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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의 이름으로
이루다(김경화)
내 스물 셋 생일을 맞이하여 이모가 배스킨라빈스에서 생일파티를 해줄 것이라는 말에 나는 무척 놀랬다. 앙증맞은 아이스크림 공주가 선전하는 배스킨라빈스 31 아이스크림을 모두 맛보일 것이니 과 친구들은 물론 선후배 모두를 불려오라는 것이었다. 물론 학기 중에 연극영화학과 ‘항우’ 공연이 없는 날이나 강의가 없는 날은 내 여가 시간을 반납하고 이모의 배스킨라벤스 가게에서 급료 없는 일일 점원으로 봉사했고, 방학중에 내 여가를 즐기는 대신 행사 도우미, 내레이터 모델을 하면서 동거비보다 더 많은 액수를 이모 손에 쥐어주었지만, 워낙 짠순이 이모라 기대하지 못했던 바다.
“정말로 공짜로 준다고 얘기한다. 이모 딴 소리 말아요. 우리 항우 식구들 식욕 왕성한 것 잘 알잖아.”
“걱정 마라, 우리집 가게 아이스크림 거덜나는 한이 있어도 풀 코스로 대령할거다. 그 날은 다른 손님 안 받는다. 너희들이 배스킨라빈스 전세 내는 거야. 수아네 팀까지 오면 시끌벅적할 테니 너네한테 전세낼 수밖에 없지, 암. 이 더운 날 니들 쌍둥이를 낳아서 고생한 언니 생각해서 내가 쏘는 거야.”
“수아라니...수..수산나 걔도 부를거예요? 자기 집이나 마찬가지인 마리아자매 성당에서 해줄텐데, 뭐하려? 그리고 우린 학교에서 서로 아는 척 안 한단 말야. 쌍둥이라고 소문나는 것도 싫고.”
“어머, 얘네들 좀 봐. 과는 틀려도 같은 학교를 3년 내내 다니면서 조선시대도 아니고 부부도 아니면서 내외를 하니? 그리고 언제까지 쌍둥이가 생일상을 따로 차릴래. 돌아간 언니와 형부가 그런 걸 좋아...”
“엄마, 아버지 이야기하지 마, 이모! 그 날의 일만 생각하면 이렇게 몸서리가 쳐지는데... 주범인 수아를 꼭 나와 쌍둥이라는 이름으로 붙잡아매야겠어요? 난 그런 언니 필요 없었단 말이야.”
내가 흥분해서 씩씩거리자 이모가 내 어깨를 잡으려 했다.
“설마...현아야...너 아직도 그 일을...수아탓이라고...”
“...나 마저 연습 가봐야 해요.”
난 바로 어깨를 뒤로 빼고 배스킨라벤스 문을 열며 한마디만 했다.
“하여튼 수아부르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파티할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장소는 많으니까.”
벌써 10년이나 지난 사건이지만 난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자애롭던 엄마, 아버지의 목숨과 교환해서 내 앞에 나타난 내 언니라는 여자아이. 붕대 속의 불그스름한 피부의 수아를...
원래 내겐 언니가 없었다. 언니 없이 10년이라는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열 살 생일을 이틀 앞둔 날, 엄마가 학교 갔다 돌아온 나를 앉혀놓고 언니 얘기를 처음으로 꺼냈다.
“우리 현아 전에 동생 가지고 싶다고 그랬지? 동생을 만들어줄 수는 없지만...현아에게 실은 언니가 있어요.”
“언니?! 정말? 내게 언니가 있어?”
“응, 이름은 진수아이고 현아하고 나란히 엄마 뱃속에 있다가 현아보다 먼저 손을 들어 언니가 됐지만 현아랑 국화빵이란다.”
엄마는 그전에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나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초등학교 1학년 땐 학교에서 지 형제, 자매들 자랑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서러운 마음에 저녁에 늦게 들어오시는 엄마께 ‘왜 내겐 형제가 없어? 동생 만들어줘.’하고 투정부린 일은 있었다. 하지만 한 학년 올라오면서, 먼 지방에 일하려 가셔서 두 달에 한 두 번이나 집에 오시는 기러기아빠와, 인형공장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엄마를 더 이상 귀찮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난 언니나 동생 갖는 걸 포기하고 혼자 노는 법을 터득했었다. 가끔 엄마가 없는 오후시간대에 이모가 와서 놀아주기도 했지만-내가 살던 달동네는 나만한 또래의 아이들이 없었다- 내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는 봉제인형이었다. 엄마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벌로 공장에서 만들다 남은 것들로 손수 만들어서 자고 있는 내 품에 넣어준 테디 베어 곰돌이. 그는 내 이불 속 베개 옆에 항상 눕혀져 있다.
기러기 아빠이긴 해도 내 생일날에는 반드시 선물을 사와서 엄마와 함께 생일파티를 해주던 아빠. 단지 그게 하루종일이 아니고 정오가 지난 후 반나절이라서 조금 서운했지만, 엄마랑 아빠는 매년 8월 11일 내 생일날만 되면, 아침 일찍 나가셔서 정오가 지나서야 내 생일선물을 가지고 돌아오셨다. 아홉 살 생일까지 그랬는데 열 살 생일을 이틀 앞둔 날 엄마가 언니의 존재와 함께 그 이유를 알려주셨다.
1991년 8월 11일, 강원도의 한 수녀원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우리 자매의 양육은 아직 대학생이셨던 부모님께 벅찬 일이었다고 했다. 양쪽 집안에서 반대하던 결혼인데다, 도망치듯 속도위반으로 낳은 처지라서, 친지에게 맡길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이 태어난 마리아자매수녀원에 한 아이를 맡겼다고 했다. 그것이 내 언니인 수아였다고. 둘이 도망을 쳤을 때는 이미 졸업은 포기한 처지라, 아버지와 엄마는 서울에 와서 돈을 벌 생각만 했다. 오직 가족이 모두 함께 살기 위한 일념으로 온갖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 엄마는 공장일 전에 백화점 시식행사사원, 마트계산원 등을 전전했으며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건설과장 눈에 띄인 것은 행운이었는데, 사무실로 들어가 정식직원이 된 아버지는 지방 건설 일을 맡게 되어 기러기아빠가 됐다. 그렇지만 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 ‘태어났을 때 사진이나 찍어둘 걸.’하고 후회하셨다고. 그래서 우리의 생일날에는 반드시 시간을 냈고, 엄마랑 같이 두 딸을 챙기기로 했다. 하루를 반나절로 나눠서, 오전 반나절은 강릉에 있는 수녀원에 가서 첫딸을 챙겼고, 오후 반나절은 서울의 집으로 와서 나를 챙겼던 것이다.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엄마는 눈물방울을 떨구셨지만 웃으면서 나를 안아주셨다.
“하지만 현아야. 이제 내일 한 번만 강릉에 있는 수녀원에 다녀오면 모레 현아 생일에는 현아랑 언니랑 아빠랑 엄마랑 여기 우리집에서 하루종일 보낼 수 있게 됐단다. 아빠가 돈을 아주 많이 버셨거든. 근무처도 여기로 옮기시고. 이제 네 언니 수아만 수녀원에서 아예 데리고 나오면 된단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언니였지만 언니가 생긴다니까 기뻤다. 나랑 국화빵이라니까 분명 예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일날 하루종일 온가족이 함께 있을 수 있다니까 너무 기뻤다.
“그러니까 오늘은 현아가 집을 잘 지켜야 해. 이따 저녁에 이모가 올 거지만 엄마랑 아빠랑 가서 언니 데리고 오게 내일까지 집 잘 지킬 수 있지?”
“응, 엄마. 하지만 너무 늦게 오지 마.”
그렇게 승용차에 탔었는데, 그것이 부모님의 마지막이었을 줄이야. 엄마가 만들어준 테디 베어를 안고, 설레이는 마음에 언니와 아빠와 엄마를 만나는 것을 상상하며, 이불 속에 누워서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내가 꿈결 속에서 엄마, 아빠를 만났을 새벽쯤에 사고가 났다고 했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를 지날 때 대관령 고개에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는데, 중앙차선을 넘은 졸음 운전 트럭을 피하다가 태백산맥의 계곡 아래로 떨어져 차가 폭발했다고 했다. 차가 계곡에 떨어지기 직전에 부모님은 나의 언니라는 여자아이를 차창 밖으로 던졌다고 했다. 폭발과 함께 아버지와 엄마는 즉사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언니가 병원에 있다는 전화를 받은 이모가,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쫓아갔다. 거기서 나는 수아를 처음 보았다. 수아는 내가 상상했던 언니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아이였다. 머리엔 온통 붕대를 감아 놓았고 보이는 피부는 온통 붉은 데다가,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고 말 한마디 없다.
‘뭐가 나와 국화빵이라는 거야? 저렇게 붉고 괴물같은 아이를 살리려고 엄마, 아빠가 죽었단 말이야. 싫어. 나 저런 애 싫어. 저런 언니 필요 없다고. 엄마, 아빠 돌려줘. 우리 엄마, 아빠 물어내란 말이야.’
나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서 도리질을 하며 크게 울었다. 옆에서 창백한 소복에 흰 핀을 차고 물거품이 되가는 인어공주의 표정으로 마냥 서있던 이모에게 가 안겼다.
“이모야. 엄마 아빠 어디 갔어...현아 버리지 말라고 그래. 이모가 현아 버리지 말라고 엄마, 아빠한테 말해 줘. 의사선생님한테 잘 말해서 저 딴 것 데려가고 엄마, 아빠 도로 데려다 달라고 얘기 좀 해봐, 응 이모.”
하지만 꿈속의 엄마, 아빠와의 행복한 모습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수아를 미워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수아는 나의 언니지만, 만나자마자 악연이라니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미리 받은 보수 때문에 서울집을 팔게 될지도 모른다고 해서, 나는 이모와 함께 수아 병실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후 수아가 머리 붕대를 풀어서 약간 사람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내 눈에 들지는 않았다. 수아는 내가 보기에 이상한 아이였다. 내 눈이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이었는지도 몰라도 내 눈을 슬슬 피하면서도, 내가 딴 곳을 쳐다보면 흘끔흘끔 나를 쳐다보는데, 왜 그러냐고 물으면 대답은 없다. 한번은 내가 자고 있는 사이, 내 테디 베어를 가져다가 지 마음대로 모자를 벗기고 옷에 손을 대길래 냉큼 뺏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하면서 슬픈 낯으로 “테디 안 아프데? 불에 많이 그을렸었는데...”라고 이상한 소리를 했다. 수아가 정상적으로 말한 것은, 이모가 수아의 머리숱이 너무 빠졌다고 퇴원하면 당장에 미장원에 가서 파마부터 하자고 했을 때 였다. “으응, 고마워요.”라는 말을 들은 이모가, 수아를 데리고 미장원에서 한 파마머리는 적은 머리숱을 부풀게 해 많게 보이게 하는 파마였다. 수아는 대학생인 지금까지 그때의 그 파마머리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사고소식을 접한 친가와 외가쪽에서 일주일동안 서울집과 병원과 사고현장을 왔다갔다하며 사고 수습을 했고 갑자기 고아가 된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정했다. 수아는 친가쪽에서 나는 외가쪽에서 맡기로 정해졌는데, 수아랑 같이 살지 않아서 좋았지만, 이모가 나랑 같이 산다고 안 해서 슬펐다. 솔직히 이모 외에 다른 친척들은 한 번도 우리집에 온 적이 없다. 이모는 아빠랑 엄마처럼 가족같은 느낌이라서 손을 놓기 싫었는데, 이모가 아직 자기는 처녀라서 나를 거둘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 “우리 현아가 좀더 크면 그때 같이 살자.”고 약속해 주었고 스물 살까지 친가와 외가를 전전하면서 큰 나는 고교를 졸업하면서 이모랑 비로소 동거할 수 있었다. 수아쪽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친, 외가보다는 아홉 살까지 살았던 강릉의 마리아의작은자매수녀원에 더 있었던 것 같다.
머리가 약간 영리했는지 손재주가 있었던 수아는, 나보다 두 살 일찍 독립을 해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과외 알바를 해서 학비를 버는 듯 한데, 수아는 지금 한양대 사범대학 응용미술교육과 3학년이고, 나는 한양대 인문대학 연극영화학과 3학년이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 제사 때는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지만 초, 중, 고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 적은 없었다. 그래서 3년 전 수아가 나랑 같은 한양대에 원서를 접수했다는 소리를 듣고 무척 화를 냈었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수아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응용미술교육과가 있는 대학이 한양대뿐이라고, 이모가 말해서 화를 삼키고, 수아에게 같은 학교에 다니는 대신에 꼭 지켜줘야 할 점을 통보했다. 학교 내에서는 절대 아는 척 하지 말라는 것과, 절대로 쌍둥이 인 것을 알려서는 안 된다는 점. 솔직히 수아랑 나는 쌍둥이이긴 하지만 정말로 다른 사람이란 게 눈에 보였다. 수아는 아버지와 엄마를 앗아간 그날 사고로 머리숱이 많이 없어져서 이모가 해준 파마머리를 바꿀 생각을 안 하고 그날부터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청순한 긴 생머리부터 발랄한 단발머리, 귀여운 숏카트머리까지 소화해내고, 여러 가지 스타일로 옷을 매번 바꿨지만, 수아는 옷도 한 가지 분위기의 옷을 여러 벌 샀는지, 그것만 입어서 촌스러워 보였다. 얼굴은 비록 닮았다해도, 이처럼 머리모양이랑 옷차림이 틀려서 우리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사람들이 우리가 쌍둥이라는 걸 그다지 눈치 못 챘다. 그런데 내가 연극영화학과 동아리 ‘항우’에 들면서 유명인이 되자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같은 학교에 다닌다 해도, 하나는 사범대학이요 하나는 인문대학이니, 캠퍼스 내에서 우리 두 사람이 그다지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나를 알아보게 된 나의 팬들이 가끔 사범대학에 갔다가 수아를 나로 착각하는 일이 빈번히 생겼다.
“우와, 현아 씨. 저번에 변장술 정말 끝내줬어. 현아 씨처럼 세련된 사람한테서 그런 시골처녀같은 분위기가 나다니. 파마머리 해놓으니까 정말 못 알아보겠던데.”
“언니, 사범대학에서 언니 봤어요. 그런데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빨라요? 인사하려고 했더니 휙 가버리데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난 적당히 웃으며 수아가 아닌 내게 정말 일어난 일처럼 맞장구를 쳐줬다. 그들을 돌려보낸 후엔 수아에게 바로 연락해 다시 자초지종을 듣고 앞으로도 조심하라고 말하는 식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3년 간 주의해서 대학에 다녔는데 1년 전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수아의 존재를, 우리가 쌍둥이라는 것을 들키고 말았다. 그것도 내가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입학 후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된 허성욱 선배에게. 성욱 선배는 우리를 아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착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선배가 처음 만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수아였다. 선배와 수아 사이에 내가 알지 못하는 신앙의 연결고리가 있었는 줄은 그때는 몰랐다.
3년 전 연극영화학과 오리엔테이션 때 즉석오디션에서 나는 성욱 선배를 처음 보았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 거짓말이군. 정말 화려한 새내기양인 걸. 나는 98학번 허성욱이다. 잘 부탁한다.”며 박수를 세 번 치며 앞으론 나온 선배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01학번 새내기 진현아입니다. 허성욱 선배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98학번이면 대선배 아니야.’하고 쫄아 있는데 다른 4학년 선배가 성욱 선배의 어깨를 잡더니 말했다.
“이 녀석 학번으로는 늙었어도 너하고 학년은 하나밖에 차이 안 나. 이 녀석 1학년 마치고 휴학하고 공익으로 2년 2개월 근무했거든. 고등학교서 근무했는데 끝나면 연습 맞추려 과에도 출근도장 찍은 놈이었어.”
몸집도 건장하고 근육질-여름 공연 연습 때 그가 셔츠와 반바지차림으로 나와 근육미를 보여 줄 때는 여자 동기들이 비명 지르는 연기를 리얼하게 해냈었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지만-인 성욱 선배가 어째서 현역이 아니고 보충역인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한 건지 모르겠지만 선배가 B형으로 감수성이 상당히 예민하다는 걸 같이 공연하면서 알았다. 높은 감수성으로 활달하다 갑자기 침울해져서 소심한 사람처럼 될 때가 있었지만 연극 때의 정열은 대단했다. 성욱 선배와 오랜 동기였던 한 선배가 이에 관해 이런 말을 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얘들이 갑자기 울적해지면 헤어나기 힘들 때 있잖아. 성욱이가 가끔 기분이 지나치게 울적해 져서 신경증성 우울증에 상당히 시달리나봐. 너무 소심해진다고 할까 가끔은 분노를 참는 듯한 심각한 표정도 나오고. 그 때문에 여러 번 카운슬링도 받은 것 같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닌 듯 요즘은 안 가더라. 신검에서 3급 현역이 아니라 4급 보충역으로 빠져서 공익이 된 것이 그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야.”
다른 선배도 끼어 들었다.
“그래도 성욱이 모태신앙 덕에 병원신세 안 진 거다. 그 녀석 연극 연습에 안 빠지면서도 미사 역시 꾸준히 갔잖아. 신앙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거야.”
“모태신앙이요?”
“어, 현아 몰랐구나. 현아도 성욱이랑 더 친해지고 싶으면 천주교 성당에 가봐. 성욱이 녀석 그래뵈도 성당의 신부님 아들이라나.벧엘 성당에서 가끔 요한이란 세례명으로 성욱이를 찾는 전화가 걸려오잖아.”
선배에게 신앙이 있었구나. 하지만 내가 성욱 선배를 좋아한다고 해서 선배의 신앙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나는 성당에 한번 가보자라는 성욱 선배의 제안을 매번 거절했었다. 하루는 연극 연습이 늦게 끝나 둘이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을 때 였다. 선배가 소심한 사람처럼 되어서 분장실 거울 앞에 있는 나를 보며 물었다.
“현아야, 정말 성당에 가 본 적 없어? 벧엘 성당에서 전에 너같은 애를 본 것 같은데...”
“선배, 대체 누구랑 나를 착각하는 거야. 난 태어나서 한 번도 성당에 가 본 적 없어.”
“그래. 미안... 머리도 틀린 걸.”
사실은 성당이나 수녀원 근처에는 가기 싫어서 안 갔다. 왜 그런지 내가 성당에 가면 수아같은 분위기를 낼까봐 싫었다. 그래서 성당가는 것만큼은 누구한테나 거절했었다.
“잠깐, 현아야. 너 정말 어울릴 것 같은데...이 머리 해봐. 여기서 이렇게 웨이브를 넣어서 올리고...”
갑자기 성욱 선배가 거울 옆의 분장용 스프레이를 들더니 내 긴 생머리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래, 이 머리 였어. 여기서 조금만...”
선배의 표정은 마치 석고를 조각하는 예술가의 그것과 같았다. 그 눈은 내가 아니라 초연한 완성품을 보는 듯 빛났다. 선배의 손의 감촉이 내 봇살과 머리옆선을 타는 게 싫지 않았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는 머리를 빼내 스프레이가 날아가도록 세게 흔들었다.
“싫어. 난 그런 촌스런 파마머리는 싫단 말이야.”
나는 그 길로 화장실로 가서 거울은 다시 한 번 본 후에 머리를 바로 감아 버렸다. 거울 속의 내가 파마머리 수아를 너무나 닮아있었기 때문에. 설마 성욱 선배가 성당에서 보았다던 여자가 수아...?
수아랑 비슷한 분위기가 되는 것이 싫어서 성당 근처에도 안 가고 수아의 파마머리만큼은 흉내낸 적 없었다. 하지만 선배가 성당 얘기를 꺼내면서 파마머리를 한 나같은 여자를 봤다며 혹 예전에 파마머리 아니였나고 묻고 나서부터 부쩍 의심이 들었다. 그런 의심가운데 1년 전 그 일이 터졌다. 학교 과제물에다가 ‘항우’ 공연까지 겹쳐서 지친 상태에서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바쁘게 가던 길. 물론 소심한 사람이 되어도 항상 형과 같은 시선으로 동생을 대하듯 사람들을 대하는 평화주의자인 성욱 선배가 함께 있어서 힘듬이 덜했다. 둘이서 함께 빠르게 캠퍼스를 가로지르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현아야, 이것...”
단번에 수아라는 것을 눈치채고 나는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다.
“학교에서 내가 연락하지 않은 한 아는 척 말라고 했잖아. 무슨 일이야?”
“교양과정부 곽교수님 점수에 빡빡하잖아. 이거 잃어버려도 괜찮겠어.”
그제야 가방이 허전하다는 걸 깨닫고 나는 뒤돌아봤다. 수아의 손에 이제까지 공들여 복사해놓은 자료가 들려있다.
“이런, 언제 빠진 거지?”
황급히 받아 넣는데 무척이나 놀라는 성욱 선배의 시선이 등뒤로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그때의 성욱 선배의 표정. 그건 나하고 똑같이 생긴 여자가 한 명 더 있다는 신기한 놀라움이라기보다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듯한 표정, 그러니까 반가움, 발견의 놀라움이었다.
“혹시 수...수산나...벧엘 성당에서...”
성욱 선배는 공연 때도 그렇게 떠듬거리는 연기를 잘 한 적이 없다. 파마머리 수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건 제 본명인데...당신 나 아는 사람?”
“저...요한입니다. 벧엘 성당의 본당 미사 때...성가대쪽에 있었죠.”
“아, 그때 본당 신부님 자제분..! 마리아 수녀님 대신 잠시 갔던 거였는데 그때 친절하게 안내해주셔서 감사했어요. 그 후론 벧엘 성당에 간 적이 없어서...”
“하하,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요. 수산나, 그 머리... 그대로네요.”
성욱 선배는 약간 신음하듯이 웃으며 반가운 표정이 된 파마머리 수아와 허를 찔린 표정을 내보이지 않으려는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진짜 쌍둥이였어. 하지만 현아는 전혀 그런 소릴 안 했는 걸.”
나는 왜 쌍둥이라는 걸 숨겼느냐고 성욱 선배가 따질까봐 선수를 치기로 했다.
“선배 잘못이잖아. 일부러 숨긴 것 아냐. 난 선배가 성당에서 봤다는 나 닮았다는 여자가 수산나. 아니, 수산나라고 하니까 정말 이상하네. 하여튼 난 수아인 줄 몰랐다구. 선배 설명으로는 수아라고 상상이 안 가던 걸,”
하지만 성욱 선배는 쌍둥이라는 걸 숨긴 것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쌍둥이를 비밀로 하고 싶은 거라면 걱정 마. 쌍둥이가 함께 있으면 사람들이 신기해하잖아. 얼굴도 닮았지만 쌍둥이만이 느끼는 텔레파시도 있고 서로를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보다듬을 수 있는 유일한 반쪽, 또 하나의 자신이라고 주위사람들은 말하지. 하지만 둘은 쌍둥이라고 주위에서 너무 연구하려고 드니까 짜증이 나는 거야. 쌍둥이라고 드러나지 않은 편이 그래서 좋을지도 몰라.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쌍둥이일수록.... 실은 서로에 대한 더 끈끈한 애착심을 보여. 드러내지 않은 만큼 둘만 있어서 외롭지 않으려고 서로 의존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눈에 그을음같은 노을이 번졌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선배가 가끔 소심한 사람이 될 때 나타나는 버릇으로, 항상 형이 동생을 대하는 표정인 상냥한 미소 -우리 동기들은 피스메이커(평화주의자)미소라고 불렸다.-뒤로 한 가닥 먹구름 자락처럼 노을이 번지는 일이 있었다. 선배들이 말하는 성욱 선배의 신경성 우울증의 전조일까, 눈가에 그런 노을이 지면 선배는 항상 슬픈 표정이 되었다. 그럴 때의 선배는 안쓰러워 달래주고 싶은데, 오늘의 성욱 선배는 찾는 여자가 앞에 있어서 인지 바로 말꼬리를 잡아 이었다.
“아, 수산나...속명은...수아 씨라고 했죠? 같은 학교죠? 우리 과는 아닌 것 같고...”
“진수아는 사범대 응용미술교육과이고 나하고 같은 01학번이야. 그러니까 말놔도 돼, 선배.”
내가 뾰로통해져서 말하자 선배는 예의 활달한 미소를 되찾았다.
“현아야, 삐지지 마. 내겐 챙겨야 할 동생이 하나 더 생긴 것 뿐이야.”
정말 그럴까? 동생은 둘일 수 있어도 연인은 하나뿐인데...내 예감대로 두 사람은 수산나,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서로를 부르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성욱 선배가 수아를 처음 만난 날이 1년 전 가을학기여서 수아의 스물 둘 생일을 챙겨주지 못했다고, 이번 스물 셋 생일은 벼르고 별렀는지 한 달 전부터 선배가 물었었다.
“내달 8월 11일면 현아 생일이구나. 현아의 생일은 곧 수산나의 생일. 쌍둥이는 생일이 같이 찾아와서 두 사람 분의 선물은 준비해야 해서 지갑이랑 바지주머니에 구멍이 나겠어. 현아 선물은 뭘 할지 몇 주 전부터 정했지만... 수산나는 뭘 가지고 싶니?”
“고마워, 요한 오빠. 하지만 그다지 필요한 것은....”
“그러지 말고 말해봐, 수산나. 현아 꺼보다 비싼 것 사줄 수는 없겠지만 알바를 두 배로 해서라도 꼭 선물할테니까.”
수산나. 수산나. 성욱 선배의 입에서 나오는 수아의 세례명은 정말 듣기가 싫다. 수아와 성욱 선배의 첫대면이 있고 나서 얼마 후부터 ‘항우’ 공연과 성당 미사가 셈셈이던 성욱 선배의 일정이 바뀌었다. 연습일정도 반으로 줄이고 성당 미사 쪽에 좀더 시간을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성욱 선배와 수아는 서로의 성당 미사를 핑계로 지난 1년 간 계속 오고 가며 만난 것이었다. 솔직히 나하고 과나 동아리에서 있는 시간보다 수아랑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듯 보였고, 간혹 셋이 만날 때도 나만 왕따인 것처럼 수산나, 요한 오빠 서로를 그렇게 불려서 짜증이 났다.
‘내 스물 셋 생일에 성욱 선배도 올 텐데 수아랑 같은 생일상에서 수산나, 요한 오빠하는 꼴을 또 보란 말인가. 그건 절대 안 돼지. 이모는 왜 쓸데없는 짓을 한 거야. 아무래도 저번 커플미팅에서의 수아의 본심을 알아보고 철저히 마크하고 공략해야겠어.’
수아에게 전부터 따질 일이 생각이 나서 난 이모의 생일 파티 말을 듣고 배스킨라벤스를 나온 직후에 수아의 사범대학건물 응용미술교육과로 찾아갔다. 여전히 촌스러운 파마머리에 안경을 올려놓은 채 화판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수아가 내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다 놀라 머리에 올려놓았던 안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어머, 현아야... 항상 전화로 하더니 오늘은 웬일로 여기까지 왔니? 요앞 자판기가 시원하나? 음료 뭐 마실래?”
수아가 빼다 준 음료수 캔 따개를 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경찰대학생 심정우 씨 너한테 뭐야?”
경찰대학생 심정우. 그는 며칠 전 커플미팅처럼 될 뻔한 자리에서 마주친 훤칠한 키의 남학생이었다. 오랜만에 성욱 선배와 수아랑 같이 셋이 만나는 자리에서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찰제복의 키 큰 남학생이 와서는 수아에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어여, 진수아. 오랜만이다.”
“누구...너..너 심정우?!”
놀라는 수아에게 윙크를 하고는 성욱 선배를 바라봤다.
“허성욱 선배님도 상당히 오랜만입니다....아, 진현아 씨도 있었네요.”
성욱 선배에게도 나에게도 아는 척을 하는 그를 조금 황당해하면서도 어디서 본 듯해서 기억을 더듬었는데 한 달 전 항우 대학연합 공연 때 공연을 끝마치고 나온 내 등을 힘껏 쳐놓고 사람을 잘못 봤다며 사과하던 남학생이 생각났다.
“다..당신...”
“아,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요. 수아인 줄 알았거든요. 수아에게 쌍둥이 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그새 까먹어 가지고... 수아가 웬일로 파마머리를 풀었나 하고 너무 반가워서 쳤던 건데 많이 아팠지요?”
“정우야, 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여기 왔어? 그리고 그 차림새는...?”
“나 경찰대학교 들어간 것 몰랐구나. 여전히 계속 강릉에 묶어있을 줄로 생각했니? 수아 네가 서울에 자취를 시작했을 때쯤에 이미 난 용인에 가 있었다구. 수녀원이 절은 아니지만 문 걸어 잠그고 공부하기는 안성맞춤이라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야.”
이 사람은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엄청 수다스러웠다. 여전히 기억을 못하는 성욱 선배 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지금은 경대 극예술연구회 ‘또아리’인이지만 한강고교 연극반에서의 3년은 제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답니다. 특히 대선배 성욱 형와의 만남은... 까마득한 후배라고 기억 못 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햐, 이거 섭섭함은 금할 길이 없는데 어떡하죠?”하고 한숨까지 내셨다.
“가만. 내가 막 졸업할 때 문밖에서 목을 내밀던 1학년꼬마 아니야. 6기였던가 이름이 심정우?”
“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4기 선배님. 성욱이 형은 그 당시 제게 우상이었다구요.”
“경찰대학생이 되다니 대단한데...용인에서 여기 상당히 멀지 않나?”
“이깟 거리는 문제가 안 됩니다. 우상인 선배가 한양대 ‘항우’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기뻤는데요. 수아까지 한양대에 다니고 있는 걸 알았을 때는 정말...”
“내가 알기론 경대는 기숙사생활이라고 하던데 맘대로 외출해도 되요?”
내가 그의 수다를 입막음하려고 물은 말인데 그는 한층 연극조로 답했다.
“그리움과 사랑의 날개로 특별외출을 명받았답니다. 여기 분위기 상당히 좋은데요. 이거 쌍쌍미팅해도 될 것 같아요. 자리도 딱 됐네. 내가 여기 앉으면 나는 수아랑 마주보고 성욱 선배는 현아 씨랑 마주보니 진짜 미팅일세.”
내가 거기까지 회상했을 때 수아도 캔 뚜껑을 따며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말이야? 정우는 강릉 수녀원에 있었을 때 함께 자란 소꿉친구라고 말했잖아.”
흥, 나는 그 당시 테디 베어랑 이모랑만 놀았었는데 너에겐 소꿉친구 따위가 있었다고.
“너 좋다고 동아리 일 핑계로 용인 기숙사를 빠져나와 서울 온 사람이잖아. 진수아 너 은근히 인기있는 건 알겠어. 하지만 양다리 걸칠 생각이면 당장에 그만둬!”
“현아야, 무슨...”
“요한 오빠, 요한 오빠하면서 잘도 성욱 선배에게 아양떨면서 정우 씨 앞에서 소꿉친구라고 다정하게 구는데 너 은근히 뒤로 호박씨까는 타입이었구나.”
“아냐, 오해야. 현아야. 정우는 내게 좋은 친구...”
“그만!”하고 난 마시고 있던 음료수 내용물이 파도타고 뚜겅 밖으로 나올 것처럼 탁자에 내려놓으며 수아의 말을 막았다. 더 이상 질질 끌어선 안 된다. 여기서 확실히 하는 것이다. 비열하더라도 사랑은 쟁취해야 한다.
“나 여기서 확실해 얘기할게! 진수아, 니가 10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건의 용서를 빌고 싶다면 내게 좋은 언니이고 싶다면 이번 기회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으면 해. 성욱 선배가 널 정말로 사랑하더라도 나 성욱 선배 포기할 수 없거든. 정말로 사랑하거든. 너처럼 성욱 선배의 보이는 향기에 취해 좋아하라는 여자들은 많았지만 선배에게 알게 모르게 드리워지는 우울증의 그림자까지 받아 줄 그런 여자는 아직 못 만난 듯 해. 하지만 난 자신 있어. 선배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거든.”
“현아야, 저기...난...”
수아는 무슨 말을 더 이으려고 했다. 입 속에서 오물거리는 말을 담아내지 못해 답답한 듯, 상기된 볼의 붉은 낯을 캔 속 분홍빛 물방울로 대치하려는 듯, 빠른 속도로 내용물을 마셔댔다. 그리고 스스로의 열기를 떨쳐내려는 듯 귓불과 파마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고 일어날게. 이번 생일은 선배와 보내도 괜찮아. 어차피 선배 너한테 줄 선물 샀을 테고 올해만큼은 봐줄게. 그 대신 확실히 정리해 줘.”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 나가려는데 수아가 깨물던 입술을 떼었다.
“잠깐만, 현아야. 요한 오빠...생일파티에 못 온다고 했어. 오빠 요즘 많이 힘든가봐. 벧엘 성당에서 요즘 2주에 걸쳐서 강간치사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했어.”
“뭐? 무슨 소리야? 연습 때는...”
“요한 오빠 피스메이커 성격이라 속으로 끙끙 앓았을 지도 몰라. 오빠 마음을 편하게 해줘. 현아야, 들어줄 수 있지? 다른 것은 안 바랄게.”
수아가 갑자기 내 손을 꼭 잡았기 때문에 놀라 몸이 뒤로 꼿꼿해질 때 똑똑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곧 문이 열리고 현관에 나타난 사람은 심정우 씨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손도 떨어졌다.
“아직 안에 있을 줄 알았어, 수아. 어, 현아 씨도 있었네.”
“저기..실례했습니다. 말씀들 나누세요.”하고 인사하고 바로 나왔다. 수아 표정으로는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데, 성욱 선배의 오늘까지의 표정으로는 그런 걸 상상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우 씨랑도 저렇게 계속 만나는 건가? 앙큼한 계집애. 성욱 선배 걱정은 지가 다 하는 것처럼 굴면서 정우 씨랑 따로 만나...
수아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날 연습부터 나는 성욱 선배를 주시해서 보았지만 선배는 별다른 게 없었다. 평소의 연극에 임하는 정열적인 허성욱 선배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물어볼 것은 물어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연습 끝나고 함께 뒤쳐질 때 살짝 물었다.
“저...선배. 수아에게 들었는 데 선배네 성당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면서?”
내 말에 선배 눈에 순간적으로 노을이 번진 것 같았지만 표정이 금세 부드러워졌다.
“으응, 수사하고 있어서 미사가 연기됐었어. 여긴 성당 사람들도 아닌데 신경쓰이게 하기 그래서 말 안 했는데...안 좋은 소문은 빨리 퍼지는 건가...”
“빨리 범인 잡혀서 해결됐으면 좋겠다...저, 수아가 안 가는 날에 나도 그 벧엘 성당에 가보고 싶은데...”
선배의 표정에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이 보였다. 그동안 내내 안 가다가 간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보였나? 하지만 수아에게도 이제 선배에게서 떨어지라고 했으니 내가 선배 신앙 생활 속 수아의 빈자리를 메꾸어줘야할 것 같아 한 말이었는데 선배는 갑자기 기겁을 했다.
“안 돼, 현아야!....내 말은 당분간은 위험하니까...하여튼 내 성당일 때문에 항우의 행사에 차질이 생기게 할 수 없어. 내일부터 정식절차로 경대 극예술연구회 또아리에서 참관한다고 하는데 우울해질 수 없잖아. 그 얘기는 다음에 하자.”
내 스물 세 살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정우 씨외 경대 또아리인들 세 명이 하루 일정으로 우리 항우를 참관했다. 그런데 정우 씨를 보는 선배의 표정이 평상시와 다르게 냉소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 쉬는 타임에 멤버들을 위해 잠시 음료수를 뽑으려 갔던 사이, 모퉁이쪽 기구실 앞이 웅성웅성해서 불안한 마음에 뛰어갔다. 정우 씨를 뺀 또아리인들과 우리 항우인 두 세 명이 닫혀진 기구실 문 앞에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고 누가 들어있느냐고 물으니 성욱 선배와 정우 씨가 들어갔다고 했다. 들어가기 전에는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사이의 다정함을 풍기는 대화를 했는데, 들어가고 나서 몇 분 안되어 이렇게 물건 부서지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항우까지 들려서 모두 쫓아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안으로 문이 잠겨서 이렇게 맥없이 서 있다고.
“열쇠 찾아봤어?”
“열쇠는 기구실 안에 있을 거라는 데요.”
“젠장, 비상키 따로 놔둔 것도 없는 거야?”
엄청나게 싸우는 소리가 안에서 들리는 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문을 두드리며 두 사람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는 데, 닫혀서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이 안에서 열렸다. 나온 건 성욱 선배다. 얼굴이나 옷에 상처 난 부분은 없는 듯해서 다행이었지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엄청 화난 표정으로 쌩하고 내 옆을 지나가 버렸다. 선배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안에 정우 씨가 벽에 기대어 엉덩방아를 찧고 있어서 가서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이에요, 정우 씨? 저렇게 화난 모습의 선배는 처음 봤어요. 대체 무슨 일로...”
끄윽하고 고개를 세운 정우 씨는 눈의 초점을 바로 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조심해야 해요, 현아 씨.”
“네?”
내 얼굴을 확인한 정우 씨는 아주 내가 애처로워보인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아가 아무 말도 안 한 모양이지요.”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 하자 지금은 말할 단계가 아니지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카드형태의 명암 한 장을 주고 가버렸다. 앞장은 학생증과 비슷했고 뒷장은 국립경찰대학교 부속건물인 치안연구소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 범죄 대책 연구실이라고 인쇄된 위로 핸드폰 번호가 적힌 스카치테이프가 얹져 있었다.
정우 씨와 성욱 선배는 그렇게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경대 사람들 말로는 정우 씨는 학교에서 지시한 특수한 일을 하려 갔다는데 성욱 선배는 전화해도 안 받고 연락이 없었다. 그 날의 일정은 그때부터 어떻게 진행시켰는지 두루뭉실하게 끝내고 배스킨라빈스에 점원 일을 하려 왔다. 하지만 장사할 기분이 아니었다. 온통 성욱 선배와 정우 씨의 주먹다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원래 폭력성향을 타고나는 B형이라지만 결코 폭력적이진 않았던 성욱 선배였다. 성욱 선배가 무슨 일로 정우 씨를 때렸을까? 불안한 마음에 나는 내 나름대로 상상을 했다. 혹시 수아의 일 때문에?! 여자들이 아무리 좋아해도 남자쪽에서 좋아해야 이루어진다던데...내가 아무리 수아와 성욱 선배 사이를 갈라놔도 선배가 원하면 커플이 이루어지는 걸까? 정우 씨에게 수아에게서 떨어지라고 그런 것일까? 아이스크림을 달라는 손님들의 소리에 건성으로 들으며 아이스크림을 푸다가 금액보다 좀더 많은 용량으로 아이스크림을 넣어주기도 해서 이모에게 혼이 났다.
“진현아, 수아에게서도 연락이 와서 생일상 같이 안 차리기로 했는데 웬 또 심술이야.”
“이모는 모르면 가만히 있어? 나 오늘은 일 못하겠어. 들어갈게.”하고 들어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 정보에 뜨는 건 기다리고 기다리던 허성욱 선배.
“선배? 선배! 어디예요?”
“후우, 현아야. 내가 오늘 잘못을 저질러서 고해성사를 하려 성당에 왔는데...생각해보니 성사해주실 신부님이 안 계시는 걸 깜빡했어. 집에 연락하기는 싫고..수산나는 바쁜 것 같고...현아 니가 와줄래.”
“어디야? 벧엘 성당이야?”
성욱 선배에게서 노선을 확인하고 벧엘 성당에 쫓아갔다. 평상시의 소심한 선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거기에 죄책감과 신경성 우울증이 겹치면...버스를 탔을 때 해거름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벧엘 성당의 글자를 확인하고 문으로 들어가려니까 너무나 어두웠다. 가로등이 커진 현관은 괜찮았지만 안은 정말 칠흙이었다. 꺼진 전등의 스위치는 어디 붙어 있을까? 손에 잡히는 벽을 더듬으며 한 발짝 씩 안으로 들어갔다. 성욱 선배 정말 여기 와 있는 걸까? 눈이 어둠에 조금씩 익숙해질 때 내 발자국 소리에도 자꾸만 움츠려들던 내 귀를 때린 것은 정적 속 피아노 건반소리였다. 안쪽 전등이 켜지며 피아노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있던 성욱 선배가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봤다. 선배의 고개가 들려질 때 또 하나의 건반이 소리를 냈다.
“현아...?”
잠결에 웅얼거리는 목소리. 난 선배에게 바로 뛰어갔다.
“선배,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이런 곳에서 자면 감기 걸려요.”
“정말 현아네. 하지만 어떻게 왔어?”
“선배가 고해성사한다고 나보고 와달라고 했잖아. 기억 안나?”
“내가 고해성사를....그래, 정말 잘못을 많이 했지? 동생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했잖아.”
몽롱해 보이는 선배의 두 눈에 역시나 노을이 번졌다. 하지만 이번 노을은 먹구름에 약간 핏빛을 동반했다.
“난 정말 좋은 형이 되고 싶었는데...그 애는 너무 강렬해서 말이야. 흐음, 현아에게 있어서 수산나처럼 좋은 형이 되어주지 못해서...”
“동생이라니..좋은 형이 되어주지 못했다라니...설마 선배...”
“그래, 내겐 형제가 있어. 수아나 현아처럼... 드러나지 않았지만 언제나 늘 함께였는데...그런데...”
성욱 선배에게서 형제가 있다니...그런 소리는 못 들었다. 벧엘성당 본당 신부님의 외아들이라고 들었고 항우에서의 임원명부에서도 선배에게는 형제가 분명히 없었다. 신경증성 우울증이 격정적 우울병으로 심해져서 있지도 않은 동생을 만들고 죄책감을 키우는 것일까? 언제부터 선배의 우울증이 중증이 되었지. 나는 어쨋든 성욱 선배를 나가게 하기 위해 부드럽게 안아주고 토닥거리는 말을 했다..
“그 동생한테 가자, 선배. 내가 옆에 있어 줄게. 형을 슬프게 하는 짓 하지 말라고 내가 말해줄게.”
선배가 아이처럼 내게 안겨왔다.
“정말 우리 옆에 있어 줄거야? 버리지 않을 거야?”
“괜찮아, 선배. 버릴 리가 없잖아.”
선배의 말투는 점점 어린 아이처럼 되어갔다.
“정말 떼어놓지 않을 거지?...현아는 상냥하니까...하지만 상냥했던 간호사 누나는 우릴 떼어났는 걸. 어른들은 언제나 그렇게 거짓말쟁이야?”
선배가 어느새 내 품에서 얼굴을 들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자기 분에 못 이겨 우는 아이처럼 쇠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빠도 엄마도 성당의 할아버지도 우리가 언제나 함께 있어도 된다고 말로는 그랬어! 우리 모습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고 했지만. 난 다 알고 있었다구! 괴물이라고 성당에 들여놓지도 않았는 걸. 친척들이 뒤에서 속닥거리는 것도 다 들었다고, 으아앙, 모두 다 미워.”
마치 진짜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눈가에 눈물 방울을 가득 고이며 고함치는 선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런데 엄청나게 공포스러운 환영을 본 건지 선배의 두 눈의 동공이 커지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 가슴을 양손으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너도 그런 거지? 지금 우리 떼어놓으려는 거잖아. 안 돼, 그러지 마. 난 죽기 싫단 말야. 이 녀석과 떨어지면 난 죽어.”
내가 선배의 어깨를 다시 잡으려 하자 성욱 선배는 필사적으로 무릎을 세우고 허벅지와 가슴을 밀착시키고 팔짱을 끼듯 온몸을 감싸쥐고는 벌벌 떨었다.
“싫어...더 이상 다가오지마. 우릴 가만히 내버려두란 말이야!”
이때의 성욱 선배의 목소리와 행동은 진짜 세 네 살 먹은 꼬마의 그것이었다. 나는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피를 못 잡아 가만있었는데 어느새 한참 떨던 선배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은 말랐는데 표정은 시무룩했다.
“선배, 이제 괜찮은 거야?”하고 다가서려니까 작은 호랑이같은 눈빛이 되어서는 몸을 날려 날 넘어트리고 위에 올라타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우릴 갈라놓게 내버려둘 줄 알아! 죽여버릴거야!”
“서...선배.”
힘들게 손을 끌어서 선배의 손을 잡았지만 선배의 손 힘은 장난이 아니었다. 숨은 막혀오고 선배의 눈물방울로 핏빛 노을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선배의 눈에 증오가 가득 보였다. 하지만 난 상냥했던 선배의 눈을 기억하며 눈으로 애원했다. 숨막힘 속에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선배...제발...정말 날 죽일...거야?”
순간 선배의 동공이 확대됐다. 목을 누르던 힘이 사라지고 선배의 손가락이 내 턱과 눈물이 떨어진 볼과 입술선을 가만히 따라갔다. 그리고 열어지는 선배의 입술. 새어나온 건 분명 성욱 선배 본래의 음성이었다.
“수..수산나?!...”
성욱 선배는 손을 떼고 멍하니 내 몸에서 내려와 뒤로 주저앉은 채 자신의 두 손가락이 자신한테 붙어있지 않은 물건인 것처럼 움직여보며 떨었다.
“내가 어째서...어째서 수산나를...”
난 겨우 숨을 토해내고 기침을 하면서 몸을 추슬렀다. 내 몸보다 선배가 걱정이었다. 원래의 성욱 선배로 돌아온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선배...대체 선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물어보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아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욱 선배는 그제야 나를 쳐다봤고 이내 남자의 건장한 어깨로 나를 안아줬다.
“미안, 수산나. 내가 잠깐 어떻게 됐었나봐. 수산나 나 지금 외롭고 무서워. 그러니까 다른 데 가지말고 오늘은 함께 있자.”
선배의 입김이 내 목에 와 닿았다. 어째서 성욱 선배의 눈엔 내 생머리가 안 보이는 걸까? 어째서 수아로 착각하는 걸까? 그런 와중에 선배의 입술이 내 턱선을 따라 입술로 가까워졌다. 선배의 손이 내 목과 허리와 어깨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를 수아로 착각해서 안는 것은 싫다. 설마 수아랑 선배가 이미 몸을 합했다해도....생각할 겨를 없이 성욱 선배의 불같은 손길과 입술이 내 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웁...싫어. 선배..나..나 현아라구요. 수아가 아냐!”
나는 있는 힘껏 선배를 밀쳐냈다. 밀려난 성욱 선배의 표정이 상당히 경직되었다고 느꼈는데 선배가 뒷주머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멕가이버나이프를 끄집어내서 깜짝 놀랬다. 낮에 정우 씨를 쓰러뜨리고 나갈 때의 표정으로 어느 순간 변해 있었다.
“싫다고. 하지만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수산나가 아니어도 좋아. 고귀한 백합 성녀께서 이 밤중에 여길 납셔주실 리가 없지. 성욱이라면 수산나만 원할지 모르지만 그 성녀의 동생만으로도 난 충분해. 어차피 쌍둥이는 한 몸이니까 말이야. 하나의 개체로 성장해야 하는데 둘로 나뉘어 졌을 뿐. 성욱이와 나처럼 나뉘어졌어도 욕망은 하나란 말이야.”
“선배...무슨...”
아까의 아이 버전도 이상했지만 이번의 흉악 버전엔 두려움마저 몰려왔다. 난 무서움을 느껴서 주춤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성욱 선배가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세워 바싹 다가와서는 내 목에 칼을 들이댔다.
“가만있어. 가만있으면 다치게 하지 않아. 성당안에서 갖는 유희는 내겐 정말 즐거운데 자매란 것들은 너무 성녀인 척 해서 성녀의 세례명을 가지고 있으면 모두다 자기가 그 성녀가 되는 줄 알아. 웃기지 않아. 성녀처럼 순결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지도 못하는 것들이...난 아버지의 권한으로 순교 당했었지만 성 요한...그래, 요한 형이 나를 살려둔 줄은 몰랐을 거야.”
“요..요한 형?”
“그래, 요한. 나의 반쪽. 나의 사랑스런 성욱이. 우린 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두 쪽 중 한 쪽은 순교해야지 살아갈 수 있다고 의사가 말했어. 아버지는 요한을 선택하고 나를 버렸지만 나는 죽지 않았어. 비록 육체는 없어졌지만 정신은 이렇게 있는 걸. 성욱이와 같이 생각했고 같이 자라왔다. 하지만 난 내 육체를 가지고 뭔가를 해보고 싶었어. 요한은 형답게 내게 양보하려고 했는데-후훗, 요한은 자기 때문에 내가 육체를 잃어버렸다고 자책하고 있어. 그것이 내가 요한에게 머물 수 있는 이유거든- 하지만 이 나약한 것이 어느 순간에 빌어먹을 꼬마 녀석에게까지 육체를 내준거야. 미쳐.”
마치 자기가 다른 사람처럼 자기 이름을 제삼자의 이름처럼 말하는 성욱 선배. 확실히 지금까지와는 너무나 틀려 보인다. 정말로 다른 사람같은...마치 지금까지의 선배가 보인 모습이 각자 서로 다른 인격체인 것처럼.
“하지만 지금 성욱이와 내 마음은 하나로 통합하고 있어. 진현아, 널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약 싫다면 여기 성당자매님들처럼 천사가 돼봐.”
성욱 선배는 많이 해본 익숙한 솜씨로 단 몇 초 만에 나이프를 휘둘려 내 셔츠의 단추를 몽땅 뜯어내 버렸다. 너무 놀래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을 때 성당 문이 완전히 열리며 사람이 들어왔다.
“그만해두시죠, 성욱 선배! 설마 당신이 아끼는 사람까지 죽여서 정말 살인마로 낙인찍히고 싶나요?”
정우 씨였다. 총을 든 정우 씨 뒤로 수아도 보였다. 수아가 뛰어들어오며 외쳤다.
“그래요. 요한 오빠! 오빠는 요한 오빠가 맞잖아요. 요한 오빠가 아니라니 그런 건 싫어.”
“오, 이런 수산나. 동생에게 요한을 뺏길까봐 질투가 나서 왔나? 난 형제끼리 싸우는 꼴이 보기 좋아. 특히 쌍둥이끼리 말이야. 심정우, 불청객인 너만 없다면 지금 이 성당 안도 꽤나 천국일텐데, 안 그래?”
“정말 성범 선배가 확실하군요. 하지만 난 성욱 선배에게 감사한걸요.”
수아에게 떨어져있으라고 하고 총을 든 체 가까이 오는 정우 씨와 대치하여 성욱 선배는 나를 인질로 삼았다. 허리를 안아 내 양손을 결박하고 여전히 내 목에 멕가이버 나이프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러나 정우 씨는 상당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범 선배에게 완벽하게 먹히지는 않은 것 같거든요. 그리고 가끔 만나는 범욱이는 어린 아이라서 그런지 잘 달래주고 과자 사주면 근방 마음이 풀어졌어요. 물론 제대로 사랑도 못 받은 자아라 언제 어떤 식으로 분노가 폭발할지 몰라 위험하긴 했지만...성욱 선배의 마음의 일부분이니까...그런 슬픈 자아를 치유하기 위해 성욱 선배는 스스로 자신과 함께 자란 반쪽이라는 성범 선배를 만든 거겠죠. 그리고 성욱선배로서는 달성하지 못한 분노가 느껴질 때는 그 자아에게 모든 것을 전임한다는...하지만 그래서는 성욱 선배는 자유로울 수 없어요. 성범이라는 이름으로 분노를 폭발시켜도 성욱 선배로 돌아오면 괴롭잖아요. 형노릇도 제대로 못하면서 주위 사람에게 피해만 주는 자기 모습에 더 오열하잖아요. 성욱 선배, 이제 성범 선배랑 범욱이를 놔주세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 몸의 주인은 나야. 성욱이는 늘 잠잤고 내게 양보했다고. 그리고 범욱인가 그 어린 녀석한테 내가 질 것 같아?”
성범 선배..성욱 선배..범욱이? 슬픈 자아...라고?
나는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지만 정우 씨의 말로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유추하려고 애를 썼다. 정우 씨는 침착하게 목소리를 높여서 다가왔다.
“성욱 선배, 잘 들어요. 아무리 분열된 자아라도 특정 자아가 몸 전체를 다 지배할 수는 없답니다. 스스로가 원한 망각으로 분열되어 뇌의 기억 속에 갇힌 각 자아는 각성될 때를 찾아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들지요. 그때가 일정하지 않고 즉흥적이라서 힘들지만...자, 선배 안의 자아들간의 고된 싸움은 끝이 났어요. 선배의 자아를 분열시키게 만든 장본인인 당신 아버지, 허윤구 신부에게 소환영장이 방금 떨어졌거든요. 샴쌍둥이였던 아들이 분리수술 후에 다중 인격 장애를 보였는데도 단지 신검 때 4급으로 둔갑시켜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게 하고, 우울증 상담 클리닉만 다니게 해서 지금까지 방치한 결과 그 중 한 자아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한 죄를 물을 겁니다. 의사의 증언 자료도 확실히 가지고 있어요. 시간이 좀 걸렸지만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성욱 선배가 가장 괴롭다는 거 알아요. 이제 돌아와요.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원래의 성욱 선배 당신이니까요.”
“집어 치워.”
선배가 내 허리와 팔을 꺾어 옆으로 쓰러뜨리고 정우 씨에게 칼을 들이대며 달려들었다. 정우 씨가 그 바람에 총을 놓치고 두 사람은 함께 성당 바닥을 뒹굴었다. 놓친 총은 수아옆으로 떨어졌지만 수아는 주울 생각도 못하고 바라보다가 나를 눈치채고 내 옆으로 와서 일으켜 세웠다.
“괜찮니, 현아야!”
“성욱 선배가...다중 인격 장애?”
나는 수아 손에 이끌려 일어나며 정우 씨의 대사중 다중 인격 장애라는 말을 그대로 대뇌였다. 수아는 10년 전 병원에서 내게 테디 베어를 뺏겼던 표정이 되어 내 손을 놓고 말했다.
“응, 나도 믿을 수 없지만...해리성정체장애라고 지금 요한 오빠의 정신은 세 개의 자아로 분열되어 있대. 지금 가장 뚜렷한 자아가 우리가 아는 성욱 선배, 그리고 성욱 선배가 분리 수술할 때 자신의 쌍둥이 반쪽이 자기 몸 안에 함께 살고 있다고 믿어서 만들어진 성범이라는 인격. 성욱 선배가 삼쌍둥이였을 때 분리수술 직전 자아인 범욱이라는 어린아이 인격도 있지만 그는 아주 가끔 나타나나봐.”
난 풀린 셔츠의 떨어진 단춧구멍을 매만져 올리다가 아연실색했다.
“그럼 이 성당에서 2주간 일어났던 강간치사살인사건의 범인이... 서...성욱 선배라고?”
그 말을 긍정하듯이 내 옆에 앉아 고개를 숙여 떨고 있는 수아의 대각선으로 정우 씨의 몸을 탄 성욱 선배가 멕가이버나이프로 정우 씨의 눈을 찌르려는 자세로 노려보았다.
“네 녀석을 그때 죽였어야 했어.”
“선배는 못 할걸요. 성욱 선배는 아끼는 후배에게 절대로 못하죠. 사실 제가 수아보다 당신을 먼저 봤습니다. 강릉 수녀원의 느티나무에서...기억해봐요.”
"치, 왜 자꾸 날 괴롭히는 거야."하고 선배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고 선배의 손에서 나이프를 뺏으려고 했다. 두 사람의 위치가 서로의 손목을 잡으며 변경되었지만 선배의 눈빛에 다시 힘이 들어가며 발로 정우 씨의 복부를 차서 그를 벽쪽으로 밀쳐내고 다시 칼로 찌르려 했다. 신음소리를 내던 정우 씨가 벽쪽에서 몸을 돌려 나이프를 회피했다. 우리 여자들이 보기에 두 남자의 싸움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현아야. 정우가 말하길 요한 오빠를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빠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했어.“
그러면서 수아는 냉큼 일어서 자신의 조끼를 벗어서 내게 입히고 단추를 차곡차곡 잠갔다.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수아?”
수아는 이제까지 항상 내 앞에서 어눌한 듯 보였고 민첩하지 못하고 사람이 약지 못하고 맹해서 바보같았다. 하지만 내게 자신의 조끼를 입히는 지금의 그녀의 얼굴은 뭔가 비장한 각오를 한 것처럼 하얗게 서늘했다. 비유하자면 희멀건한 하얀 색이 아니라 얼음장같은 서리라고 할까?
“...우리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비극을 껴않고 태어났다해도 언제까지 비극안에서만 살 수는 없어. 난 그 비극을 떨쳐내고 싶다고.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 수 없어. 너도, 요한 오빠도...정우도...비극의 수채화 속의 주인공은 나 혼자로 충분하니까”
수아는 밭은 걸음으로 일어나 떨어진 총을 집어 들더니 여전히 뒹굴고 있는 남자들을 향해 총구를 휘둘렸다. 위협만 할 줄 알았던 그때 진짜로 총알이 빠져나갔다. 성욱 선배와 정우 씨가 엉겨붙은 정중앙을!
내가 “안돼”하고 소리치고 수아를 뒤에서 껴안을 때 두 남자도 다행히 서로에게 떨어져서 총알을 피했다.
“수아야, 어째서...”
“이거 놔. 동생이면 동생답게 한 번이라도 언니 말을 제대로 들어봐!”하고 나를 떨쳐냈다. 정우 씨가 놀라서 다그쳤다.
“진수아, 너 미쳤어?”
“아니, 난 미친 게 아니야. 아니,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어.”
나이프를 자기 가슴 쪽으로 가져오며 몸의 균형을 맞춰 흔들거리며 일어서는 성욱 선배를 노려봤다.
“요한 오빠처럼 이 수산나도 미쳐볼까요? 그럴까요? 하지만 미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지금 내 처지가 요한 오빠보다 훨씬 더 비참하니까 괜찮아. 우린 비슷해요, 오빠. 세례명을 주고받아서가 아니라 인정받지 못한 쌍둥이라는 게 비슷해.”
“진수아, 너답지 않잖아, 그만둬.”
정우 씨가 다가오려 하자 다시 총을 올려 벽을 향해 두 방을 쏘고 정우 씨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관계없는 사람은 빠져. 정우 너도 현아도!”하며 나를 정우 씨쪽으로 밀쳤다.
“이건 우리 쌍둥이 맏이들의 문제니까. 어서 나가라니까. 요한 오빠. 오빠도 나만 있으면 되잖아, 안 그래?”
“수산나, 너하고는 반드시 한 번 해보고 싶었어.”
“내 몸은 줄 수 있어, 오빠. 하지만 요한 오빠 한 가지만 알아둬. 오빠의 죄책감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나보다 덜할 걸. 오빠네는 몸 이 붙은 샴쌍둥이었고 분리해내지 않으면 둘 다 죽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분리하다 한쪽이 희생된 거였어. 요한 오빠 잘못이 결코 아니라고. 하지만 내 경우는 달라. 내가 그날 성당에 두고 온 테디 베어를 다시 가지려 가자는 말만 안 했어도 중앙선을 침범하던 트럭과 마주칠 일이 없었어. 그런데 내가 테디 베어를 가지려 가자고 해서 인형을 가지고 다시 대관령 고개를 넘을 때 사고가 일어났어. 엄마, 아빠도...여덟 살 생일선물로 받은 테디 베어까지도 계곡으로 떨어져 버린 거야. 흐윽, 내 잘못이었어! 현아가 아무리 나에게 못되게 굴어도 난 그 애에게 할 말이 없는 걸. 요한 오빠에게서 떨어지라면 떨어질 수밖에 없고...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오빠의 행복이었는데...”
테디 베어?...! 엄마는 나한테 뿐만이 아니고 수아에게도 테디 베어를 선물하셨었나 보다. 그래서 10년 전 병원에서 내 테디 베어를 보고 "테디 안 아프데? 불에 많이 그을렸었는데..." 했구나.
수아는 더욱 흥분했다.
“그런 어리광 같은 죄책감 때문에 바보같이 자아 따위를 분리시키지 말란 말이야. 요한 오빠 그렇게 바보였어? 내가 사랑하는 요한 오빠는 결코....”
결국 눈물을 떨어뜨리며 주저앉았다.
“요한 오빠로 돌아와. 더 이상은 싫어. 볼 수 가 없다고. 오빠 때문에 현아까지도 불행해져. 불쌍한...불쌍한 내 동생을 더 이상 불쌍하게 만들지 마. 그리고 오빠도...”
나도 눈물이 나왔다. 수아가 그동안 겪었을 죄책감. 그녀의 아픔을...이제 수아를 언니로서 용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때 다급한 정우 씨의 목소리가 울렸다.
“젠장, 성범이 형 앞에서 방심하면 안 돼!”
“그럼 모두 다 죽어. 친한 척 하는 것들은 싫어.”
“안 돼, 선배! 언니!”
늑대같은 포즈로 달려드는 성욱 선배의 칼 끝이 고개를 든 수아의 어깨에 닿으려 할 때 나도 모르게 두 사람 사이로 뛰어가 수아를 껴안았다. 수아가 그 파동으로 나를 안고 균형을 잃어 상반신을 눕힐 때 선배의 칼이 내 어깨와 수아의 어깨를 그슬려 성당 바닥에 챙하고 떨어졌다. 그런데 덜컹거리는 내 심장소리를 비웃듯이 내 귓가에서 땅 하고 총소리가 들렸다. 내 몸에서 벗어난 수아의 한 손이 어느 결에 방아쇠를 당겨서 선배의 윗가슴을 관통한 것이었다.
“어..어째서 너네들 친한 거야? 서로...미워하던 것 아니었나..어째서...”
성욱 선배는 그렇게 옆으로 쓰러졌다.
“서..선배!”
“요..요한 오빠!”
우리가 다시 흔들자 선배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수..수산나...다행이다...다치지 않았...”
정우 씨가 옆에서 “하필 다친 후에 제정신으로 돌아오나요, 성욱 형.”하며 혀를 찰 때 사이렌 소리가 성당 밖에 가까워졌다.
“수아 너 그랬다고 쏠 필요는 없었잖아. 정당방위였대도...”
수아는 정우 씨의 말에 대답 없이 자기 치마를 푹 찢어서 성욱 선배의 가슴에 떨리는 손으로 지혈했다.
“우리 요한 오빠 숨쉬는 게 가파르지만 숨쉬는 것 맞지?”
“걱정마. 우리 치안연구소팀과 병원차가 곧 이리로 올 거야. 우선 선배 좀 내 등에 업어 줘, 현아 씨도 어서.”
이번에 수아는 성욱 선배의 몸을 일으키려는 내 손을 붙잡았다.
“현아야, 너도 다친 데 없어.”
“수아, 너야말로 정신차려. 언제부터 언니 노릇했다고 자꾸 신경 써. 내 일은 알아서 해. 어서 선배나 업히자.”
우리가 성욱 선배를 정우 씨 등에 업힐 때 문이 열리며 경찰제복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정수사관님, 너무 늦었잖아요.”
“어, 정우야. GPS엔 오차가 있잖니? 성당이 이렇게 몰려있을 줄은 몰랐어. 그래도 허윤구 신부은 확실히 소환했다. 음, 아가씨들은 무사해요?”
정수사관이 "이런, 여기도 쌍둥이 잔치로군."이라는 뒷말을 남길 때 수아가 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경..경찰관 오빠. 요한...오빠. 우리 요한 오빠도 잘 좀 부탁해요. 정신질환 중에 행한 범죄는 정상참작...”
하지만 말하는 중에 수아가 힘을 잃고 쓰러져 버려서 나랑 정우 씨, 그 경찰관까지 놀랐다. 911차에 성욱 선배와 수아를 싣자 정우 씨가 내게 택시비를 내주며 말했다.
“이제 들어가요. 힘들었죠. 수아와 성욱 선배 상태는 내가 연락해줄게. 참, 이제 내 학생증 줘요. 지금 현아 씨에게 필요 없으니까.”
나는 내 바지 주머니에 삐져 나온 그의 카드를 내주자 땀을 닦으며 웃었다.
“사실 이게 GPS였어.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려준 것은 역시 수아였어요. 이쪽지역 근처에 현아가 성욱이 형과 같이 있다면 분명 벧엘 성당에 있을 거라구.”
배스킨라빈스로 돌아오자 이모가 성화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늦었어. 핸드폰으로 전화해도 안 받고. 오늘 새벽부터 문닫고 너 생일파티 준비하려고 했더니, 원.”
옷을 갈아입는 내방까지 쫓아 들어온 이모다. 의자에 앉으며 담담히 말했다.
“이모, 생일파티 여기서 해도 나 못 먹을지도 몰라. 나 수아랑 병원에 가야 할지도 모르거든.”
“응?”
거울 속에 있는 내 얼굴에 한번 웃어주고는 돌아서 의아해하는 이모에게 정확히 말했다.
“이모, 나 스물 세 번째 생일은 수아랑 같이 보내고 싶어 졌어.”
<끝>
첫댓글 이야기가 재미있네요. 읽는 사람에게 꼬리를 무는 궁금증을 부릅니다. 그리고 아픈 기억을 가진 쌍둥이 자매 애기는 루다님 만나서 물어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