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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본문 : 이사야 43:14-21
2018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여러분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습니까, 아니면 또 다른 한해의 반복으로 여기고 무덤덤했습니까? 전도서 1:9-1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 말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습니까? 분명히 우리 앞에 펼쳐진 2018년은 2017년과 다른 새로운 한 해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해 보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한 해의 시작을 무덤덤하게 보내게 되는 것일까요?
새해가 되면 방송에서 서커스 방송을 보여주곤 합니다. 방송을 보던 중, 작은 조련사의 지시에 따르는 거대한 코끼리를 보면서 ‘저렇게 큰 코끼리를 어떻게 훈련시켰을까?’라는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더욱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은 코끼리를 구속하고 있는 발목 쇠사슬의 두께였습니다. 성인 남성의 손가락 하나 정도의 두께로 엮인 쇠사슬은 코끼리가 약간의 힘을 주변 끊을 수 있을 텐데 왜 저렇게 순종적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시아 코끼리의 경우, 몸길이는 550~640cm. 어깨높이 250~300cm. 꼬리길이 120~150cm. 몸무게 2720~5400kg에 달한다고 합니다. 평소 걷는 속도는 시속 4~6km이지만 위험을 느끼거나 공격할 때에는 시속 40km 정도로 달릴 수 있습니다. 제가 물리학을 잘 모르지만 5400kg에 달하는 몸이 위급할 경우 달릴 수 있는 속도인 시속 40km의 속력으로 쇠사슬을 당긴다면 고무줄 끊어지듯 쉽게 끊길 것입니다. 그럼에도 코끼리는 자신에게 너무 약한 쇠사슬을 끊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련사들은 이 큰 코끼리를 어릴 때부터 같은 종류의 쇠사슬에 묶어 둔다고 합니다. 어른 코끼리가 쉽게 끊을 수 있는 쇠사슬은 어린 코끼리가 끊기에는 벅찬 굵기입니다. 어린 코끼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놀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쇠사슬에 메여 갈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어린 코끼리가 더 멀리 가려고 시도를 하지만 쇠사슬 때문에 멀리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쇠사슬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학습하게 됩니다. 결국 코끼리는 거대하게 성장해도 어릴 때부터 쇠사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학습했기에 쇠사슬을 끊어버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심리현상을 심리학적 용어로 학습된 무기력증이라고 합니다. 학습된 무기력증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연속해서 진급에 누락되거나, 시험에 낙방하고, 노력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 사람들은 ‘난 안되나 봐!’라며 자포자기해 버리고 더 이상 무언가를 시도하지 않으려는 현상이 그것입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사람이 해 아래에서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하지만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계속해서 만났고 그로 인해 실패를 반복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새로워질 수 없다는 탄식의 표현입니다.
2018년 새해 시작의 자리에 있는 우리가 새로운 한 해에 대한 감격과 기대감 보다 또 다른 1년의 반복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은 생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학습된 무기력증의 아닐까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이사야40장 이후의 배경은 유대민족이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시대에 써진 글입니다. 역사 속에서 유대민족의 포로생활은 약 70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70년 동안 유대인의 영토는 바벨론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었습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왕궁과 궁전은 물론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성전도 무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될 때, 성전의 기물과 성전을 장식한 금이 발가벗겨져 전리품으로 바벨론에 옮겨졌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경험을 한 우리 나라로서 이스라엘이 독립을 위해 어떤 고통 속에 있었는지, 우리는 역사적 경험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유대민족은 애굽에서 당한 속박의 상태와는 달리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우선 선지자, 제사장, 장로와 같은 유대 사회의 종교적, 사회적 구조가 있었습니다. 또 자기 집을 소유하고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편지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특권도 누렸을 뿐 아니라 다니엘서에 기록된 것처럼 고위직에 종사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습니다. 또 비옥한 땅에 거주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어 식생활에 어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평안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심적 고통에 대해 시편 137편 1-6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
이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벨론에서 거주하던 중 어떤 바벨론 사람, 혹은 고위관직자가 수금이라는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는 한 사람을 잔치를 위해 부릅니다. 바벨론 사람은 여흥을 위해 유대 땅에서 부르던 노래를 수금연주와 함께 불러보라고 합니다. 그 여흥은 바벨론의 쾌락의 문화로 치장되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의 요청에 시편 137편의 기자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인간의 여흥을 위해 불릴 노래가사가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노래였기 때문입니다.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잔치 자리를 떠나 시인은 강변의 버드나무에 아끼던 수금을 내팽개치듯 걸어놓고 차라리 수금을 연주하는 자신의 손이 연주법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벙어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질펀하게 술판이 벌어지는 곳에서 직장상사나 학교선배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 아무개. 너 교회 다니지.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 중에 빠르고 신나는 노래 한번 불러봐!”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바벨론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의식주의 자유는 허락했을지 몰라도 포로된 그들의 처지를 끊임없이 조롱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신앙까지 비웃었습니다. 다니엘서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유대민족은 사회적, 경제적 혹은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럼 포로된 민족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런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최고의 문명으로 힘을 과시하던 나라였습니다. 성경에 느브갓네살로 기록된 유명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기원전 6백5년~5백62년)가 통치하던 때에 그는 바빌론을 사상 최대의 성곽을 가진 도시로 건설해 그 세력이 최고조에 달하게 했습니다. 당시 바빌론에는 위대한 신들을 위한 신전 53개, 마르둑신을 위한 예배당 55개, 대지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 3백개, 하늘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이 6백개가 있었으며, 여러 신들을 위한 제단이 4백개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는 ‘신의 문’이라는 뜻의 바벨탑이 있었는데, 이 탑은 7층으로 높이가 90m에 달했으며 8천5백만개의 벽돌을 사용했을 정도의 큰 규모였습니다.
바빌론의 성은 이중 성곽으로 돼 있는데 외각 성벽은 양변이 1천8백m와 1천3백m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이었습니다. 이중으로 된 바빌론 성벽은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양쪽에서 달리더라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넓었습니다. 1800m의 길이는 지도상으로 경천교회에서 보라매공원을 일직선으로 연결한 거리입니다. 말 네 필이 끄는 마차 2대가 달릴 수 있는 넓이의 양변이 1천8백m와 1천3백m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성벽의 규모는 사람을 압도하기 충분한 크기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은 메디아 출신의 왕비 아뮈티스가 고향의 산을 그리워하자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사막 한 가운데 인공산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정원입니다. 하늘 정원은 궁전 안에 만든 높이 25m나 되었습니다. 테라스에 흙을 묻고, 물을 위에까지 끌어 올려 밑으로 흘리고, 수목과 꽃등을 심은 것으로 오늘날 옥상에 정원을 만든 것을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 건축물은 매우 컸으므로 멀리서 보면 흡사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고 가장 위의 면적은 60평방미터나 되는 거대한 건축물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이와 같은 건출물의 양과 규모, 그리고 건축기술은 곧 그 나라의 국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 물을 끌어들여 25m 높이의 건축물에 정원을 조성한다는 것은 엄청난 기술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바벨론의 선진문명을 경험한 유대민족이 무력으로 독립을 꿈꾼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70년 동안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학습해야만 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스라엘 전 민족이 학습된 무기력증에 빠지기에 충분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14, 16,17절의 말씀입니다.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강대국 바벨론을 한순간에 멸망시키겠다는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출애굽 당시 애굽의 군대가 홍해 바다에서 일시에 수장되듯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학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당시 최고의 강대국으로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던 바벨론은 무지지지 않을 것 같았으나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내부적으로 정치적 분열로 국력이 나뉘었고, 외부적으로는 신흥세력인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바벨론은 페르시아에게 패해 고레스 왕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14절의 말씀과 같이 실재로 바벨론 북쪽 티그리스 강의 오피스라는 곳에서 바벨론과 페르시아는 결정적 접전하였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승리하였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병합되면서 이스라엘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왕 고레스는 유대인들에게 고향 유대 땅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레스 왕은 페르시아의 국고를 풀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을 것을 명했으며, 귀향한 모든 유대인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와줄 것과 또한 느부갓네살이 탈취한 성전의 물건과, 성전 건축 시 쓰이는 금과 은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낼 것을 명했습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것을 두고 어떻게 새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동안 유대민족이 귀향을 꿈꾸기는 했지만 그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의 본문 19절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우리는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데 인간의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실하게 새 일을 유대민족에게 행하시고 나타내셨습니다.
이 새로운 역사의 현장 속에서 유대인들이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보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NLT성경은 19절의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For I am about to do a brand-new thing. See, I have already begun! Do you not see it?”
“내가 지금 새로운 일을 시작했으므로 보라. 벌써 시작됐다. 너는 이 일을 보지 못하느냐”
이 말씀의 지적은 이렇습니다. 유대민족이 고난 중에 아파하고 괴로워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을 때, 하나님은 이미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미 시작된 새 일을 보이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NLT성경은 너는 내가 시작한 새 일을 보지 못하니 하고 유대민족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하나님의 새 역사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18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실패와 좌절을 끊임없이 반복할 때 무기력증과 우울증과 같은 심리증세를 보이게 됩니다.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실패의 경험이,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바벨론 같아서 극복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난 안 돼. 난 할 수 없어. 난 구제불능이야.” 그리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더 이상 실패하지 않기 위해 도망쳐 버리곤 합니다. 과거의 실패에 매몰되고 시각이 고정되어 있는 사람은 옛날 일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페르시아를 사용하셔서 바벨론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새 일,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강대한 힘을 가진 나라나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여러분.
오늘의 말씀 속에서 유대민족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각자의 연력에 따라 우리는 많은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말마다 올해는 무엇을 하리라고 다짐하였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결심들은 몇 일 혹은 몇 달 가지 못하고 얼마나 많이 무너져 내렸습니까? 그런 경험으로 인해 나이를 먹을수록 새해에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강대국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 유대민족을 포로로 삼아 자신의나라에 묶어두고 살 수 있게는 하지만 희망과 꿈은 꾸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의해 새해의 계획과 미래를 향한 꿈을 꾸지 못하게 하고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게 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셨고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의 삶 속에서는 여러분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꿈을 새롭게 하시고 있습니다. 청년부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계십니다.
보이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꿈 말입니다.
보이십니까? 여러분를 향하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2500여 년 전에 기록된 말씀을 오늘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삶에는 새로운 역사들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출애굽의 여정 중, 홍해 앞에선 이스라엘 민족처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의 현장 앞에 있습니다. 바벨론 땅의 유대민족처럼 전혀 새로울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 2018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2017년 아니 새로울 것도 변화될 것도 없는 과거의 삶처럼 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저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심리 상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모세는 과거 유대민족에게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4:13-14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새 일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가만히 있는 일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행할 수 있는 적극적인 믿음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내가 앞서지 않고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는 것을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로 새로워질 것이요 우리의 입에서는 기쁨의 찬양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를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기록하십시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곧 나타내리라”
<기도>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하나님 2018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부푼 꿈과 기대감으로 한해를 시작하지만 곧 그 기대와 꿈들은 현실의 무게로 무참하게 짓밟혀 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과연 새로운 삶의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을까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지만 희망보다는 무감각한 감정으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보고 잠자리에 들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삶의 자리는 점점 각박해져가고 좁은 취업의 자리로 불안한 마음에 눌려 하나님을 찾기 보다 토익점수를 올리기 위해 학원과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가 많았습니다. 일자리를 찾은 자들은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조직의 부속품으로 살아간다는 자괴감에 빠져 반복되는 일상에 생기를 일어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직장인인 직장인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새로울 것 없는 또 다른 한해를 맞이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왜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셨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질문에 하나님은 분명한 음성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하나님 우리의 삶 가운데 새 일을 행하시고 지금 나타내 주소서. 당신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각각의 삶 가운데 우리 청년부 가운데 나타내 주셔서 주님의 생기로 마른 뼈들이 일어나듯이 살아나게 하옵소서. 이미 행하신 새 일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