보면 수많은 노동단체들이 소리 없이 명멸해 갔던 지난 세월이었으니 무관심 자체가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컨대 7년 전 독립노동당이 창당할 때와 같은 언론과 기존 정당들의 비아냥거림조차 없었다........... 차티즘(Chartism)의 맹렬한 기세가 수그러든 지 벌써 반세기 너머의 일, 영국사회에서 정치적 노동운동이란 아직 한없이 어색하고 낯선 개념일 뿐이었다. 1923년 최초의 집권에 성공한........ 영국노동당은 전 잉글랜드가 제국의 승리를 열광하던 20세기 첫 해 겨울에, 언론과 세인의 무관심 속에서 이렇게 시작되었다.”
- <영국노동당사> 고세훈, 나남출판, 1999
1900년 2월 27일, 오늘 영국노동당이 창당되었습니다. 2000년에 서울에서 창당된 민주노동당의 창당 보다 딱 100년 앞서서였습니다. 다른 서유럽의 노동자정당, 사회주의 정당의 창당과는 다르게 노동운동이 주도하여 창당한 영국노동당은 너무나 많은 측면에서 우리의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과정과 닮았습니다. 우선 창당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과 토대가 매우 흡사했습니다. 조합주의에 갇혀 있던 노동운동이 정치화로 나아가는 과정이 그러했고, 당의 토대가 대중조직인 노동조합의 조합원들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그랬습니다. 노동운동의 대중적인 결합이 없었던 영국노동당 이전의 지지부진했던 영국의 진보정당운동의 전사(前史) 또한 우리와 많이 닮았고, 우리처럼 당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기도 하였지만 적지 않은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배타적 지지라 불리는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 또한 비슷했습니다. 창당 이후 부침을 거듭하던 활동의 과정 또한 비슷합니다. 노동운동과 노동계급이 당의 중심적 토대인 것은 분명했으나 당의 성장과 함께 오히려 노동운동은 당 활동의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단순한 토대로서의 역할, 즉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돈대고 몸대는 것 이상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게 된 것도 비슷했습니다. 여기에다 진보정치와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기본방향이 정립되지 않은 채 출발하면서 당의 이념과 노동정치의 방향을 둘러 싼 혼란이 일어나고, 당의 활동이 의회주의와 대리주의에 갇혀 버리고, 결국 논쟁 속에서 당의 분열과 당과 노동운동의 갈등이 나타나게 되었던 양상도 또한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영국노동당의 태동과 발전의 과정들은 지금 우리의 진보정당 운동,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오늘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112년의 역사를 가진 영국노동당과 12년이라는 짧은 시간(민주노동당 창당 이전의 진보정당 운동사를 간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동운동이 결합하며 진보적인 대중정당 운동을 시작한 2000년의 민주노동당 창당과 영국노동당의 창당을 비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을 거친 우리의 진보정당운동,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지금 시점에서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견주어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의 정치화 과정을 통하여 창당 이후 불과 23년 만에 집권에 성공하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양당체제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영국노동당과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진보정당운동, 노동자정치세력화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칫하다가는 제 논에 물대는 방식의 평가가 되거나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은 우리의 진보정당 운동을 어떤 틀에 맞춤으로써 그 풍부한 가능성을 사상시켜 버릴 오류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태동과 출발, 그리고 이후의 활동 과정이 영국노동당과 매우 닮았다는 점에서 영국노동당이 걸어간 길을 들여다보는 것은 지금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진보정당운동과 노동자정치세력화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줄 것입니다.
영국노동당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한편에서는 영국노동당이 노동운동이라는 대중적 토대를 바탕으로 짧은 기간에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집권당이 되고,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일정하게 복지를 확장하고 노동계급의 사회적 조건들을 개선시켜 왔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의 성공적인 정치화 과정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영국노동당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소수정당으로 출발하였고 그 당의 형태도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단체들의 연합체라는 느슨한 구조에 있었습니다. 창당 이후 첫 선거에서는 불과 2명만이 당선되었고 당의 대중적 토대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영국의 노동조합들과 노동자들은 여전히 기존정당과의 연대를 통한 정치적 현안 해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초기에 매우 취약한 토대에 있던 영국노동당이 이런 한계를 딛고 노동운동의 조직적 참여를 이끌어 냄으로써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고 23년 만에 뿌리 깊은 보수.자유 양당체제를 깨트리고 집권에 성공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자적인 노동자정당의 결성과 그 당을 통한 권력창출이 노동운동이 지향하는 노동자정치세력화라고 규정할 때 이는 분명히 노동운동의 성공적인 정치세력화라고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주변화 되면서 노동정치가 실종되고, 그로 인해 당의 이념적 정체성이 탈계급화 되면서 의회주의, 대리주의에 머물고 말았다는 점에서 실패한 정치세력화, 잘못된 노동자 정치운동의 전형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영국노동당은 새로운 사회건설에 대한 전략, 즉 사회주의적 이념에 입각하기 보다는 노동운동의 현안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당되었습니다. 이러한 창당 과정은 당세가 성장하면서 조직노동자의 이해를 해결하기 위한 의회활동에 중심에 놓은 채 장기적인 사회변혁을 위한 기본적인 이념이나 정강정책 없이 기존 자유주의 정당의 동반자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본질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정치활동 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인정 속에서 중도적이고 개량적인 정책을 통한 의회권력의 확보에 방점을 찍는 의회주의 정당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영국노동당의 기본노선은 점차 노동자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 갔고 반자본주의를 내세우기 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의 수호자로서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사회입법을 개악시키는 데까지 나아가고 말았습니다. 노동계급의 헤게모니가 사회적으로 관철되고 이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가는 것이 노동자정치세력화라고 할 때 영국노동당은 분명히 그 실패의 한 전형이라고 평가할 만합니다.
오늘, 노동자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많은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고 그 속에서 희망과 우려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진보정당 대통합에 대한 논쟁,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체성 논쟁, 민주노총 정치방침에 대한 논쟁,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새로운 논쟁 등이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들은 위에서 우리가 잠깐 들여다 본 영국노동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맥을 같이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결국 노동자정치세력화란 도대체 무엇인지, 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보정당의 이념은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의견의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국노동당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의 고민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영국노동당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 혼란스러운 노동정치의 한가운데서 새로운 노동정치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줄 것입니다. 물론 오늘 이 한정된 지면에 112년 역사의 영국노동당을 모두 담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태동과 초기 전개과정을 우선 돌아 볼 생각입니다. 민주노조운동의 시작과 발전, 초기 민주노조운동의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입장, 민주노총의 창립과 노동자정치운동의 시작, 국민승리21의 결성과 민주노동당의 창당, 민주노동당의 성장과 한계, 그리고 당의 분열, 최근의 진보정당 통합논의와 무산, 통합진보당의 창당과 이를 둘러 싼 민주노총 내부의 갈등, 혼란에 빠진 현재의 상황 등을 영국노동당의 초기 역사 속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후 전개될 진보정당운동의 미래와 노동정치의 새로운 전략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임스와트의 증기기관
자본주의가 태동한 나라는 영국입니다. 따라서 근대적인 의미의 노동계급이 가장 먼저 형성된 나라도, 또 노동조합이라고 하는 것이 결성되고 노동운동이 시작된 나라도 영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자본주의는 1764년 제임스 하그리브스가 다축방적기를 발명하고 이어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정착과 발전은 새로운 계급인 노동계급의 형성을 가져왔습니다. 새로운 사회체제, 자본주의 체제는 필연적으로 자본가들의 끝없는 이윤추구로 이어졌고 새롭게 형성된 노동계급은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저임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임금노예로 전락해 가고 있었습니다. 엥겔스가 쓴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는 산업혁명 초기부터 19세기 초까지의 영국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12시간에서 16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으며 임금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엥겔스는 이런 영국 노동자들의 상태를 ‘인간성을 상실하고 타락해 버린,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동물과 다를 바 없으며, 육체적으로도 쇠약한 존재’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0년을 주기로 다가 오는 자본주의 체제의 순환구조상의 불황은 노동자계급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실업의 만연과 전면적인 기아가 노동자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가 자리를 잡아 갈수록 노동자들의 고통은 깊어갔고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자들은 협동조합 운동으로, 공제조합 결성으로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들어갔습니다. 정치적으로 결집하여 정부에 대한 청원과 입법운동도 벌여 나갔습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하에 노동자의 선거권 운동 또한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권리와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운동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자 하는 자주적인 결사운동과 파업이었습니다.
18세기 후반부터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시작했고 곳곳에서 자연발생적인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국가권력과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하여 강력하게 대응하고 나섰습니다. 1800년, 영국정부와 자본가들은 단결금지법을 통해 노동조합 결성과 파업을 원천적으로 불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참혹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던 노동자들은 정부와 자본의 공세에 굴하지 않고 싸워 나갔습니다. 19세기 초에는 섬유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기계파괴운동(Luddite, 러다이트)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기도 하였습니다. 영국의 노동운동은 이러한 투쟁들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조직적인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의 생존권 또한 최소한의 노동조건을 규정한 1802년의 공장법 제정을 시작으로 조금씩 성과를 거두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1819년, 1829년, 1833년, 공장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규정하는 법률들이 잇따라 제정되었고 1824년에는 노동운동에 가장 큰 족쇄로 작용했던 단결금지법도 부분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초기 영국의 노동운동은 매우 전투적인 모습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영국의 노동운동은 1830년대에 들어서며 정치적 대중운동인 선거제도 개정운동이었던 차티스트 운동(Chartism)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해나갔습니다. 선거제도 개정운동은 노동운동이 중심에 서고 소자본가와 부르주아 시민계급들에 의해 추진된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선거권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1801년의 선거를 보면 254명의 하원의원을 5,723명의 유권자가 선출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인구가 1,500만이었음을 감안하면 선거권의 제한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민주적인 선거제도의 부재는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를 구조적으로 받쳐주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노동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민주주의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차티스트 운동의 대중적 역동성이 확보된 것은 바로 이러한 노동계급의 적극적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영국 노동자들이 1838년 5월 8일자로 작성한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의 6개 요구사항이다. 인민헌장이 나온 뒤부터 참정권 운동은 '차티즘(Chartism)' 또는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차티스트 운동은 본질적으로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이 연대할 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계급간의 모순으로 인해 보다 전면적인 정치투쟁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중간계급은 자신들의 이해가 반영된 선거제도의 일부개정에 만족했고, 전면적인 정치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티스트 운동의 본질적인 한계로 인하여 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노동자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탄압을 앞세운 정부에 의해 결국 그 기세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자의 대중적 각성을 불러왔고 노동운동의 강화로 이어졌습니다. 동시에 이 운동은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였지만 영국에서의 보통선거권을 확보해 나가는 출발이 되었고 이 운동을 기점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노동자의 선거권은 영국 노동운동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선거권은 1832년에 도시 중간계급에게, 1867년에는 성인남성의 40%에게, 그리고 1884년에는 대부분의 성인남성에게 부여되었습니다.
전투적인 투쟁력을 보였던 영국의 노동운동은 차티스트 운동을 정점으로 하여 점차 그 방향이 전환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노동운동은 1850년대 이후 자본주의 체제내로 인입되기 시작하면서 보수적이고 안정적이며 노사협조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850년대 이후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일컬어지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을 구가하며 획기적인 산업발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자본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노조에 대한 억압적인 통제 보다는 노자간의 타협을 통한 자본의 안정적인 축적을 중심에 놓는 전략으로 나아갔습니다. 더구나 점차로 확대된 영국식 민주주의의 확장은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단체교섭에 의한 타협과 실용을 중심에 놓는 보수적이고 실리적인 운동에 집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초기 전투적인 노동운동의 기풍은 일정하게 조직적인 안정을 통해 노동조합의 조직적 틀이 갖추어 지기 시작하했고 이런 운동을 통해 조직노동자들의 물적 토대가 점차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영국 노동운동은 1850년대 이후 외양상으로는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전국규모의 직종별 노동조합들이 결성되기 시작했고 이런 토대를 바탕으로 1868년 총연합단체인 노동조합회의(TUC : Trade Union Congress)를 만들었습니다. TUC는 당시 영국의 사회적 분위기, 즉 자본주의 체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정치적 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던 자유주의적인 낙관이 지배하던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본주의체제 안에서의 단기적인 경제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 노동운동 전략을 밀고 나갔습니다. 영국 노동운동은 사회체제나 정치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영국 노동운동의 최대 현안 중의 하나였던, 노동기본권과 관련한 피켓팅 등의 단체행동권과 파업권의 문제가 1875년의 모의와 재산보호법, 1876년의 고용법으로 일정하게 해결되고 난 뒤에는 그나마 있었던 최소한의 정치적 관심도 사라졌습니다. TUC는 조직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조건이 확보된 이 법령에 만족했습니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이었던 자유당을 통한 정치적 로비에 주력했던 TUC는 자신들이 추진한 방식의 정치활동이 노동운동의 지평을 새롭게 열게 된 것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곧 영국 노동운동의 방향, 특히 정치문제에 대한 노동운동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영국 노동운동이 보인 이런 비정치성은 영국 노동계급 중에 가장 먹고 살만한 노동자였던 숙련공들이 바로 영국 노동운동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전투적 노동운동을 거치며 영국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숙련공들은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배타적인 이익을 누렸습니다. 비숙련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 상시적인 해고와 실업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조건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건만 조직화된 TUC로 대표되는 영국 노동운동은 노동계급 전체의 문제나 자본주의 사회주의 본질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런 구조 하에서는 조직노동자의 경제투쟁이나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기반을 확장하는 문제만이 노동운동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유당과의 공조를 통한 의회전략 정도 이상을 고민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를 통한 근본적인 사회변혁에 대한 실천이나 이미 바다 건너 유럽대륙을 달구고 있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을 이야기하는 사회주의라는 이념은 영국 노동운동에서는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불과 조직률 10%에 불과한, 그것도 숙련 노동자로서 영국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혜택받은 노동자가 노동운동의 중심이자 영국 노동계급을 대표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1850년대 이후 영국의 숙련노동자와 노동운동에 대한 다음의 평가는 그 한계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숙련노동자는 노동자계급 속의 귀족이다. 그들은 비교적 좋은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으며, 그 상태가 최후의 상태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 엥겔스
“차티스트 운동 이후 진행된 1850년대의 영국 노동운동의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자본에 대항하여 노동계급이 권력을 확대해 간 과정이라기보다는 숙련공이라는 특권적인 소수가 노동대중으로부터 자기이익을 체계적으로 방어해 나간 과정이라는 의미가 더 컸다.”
- 고세훈, <영국노동당사>
영국 노동운동의 중요한 정치활동 방식이었던 自-勞同盟은 187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의 정당체제는 보수당과 자유당을 양축으로 하는 양당체제 하에 있었습니다. 보수당은 토리(Tory)라는 정치그룹에서, 자유당은 휘그(Whig)라는 정치그룹에서 연원한 정당이었습니다. 1660년 영국 왕 찰스2세가 적자가 없이 죽은 후 국교도(성공회 신자)가 아닌 제임스의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찬성했던 그룹이 토리였고 이를 반대한 정치그룹이 휘그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정당이라고는 할 수 없는 단순한 정치적 의견을 같이 하는 정치그룹에 불과했지만 이후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라는 정치체제가 들어서면서 이 그룹들은 정당으로서 발전해 나갔습니다. 토리당은 전통적인 지주계급과 귀족들을 기반으로, 그리고 휘그당은 신흥자본가들과 도시의 소시민들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이후 영국 정치를 양분해 나갔습니다. 두 당이 갖고 있는 기반으로 인하여 토리당은 보수적인 입장을, 휘그당은 개혁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두 당은 1840년대 선거권의 확대와 더불어 각각 보수당과 자유당으로 분화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영국의 노동운동이 독자적인 노동정치에 대한 관심 보다는 조직 노동자의 이해를 보다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영국 노동운동은 특정한 정당에 대한 지지를 조직적으로 강제하기 보다는 노동자에게 이익이 될 수만 있다면 당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유당과 조금 더 가까운 측면은 있었으나 지역에 따라 보수당과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노동조합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영국 사회의 변화가 진행되면서 양당의 정체성이 점차 차별화되기 시작하자 영국의 노동운동은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자유당과 점점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일정하게 정치적인 공간을 필요로 했던 TUC를 중심으로 한 영국 노동운동은 자유당과의 연대를 통해 노동자를 의회에 진출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유당은 자유당대로 새롭게 성장하는 도시의 노동계급을 당의 기반으로 두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양측은 18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자-로동맹(自-勞同盟, 자유당과 노동조합의 동맹)을 시작했습니다. 自-勞同盟은 자유당을 통해 노동자의원을 만들어 내고 그 의원들을 통해 노동자들의 현안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정치적 연대의 구조였습니다. 1870년대 초 自-勞同盟에 의해 처음으로 3명의 노동자의원이 배출된 후 1885년 총선에서는 12명으로 증가했고 이후 계속해서 그 숫자를 늘려갔습니다. 이처럼 自-勞同盟은 TUC의 가장 중요한 정치활동이었습니다. 숙련공을 중심으로 하고 있던 TUC에게는 이 정도의 정치활동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굳이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를 통해 전체 노동계급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본질적인 변혁을 도모할 이유를 TUC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1880년대 중반까지 영국의 노동운동은 이런 기조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영국경제에 불황이 닥치고 농산물의 흉작까지 겹친 1870년대 말에서 1880년대 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과 독일 등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의 추격이 이어지면서 영국 자본주의는 축적의 위기를 겪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불황이 구조적으로 심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다가오자 자본가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더 강력하게 노동착취의 고삐를 쥐었습니다. 비숙련 노동자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숙련공의 경우에도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부딪히고 있는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찬란한 영광의 시대였던 빅토리아 시대의 자유주의에 대한 찬미와 경제성장에 대한 낙관은 급격히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1885년에서 1886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영국 노동운동은 지난 반세기 이래 최대규모, 최장기간의 실업상황에 부닥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노동운동, 새로운 정치운동을 불러 왔습니다. TUC에 속하지 않았던 미조직 노동자들, 특히 비숙련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이 전국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실업자들의 항의 소요와 시위로 시작된 이 운동은 새로운 노조운동으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비숙련 노동자들의 노조결성과 투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이런 운동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불만과 거부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투쟁의 양상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투쟁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고, 이렇게 새롭게 시작된 영국의 노동운동은 새로운 이념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가 점차 영국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며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대륙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큰 흐름을 이어가고 있던 19세기, 영국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가 큰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의 뿌리는 로버트 오웬을 중심으로 1820년대부터 1840년대까지 진행되었던 협동조합운동에 있었습니다. 이는 생 시몽, 샤를르 푸리에 등이 주창한 유토피아 사회주의, 즉 공상적 사회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1850년대부터 영국 자본주의가 안정적인 성장으로 들어서고 노동운동이 보수화되면서 영국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국의 세계에 대한 산업독점이 계속되어 온 동안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어느 정도까지 이 독점이익의 분배에 참여해 왔다. 이 이익은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 특권의 소수가 그 대부분을 주머니에 넣었지만 대다수의 대중도 그 일시적인 분배에 참여하였다. 그것이 영국에서 오웬주의가 사라진 뒤 사회주의가 없었던 이유인 것이다. 세계적 독점의 붕괴와 더불어 그들은 전체적으로 - 선택된 소수를 포함하여 - 다른 나라의 노동자와 동일한 수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영국이 다시 사회주의를 갖게 될 이유인 것이다.”
- <Common Will>紙, 엥겔스, 1885, <세계노동운동사1>에서 재인용
1880년대, 변화된 영국 사회의 상황은 새로운 운동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불러들이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통 받던 노동계급의 문제의식이 확대되고 여기에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마저 덮치면서 새로운 사회질서를 이야기하는 사회주의는 영국의 노동계급에게 새로운 이념적 토대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가던 사회주의는 1884년 페이비안협회와 사회민주연맹이 연달아 결성되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구체적 실천을 위한 기반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들 단체와 사회주의자들은 새롭게 시작된 영국의 노동운동에 마르크스주의의이념을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지도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880년대 후반부터 영국의 노동운동은 이제 종래와는 다른 이념과 다른 투쟁주체, 그리고 다른 투쟁방식을 통하여 새로운 노동운동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일찍 자리잡은 영국에서 평화적으로도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던 마르크스의 진단이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런던의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
1880년대 후반으로 이어지며 전투적이면서 사회주의적 이념에 세례를 받은 신노조주의라고 일컬어진 새로운 노동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1886년 2월, 트라팔가 광장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실업반대 항의시위를 시작으로 확산되어 나가기 시작한 새로운 노동운동의 중심은 그동안 철저하게 자본주의체제하에서 수탈당하고 소외되었던 비숙련 노동자들이었습니다. 1887년 11월 13일, 집회와 시위 중이던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과 군대의 강제진압으로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과 1888년 런던을 시작으로 진행된 일련의 파업들은 영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시대를 연 투쟁들이었습니다. 브라이언트 앤 메이 성냥공장의 파업, 가스 노동자들의 파업, 3만 명의 런던부두 노동자 파업이 잇따라 승리하면서 영국 노동운동의 투쟁력과 조직력은 획기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실로 영국 노동운동의 일대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비숙련 노동자들에 의해 주도된 신노조주의, 새로운 노동운동은 숙련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경제불황의 여파는 숙련공에게도 마찬가지로 생존권의 위기를 불러왔고 그동안 노사협조주의의 관행에 젖어있던 TUC 소속의 노동자들도 투쟁의 대열에 동참하였습니다. 곳곳에서 보수적이고 노사협조적인 노조 지도부를 교체하고자 하는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습니다. 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의 연대도 부분적이지만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폭발적인 노동운동의 고양에 따라 조합원수는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이는 새롭게 비숙련노동자들이 조직노동자의 대열에 합류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기존 숙련공 노조 또한 노동운동의 고양에 따라 조합원수를 급격하게 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선 노동조합의 활동방식 또한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양상으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노동운동의 중심에는 비숙련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숙련 노동자들의 투쟁은 새로운 조직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비숙련 노동자들을 새롭게 모아내는 조직화운동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비숙련 노동자들은 기존의 TUC 소속 노조의 조합원으로 흡수되었습니다. 1890년대 초까지 새로 창설된 독립적인 신노조의 조합원수는 10만을 넘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TUC는 비숙련 노동자를 흡수함으로써 조합원 수가 150만에 이르렀습니다. 1870년대 말 조합원이 40만이었음을 감안하면 불과 10여년 만에 4배 가까이 조합원이 늘어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신노조주의가 영국 노동운동에 얼마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수년에 걸친, 1880년대 후반에서 1890년 초까지의 전국적인 투쟁과 폭발적인 운동의 고양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의 상태는 여전히 열악한 수준이었습니다. 실업은 아직도 노동자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였고 특히 비숙련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은 쉽사리 개선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운동의 정치화는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TUC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노동운동은 여전히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하여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비숙련 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 또한 당면한 빈곤이 주는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동운동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위한 토대나 조건은 여전히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1889년, 부두노동자의 자녀들이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자선단체에서 나누어 주는 구호품을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이전보다는 영국 노동운동 내부에서, 특히 현장으로부터 노동운동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대한 요구는 꾸준히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신노조주의와 함께 성장한 사회주의 세력이 노동조합 곳곳에 포진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TUC 내부에서 노동운동의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꾸준하게 공론화해 나갔습니다. 신노조주의는 비록 즉각적인 노동정치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영국 노동운동이 이후 독자적인 정치세력화화로 진전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디딤돌의 역할을 한 것만큼은 분명했습니다.
1880년대 후반을 몰아쳤던 영국의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노동운동, 신노조주의는 1890년대 들어서면서 영국정부와 자본의 일대 반격에 의해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무력진압과 폭력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와 더불어 정부와 보수언론은 날로 국제적인 경쟁력을 상실해 가는 영국경제의 근본적인 문제가 노동자들의 파업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며 영국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특히 비슷한 시기 주방위군과 경찰을 동원하며 철저하게 노동운동을 짓밟아 간 미국에서의 노동운동탄압 양상은 영국 정부와 자본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본과 보수언론은 미국에 비해 영국이 국제경쟁력에서 뒤지는 것은 순전히 미국과 영국의 노동운동의 차이 때문이라며 영국 노동운동의 급진성에 모든 책임을 돌렸습니다. 영국의 사법당국은 파업으로 인한 영업손실에 대한 일정한 책임이 노동조합에 있다는 판결을 잇따라 내놓았습니다. 이러한 사법당국의 판결은 노동조합의 투쟁력과 단결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영국 노동운동의 투쟁력은 급격히 쇠잔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대규모 노조들의 파업이 잇따라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패배했습니다. 1897년에 있었던 기계노조의 7개월에 걸친 파업의 패배는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상 최대의 패배가 되었습니다. 1890년대 내내 수세에 몰리던 영국의 노동운동은 이제 노동운동이 종래의 사업장의 노자관계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영역에서의 투쟁이라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노동자와 노동운동의 위기는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운동의 주체적 요인과 함께 영국의 정치와 경제상황의 변화도 이 흐름에 힘을 보태 주었습니다. 영국 노동운동에 최소한의 공간을 열어주기도 했지만 영국 노동운동의 개량화의 토대이자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반감시켰던 자유당에 대한 배신감이 그것이었습니다. 정치적 동맹관계라고 생각했던 자유당이 아일랜드 자치문제에 빠지면서 사회적인 문제는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나아가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사회적 입법문제에 대해서는 시종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유당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며 自-勞 동맹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자유당이 1894년 선거에서 패배하며 보수당에게 정권을 내주게 되자 자유당에 대한 기대는 이제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TUC와 직종별노조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자유당을 통한 대리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아직은 TUC 내부에서 소수였습니다. 기계노조와 철도노조는 적극적인 입장이었으나 TUC 집행부를 중심으로 한 영국 노동운동의 지도부와 다수의 직종별 노조는 여전히 자유당과의 연대를 통해 기존의 의회주의와 대리주의, 그리고 정책연대가 영국 노동운동이 취할 수 있는 정치활동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물적토대가 갖추어진 산업의 직종별 노조들은 사업장 단위 혹은 직종 단위에서의 단체교섭을 통한 실리주의와 정치적 대리주의를 여전히 선호했습니다. TUC내 최대 노조로서 영국노동당이 창당된 이후에도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반대했던 광부노조와 노동운동이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질 경우 조직을 분열시킨다며 반대했던 섬유노조 등 다수가 아직은 반대의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대는 계속되는 노동운동의 위기와 경제상황의 악화, TUC 내부의 사회주의 정치그룹의 영향력 확대, 그리고 자유당에 대한 불신 등이 겹쳐지면서 점차 약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899년, TUC는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를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영국 노동운동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는 큰 허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통해 종래의 정치활동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이념과 전략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통한 노동자정당을 선언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종래의 정치활동에서 가졌던 입장을 그대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국 노동운동의 기본적인 토대가 갖고 있던 계급적 한계로부터 비롯된 문제였습니다. 영국 노동운동이 수세에 몰리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TUC를 구성하는 노동계급의 상태는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고 이러한 토대는 영국 노동운동의 개량화를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치세력화 또한 전면적인 사회변혁이라는 관점, 즉 사회주의 정당의 건설이라는 관점 보다는 과거 자-로동맹에서 추진했던 노동자의 경제적 이익이나 노동운동의 공간을 확대하기 위한 입법활동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노동자정당을 만들어서 의회권력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의석)을 만들고 이를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확보하자는 것, 바로 그것이 영국 노동운동이 지향했던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이념이자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영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입장은 후에 영국노동당이 의회주의로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의 정치적 관심이 고조된 것이 自-勞 동맹의 취약성에서 비롯되었다면, 노동운동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로부터 기대한 것 또한 그간의 自-勞 동맹이 충족시켜 주었던 바를 벗어나기 힘든 것이었다.”
- <영국노동당사>, 고세훈, 나남출판, 2000
영국 노동운동이 1880년대 중반 이후 걸어 온 길은 우리 민주노조운동의 87년 이후의 역사와 많이 닮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치세력화로 나아가는 과정 또한 유사합니다. 마침내 1899년 TUC는 총회에서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를 통해 노동자정당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음 의회에 보다 많은 숫자의 노동대표를 보낼 방법을 강구하기 위하여..... 협동조합, 사회주의 단체, 노동조합 그리고 여타의 노동자 단체가 참여하는 특별회의를 개최한다.”
이 결정은 TUC 조합원 54만 6천 대 43만 4천이라는 투표결과가 보여주듯이 근소한 표차였습니다. 그 결정이 의회에 노동대표를 보내는 것에 머물고 있다는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정치세력화 수준을 결정하는 것도 상당한 이견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1899년의 결정은 영국 노동운동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문제를 일단락시킨 결정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했습니다. TUC는 이러한 결정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정당을 추진해 왔던 3개의 사회주의 정치그룹들, 페이비안협회, 사회민주연맹, 독립노동당과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영국노동당은 이 특별위원회를 통해 태어났습니다. 영국노동당의 창당과 이후 활동을 더 이야기하기 전에 영국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의 흐름과 사회주의 정치그룹들의 그동안의 활동에 대하여 잠깐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TUC 총회의 결정은 1880년대부터 영국에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고자 했던 사회주의 정치그룹을 고무시켰습니다. TUC가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 방침을 결정하게끔 내부논의에 개입해 왔던 사회주의 정치그룹들은 이 결정이 나오면서 TUC와 함께 독자적인 사회주의 정당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대중적인 정치운동을 지향하지 않은 페이비안협회는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적인 사회주의 정당으로의 발전 방향을 모색했던 독립노동당은 창립 이후 6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13,000명 정도의 당원을 가진, 의원 하나도 갖지 못한 채 그 영향력이 제한적인 조직이었습니다. 사회민주연맹 또한 그 전신인 민주연맹(Democratic Federation)이 창립된 1881년부터 기산하면 물경 9년이나 되었지만 9,000명의 회원에 불과한 활동가 중심의 정치조직에 불과한 실정이었습니다. 영국 노동운동의 비정치성은 사회주의 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정당의 정착을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페이비안협회(Fabian Society)는 1882년에 창립된 신생활동우회(Fellowship of the New Life)에서 기원한 단체였습니다. 개인의 도덕적 윤리를 중심에 놓고 새로운 공동체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신생활동우회는 이후 명백한 한계에 부딪혔고 이에 ‘윤리 보다는 경제’라는 기치를 내걸고 탈퇴한 사람들이 페이비안협회를 창립하였습니다. 버나드 쇼, 시드니 웹 등이 중심이 되었던 이 협회는 대륙의 마르크스주의가 벤담이나 밀의 영국식 급진주의와 결합하여 나타난, 말하자면 영국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단체였습니다.
페이비안협회는 사회주의 체제는 불가피하지만 그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동시에 합법적인 개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페이비안협회라고 하는 이름은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입장이 녹아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페이비안이라는 말은 로마의 장군이었던 파비우스(Quintus Fabius Maximus Cunctator)에서 연원한 말이었습니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를 침공하였을 때 맞서 싸우지 않고 적이 지칠 때까지 끈질기게 싸움을 지연하면서 마침내 로마의 승리를 가져왔던 장군의 이름이었습니다. 즉 페이비안협회는 이런 파비우스의 전략에 따라 사회주의의 실현을 끈질기고도 점진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페이비안 협회는 영국은 이미 민주주의가 다른 어떤 유럽국가들 보다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져있고 발전된 자본주의 체제를 갖고 있음으로 대륙의 사회주의 전략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국사회를 사회주의체제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기본인식 속에서 페이비안협회는 국가란 지배계급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실현해가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충분히 민주적으로 발전한 국가는 노동계급이 그 국가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만들어 갈 수 있으므로 합법적이고 누적적으로 개혁을 실천해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요한 기반은 집산주의, 즉 국가 혹은 지방정부의 규제를 확대함으로써 국, 공유화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페이비안협회가 말하는 집산주의는 생산수단의 전면적인 공동소유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에 직결되는 산업의 제한적인 국,공유화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비안 사회주의를 그 의미를 폄하하여 ‘가스와 상수도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페이비안주의자들은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실천, 즉 기존질서에 대한 전복과 급진적인 투쟁에 대해서는 반대했습니다. 세제에 대한 개혁, 사회입법제정을 위한 청원운동, 사기업에 대한 일정한 규제 등이 주요한 실천과제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또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즉 독자적인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는 것에 대해서도 명백한 의지를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비교적 개혁적인 자유당을 통해 이런 과제들을 추진할 수 있으므로 자유당에 대한 개입이나 혹은 자유당과의 연대를 통한 사회주의자들의 의회진출을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보았습니다. 노동운동에 대해서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는 않았지만 페이비안주의자들은 노동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중요한 대중적 토대로 보기 보다는 조합원들을 위한 경제투쟁의 도구정도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대표적인 페이비안주의자였던 시드니 웹이 쓴 노동조합에 대한 고전 <영국노동조합운동사>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페이비안주의자들은 제국주의 문제에 대하여 시종 애국적인 관점에서 있었으며 영국의 식민지 침략과 지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보어전쟁(1899-1902년에 남아프리카를 식민지로 하고 있던 영국이 다이아몬드 광산을 뺏기 위하여 보어인이 세운 트란스발공화국과 벌인 제국주의전쟁, 전쟁과정에서 영국은 보어인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등 야만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음, 영국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나 영국은 이 전쟁으로 국내외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음)에 대해서, 그리고 이어지는 식민지 침략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하여 이들은 언제나 영국정부의 제국주의 정책과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영국 사회주의 운동의 가장 큰 흐름을 형성했던 페이비안주의는 거꾸로 대륙의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1890년대에서 1900년대 초까지 대륙의 사회주의 운동의 가장 큰 논쟁거리였던 수정주의 논쟁에는 영국의 페이비안주의의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륙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수정주의 논쟁의 불을 지핀 베른슈타인이 1888년부터 1891년까지 영국에 머물면서 이들 페이비안 사회주의자들과 교류를 가졌습니다. 베른슈타인은 독일로 돌아간 후 사민당 내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맞서며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 전략에 대한 일련의 글들을 발표함으로써 사민당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이내 이러한 논쟁은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자신이 페이비안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극구 부정하였으나 베른슈타인의 논리의 상당부분은 페이비안주의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오늘 스물 한 번째-개량인가 혁명인가 참조).
페이비안협회는 대중적인 정치단체 혹은 정당을 지향하기 보다는 지식인 중심의 사회주의 단체 정도로 자신들을 규정하였습니다. 이런 페이비안협회의 입장은 당연하게도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던 독립노동당이나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했던 사회민주연맹과의 연대를 형식적인 연대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비안협회가 노동운동의 정치방침의 진전에 따라 TUC와 이들 사회주의 단체들과 영국노동당의 결성에 나선 것은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대의를 거스를 수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영국노동당에 참여하면서도 이 당의 미래에 대하여 명확하고도 분명하게 확신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노동당의 이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페이비안협회였습니다. 이는 페이비안협회가 사회주의라는 이념과 관련해서는 가장 이론적인 완결성을 갖고 있는 조직이었고 이 협회의 성원들이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가장 중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페이비안협회가 내세운 사회주의 논리가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의 단계나 영국 노동운동의 현실적 조건에 가장 정합하는 이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점진주의, 합법주의, 의회주의, 계급간의 화해, 다원주의 관점의 국가관 등으로 규정되는 페이비안주의는 이후 사실상 영국노동당의 일관된 노선이자 중심 철학이 되었습니다.
사회민주연맹(Social Democratic Federation)은 1881년 6월, 무정부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등 다양한 사회주의적 색채를 지닌 사람들이 결성한 민주연맹으로부터 기원한 단체입니다. 1884년 하인드만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도하여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정치조직으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사회민주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사회민주연맹은 “모든 생산, 교환, 분배수단의 공공소유”를 강령에 명시하고 사회주의 혁명과 계급투쟁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대중적인 사회주의 정치조직을 내세웠지만 영국사회에서 이와 같은 급진적인 노선은 대중과 유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영국의 노동운동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영국의 노동운동이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면서 사회주의적 실천이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는 외면한 채 기존정당을 통한 정치활동만을 하고 있다는 평가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사회민주연맹은 마르크스주의를 매우 교조적이고 결정론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영국에 머물던 엥겔스는 이런 사회민주연맹의 활동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 이론을 경직된 교리로 축소시켰으며 영국적 상황에서 혁명을 강조하는 것은 곧 구호만 외치고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1880년대 후반 불어 온 신노조주의의 열풍 속에서 사회민주연맹은 일정하게 조직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급진성과 기존의 노동운동에 대한 불신은 여전히 사회민주연맹의 대중적 확대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신노조주의가 한풀 꺾이고 선거법 개정으로 영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진전되면서 계급투쟁과 급진적인 혁명노선은 대중적으로 점점 유리되어 갔습니다. 1893년 비교적 온건한 사회주의 혁명전략을 내세운 독립노동당이 창당되면서 사회민주연맹의 영향력은 더욱 축소되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독자적정치세력화에 나서자 사회민주연맹은 보다 분명한 사회주의 전략이 관철되는 당을 창당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당 건설 논의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회민주연맹은 자신들이 내세운 사회주의 기본강령이 채택되지 않자 창당 1년 후 영국노동당을 탈당하였습니다. 사회민주연맹의 완고하고도 교조적인 입장은 사회주의가 대중과 소통하는 것을 오히려 막는 결과를 빚었고 이런 활동은 영국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을 왜곡시키고 영국 노동당을 개량화로 흘러가게 만든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측면도 있었습니다. 과학적인 사회주의가 대중과 유리된 교조적인 입장을 가질 때 어떤 위험성을 갖게 되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지점입니다. 가장 교조적인 관점에 있었던 사회민주연맹은 그러나 1차 대전 당시에는 열렬한 애국주의를 보이는 등 관념적인 사회주의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사회민주연맹은 1차 대전이 종전된 후 영국 공산당으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습니다.
토마스 하디와 람제이 맥도날드 등 노동운동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독립노동당(Independent Labour Party)이 창당 된 것은 1893년 1월이었습니다. 독립노동당은 영국최초로 노동자를 대중적 토대로 하여 창당된 노동자정당이었습니다. 페이비안협회와 사회민주연맹이 엘리트주의와 교조적인 이념을 가진 활동가 중심의 정치조직이었던데 반해 독립노동당은 영국 노동운동이 조직적인 정치세력화를 주저하고 있는 가운데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기본적인 토대로 하여 설립된 정당이었습니다. 비록 스코틀랜드 지역의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기반에 머물고 있었지만 독립노동당은 영국노동당의 창당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회주의 정치조직이었습니다. 노동운동가와 현장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하여 창당된 독립노동당은 TUC 내부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TUC가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대한 방침을 결정하도록 끊임없이 추동해 나갔습니다. 독립노동당은 노동운동이 중심이 되는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노동자정당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아직은 사회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의 정서를 최대한 고려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독립노동당은 창립총회에서 “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집단소유”라는 사회주의의 목표를 분명히 하였지만 당명에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였고 사회민주연맹이 제안한 ‘사회주의 연합’에 참여하는 것도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선거에서 사회주의자에게만 투표하도록 하자는 일부 당원의 동의안을 부결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독립노동당이 갖고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목표, 즉 노동운동의 조직적 결합을 통한 노동자정당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독립노동당은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위해서는 대중운동인 노동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독립노동당의 노력은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결합을 통한 대중적 토대를 담보로 사회주의적 이상을 희생시키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독립노동당이 갖고 있었던 이런 입장은 사실 페이비안협회나 TUC가 갖고 있었던 정치세력화에 대한 입장, 즉 사회주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당의 건설 보다는 의회내에 더 많은 노동자대표를 보내고자 했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독립노동당은 사회주의적 이념의 문제는 당 건설 이후에 점차적으로 확장해 갈 문제로서 창당과정에서 이런 문제가 불거져서 당 결성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독립노동당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대한 노력은 평가할 만한 지점이지만 영국노동당이 사회주의 정당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수립하지 못한 것이나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지 못한 데는 독립노동당의 이런 입장도 한 몫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국노동당의 창당은 이처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다양한 그룹들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기존의 정당에 대한 실망 속에서 새롭게 노동계급의 이해와 노동운동의 당면한 과제를 의회 내에서 해결하기 위한 방편에 중심을 두었던 TUC, 독자적인 정당 건설보다는 여전히 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대한 개입전략을 중심에 두면서 소극적으로 결합했던 페이비안협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조적인 입장 속에서 계급투쟁과 사회혁명을 전면에 내세우며 명확하게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던 사회민주연맹, 노동운동의 대중적 결합을 통한 노동자당 건설을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로 삼았던 독립노동당의 결합은 영국노동당의 혼란스러운 미래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사회민주연맹을 제외하고는 당의 이념과 정체성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비슷했고 또 당의 중심이 노동조합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도 비교적 생각이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감대 속에서 탄생한 영국노동당이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이라는 사회주의 정당으로서의 정체성 보다는 의회내 권력을 우선시하는 의회주의 정당으로서의 길을 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할 것입니다.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측면에서나 사회주의 정당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1900년 2월 27일, 오늘, 비로소 영국의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독자적인 노동자정당, 사회주의 정당을 창당하였습니다. 영국노동당이 처음 사용한 명칭은 노동대표위원회(LRC : Labour Representative Committee)였습니다. 당이라는 명칭 대신에 노동대표위원회라는 명칭을 쓴 것은 위에 언급했듯이 의회 내에 노동자대표를 보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독자적인 정치활동에 익숙하지 못한 노동조합을 고려한 명칭이었습니다. LRC가 노동당이란 당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그로부터 6년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LRC의 출범은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지만 그 앞날은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정했으며 그 전망 또한 불확실했습니다. 노동운동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문제는 일단 한 고비를 넘었지만 어떤 이념과 조직구조를 가져야 하는지, 또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동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의견이 모아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LRC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 즉 강령과 관련하여 예상대로 사회민주연맹은 사회주의적 강령을 들고 나왔지만 노동운동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한 독립노동당과 노동조합 대표자들에 의해 사회민주연맹의 제안은 거부되었고 독립노동당의 토마스 하디가 제출한 수정안이 채택되었습니다. 그것은 노동운동이 갖고 있던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기본입장, 즉 의회주의를 통한 당면과제의 해결을 목표로 하는 강령이었습니다.
“의회 안의 독자적인 노동단체로서 자체의 규율과 합의된 정책을 가지며, 당분간 노동자의 직접적인 이해에 관계되는 입법을 위하여 어떤 정당과도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반면에 노동자의 이익을 저해하는 모든 입법을 반대하기 위하여 역시 마찬가지로 어떤 정당과도 제휴할 수 있어야 한다.”
조직구조와 관련하여 LRC는 형식적으로는 노조와 3개 사회주의 단체의 연합체였습니다. 즉 개인당원 중심의 정당이 아니라 이들 4개 조직이 조직을 유지한 채 결합한 연합체였던 것입니다. TUC의 직종별 가입노조 중 일부는 결합하였지만 광부노조나 섬유노조는 이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창당 당시 LRC는 57만명의 노조원과 2만 3천명의 사회주의 단체회원을 대표하는 단체로 출발하였습니다. 즉 약 60만 정도의 당원을 가진 정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LRC가 개인가입 당원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 당원 숫자는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LRC는 노조원이나 단체의 회원은 노동조합이나 사회주의 단체를 통해 단체가입하도록 하였으므로 이 숫자는 조직적으로 LRC에 참여가 결정된 노조와 사회단체의 구성원의 숫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LRC가 대표한 노조원의 숫자는 영국 노동운동 전체와 비교하면 2/3가 되지 않는 숫자였고 TUC 소속 노조와만 비교하면 절반이 안 되는 숫자였습니다. 즉 LRC는 아직은 노동운동의 전면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LRC는 이들 조직들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의사표시를 행하게 하는 블록투표제를 채택하였습니다. 블록투표제도란 한 단체에 속한 성원들의 의사표시가 집단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단체로 가입한 어떤 노조가 LRC의 안건에 대해 노조 내의 투표를 통해 500대 450으로 찬성의사를 표시했다면 이 노조의 대표자는 투표에 참여한 950명 전체와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조합원까지 묶어 950∔α로 찬성표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 제도는 LRC 구성의 90%를 상회하는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은 LRC의 사회주의화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블록투표제는 1993년 전당대회에서 93년 만에 토니 블레어에 의해 폐지되었습니다. 제3의 길을 표방하며 영국노동당을 좀 더 오른쪽으로 이동시키고자 했던 토니 블레어는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이 제도를 폐지했던 것입니다. 창당 초기 영국노동당의 사회주의화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블록투표제는 9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나마 영국노동당의 노동자 참여와 계급성을 최소한이라도 담보하는 제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회주의 정당의 가치를 완전히 버린 영국노동당에게는 이마저도 거추장스러운 과거의 유물에 불과했습니다.
이처럼 당의 이념적 정체성은 명징하지 못했고 조직구조는 느슨했으며 노조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노조에 대한 재정부담을 최소화 하다 보니 재정상태 또한 취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공을 들여 온 노동운동의 조직적 참여를 만들어내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노동운동 전체를 대표할 만한 조직적 토대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TUC 내 최대 노조인 광부노조는 오히려 LRC에 대항하며 자유당과의 연대를 통한 광부노조의 의원수를 확대하는 운동에 나서는 판이었습니다. 또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의원의 당선과 이를 통한 의회 내 활동을 통해 현안문제의 해결을 내세운 만큼 빠른 시간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었습니다.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첫발을 내딛었지만 LRC의 미래는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23년 후에 집권하는 영국노동당의 1900년의 모습은 이랬습니다. 이제 집권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여기서 잠깐 우리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와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의 창당으로 이어졌던 진보정당 운동을 영국노동당의 태동과 비교하면서 한 번 돌아다볼까 합니다.
영국 노동운동의 정치화와 영국노동당의 창당과정이 우리 민주노조운동의 노동자정치세력화와 민주노동당 창당과정과 비슷한 지점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전투적인 조합주의에 입각한 탈정치, 혹은 현장정치의 과정에서 합법적인 노동자정당 건설을 결의해 간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세력화 과정이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전노협과 업종회의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의 폭발적인 고양과 조직적인 확대, 이어지는 권력과 자본의 전면적인 반격, 민주노조운동 초기부터 꾸준히 모색되어 온 사회주의 정치조직의 계급정당 건설 움직임, 탈정치 혹은 전투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현장정치를 중시하며 대중적인 정치운동에 거리를 두었던 민주노조운동의 기본 노선, 점점 현장을 기반으로 한 노사문제가 정치적 공간으로 이전되며 노자간의 계급문제로 확대되어 갔던 노동운동의 환경변화 등 주.객관적 조건들은 영국 노동운동의 발전과정과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민주노조운동은 민주노총의 창립과 함께 드디어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를 핵심과제로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선전이나 당위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했습니다. 영국의 노동운동이 그러했듯이 우리 민주노조운동 내부에도 정치세력화를 둘러 싼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통한 정치적 공간의 확대를 주장하며 독자적인 노동정치 보다는 민주연합에 의한 정권교체를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고 섣부른 정치세력화가 현장투쟁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맞이한 노동법개정투쟁 총파업은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한 단계 올리면서 민주노총으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영국 노동운동이 1900년대 연이은 노동악법의 제정과 잇따른 반노동자적 판결, 그리고 노동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와 탄압으로부터 새롭게 노동자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과 비슷했습니다.
◀ 96-97 노동법개정 총파업, 서울 명동 성당
민주노총은 노개투 총파업이 종료된 1997년 3월부터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추진해 나갔습니다. 97년 대통령선거에서 노동자후보를 세우고 이를 발판으로 노동자정당을 건설하자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1997년 9월에 결성된 국민승리21은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추진해 나가는 첫 걸음이었습니다(국민승리21의 출범과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과정은 오늘-열 아홉 번째 참조). TUC가 그랬듯이 민주노총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노동자정치운동의 획기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이전의 사회주의 정당 운동은 노동운동이라는 대중운동의 바깥에서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이렇다할만한 진전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의 결정은 이후 노동자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운동의 확실한 미래를 담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진보적인 단체들과 사회주의 운동 조직들이 민주노총의 결정에 힘을 입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합류하였습니다. 이는 영국노동당의 창당과정에서 나타났던 현상과 너무나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민주노총과 함께 국민승리21을 결성한 전국연합과 진보정치연합, 그리고 정치연대는 영국의 페이비안협회와 독립노동당, 사회민주연맹이었습니다.
한국사회의 변혁전략을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단계로 보면서 그동안 자유주의 정당과의 연합에 더 많은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며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대해 회의적이던 전국연합은 페이비안협회의 입장과 비슷했습니다. 오랜 사회주의 정당 건설의 과정을 거치며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래도 진보정당운동의 흐름을 형성해 온 진보정치연합이 갖고 있었던 전략, 즉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를 통한 사회주의 정당 건설이라는 전략을 갖고 있었던 진보정치연합은 독립노동당과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보다 계급적인 사회주의 정당, 보다 원칙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를 기본 입장으로 갖고 있던 정치연대가 비판적인 관점에서 결합한 것은 사회민주연맹을 보는 듯합니다. 대선이 끝나고 분명한 사회주의적 정당으로의 전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이후 진보정당운동의 대열에서 이탈한 모습까지도 닮았습니다.
▲1997년 9월 7일, 국민승리21(준) 출범식,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권영길 후보가 단상으로 향하고 있다
국민승리21의 결성과정은 이처럼 그 노동운동의 주체적 조건이나 사회주의 정당 운동의 토대 등이 영국과 비슷했습니다. 또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는 과정도 매유 유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내부적인 한계도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민주노총은 국민승리21을 통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결정하기는 하였지만 사실 내부적으로 그 결의수준은 높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에는 자유주의 정치세력과의 정치연합, 즉 비판적 지지 경향이 강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시기상조를 주장하며 현장투쟁을 강조하는 흐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대한 이해의 정도도 달랐습니다. 즉 향후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이념적 지향이 명백하게 정리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당의 건설과 이를 통한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중심에 놓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노동운동이 당면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회 내에 일정한 권력을 확보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선거정치 혹은 의회주의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노개투 총파업이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계기가 된 것은 분명했지만 한편으로는 총파업투쟁에서 드러난 정치력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노동운동의 전략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인식의 차이를 좁히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비판적 지지와 현장투쟁의 양 끝을 쫓아다니기에도 버거운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내부적인 한계는 노동자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운동의 미래가 결코 쉽지 않은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노동운동의 상태나 LRC의 초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민주노총은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토대를 놓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민승리21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대중조직이 참여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는 적어도 진보운동 전체의 미래를 새롭게 열었던 것만큼은 분명했습니다. 국민승리21에 그러한 역사적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노동운동이 조직적으로 노동자정치세력화를 결의했기 때문입니다. TUC가 그랬던 것처럼 민주노총의 결정은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모든 논쟁을 일단락시킨 역사의 전환점이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슷한 조건과 토대를 갖고 출발한 영국노동당(LRC)과 국민승리21,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노동운동의 독자적인 노동자정치세력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노동운동의 발전과정과 정치세력화로 이어지는 경로가 비슷했습니다. 사회주의 정당 운동의 조건과 토대가 취약한 상황에서 노동운동의 조직적 결의가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똑 같았습니다. 또한 출발과 함께 맞이한 조건 혹은 한계도 비슷했습니다. 대중적 토대는 아직은 미약했고 이념적 지향도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당의 정체성을 의회주의, 혹은 선거주의로 받아들이는 경향성이 컸던 측면도 유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국의 노동자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운동을 보다 정확하게 비교하기 위해서는 국민승리21의 결성과정과 LRC를 비교하는 것 보다는 민주노동당과 LRC를 비교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국민승리21을 토대로 하여 민주노동당이 창당되는 과정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국민승리21로 임한 1997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후보인 권영길이 얻은 표는 30만 표였습니다. 한국의 정치,사회적 조건에서, 그리고 우리 운동의 조건에서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징표였습니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의 성패는 득표수에 있지 않았습니다. 득표와 관계없이 그것을 바탕으로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길을 열어갈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시작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의미 있는 출발이 되기 위해서는 대선 이후 노동자정치세력화를 향한 장정이 중단되지 않는 것이 관건적인 과제였습니다. 노동운동이 중심에 선 노동자정치세력화가 그 이전의 진보정당운동과 달랐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민주노총은 여러 가지 어려운 가운데서도 대중적인 결의와 토대를 바탕으로 정치세력화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00년 1월, 마침내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습니다. 국민승리21에서 민주노동당의 창당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것은 따지고 보면 처음 민주노총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결정하고 국민승리21을 결성하기까지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객관적인 조건과 토대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이 주도하고 진보적인 단체들의 결합으로 이루어 진 창당과정은 국민승리21과 같았습니다. 대중적으로 여전히 부족한 토대나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조합원들의 정치의식, 민주노총 내부에 존재하던 다양한 의견차이 등은 3년 전의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민주노동당 창당의 조건과 토대 또한 영국노동당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창당은 몇 가지 지점에서 영국노동당과 분명하게 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나타난 이념적 지향이나 당의 정체성이 LRC와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당의 이념적 지향과 관련하여 민주노동당은 당 강령에 사회주의적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명확히 못 박았습니다. 또한 의회정치를 인정하면서도 당의 일상적인 사회주의 실천을 강조함으로써 의회정치와 진보정치운동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민주노동당은 동시에 당명에서 보듯이 다른 여타 사회단체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당의 노동중심성과 반자본주의적 지향성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적어도 민주노동당은 선언과 강령을 통해서는 그 이념적 지향과 활동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천명한 진보정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강령이 곧 실천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 부분이 실질적인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평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이 이후 당 활동 과정에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졌는가를 되짚어 보면 민주노동당이 강령과는 무관하게 의회주의에 점점 포획되어 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오랜 기간 배태되어 온 내부의 의회주의라는 경향성이 대중적으로는 명백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중들은 2000년 이후 보다 강화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의 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러한 관점에서 민주노동당을 의회주의 정당으로 이해한 측면도 컸을 것입니다. 비록 잠복하고 있었지만 민주노동당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언제든지 당의 이념적 지향이 흔들릴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명시적으로는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노동자대표를 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목표로 삼으면서 사회주의와 관련된 어떤 수사도 담지 않고자 했던 LRC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지만 실제 그 폭이 얼마나 컸는지는 의문입니다. 실제로는 이념적 지향점이 대중적으로는 비슷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창당 과정에서 노동운동이 갖고 있었던 기본적인 입장 또한 달랐으며 노동운동의 토대 또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노동운동의 이런 차이가 곧 당의 이념적 지향의 차이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시작된 민주노조운동은 자본에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하여 성장해 왔습니다. 정치세력화라는 측면에서 일정하게 조합주의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던 지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은 노동계급의 대표성을 가지고 한국사회의 변혁을 위해 추동해 온 운동이었습니다. 96년 노개투 총파업은 민주노조운동의 정치투쟁의 지평을 새롭게 열면서 노자관계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조합원의 정치의식을 확장시킨 투쟁이었습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자본의 공세가 전면화되고 있던 1997년 이후의 IMF 상황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연이은 총파업 등을 통해 아직은 계급운동으로서의 지향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통한 정치화의 흐름도 이런 과정을 거치며 현저히 잦아들었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정치세력화와 창당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이 노동중심성과 반자본주의라는 입장을 분명하게 갖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노동계급의 상태 또한 영국과는 달랐달랐습니다. TUC의 조합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축적을 자본과 공유하며 탈계급화되어 가고 있었던데 반하여 민주노총의 조합원들은 개량화의 물적 토대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TUC가 LRC의 개량적 토대의 기반이었다고 한다면 정반대로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적 이념과 노동중심성을 담보하는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양 당의 창당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운동의 조건 차이는 양 당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지점에 대해서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IMF를 겪으며 급격한 노동시장의 변화가 다가오면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조직노동자의 계급적 조건들은 점차 변화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즉 IMF 국면에서 진행된 노동유연화가 조직노동자를 현장 안으로 묶어 두고 사회적으로는 비정규직을 양산함으로써 노동계급의 분절화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결과 조직노동자의 상태는 임금, 근로조건, 고용에서 상대적으로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러한 계급의 상태는 민주노조운동의 노선의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사실 2000년을 전후하여 이미 이런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고 이런 측면에서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견지한 운동 원칙과 무관하게 현장노동자들은 점차 개량화의 위험에 노출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즉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당의 사회주의적 정체성을 끌고 간 것과 무관하게 당의 대중적 토대가 되는 노동계급의 상태는 이러한 이념적 지향과는 다른 길로 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민주노총의 조합원들의 상태 또한 TUC 조합원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조건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노동운동이 당의 대중적 토대가 된 것은 같았지만 그 결합방식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민주노동당에는 LRC와 같은 단체가입이나 블록투표제도가 없었습니다. 이는 당과 노동운동의 결합방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현실에서는 큰 차별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노동자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을 통해서 추진한다”라는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유일한 진보정당으로 인정하고 모든 인적, 물적 역량을 민주노동당에 전적으로 투여한다는 결정이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LRC처럼 단체가입이 아닌 개별가입제도를 채택하였지만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그 효과에 있어서 사실상 TUC의 직종별노조들이 취한 단체가입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다. 이 정치방침은 조합원의 당원가입여부와 관계없이 당의 재정과 지지를 조직적으로 책임지는 결정이었습니다. LRC처럼 블록투표제가 아니어서 민주노총이 당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거나 의결권을 절대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노동할당제를 통해 50%에 해당하는 의결권을 각종 의결기구에서 갖도록 한 것은 LRC의 블록투표제와 같은 효과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당과 대중운동의 결합은 그 형식적 차이만 있었을 뿐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LRC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도 노동운동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미치는 정당이었습니다.
이처럼 몇 가지 지점에서 LRC와 민주노동당은 창당의 조건이나 토대가 다른 부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떤 측면에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그 차이가 크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차이가 결정적인 차이였는지 아닌지는 이후 양 당의 활동과정에서 다시 평가해야 할 지점이 될 것입니다. 여하튼 일정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출발의 조건이 비슷했던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진보정당운동이 100년을 앞서 간 영국노동당의 창당과정과 비슷했다는 것은 이후의 활동에서도 유사한 궤적을 보일 개연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는 점에서 영국노동당이 창당 이후 걸어간 길은 우리 진보정당운동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가늠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있는 우리의 노동자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운동을 위한 나침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와 영국노동당에 대한 평가에 기반할 것입니다. 이제 창당 이후 영국노동당이 걸어 간 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 2편에서는 영국노동당이 소수당으로 집권한 1923년과 다수당으로 집권한 1929년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그 한계를 짚어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영국노동당의 초기활동에 대한 평가를 통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에 대한 평가, 진정한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고민 등을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