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의 위로(마 5:4)
마태복음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을까요?
애통이란 애간장이 녹아질 듯 몹시 슬프고 가슴 아픈 것을 말합니다.
왜 이렇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자가 복이 있어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될까요?
너무나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마태복음 5장 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진리를 만나 기뻐했던 자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기뻐하던 자가 자기가 얼마나 모순된 모습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진리 앞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니 한없는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진리와는 너무 먼 거리에 있는 죄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우리가 진리를 알고 나니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렇게 진리를 깨우친 자는 사도바울처럼 죄된 자신을 놓고 하나님께 자복하고 회개하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모순되고 죄 된 자신을 올바로 세울까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신의 모순된 모습과 싸우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자, 곧 애통하는 자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사도 바울도 모순된 자신과의 심령의 투쟁 속에서 몸부림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롬 7: 23-24)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 말씀을 알고 나니 스스로가 죄인임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말씀대로 살 수 없는 타락된 죄인임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애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심령에 애통한 자를 하나님의 성령이 위로해주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흘리신 고통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은사를 깨우치게 될 때 나는 고통에서 구원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고통과 무한한 사랑을 깨달았을 때 나 자신의 고통과 슬픔은 너무 작아져 차마 나의 고통은 드러내기 조차 부끄러워집니다.
더 큰 고통 앞에서 나의 고통은 위로를 받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떨쳐내고 예수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눠 지려 떨쳐 일어나는 모습이 됩니다.
베드로는 왜 십자가에 거꾸로 달아달라고 했을까요?
자신이 지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적어도 예수님보다는 더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라고 스스로 각오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죄를 알고 그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은총을 깨달았을 때 감사함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나 자신도 십자가의 길을 갈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이 됩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애통하고 있습니까?
죄된 자신을 놓고 고민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고통과 은총을 깨달았습니까?
그러면 나에겐 이미 성령이 함께 하고 있을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했다면 예수님의 고통을 깨달았을 것이고 나는 이미 위로받고 있을 것입니다.
죄의 법 아래 살고 있는 자신을 놓고 애통해 하고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심령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죄악에 빠진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아시고 심령의 양식에 갈급하고 심령의 애통 속으로 들어가길 바라신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의 고통에서 빠져나와 심령의 애통 속으로 들어가서 심령의 위로를 받아야겠습니다.
나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의 대속의 길을 가셔야 했던 예수님의 고통과 은총을 위로하고 감사하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들의 귀에 대고 간절한 심정으로 호소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재림주님 말씀>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뜻길을 가는 데 있어서 언제나 슬픈 하나님을 어떻게 위로해 드릴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하나님보다 더 수고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고, 또 우리를 위 로하시는 입장에 선 하나님은 슬픔을 잊으시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슬픔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슬픔을 대신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안타까워하며 간접적으로나마 위로할 수 있는 입장에 서면,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시는 자리에 서실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섬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은 바로 하나님께서 슬픔을 넘어설 수 있는, 슬픔을 잊을 수 있는 한 순간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두고 볼 때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이란 것은 자랑하는 시간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시간이란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 하나님이시여, 당신께 슬픔이 있으면 그 슬픔을 나로 인해 탕감하시옵소서. 그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모든 슬픔까지도 나로 인하여 탕감하여 주시옵소서.’ 하면서 제물 되기를 다짐하고 그런 입장을 찾아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멀리하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을 중심삼고 인연을 맺으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 을 통해서만 전진할 수 있는 것이 하늘의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터전을 갖고 나서는 사람을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전진의 일로를 가기 위해서는 슬픈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슬픈 하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슬픈 입장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슬픈 입장에서는 슬픈 하나님을 위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평하는 마음이나 불만스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서라면 천만번 죽더라도 감사할 수 있고, 천만번 다시 회생하더라도 또 다시 하늘의 뜻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일대(一代)에 있어서 수십 혹은 수백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집 42권 6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