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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6(월)
홈페이지를 다시 올립니다.
지난 7월 29일 열었던 홈페이지를 새로 단장 해 다시 엽니다.
김용성 님이 홈페이지 작업에 수고를 해주셨습니다.
부족한 점은 차차 고쳐나가기로 하겠습니다.
박상익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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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홈페이지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는 무교회 신앙 전반에 대한 안내, 김교신 선생을 비롯한 믿음의 선배들의 글 소개, 그리고 부족하나마 저의 성경 공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의 인문학 공부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청교 시인 존 밀턴을 비롯한 기독교 고전 사상, 그리고 서양사를 중심으로 한 역사읽기가 주된 내용입니다.
끝으로 독자와의 대화를 위한 부분이 있습니다. 웹상에서나마 코이노니아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홈페이지 제작에 왕초보라서 세련된 디자인으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만, 이런 외적인 면들은 차차 보강하기로 하고, 일단 엉성하게나마 시작을 해봤습니다.
2001.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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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6(월)
<김교신전집>복간 안내(1차분: 1, 2권 및 별권)
『김교신 전집』이 도서출판 부키(Bookie; ‘책 만드는 사람’, 02-325-0846)에서 복간되었습니다. 편집자는 노평구 선생님으로 되어 있으며, 실무 작업은 부키 편집진에서 맡아 주었습니다.
노평구 선생이 정한 기존의 편집 방침은 고스란히 유지되었으되,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세로 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는 등 외형상의 수정이 가해졌고, 『성서조선』 원문과 일일이 대조함으로써 기존의『김교신전집』에 있었던 탈자, 오자를 크게 바로잡았습니다.
그밖에도 부키 편집진은 『김교신전집』을 명실상부한 현대의 고전으로 만들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오늘날 잘 사용되지 않는 어려운 낱말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뜻풀이를 붙였고, 한문 문장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그 의미와 출전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인명, 지명에 대해서는 원음을 일일이 병기했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서 일일이 김교신 선생의 지인(知人)들을 방문하는 등, 까다로운 편집 작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준 편집진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김교신전집』은 전8권(별권 포함 9권)으로 출간될 계획으로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것은 제1권(인생론), 제2권(신앙론), 그리고 별권(김교신을 말한다) 등 3권입니다.
제1권 인생론 (신국판 / 양장본 / 18,000원)
제2권 신앙론 (신국판 / 양장본 / 18,000원)
제3권 성서 개요(근간)
제4권 성서 연구(근간)
제5권 일기 1 / 제6권 일기 2 / 제7권 일기 3 (근간)
별권 : 김교신을 말한다. (신국판 / 14,000 원)
(그밖에 제8권은, 아직 활자화되지 않은 미공개 일기 및 서간문 등으로 꾸며질 예정이나, 편집 작업이 용이하지 않아 현재로서는 정확한 출간 일정을 발표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세 책이 나왔고 제2차분(제3권, 제4권)은 8월말까지 출간될 예정입니다.
마지막 3차분(제5-7권)은 금년 12월까지 출간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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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평구전집>에 대하여...
"믿음의 선배들" 코너에서는 <노평구전집>의 글을 다듬어 올리고 있습니다.
<노평구전집>은 노평구 선생이 1946년 11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간행했던 월간 <성서연구>에 수록된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통권 500호로 1999년 12월에 종간했습니다. 한국 잡지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노평구 선생이 <사상계> 등에 기고했던 글들도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16권으로 되어 있는 <노평구전집>의 제1부(1-5권)에는 "종교와 인생"이란 제목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주옥같은 신앙 에세이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2부(6-11권)에는 "성서연구", 제3부(12-16권)에는 "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제1부(1-5권)의 "종교와 인생"은, 1946년부터 1999년까지의 20세기 후반기 한국 현대사를 기독교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 글들입니다.
이를테면 "크리스천의 관점에서 본 한국현대사"가 되겠지요.
저는 노평구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각별히 이 주제에 걸맞는 글들을 가려 뽑고, 문장을 오늘날의 감각에 맞게 가다듬어 새롭게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낼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 사관으로 본 한국 현대사"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이 시리즈를 당분간 연재하고자 하니, 관심을 갖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고전 텍스트"를 생산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평구 선생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문화일보> 2001년 6월 4일자에 "김교신 선생 탄생 100주년 맞아 전집 복간한 제자 노평구씨"란 제목의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munhwa.co.kr/content/2001060401012830077002.html
<중앙일보> 2000년 1월 8일자(인터넷은 1월 7일자) "문화인터뷰"의 관련 기사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joins.com/cgi-bin/va.cgi?i=20000107193308102
<한겨레21> 제184호(1997년11월27일)에도 관련 기사가 실렸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hani.co.kr/hankr21/K_97BR0184/97BR0184_021.html
참, 갤러리에 가시면 노평구 선생 관련 사진 자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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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전집>,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도서출판 부키로부터 <김교신전집>이 얼마 전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선정이 되면 출판지원금과 도서구입대금을 합쳐 700만원을 문화관광부로부터 받는다고 합니다.
출판사로서는 재정적으로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출판사 측에 의하면, 덕분에 2차분 제작비 걱정을 덜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홍보 효과도 있겠지요.
그리고 한가지 소식...
<김교신전집> 2차분(3, 4권)은 9월 중순경 나온다고 합니다.
2차분이 출간되면 다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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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9/12(수)
단테 『신곡』 독서회 안내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임세영 교수님이 서울 종로 2가 YMCA에서 격주로 단테 신곡 독서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희망하시는 분은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서울 지역 대학생들의 참석을 권합니다.
임세영 교수님이 직접 보내주신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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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독서회를 시작합니다.>
늘 좋은 신선한 글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칼럼을 통해서 고전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고전 독서와 관련해서 칼럼 독자님들께 한 가지 알리고자 합니다. 서울 종로 YMCA에서 매주 오후에 모이는 성경연구모임에서는 집회 후 단테의 『신곡』을 읽는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동안 지옥편, 연옥편의 통독을 위한 개론 강의가 있었습니다. 이번 주일(4월 22일, 오후 4시부터)에는 천국편에 대한 개론 강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일단 전편을 통독한 다음에는 최근(1997년)에 출간된 Kathryn Lindkoog의 영문 산문역으로 한 곡 한 곡 따져가면서 읽어가려고 합니다.
단테의 『신곡』을 완역한 바 있는 T. S. Eliot은 셰익스피어가 인간의 열정이 얼마나 광대한지를 보여주었다면, 단테는 인간성이 얼마나 깊고 높은 것인지를 보여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정신적 모델은 단테라고 합니다.
그리고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는 『신곡』 지옥편 5곡의 프란체스카를 주제로 곡을 쓴바 있으며, 라흐마니노프도 동일한 주제로 오페라을 작곡하였습니다(1906). 리스트는 "단테 심포니"(1839)와 단테 소나타(1839)를 작곡하였습니다.
단테의 『신곡』에는 모두 408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그 밖에 426명의 이름이 일컬어집니다. 그들은 중세 천년을 선(善)으로 혹은 악(惡)으로, 지식으로 혹은 지혜로, 용기로 또는 비굴로 대표하는 인물들입니다. 이탈리아어로 1984년에 출간된 『단테 백과사전(Enciclopedia Dantesca)』는 전체가 6권인데 쪽수는 6,357페이지에 달한다고 합니다.
사실 단테의 『신곡』이 사용한 피렌체 방언은 바로 이 작품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이탈리아어의 표준어가 되었답니다. 이것은 모두 단테의 『신곡』이 서양 문화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들 입니다.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려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까다롭고 어려운 점이 있어서 중도 하차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공부하듯이 읽어보려고 합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저 임세영(041-560-1101 또는 011-761-0323)에게 문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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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10/21(일)
<김교신전집> 2차분이 발간되었습니다.
<김교신전집> 2차분(제3, 4권)이 10월 20일 출간되었습니다. 지난 4월에 나온 1차분(제 1, 2권 및 별권)과 마찬가지로 편집자는 노평구 선생님으로 되어 있으며, 실무 작업은 도서출판 부키 편집진에서 맡아 주었습니다. 도서출판 부키의 전화번호는 02-325-0846 또는 016-702-0846입니다.
<김교신전집>은 전7권(별권 포함 8권)으로 출간될 계획입니다. 이번에 나온 것은 제3권(성서개요)과 제4권(성서연구)입니다.
제3권 성서 개요(신국판 / 양장본 / 18,000원 / 444쪽)
제4권 성서 연구(신국판 / 양장본 / 18,000원 / 424쪽)
<김교신전집> 2차분(제3, 4권)은 10월 25일 이후 시중 서점에서 구해 보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 3차분 (제5, 6, 7권)은 <성서조선>에 실렸던 김교신 선생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2년 1월까지 출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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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11/28(수)
[기독교고전]홍순명 선생의 <새 춘향전>에 대하여
<새 춘향전>을 쓰신 홍순명 선생님은 일생 동안 충남 홍성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국어 교사로, 그리고 얼마 전까지 교장으로 재직하셨고, 내년 2월이면 65세로 정년을 맞이하시게 됩니다.
독학으로 영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한문 등을 공부하시어 해당 국가에서 그 나라 말로 강연을 하실 정도의 어학 능력을 갖추신 우리 시대의 숨겨진 탁월한 인문학자이십니다.
키에르케고르, 원효, 퇴계의 사상에 관한 논문도 쓰실 정도로 박람강기의 선비이십니다.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앙의 지도자 노평구 선생께서는 홍순명 선생님이 풀무학교에 계신 것을 늘 아까워하시며 “진주가 진흙 속에 묻혀 있다”고 탄식하셨지요.
이번에 홍순명 선생께서 정년에 즈음하여 춘향전, 홍길동전, 흥부전 등을 “새롭게” 써서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선물하고자 하십니다.
“새롭다”고 했지만 그야말로 “환골탈태”의 수준입니다.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을 시시한 두 남녀의 사랑 놀음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민족과 사회, 정의와 진리의 시각에서 풀어가고 있습니다.
...
독일 문학사에는 중세 말기부터 “파우스트”에 대한 수많은 다양한 버전의 이야기들이 나돌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파우스트들 중에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괴테의 파우스트”뿐입니다.
괴테의 인생관과 우주관, 종교관에 의해 재구성된 그 “파우스트”만이 영속적인 생명력을 얻고 불멸의 고전이 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오게 된 것입니다.
...
<새 춘향전>에서 성춘향은 기껏해야 서방님의 옷 걱정이나 하는 쩨쩨한 아녀자가 아닙니다. 이몽룡은 과거에 급제하여 개인적 보복이나 도모하는 출세지상주의자가 아닙니다.
방자는 흔해빠진 어릿광대가 아니라 비록 신분은 낮으나 가슴에 위대한 철학을 품은 기독교 사상가로 등장합니다. 노예 신분으로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였던 그리스의 에픽테토스를 연상케 하는 인물입니다.
...
어린이들부터 누구나 즐겨 읽는 “우리의 고전”이 포부도 이상도 꿈도 없는 시시한 사랑 이야기로 질질 끌어간대서야 말이 안 됩니다.
홍순명 선생님의 <새 춘향전>은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민족과 사회, 진리와 정의에 대한 비전을 갖게 하는, 그야말로 21세기형 춘향전입니다.
홍순명 선생님의 <새 춘향전>이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후손들에게 길이 남을 불후의 고전, 우리의 텍스트로 남게 되길 바랍니다.
홍 선생님은 이 외에도 <새 흥부전>, <새 홍길동전>도 쓰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도서출판 부키를 통해 내년 초에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올 예정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기대와 성원을 바랍니다.
박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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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12/4(화)
무교회 겨울 전국 성서집회 안내
무교회 겨울 전국 성서집회를 다음과 같이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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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01.12.29(토)저녁 - 2002.1.1(화)아침까지
장소: 충남 홍성군 홍동면 문당리 환경교육관
(교육관대표 주형로 TEL: 041-633-3006)
강사: 유희세(전 고려대), 임능빈(전 부산대) 선생 등 8- 10명
비용: (3박 8식) 어른 5만5천, 초중고생 3만3천 (부분 참석도 가능)
자세한 것 문의: 주형로 TEL: 041-633-3006
집회에 관한 문의: 한병덕 TEL 02-3679-0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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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1/9(수)
[필독]노평구 선생 생신만찬을 무기연기합니다.
노평구 선생님의 생신 만찬을 1월 19일에 종로 한일관에서 하기로 얼마전 공고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노 선생님께서 워낙 연로하신 데다가(92세), 날씨마저 추워서, 공개적인 자리에 여러 시간 앉아 계시기에는 무리라는 판단을,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여러분들이 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인하여 1월 19일 만찬 계획을 무기 연기하기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상의 내용은, 제가 노 선생님의 장남되시는 노정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전갈을 듣고 독자 여러분들께 급히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님들께서는, 이 자리에 참석할 계획을 세우셨던 다른 분들에게도 꼭 연락을 취하셔서,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박상익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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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2/23(토)
<김교신전집>이 드디어 완간되었습니다!!!
<김교신전집> 3차분(5, 6, 7,권)이 발간되었습니다. 이로써 전7권(별권 포함 8권)이 모두 완간된 셈입니다.
편집자는 노평구 선생님으로 되어 있으며, 실무 작업은 도서출판 부키 편집진에서 맡아 주었습니다.
부키 편집진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도서출판 부키의 전화번호는 02-325-0846 또는 016-702-0846입니다.
<김교신전집> 3차분(5, 6, 7,권)은 지금 서점에 가시면 구해 보실 수 있습니다.
<김교신전집>은 얼마전 한국일보 주관 "제42회 백상출판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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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3/8(금)
제1회 "무레사네" 4월 5일 계룡산 갑니다.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조선을 숨쉬다가 장차 그 흙으로 돌아가리니 불역열호(不亦說乎)”
김교신 선생이 시작하신 "무레사네"(물에산에) 행사를 부활시키고자 합니다.
대학생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첫 행사로 이번에 가볼 곳은 대전 근교의 "계룡산"입니다. 동학사에서 출발하여 갑사로 넘어가도록 할 것입니다.
* 집합 일시: 2002년 4월 5일(식목일) 오전 9시 정각
* 집합 장소: 대전역 여객 출구(열차 승객들이 기차표를 내고 나오는 곳)
(대전역 앞에서 102번 좌석버스를 타고 동학사에 갈 예정입니다.)
대전역 이용이 불편하신 분은 계룡산 국립공원 "동학사 매표소" 앞으로 오전 10시까지 오셔도 됩니다.
*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만일 비가 온다면 행사는 다음으로 연기하도록 하겠습니다.
* 준비물:
1. 각자 산행에 필요한 장비를 준비해야 합니다. 현재로선 날씨를 예측할 수 없지만 산의 기후는 평지와는 크게 다르므로, 방풍, 방한을 위해 여벌의 옷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2. 김밥, 과일, 음료수 등 각자 자기의 점심 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3. 버스 요금, 국립공원 입장료도 물론 준비하셔야겠죠?
4. 4월 5일 식목일은 공휴일인 관계로, 참석하실 의사가 있으신 분들은 열차를 미리 예약 또는 예매해 두셔야 차질이 없습니다.
(대전역에서 귀가하기 위한 열차표도 미리 예매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 날 구체적인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귀가 열차 탑승 시간은 저녁 8시-9시 정도로 넉넉하게 잡아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해산 시간: 쉬엄 쉬엄 산행을 할 것이므로(이야기도 나누며), 당일 오후 4시가 넘어야 갑사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산행을 마친 후 갑사 주차장에서 버스편으로 각자 귀가해도 되고, 대전역까지 함께 가서 해산할 수도 있습니다.
* 변동 사항이 있으면 즉시 공지를 할 것이니 홈페이지를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 질문이 있으시면 "독자마당"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 구체적인 교통편은 여기로 들어가서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npa.or.kr/kyeryong/traffic/traffic.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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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4/30(화)
김교신 선생 탄생 101주년 기념 강연
때: 2002년 5월 12일 (일요일) 오후 2시- 4시
곳: 서울 종로 2가 YMCA 6층 지란방
- 강사 및 강연 주제-
유희세(전 고려대 교수): 아! 김교신 선생
홍순명:(전 풀무학교 교장): 김교신과 한국 교육
임세영(한국기술교육대 교수): 김교신을 통해 본 예수
강연이 끝난 후 YMCA 1층 식당에서 만찬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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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5/13(월)
제2회 무레사네 5월 25일 대구 팔공산 갑니다.
이랬다 저랬다 해서 죄송합니다. ^^;
동대구역에서 5월 25일(토) 10시 30분까지 모이면 됩니다.
참가하실 분은 제게 이메일을 주시면 자세한 내용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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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5/28(화)
제3회 무레사네 6월 6일 다시 대구 팔공산입니다.
지난 5월 25일 대구 팔공산에 다녀왔습니다.
팔공산이 등산하기에 아주 훌륭한 산이더군요.
그다지 험하지도 않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걷기에 적합한 산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마음과 몸"(심신)을 단련한 하루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6월 6일에 다시 한번 가기로 했습니다.
5월 25일이 토요일이어서 근무 때문에 오시지 못한 분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동대구역에서 아침 10시 30분에 집합입니다.
참석을 희망하시는 분은 제게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연락 전화번호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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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5/31(금)
[독자와의 대화]<안티 조선>을 선언합니다.
독자 명00 님과의 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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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아레오파키티카!
요즘 안티조선에 참여하면서 아레오파키티카에서 밀턴이 카톨릭의 출판 자유에 대해서 엄격한 것이 왜 그랬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뒷부분 교수님 논문은 안 읽어서 교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불관용에 대한 관용을 관용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 때문인 것 같아요. (밀턴도 이런 말을 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밀턴이 검열을 반대하면서 가장 기본으로 삼은 것이 검열의 근원은 바로 카톨릭의 종교재판이다. 이거잖아요? 그러니까 카톨릭은 다양한 목소리의 서적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불관용의 대표자이고, 이 불관용의 목소리까지 관용해야 한다고 하면 오히려 논리에 모순이 생기는 거죠.
불관용의 관용은 불관용이잖아요.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이야말로 관용이고. 마치 부정의 긍정은 부정이고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듯이.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면 마지막에 밀턴이 카톨릭의 목소리도 용납해 주어야한다. 이러면 논리적으로 오히려 모순이 생기는 거죠. 카톨릭은 철저하게 검열해야한다. 이렇게 나와야 진정한 언론 자유의 고전이 되는거고. ㅋㅋ
교수님께 서운한 게 있다면 교수님은 조선일보에 은근히 옹호적이라는 거예요. 뭐 아니실 수도 있지만 -_- 개인적인 사연 때문인지 적극적으로 비판적이진 못하잖아요.
김교신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그랬을까요? 밀턴이 한국에 지금 있다면 그랬을까요? 전 아니라고 봐요. 이 두 사람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럼 평안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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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00 님, 오랜만입니다.
모처럼 글을 올려주었군요.
사실 조선일보 문제는 저로서는 미묘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들 두어 명과는 몇 해 전부터 출판 기사 관계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인간 관계가 관성으로 작용해서 지금에 이른 것이지요.
(아는 기자들이 모두 같은 역사학 전공자들이었으니 더 그랬습니다. 작년에 작고한 한 분은 철학 전공이었지만...^^;)
우재 님이 말한 것처럼 불관용에 대해서 관용을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밀턴의 정신입니다. 정확하게, 제대로 본 겁니다.
특히 작금 김대중 주필을 비롯한 조선일보의 논조에 대해서는 저도 강한 반발과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도 조만간 조선일보 문제에 대해 태도를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에는 "내가 무슨 대단한 지식인이라고..." 하는 생각에, 시류에 몸을 맡기고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명00 님의 글을 읽으면서 이제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아레오파기티카를 공부해서 책까지 쓴 사람이 이런 문제를 모호하게 남겨두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봅니다.
시대의 큰 흐름으로 보아 그 어떤 번명도 떳떳치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이 자리를 빌어 선언하려 합니다.
<나, 박상익은 이제부터 안티 조선의 대열에 참여하려 합니다.
조선일보에 일체의 기고를 하지 않을 것이며, 인터뷰에도 일체 응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사족. 물론 이런 선언을 했다고 해서 기왕에 알고 있던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간관계까지 단절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공과 사를 분명히 가린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저도 요즘 들어 태도를 분명히 밝힐 때가 되었다고 은근히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명00 님의 글 덕분에 저의 결심이 앞당겨지게 되었군요.
(사람은 가끔씩 옆에서 누군가 확 잡아 채줘야 정신을 차리기도 하는가 봅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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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6/7(금)
제4회 무레사네 6월 22일 서울 북한산 갑니다.
6월 6일 대구 팔공산에서 가졌던 무레사네 행사는 모두 6분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경남 양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신 김희선 선생님이 새로운 멤버로 참석해주셨습니다. *^^*
그밖에 경북대학교의 박완 교수님과 진익렬 교수님, 두레 코리아 대표이신 전희채 선생님, 천안의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임세영 교수님, 그리고 제가 참가했습니다.
쉬엄쉬엄 등산하면서, 각자 준비한 음식도 맛있게 나눠먹고, 신앙과 우리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한 폭넓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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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레사네 다음 행선지는 서울 북한산으로 정했습니다.
6월 22일(토요일) 오전 10시 정각까지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정문앞(이순신장군 동상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곳이죠?)에서 모입니다.
무레사네가 끝난 다음에는 여의도의 노평구 선생님 댁을 방문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대학생 여러분의 참여를 바랍니다.
참석하실 분은 이메일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clio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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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말씀드립니다.
제5회 무레사네는 8월 15일(광복절) 부산 금정산으로 잠정 결정되었습니다.
자세한 안내는 추후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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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6/18(화)
제4회 무레사네(6월 22일) 추가소식(참가자 필독)
어제 전희채 선생님과 전화로 상의한 결과, 산행을 하기 전에 미리 노선생님 댁을 방문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되어 아래와 같이 일정을 조정하고자 합니다.
*** 변경 사항 ***
<오전 10시>에 여의도 미성아파트 A동 608호 노평구 선생님 댁을 방문한 다음,
광화문 교보빌딩 현관 앞에서 <11시 30분>에 함께 북한산을 향해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노선생님 댁 방문을 희망하시는 분은 오전 10시에 직접 아파트로 찾아주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11시 30분까지 교보빌딩 현관 앞(이순신장군 동상이 보이는 곳)으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반드시 제게 이메일을 보내주십시오. clio53@hanmail.net
당일 긴급한 연락은 제 핸드폰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016-208-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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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6/20(목)
제4회 무레사네 집합장소 긴급 변경!(월드컵 관련)
월드컵 경기 때문에 광화문 일대의 교통이 오전부터 통제될 것으로 예상되어 집합 장소를 다음과 같이 급히 변경합니다.
*** 변경 사항 ***
<오전 10시>에 여의도 미성아파트 A동 608호 노평구 선생님 댁을 방문한 다음,
지하철 6호선 "독바위역" 1번출구 밖(地上)에서 <11시 30분>에 함께 모여 북한산을 향해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노선생님 댁 방문을 희망하시는 분은 오전 10시에 직접 아파트로 찾아주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11시 30분까지 독바위역으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반드시 제게 이메일을 보내주십시오. clio53@hanmail.net
당일 연락은 제 핸드폰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016-208-5959
하산하는 길에 "진관사" 부근에서 월드컵 경기를 시청할 수도 있으니, 축구 애호가들께서도 망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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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6/23(일)
제4회 무레사네 북한산을 다녀와서...
6월 22일 무레사네는 서울 북한산을 다녀왔습니다.
참석자는 최정일, 한병덕, 박윤우, 진익렬, 박완, 김민규, 김혜연, 임세영, 전희채, 박상익 등 10명이었습니다.
가장 많은 분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아무래도 수도권에서 자주 행사를 갖도록 해야 하겠더군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산은 한산하기만 했습니다.
다들 월드컵 때문에 꼼짝하지 않는듯 했습니다.
이번에 오른 북한산 코스 참 다양하긴 했지만 시원한 샘물이 없는 것이 옥의 티였다고나 할까요.
하산길에 진관사 부근에서 목을 축이며 월드컵 한국-스페인전을 시청했습니다.
경기 시청 때문에 충분한 대화 시간을 못가진 것이 아쉬웠지만, 세상 일이란 것이 어디 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겠습니까?
다음 무레사네는 8월 15일 부산 금정산으로 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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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7/13(토)
제5회 무레사네 천안 근교로 갈 예정입니다.
제5회 무레사네는 <7월 31일> <천안 근교>로 갈 예정입니다.
7월 21일경 미국 플로리다 대학 등에서 강의하는 김은정 박사께서 오시기로 했는데 무레사네에 기꺼이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 천안 근교의 산으로 가기로 잠정 결정한 상태입니다.
천안의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임세영 교수가 독일에서 귀국하면 구체적인 일정을 협의하여 다시 공고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산으로 갈 것인지도 임세영 교수와 협의하여 결정할 것입니다.)
김은정 선생은 학창시절 노평구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고, 그 후 도미하여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물론 무교회 신앙인입니다.)
지도 교수가 유대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날 비만 쏟아지지 않으면 좋겠군요. ^^;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clio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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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7/24(수)
제5회 무레사네: 천안 광덕산 8월 3일(토)
제5회 무레사네는 원래 7월 31일로 계획을 세웠지만, 천안의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임세영 교수님이 학교 행사 관계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하셔서, 부득이 8월 3일(토)로 연기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이번에 가볼 산은 천안 근교의 "광덕산"입니다. 천안역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고, 산에 오르고 내리는데는 세 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합니다. 안내는 임세영 교수님이 맡아주시겠습니다.
집합 장소: 천안역 출구
집합 시간: 8월 3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해산 장소: 천안역
해산 시간: 8월 3일 오후 8시경
준비물: 간단한 등산 장비.
주의 사항: 광덕산은 "마실 물"이 오를 때는 없고, 하산(下山) 길에 있다고 합니다. 각자 음료수를 준비하시는게 좋을 듯 싶습니다. (오이 등도 지참하시면 좋겠죠?)
참가를 원하시는 분은 제게 이메일을 보내주십시오.
clio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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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7/29(월)
제6회 무레사네는 8월 15일 부산 금정산에서...
이미 예고한 대로 8월 15일(목) 부산 금정산에서 무레사네 행사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집합 장소: 부산역 출구
집합 시간: 8월 15일 목요일 오전 10시 30분
해산 장소: 부산역
해산 시간: 8월 15일 오후 8시경
준비물: 간단한 등산 장비.
주의 사항: 각자 시원한 음료수를 준비하시는게 좋을 듯 싶습니다. (오이 등도 지참하시면 좋겠죠?)
참가를 원하시는 분은 제게 이메일을 보내주십시오.
clio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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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8/14(수)
[긴급]8월15일 무레사네 호우로 연기합니다.
8월 15일 부산, 경남 지방에 최고 100mm까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금정산 무레사네는 부득이 연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여하실 계획이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추후 일정은 다시 공고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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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8/14(수)
제6회 무레사네는 9월 7일 대전 보문산에서...
부산 금정산에서 하려던 8월 15일 무레사네는 호우때문에 부득이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양산의 김희선 선생님은 물론, 연세대, 경북대 등의 대학생들, 그리고 대구의 고교생까지 두루 참가할 예정이었는데 참 아깝게 되었습니다.
(방학 기간 안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날이었습니다.)
아쉽습니다. -.-;
하지만 인력으로 안되는 일에 계속 연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하여 다음 무레사네 행사를 9월 7일(토) 대전 보문산에서 갖도록 하겠습니다.
집합시간: 9월 7일(토) 10시 30분
집합장소: 대전역 승객 출구(표내고 나오는 곳)
해산시간: 당일 오후 8:00시
해산장소: 대전역 대합실
보문산은 해발 457m의 아담한 산입니다. 2시간 정도면 산행을 마칠 수 있습니다.
간단한 등산장비를 갖추시고 오시면 됩니다.
여기에 가시면 보문산 관련 정보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mountains.new21.net/san/bomun.htm
참가하실 분은 미리 이메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clio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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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9/6(금)
반영운 박사 결혼식 안내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환경공학으로 학위를 받은 반영운 박사께서 오는 10월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신부는 우경미 님입니다.
반영운 박사는 결혼 후 미국 메릴랜드 주립대학 교수("Tenure Track"이라고 하는데, 4년 근무 후 "종신 재직교수"가 되는 조건이랍니다. 미국 대학에서는 "종신 재직교수" 되기가 몹시 어려운데 참 놀랍습니다.)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입니다만, 미국 대학에서 훌륭한 경력을 쌓으신 후 한국에 다시 돌아와 활동하셨으면 합니다.
(미국보다는 한국이 훨씬 할 일이 많으니까요.)
일시: 2002년 10월 11일 (금요일) 저녁 6시 30분
장소: 프레지던트 호텔 31층(호텔 전화번호는 02-753-2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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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9/14(토)
[시간 변경]제7회 무레사네는 10월 3일 계룡산에서...
10월 3일 개천절에는 대전 계룡산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도착 및 출발 시간이 다소 변경되었습니다.)
동학사에서 갑사 방면으로 넘어갈 계획이오니(그리 만만한 코스는 아니죠?) 등산화 등 간단한 등산장비와 각자의 점심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집합시간: 10월 3일(목) 오전 9시까지.
집합장소: 대전역 출구.
해산장소: 대전역
해산시간: 오후 9시경.
직접 계룡산으로 오실 분은 동학사 매표소 앞으로 10시까지 나오시면 됩니다.
참석하실 분은 "반드시" 제게 이메일로 미리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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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9/23(월)
<아레오파기티카> 복간 안내...
제가 "번역"하고 "역주"를 붙인 다음, 200자 원고지 800매 분량의 "해제"(저의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합니다)를 붙인 <언론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가 복간되었다는 소식을 오늘 출판사(소나무)로부터 통보 받았습니다.
지난 1999년에 초판 출간된 후 금년 초에 절판되었다가, 무려 반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기사회생(?)을 한 셈입니다.
존 밀턴은 <실낙원>을 쓴 청교시인이지만, 시인이기에 앞서 종교개혁자였습니다. 그의 종교개혁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천명한 글이 바로 <아레오파기티카>입니다. 36세 젊은 시절에 천명된 밀턴의 이러한 태도는 66세로 사망하던 그 날까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밀턴이 종교개혁자가 아니었다면 <실낙원>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레오파기티카>를 이해하지 못하고선 <실낙원>도 이해할 수 없다고 봅니다.)
종교개혁 문서인 <아레오파기티카>는 또한 밀턴의 산문들 중 가장 빼어난 글로 꼽히고 있습니다. <실락원>이 밀턴의 시(詩)의 금자탑(金子塔)이라면, <아레오파기티카>는 그의 산문(散文) 중 백미(白眉)로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밀턴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제2, 제3의 끝없는 종교개혁을 필요로 합니다. 밀턴은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을 영어로 표기할 때 "The Reformation"이라고 쓰지 않고 "reformation"이라고만 표기했습니다.
밀턴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즉 우리는 "종교개혁자인 쯔빙글리와 칼뱅이 우리에게 비춰 준 섬광"을 너무 오래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밀턴에 의하면 그 빛은 "응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섬광을 오래 쳐다보기만 하면 앞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빛을 더 많은 종교적 진리를 찾는데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의 완성을 향해 부단히 추구하고 쉬임 없이 노력해야 할 필요성을 밀턴은 역설한 것이지요.
인테넷 서점 알라딘에 가시면 관련 정보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aladdin.co.kr/catalog/book.asp?UID=1669135975&ISBN=8971395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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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10/20(일)
제8회 무레사네 11월 16일(토) 충남 홍성에서
제8회 무레사네는 11월 16일(토) 충남 홍성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서울 방면에서 오실 분들은 당일 서울역에서 9시 40분 열차를 타시면 천안(10시 47분)을 거쳐 11시 49분 홍성에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도착하시면 홍성 역 앞에 정승관 선생님이 버스를 준비해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남부 지방에서 상행으로 오시는 분들은 각자의 차량을 이용하시거나, 천안(10시 47분)에서 장항선으로 갈아타는 방법을 생각하셔야 할 것 같네요. ^^;
집결지는 풀무학교 전공부(전문대학 과정)입니다. ]
여기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홍성의 용봉산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홍순명 선생님을 비롯한 풀무 선생님들과 전공부 남녀 학생들도 다수 참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풀무학교의 교육 내용에 대해 궁금하셨던 분들은 이번 기회에 이모저모를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당일 귀가하실 분들은 오후 9시 30분 홍성에서 서울 가는 열차가 있습니다.
1박 하실 분들은 전공부 기숙사에서 수면을 취하고, 다음날 오전 10시에 주일 예배를 함께 본 다음 해산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무실 분들은 침구는 준비되어 있으니 각자의 세면도구만 지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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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2/7(금)
"김교신 상(賞)" 제정 소식(1)
기독교사연합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좋은 교사> 기자로 일하시는 정병오 선생님께서 제게 메일을 주셨습니다. 정병오 선생님은 현직 중학교 교사이시며(2001년 현재 양화중 도덕 교사 재직), 좋은 교사 운동 상임총무도 맡고 계십니다.
정 선생님은 2001년에 김교신 선생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저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대전까지 오신 적도 있습니다. 물론 이 때 제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인터뷰에 응한 것은 아니고, 김정환 선생님이나 홍순명 선생님 같은 분들께서 극구 사양을 하시는 바람에 저에게 그 짐이 떼밀려온 것입니다.
그 결과 <좋은 교사> 2001년 10월호에는 "김교신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발자취를 좇다"라는 제목으로 저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인터뷰는 김교신 선생의 신앙과 생애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김교신전집>이 막 출간(정확히 말해 "복간")되기 시작한 무렵이라서 이 기사를 통해 많은 선생님들께 김교신 선생과 <김교신전집>을 알려드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그 기사가 나가고 나서 저도 잊고 있었는데(벌써 햇수로 3년이 되었군요^^;), 정 선생님께서 방금 다음과 같은 메일을 주셨습니다. 기독교사연합에서 해마다 모범이 되는 교사들을 뽑아서 상을 주기로 했고, 그 상의 이름을 <김교신 상>으로 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 오신 것입니다.
물론 저야 메일을 읽는 순간 "참 좋은 아이디어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공생애 대부분(45년 생애 중 27세부터 42세까지 15년간을 교직에 계시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직)을 크리스천 평교사로 헌신했던 김교신 선생이야말로 기독 교사의 모범이 될만한 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김교신 선생을 대변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일단 홈페이지를 통해 여러분께 이런 일이 있었다는 점을 보고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빠른 시간 내에 무교회의 다른 어른들께, 그리고 가능하다면 김교신 선생의 유족분들께도 연락을 해서 이 문제에 관해 의논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반대하실 이유가 없으리라고 낙관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사전에 동의를 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에 정병오 선생님의 메일을 올립니다. 읽으시고 혹 의견이 있으시면 제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좋은교사> 홈페이지는 http://goodteacher.org/index.ht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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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좋은교사" 정병오입니다
보낸날짜 2003년 02월 07일 금요일, 저녁 8시 20분 34초 +0900 (KST)
보낸이 "JUNGPAUL" 주소록에 추가 수신거부에 추가
받는이 clio53@hanmail.net, clio53@nonchurch.net
박상익 교수님, 그 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한 가지 의논드릴 일이 생겨서 연락을 드립니다.
저희 기독교사연합에서 매년 교사로서 정말 모범이 되는 교사들을 뽑아서 상을 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명 좋은교사 상이죠.
그런데 저희가 상의 이름을 가지고 고민하다가 "김교신상"을 하면 어떻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희 기독교사연합이 추구하는 교사상이 김교신 선생님과 같은 교사이기 때문에 매우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가족이나 혹 무교회 모임과의 사전 허락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한 번 의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혹 서울 올라오는 길 있으면 한 번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 연락처는 019-251-1633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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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2/8(토)
"김교신 상(賞)" 제정 소식(2)
기독교사연합의 <김교신 상> 제정 건 때문에 2월 8일 오후, 유희세 선생님과 이진구 선생님 두 분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다행히 두 분 다 찬성하신다는 의견을 밝혀오셨습니다.
하지만 유희세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교계 일각에서 무교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물론 터무니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이점이 나중에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유 선생님께 말씀드리길, 기독교사연합 측에 그런 우려를 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교신 상>을 제정할 뜻이 있는가?"
하는 의사를 타진한 후, 그래도 그쪽에서 무방하다고 한다면 <김교신 상> 제정을 양해하는 것으로 하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를테면 조건부 양해라고나 할까요?
물론 유희세 선생님도 저의 제안에 찬성해 주셨습니다.
이진구 선생님도 흔쾌히 동의해주셨습니다.
제가 유희세 선생님이 이런저런 우려를 하고 계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이진구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문제가 불거지면 김교신 선생이 더 널리 알려질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시더군요.
위기가 오히려 기회라는 것이지요.
연로하신 선생님께서 젊은 사람보다 더 탄력적인 사고를 갖고 계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끝으로 정병오 선생님과도 전화 통화를 했는데,
김교신 선생을 기독 교사의 모범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오셨습니다.
정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김교신 상>의 구체적인 시상방법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 금년 연말에 첫 시상을 할 예정이며, 절차가 확정되면 널리 추천을 받고, 공정한 심사를 거쳐 시상을 하겠다고 합니다.
추후 구체적인 시상 방식이 정해지면 제게 알려주시기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이상으로 경과 보고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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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2/25(화)
제9회 무레사네 3월 22일(토) 대전 보문산에서...
긴 겨울의 터널이 끝나고 저만치 새 봄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겨울 내내 이런저런 이유로 못떠났던 무레사네를 3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이번에 갈 곳은 대전 보문산입니다.
해발 400미터의 아담한 산이어서 등산이라기보다는 가벼운 산책하는 기분으로 오셔도 됩니다.
수도권, 영남, 호남 등지에서 오시기에 가장 가까운 교통편의성 때문에 대전으로 정했습니다.
물론 가벼운 등산장비(등산화 등)를 갖추고 오시면 더욱 좋겠죠.
(그래도 산은 산이니까요. ^^)
만약을 대비해서 우산도 준비하시구요.
일시: 2003년 3월 22일 토요일 오전 10시 정각까지
집합장소: 대전역 출구(열차표 내고 밖으로 나오는 곳)
해산시간: 당일 오후 8시 이후
오실 분들은 미리 왕복 열차표를 예약해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주말에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좌석을 잡기가 곤란하거든요.
김밥, 과일 등 각자 먹을 음식을 "조금씩" 준비해오시면 좋겠습니다.
(너무 많이는 말구요. 어떤 때는 음식이 남아서 걱정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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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4/1(화)
기독교사연합 소식지에 실린 "김교신賞"진행상황
정병오 선생님이 보내주신 "좋은 교사" 소식지에 김교신 상 제정에 관련된 소식이 실려 있기에 그대로 퍼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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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상" 제정 계획
기독교사 연합이 김교신 선생의 유족들과 협의하여 5월 중 김교신 상을 제정할 예정이다.
이 같은 결정은 원래 좋은 교사 운동의 귀감이 되는 기독교사들을 발굴하여 시상하려는 계획을 가졌던 기독교사연합이, 기독교사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교신 선생님의 이름을 따서 상을 제정하자는 류대영 교수(한동대)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다.
일제 시대에 45년 생애 중 27세부터 42세까지 15년간을 기독 평교사로서 계시다가 생애를 마친 김교신 선생이야말로 기독 교사의 모범이 될만한 분이라는 점에서 많은 교사들이 이 상의 제정에 공감을 표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상 기준 및 운영 방식은 별도의 논의를 통해 5월중에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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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4/27(일)
김교신 선생 기념강연(5월 11일)
때: 2003년 5월 11일(일요일) 오후 2시
곳: 서울 종로 2가 YMCA
말씀: 유희세(전 고려대 교수), 박상익(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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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6/11(수)
제10회 무레사네 6월 21일(토) 서울 북한산에서...
무레사네 행선지를 서울 북한산으로 정했습니다.
지난번 김교신선생 기념강연 파한 뒤 만찬 자리에서는 14일(토)에 해인사를 가는게 어떻겠는가 하는 말도 나왔습니다만, 아무래도 대학생들이 19, 20일까지 기말시험을 봐야 하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레사네에 관심 있는 대학생들이 수도권에 많다는 현실도 감안했습니다.
6월 21일(토요일) 오전 10시 30분까지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정문앞>(이순신장군 동상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곳이죠?)에서 모입니다. 여기에서 모여 지하철로 함께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수도권에 거주하시는 분들, 그리고 대학생 여러분의 참여를 바랍니다.
준비물은 간단한 등산장비만 갖추시면 됩니다.
오실 분은 가능하면 제게 이메일(clio53@hanmail.net)을 보내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행사진행상 인원파악이 되면 효율적이라고 생각되어서입니다.
(물론 그냥 오셔도 됩니다.^^)
현재 경북대의 박완, 진익렬 교수님, 한국기술교육대의 임세영 교수님이 참석하기로 확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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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7/8(화)
<성서조선> 영인본 CD 출간 안내
*** 20여 년에 걸쳐 발굴 복원해 낸 식민지 시대 민족 기독교의 간증록! 성서조선 영인본 CD
CD롬 형태로 제작된 『성서조선 영인본 CD』
일제 시대 민족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부르짖다 폐간 처분된 『성서조선(聖書朝鮮)』 전권(全卷)이 담긴 『성서조선 영인본 CD』(이하 『성서조선 CD』로 약칭)가 발간됐다. 창간호(1927년 7월호)부터 폐간호(1942년 3월호)까지 158권 전권이 한 장의 CD에 수록된 『성서조선 CD』는 제목 및 필자 이름으로 검색이 가능하여 책자 형태의 영인본보다 이용에 편리하다. 또 책자가 아닌 CD롬 형태의 제작 방식을 취함으로써 제작비를 대폭 낮추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90,000원)에 공급할 수 있어 일반 독자들도 조금이라도 덜 부담이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이번에 발간된 『성서조선 CD』는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한 1927년부터 더욱 노골화된 1940년대 초반까지 15년 동안에 발간된 『성서조선』 전권이 발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수록된 만큼 일제 시대 기독교 관계 연구자는 물론이고 국어 관계 연구자, 한국사 관계 연구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울러 『뜻으로 본 한국 역사』의 초고라 할 수 있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 역사」와 같은 함석헌의 글(117편)을 비롯해 남강 이승훈의 종증손으로서 풀무학교를 세우는 등 기독교적 이상사회 건설을 지향했던 이찬갑의 글(22편), 다석 류영모의 글(10편) 등을 당시의 원문 그대로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 독자들에게도 상당한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일제 시대 민족 기독교의 증언록 『성서조선』
『성서조선』은 그간 기존 교회의 제도와 교리적 모순을 비판한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주창자들이 발간하던 동인지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 사사(師事)한 김교신(金敎臣)?함석헌(咸錫憲)?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류석동(柳錫東)?양인성(楊仁性) 등 6명이 창간한 관계로 더욱 그렇다.
하지만 “다만 우리 염두(念頭)의 전폭(全幅)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朝鮮) 이자(二字)이고 애인(愛人)에게 보낼 최진(最珍)의 선물은 『성서(聖書)』 1권뿐이니, 양자(兩者)의 일(一)을 버리지 못하여”에서 택한 제호가 『성서조선』이고,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근(骨筋)을 세우며 그 혈액(血液)을 만들고자” 하는 동시에 “넓게 깊게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이상 『성서조선』 1927년 7월호 「창간사」에서)고자 발간하기 시작한 만큼 『성서조선』에서는 민족적 색채가 두드러졌다.
민족 기업가이자 오산학교 설립자로서 나중에 고당 조만식이 “조선이 낳고, 조선을 위하여 울고 웃고, 조선을 위해 죽었으며, 시신(屍身)까지 민족교육을 위해 바쳤다”고 추도한 남강 이승훈이나, 복음병원을 세워 행려병자의 치료에 나섰으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라는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는 등 성공한 의사이면서도 만년에 집 한 채 없이 병원 옥상에서 지낼 정도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장기려 등 고정 독자들 가운데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많았던 것도 그래서이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압수 소각 폐간
그러나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국판 36쪽 안팎에 발행 부수가 300부를 넘지 못하는 수준의 잡지였음에도 『성서조선』은 발간 초기부터 일제의 집요한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했다. 급기야는 1942년 3월호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개구리의 소생을 통해 조선 민족의 소생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관계자가 전원 검속되고, 관련 간행물이 일체 압수?소각 처분을 받는가 하면 최종적으로는 김교신?함석헌을 비롯한 관련자 18명은 1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고, 잡지에 대해서는 폐간 처분이 내려지는 운명에 처하게 됐다.
『성서조선』 동인들은 발간 초기부터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1927년 7월 창간 당시 초대 발행인과 편집인을 일본에 있는 류석동과 정상훈으로 하고, 발행소를 도쿄의 성서조선사로 한 것도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또 1930년대 후반 이후로는 발행인이자 주필인 김교신이 자신의 일본 벗들 중에서 발행인을 내세우고, 비용은 더 들망정 제작 자체를 일본에서 하는 것을 여러 차례 고민한 것도 모두가 조선총독부의 검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성서조선』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기만 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는 7월호가 8월이 되어서야 발간되는가 하면, 글의 중간 부분이 빈 상태로 발간된다든가 혹은 전연 엉뚱한 글이 채워져 나오는 일이 거의 매달 거듭되는 식이었다.
기독교에서 한글 표기법, 생활 풍속까지 - 당시 삶의 모습 보여 줘
『성서조선』은 또 이름 그대로 철저하게 성서적이었다. 무교회주의적 관점에서 성서 각 권을 철저히 해석하고, 성서 연구에 필요한 희랍어?성서 동물학 등의 기초 분야를 고정적으로 다룬 것은 물론이고, 독자들의 생활 에세이도 성서와 기독교를 찬양하는 간증에 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였다.
오늘날 『뜻으로 본 한국 역사』의 초고라 할 수 있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 역사」와 같은 함석헌의 글(117편)이 그렇고, 남강 이승훈의 종증손으로서 풀무학교를 세우는 등 기독교적 이상사회 건설을 지향했던 이찬갑의 글(22편), 다석 류영모의 글(10편) 등이 그렇다. 그 점에서는 평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병환자로 『성서조선』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 문신활(11편), 문둥이에 장님이라는 이중고를 겪던 윤일심(6편) 등 『성서조선』의 필자들은 한결같이 예수와 기독교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성서조선』 안에는 기독교나 성서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황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가령 『성서조선』 자체는 일제 시대 한글 표기의 변천 과정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교신 자신이 조선어강좌를 수강하며 ‘우리말 바로 쓰기’에 열의를 보인 결과이다. 또 글 중간 중간에는 당시의 생활 풍속이 세밀하게 드러난다. 일례로 『성서조선』 발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일지(日誌) 형식으로 전하는 ‘성조통신(聖朝通信)’은 필자인 김교신의 신앙생활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학교생활은 물론 세상인심의 변천과 자전거 수리비, 목욕비의 추이 등 일상의 여러 풍경을 전해 주는 만화경이기도 하다.
『성서조선 영인본 CD』발간 후기
도서출판 부키에서 『김교신 전집』을 완간한 것은 지난 2002년 2월이었다. 하지만 『김교신 전집』을 최종적으로 완간한 것 같은 기분을 제대로 느낀 것은 『성서조선 영인본 CD』의 발간과 함께이다. 그렇다고 『성서조선 영인본 CD』의 발간 과정에서 무슨 특별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일제의 압수 소각으로 세상에서 사라지다시피 한 『성서조선』을 부활시킨 것은 김교신 선생의 후배와 제자들이다. 그들은 20여 년의 세월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에 『성서조선』이 있을 만한 곳을 모두 찾아다녔다. 심지어는 검찰청 창고까지 뒤졌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성서조선』 전권 2질 중 1질은 지금 독립기념관에 가 있고, 나머지 1질은 20여 년 전 영인본으로 소량 제작되어 사전 주문자들에게만 배포되었다.
그러면 우리가 CD 영인본의 편집에 참여했느냐, 그것도 아니다. 데이터베이스를 다룰 줄도 모르는 우리가 『성서조선 영인본 CD』의 제작과 관련 한 일이라고는 『김교신 전집』의 편집 당시 원문 복구를 위해 기증 받은 2질의 『성서조선 영인본』을 CD개발업체에 갖다 주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성서조선 영인본 CD』가 발간된 지금에야 『김교신 전집』을 완간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 김의경이라는 사람이 『향린』 30호
(출처 : (http://hyanglin.org/moksun/hyanglinji/31/106.htm)
에 다음과 같이 쓴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애국자 김교신 … 선생님은 그렇게 뜨겁게 예수를 믿었으나 일본인들이 아닌 우리나라 기독교들로부터 악마처럼 위험시되었고 미움을 받았습니다. 『한국 문화사 대계』안에 김선량(金善亮)이 쓴 한국 기독교사에는 선생님의 이름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을 만큼 철저히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나 1986년에 제가 천안 옥천에 자리 잡고 있는 독립기념관에 기독교 사적을 전시한 기간에 들렀을 때 주기철 목사님의 항일 ‘순교 사적’과 나란히 김교신 선생님의 『성서조선』원본 한 권과 사적을 전시한 것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 없었던 일이 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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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8/6(수)
<성서조선 영인본 CD> 한국일보 기사
<한국일보> 2003년 7월 4일 10면
"성서조선" 영인본 20년만에 CD로
일제시대 민족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기록인 ‘성서조선’영인본이 20여 년 만에 CD로 복간됐다.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이 1927년 7월호로 창간, 1942년 3월호로 폐간될 때까지 158권이 발간된 ‘성서조선’은 민족주의 성격이 강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초고라 할 수 있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등 함석헌의 글 117편과 종교적 다원주의를 처음으로 개척한 기독교 사상가 다석 류영모의 글 10편 등이 실려있다. 폐간 사유도 1942년 3월호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개구리의 소생을 통해 조선 민족의 소생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김교신 선생의 후배와 제자들이 ‘성서조선’ 158권 전권 두 질을 찾아 한 질은 독립기념관에 기증하고 나머지 한 질로 1970년대 후반 영인본 한정판을 낸 바 있다. 이번 영인본 CD는 이 영인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김교신 전집 간행위원회가 발행하고 도서출판 부키가 펴냈다.
/남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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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8/6(수)
<성서조선 영인본CD> 경인일보 기사
경인일보 2003년 7월 4일 북월드 내용
김교신 전집간행위 "성서조선 영인본CD"
"성서조선" 전권(158권)이 담긴 영인본 CD가 발간됐다.
"성서조선"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에 의해 1927년 7월 창간돼 1942년 3월 폐간될 때까지 일제시대 민족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마지막 보루역할을 했던 잡지다.
이 잡지는 국판 36쪽에 발행부수가 300부를 넘지 않았으나 남강 이승훈, 장기려 박사 등 실천적 기독교 인사 상당수가 고정독자였을만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부터 일제의 감시와 통제 속에 발행되던 "성서조선"은 김교신이 쓴 43년 3월호의 권두언 "조와(弔蛙)"가 조선민족의 소생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관련자 18명이 전원 투옥되는 수난을 겪고 강제폐간됐다.
CD에는 15년 동안 발행된 "성서조선"의 발간 당시 모습 그대로 수록돼 일제 시대 기독교사는 물론 국어학과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뜻으로 본 한국 역사"의 초고라 할 수 있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등 함석헌의 글 117편, 풀무학교를 세우는 등 기독교적 이상사회 건설을 지향했던 이찬갑의 글 22편, 함석헌과 김교신의 스승 다석 유영모의 글 11편 등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누리미디어가 개발하고 도서출판 부키가 펴냈다.
/양훈도[yhd@kyeongi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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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8/13(수)
제11회 무레사네 8월 23일(토) 서울 북한산에서...
무레사네 행선지를 서울 북한산으로 정했습니다.
8월 23일(토요일) 오전 10시 30분까지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정문앞>에서 모입니다.
(이순신장군 동상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곳이죠? 세종문화회관 건너편입니다.)
여기에서 모여 143-1번 버스로 함께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수도권에 거주하시는 분들, 그리고 대학생 여러분의 참여를 바랍니다.
이번 북한산행의 일정은 전희채 선생님의 안내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직접 북한산에서 합류하고자 하시는 분은 전 선생님께 연락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011-9769-3466)
준비물은 간단한 등산장비만 갖추시면 됩니다.
오실 분은 "가능하면" 제게 이메일(clio53@hanmail.net)을 보내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행사진행상 인원파악이 되면 효율적이라고 생각되어서입니다.
(물론 그냥 오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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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8/22(금)
[필독]우천으로 무레사네 무기연기
내일 일기예보를 보니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군요.
서울 지역은 강수 확률 80%입니다.
도저히 일정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부득이 무레사네를 무기 연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일정은 추후에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처럼의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어 무척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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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8/22(금)
[알림]노평구 선생님 근황
노평구 선생님의 자부 되는 분으로부터 어제 전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죽 자택에서 요양하시던 노 선생님은,
며칠전 인천의 은혜병원(2병동)으로 옮기셨다고 합니다.
노인전문병원이라고 합니다.
병원 전화는 032-562-5101 입니다.
(노 선생님은 연세가 우리 나이로 올해 92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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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9/9(화)
[알림]노평구 선생님 별세(수정)
노평구 선생님께서 9월 8일 밤 11시경 타계하셨습니다.
인천 은혜병원에 계시다가 타계 후 서울대병원 영안실(7호실)로 옮기셨다고 합니다.
장의절차에 대해서는 가족분들과 유희세 선생님 등이 의논하고 계십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추석 연휴 때문에 장례식은 9월 15일(월)에 치러지게 되리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장지는 대전의 국립묘지로 정해질 것 같다고 합니다.
(노평구 선생님은 일제 때 배재학교 재학 중 1930년
전국으로 번진 광주학생사건에 참여하셨다가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독립유공자이십니다.)
여러가지로 상황은 유동적입니다.
별도의 소식이 있으면 다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추신1
오늘(9월 9일) 오후 6시에 서울대병원 영안실(7호실)에서 입관예배가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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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9/10(수)
[알림]노평구 선생님 장례식 일정(수정)
9월 9일 입관예배는 여러분들이 참석하신 가운데 서울대병원 영안실(7호실)에서 치러졌습니다.
9월 12일(금) 오후 6시에는 추도모임이 있을 예정입니다(감화회 형식).
이어 15일(월) 오전 7시에는 발인예배가 있고,
예배 끝난 후 서울을 출발하여
오후 2시에 대전국립묘지에서 장례식이 거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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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9/10(수)
[언론보도]애국지사 노평구선생 별세(수정)
신문기사 중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알려드립니다.
노평구 선생님은 1930년 2월 배재중학 3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여 1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노평구전집> 참조)
기타 언론보도(추도문 등)는 <믿음의 선배들> 섹션에 올려두었습니다.
( <-- 화면 왼쪽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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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03년 9월 10일자.
애국지사 노평구 선생 별세
애국지사 노평구(91) 선생이 8일 오후 10시30분께 노환으로 별세했다.
함북 경성에서 난 고인은 1930년 2월 경성 어랑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200여명을 모아 ‘일본 제국주의 타도’등의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행진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고인은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쓰카모토 토라지한테서 성서를 배웠다.
그는 해방 뒤 귀국해 46년부터 ‘성서연구’를 발행하고 김교신, 함석헌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운동을 이끌어 왔다. 고인은 1995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2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은 15일 오전 10시이며 대전국립묘지애국지사에 안장된다. (02)76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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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3년 9월 10일자.
애국지사 노평구선생 별세
애국지사 노평구(盧平久) 선생이 8일 오후 10시30분께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함북 경성(鏡城) 출신인 고인은 1930년 2월 어랑공립보통학교 재학중에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약 200명의 학생을 규합하여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이 적힌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항일시위 행진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95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15일 오전 10시. (02)76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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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2003-09-09 () 00면 308자
애국지사 노평구 선생이 8일 오후 10시30분쯤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함북 경성 출신인 고인은 1930년 2월 어랑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200여명을 규합,‘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이 적힌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항일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고인은 1995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5일 오전 10시이며 장지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02-76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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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2003-09-10 () 16면 240자
애국지사 노평구(盧平久.사진) 선생이 8일 오후 10시30분쯤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함북 경성 출신인 고인은 1930년 2월 어랑공립보통학교 재학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200여명을 규합,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이 적힌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항일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빈소는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 7호실 발인 15일 오전 10시. (02)76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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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3년 9월 10일자
애국지사 노평구(盧平久) 선생이 8일 오후 10시30분께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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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경성 출신인 고인은 1930년 2월 어랑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200여명을 규합,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이 적힌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항일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
고인은 1995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
빈소는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 7호실, 발인 15일 오전 10시, 장지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
☎(02)760-2028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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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0/5(일)
<노평구전집> 구입처 안내.
<노평구전집>은 노평구 선생께서 만년에 개인적으로 간행하신 것이라서 시중에서 구입이 불가능합니다.
필요하신 분은 02-502-0055 "소담 어머니"께 연락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노평구전집>은 모두 1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1부(1-5권) "종교와 인생"
2부(6-11권) "성서연구"
3부(12-16권)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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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0/6(월)
제11회 무레사네 10월 18일(토) 서울 북한산에서...
지난 8월 비 때문에 연기했던 11회 무레사네 행선지를 다시 서울 북한산으로 정했습니다.
10월 18일(토요일) 오전 10시 30분까지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정문앞>에서 모입니다.
(이순신장군 동상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곳이죠? 세종문화회관 건너편입니다.)
여기에서 모여 143-1번 버스로 함께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정각 11시에 출발하려고 합니다.)
북한산 어느쪽 길을 택해서 산행을 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광화문에서 집합하도록 하겠습니다.
준비물은 간단한 등산장비만 갖추시면 됩니다.
PS. 경북대의 두 분 교수님과 저는 서울역에서 8시 열차(31열차)로 귀가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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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1/15(토)
제12회 무레사네 대구 팔공산에서 11월 22일(토)
무레사네 이번에는 대구 팔공산에서 갖기로 합니다.
11월 22일(토)입니다.
동대구역에서 아침 10시 30분에 집합입니다.
참고로 박상익(대전역 출발)과 임세영 교수(천안역 출발)는 다음과 같이 열차표를 예약했습니다.
동대구 도착 시간 10시 19분
새마을 9열차 4호차
동대구 출발 시간 20시 06분
무궁화 252열차 3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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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1/20(목)
홍순명선생이 쓰신 새 책 소개.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이야기-풀무학교 홍순명 선생의 이야기 모음집>전 2권 (부키)
(이 책에 대한 신문 서평은 <인문학의 향연> 섹션에 올렸습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 <심청전>, <홍길동전>, <춘향전>, <흥부전>의 이야기를 다른 시각으로 새롭게 풀어 썼다. 무엇보다, 지배자의 시각이 아닌, 그 시대에 들풀같이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모두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심청은 마한 사람으로 승자인 백제 군인들에게 미운 털이 박혀 팔려나가는, 군사문화의 희생양으로, 신분 차별없는 새로운 사회를 꿈꾼 영웅 홍길동은 불운한 혁명아로 그려진다. 또, <춘향전>은 몽룡에게 초점을 맞추어 민중과 함께한 조선의 브나로드로 새롭게 해석된다.
새롭게 썼지만, 주인공의 이름과 성격, 주요 사건 등의 기본 골격은 모두 그대로 남겨 두고, 시대 배경과 사건 전개만 달라진다. 옛이야기가 소중한 유산이긴 하지만, 지금의 세대와는 맞지 않는 사상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비민주적 상하 관계와 형식화된 도덕을 답습시킨다는 맹점이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모순점을 바로잡아, 가족이나 당파를 초월한 공동체 전체를 위한 "선"을 이야기한다. 그러기 위해, 흥부, 성춘향, 심청, 이몽룡에게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을 투영한다. 외세의 침탈, 야만적 군사문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옛이야기의 주인공들의 모습이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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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2/2(화)
[책소개]<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이야기>1,2권
부키출판사 홈페이지에 실린 자료입니다.
http://www.bookie.co.kr/board/view.php?id=bookiesbook&no=89
1. 이 책은 …
이 책에서 「선녀와 나무꾼」「심청전」「홍길동전」「춘향전」「흥부전」 같은 우리 전래이야기는 철저하게 재창조된다.
연못에서 목욕하다 나무꾼과 결혼하는 선녀나 쌀 삼백 섬에 팔려가 인당수에 빠지는 심청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의적 행각을 벌이는 길동이, 몽룡을 기다리며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다 옥에 갇히는 춘향이, 제비가 물어다 준 씨로 부자가 되는 흥부의 경우에서 보듯 이 책에서도 주인공의 이름과 심성은 그대로이고, 주요 사건 역시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모두 바뀐다. 시대 배경이 달라지고, 사건 전개가 달라지며, 결말이 달라진다.
군사 문화의 희생양, 심청
가령 「새 심청전」에서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섬에 자신의 몸을 판 것이 아니다. 피정복민인 마한 사람으로 승자인 백제 군인들에게 미운 털이 박힌 탓에 팔려가는 것이다. 군사 문화의 태생적 한계인 야만성과 폭력성의 희생물인 셈이다. 그러나 심청은 그들을 모두 용서한다. 그것도 인당수 시퍼런 물속으로 뛰어들기 직전에.
불운한 혁명아, 홍길동
「새 홍길동전」에서 신분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며 개혁을 시도하는 홍길동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외관상으로는 공명심에 눈 먼 동료들 탓이기도 하고, 뚜렷한 신념이 없기 때문에 우왕좌왕하게 되는 백성들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왜란 이후의 혼란기라 하더라도 기존 질서라는 것은 강고할 수밖에 없음을, 혁명적인 방식은 내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몰랐던 탓이라고 밖에는 달리 평할 수가 없다.
조선의 브나로드, 이몽룡
반면 「새 춘향전」에서는 그래도 자그마한 성취가 이루어진다.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하여 옥에 갇힌 춘향이 구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몽룡은 그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아전들은 백성들의 살가죽을 벗기려 하고, 수령들은 아전들의 녹을 가로채고, 고관들은 뇌물을 받고 벼슬까지 파는’ 조선 말기의 극심한 혼란에 절망해 과거 시험 자체를 거부하고 ‘이러다간 남의 침략을 받기 전에 안에서 무너지고 말 것’이라며 백성들과 함께 일하며 백성들과 함께 공부하기로 결심한 몽룡은 그런 상황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춘향이 옥에서 나오게 된 것은 순전히 나중에 처남으로 밝혀지는 암행어사 덕분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몽룡의 결심은 변하지 않는다. 몽룡은 춘향과 함께 결국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민초들의 소박한 이상향, 선녀와 나무꾼
반만년 민족사를 이런 식으로 우리 전래이야기 속에 하나하나 담아 가던 지은이는 드디어 「나무꾼과 선녀」에서 자신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노다지만 걸리면 호의호식하게 해주겠노라는 광산꾼은 ‘사치 속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한숨이 들어 있는 법’이라고 싫다 하고, 투구 쓰고 갑옷 입은 무인은 ‘어떻게 하늘 뜻을 내세워 귀한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느냐’고 거부하고, 입신양명을 자신하는 선비는 ‘주인은 백성이오, 벼슬아치는 그들을 섬기는 사람인데, 어찌 주인 행세를 하느냐’고 공박하고, 학문의 세계로 안내하겠다는 학자는 ‘눈을 감고 해에 대해 말하는 것 같고, 눈을 뜨고도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피하고, 세상을 교화하자는 스님은 ‘일도 기도고, 생활도 수행이 되지 않느냐’며 외면하던 선녀가 ‘나도 모르게 말로 편을 가르고 남을 원망하였고 / 그간 생명을 가꾸기가 싫어 편한 대처로 갈 생각도 했고 / 형제를 대하듯 자매를 자매로 대하지 못했다’고 반성하는 나무꾼을 ‘마음 속 작은 불순도 고통으로 알았으니 / 그 일이 당신을 더욱 믿음직스럽게’ 한다며 남편으로 맞아들이는 장면을 통해서.
민족사의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진 흥부
이야기가 이쯤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가지 정형화된 레테르를 붙이게 마련이다. 몽상적이라느니, 낭만적이라느니, 비현실적이라느니, 이상주의적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새 흥부전」을 통해 그 모든 것이 얼마든지 현실화될 수 있는 일임을 제시한다.
조선이 명운을 다해가는 20세기 말, 놀부의 배다른 동생으로 태어난 흥부는 어려서는 신분 차별에 시달리고, 자라서는 일제의 압제에 찢기고, 나이 들어서는 이데올로기 갈등에 상처 입게 된다. 그 상처는 흥부에게 있어서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이다. 이 나라에는 혁명이 필요하다며 집을 뛰쳐나간 큰아들은 그 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어느 야산에서 무덤도 없이 시체가 된 줄만 알았는데 북쪽 땅에서 살아 있다는 소식이라도 나중에 알게 된 것이 그나마 위안일 뿐이다. 또 흥부의 어머니는 동족 간의 전쟁 중에 폭격으로 죽었고, 하나뿐인 딸은 전쟁 중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온 뒤 자살하며, 흥부 자신도 전쟁 이후 부역자로 몰려 몰매를 맞고 다리를 절게 된다. 하지만 흥부는 다른 누구를 탓하지 않는다. ‘같은 역사, 같은 말을 쓰는 형제끼리 저지른 짐승 같은 일을 부끄러워 어디다 말할 수 있겠나? 동포끼리 서로 해코지했으니 누가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도 내 몫을 치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찢기고 상처 입은 속에서도 흥부의 삶의 방식은 변할 줄을 모른다. 상처를 치료해 준 제비가 물어다 준 호박씨가 인연이 되어 호박을 심게 되고, 그 호박이 열매를 맺자 호박엿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팔게 되면서 살림이 펴져 전답도 장만했지만 흥부는 그 전답을 동네에서 공동으로 경작하도록 내놓자고 제안한다. 전답을 집과의 거리, 토질, 식구와 노동력에 따라 나눠주고, 그 관리는 동네 사람 중에 토지위원회(土地委員會)를 뽑아 맡도록 하되, 소출 중 10분의 1은 어려운 이 돕기, 농사 피해 보험, 동네 시설 기금으로 내놓으면 모두가 잘살 수 있다는 취지에서이다. 흥부의 그런 의견에 유기 농업의 보급에 힘쓰던 둘째 아들도, 마을의 장래를 위해 학교를 만들어 꾸려 나가던 막내아들도 모두 찬성한다. 흥부를 필두로 한 이상촌 건설을 향한 힘찬 발걸음은 그렇게 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교과서, 전래이야기
이 책의 주요 소재인 「선녀와 나무꾼」「심청전」「홍길동전」「춘향전」「흥부전」 같은 우리 전래이야기는 대대손손 우리 겨레, 특히 서민들의 심성과 정신을 키워 온 교과서나 다름없다.
나이 든 사람들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자장가 삼아 들으면서, 젊은 세대들은 TV나 책을 통해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효도와 충성으로 요약되는 삼강오륜의 덕목과 권선징악으로 귀결되는 도덕적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또 이웃간의 정을 중시하고 상부상조하는 우리의 소박한 미덕이 예찬되고, 서민들의 익살과 해학이 넘쳐나며, 지순한 사랑과 행복에 대한 천진한 동경이 펼쳐지는 장면 장면을 통해서는 우리의 고유한 생활문화를 자연스레 익힐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이야기 속에서 이상과 혁명을 향한 열정을 북돋우기도 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신분 차별에 대해 거부하는 장면에서는 평등이라는 고귀한 가치의 중요성을 배우고, 이상과 현실의 틈을 메우려는 꿈틀거림이 넘쳐나는 장면에서는 헌신과 용기의 필요성을 재삼재사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의 수난사와 미래의 희망을 노래하는 대서사시
하지만 현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 전래이야기가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전래이야기의 대부분은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족이나 당파를 초월한 공동체 전체에 대한 관념이 미약한 것이다. 또 비민주적 상하 관계를 고착화시키는 동시에 형식화된 도덕을 답습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체제 옹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경향이 강하다.
지은이가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우리 전래이야기의 이와 같은 모순점을 바로잡아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가 읽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지은이는 과감하게 선녀와 춘향이, 길동이, 몽룡이, 흥부에게 우리 민족이 겪은 모든 수난을 투영한다. 외세의 침탈, 야만적 군사 문화의 횡행, 기득권층의 후안무치한 보신주의, 기회주의적이거나 공명심만 가득한 지식인…. 선녀와 심청이, 길동이, 몽룡이, 흥부는 그 속에서 신음한다. 하지만 지은이는 그들 모두에게 희망을 심어준다. 군사 문화의 희생양 심청은 용서와 화해를 통해, 불우한 혁명아 홍길동은 미약하지만 작은 불씨를 남김으로써, 조선의 브나로드(V narod) 이몽룡은 실천의 한 발자국을 내딛음으로써, 민족사의 고통을 한 몸에 걸머진 흥부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음으로써 선녀와 나무꾼이 그리던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이야기』라는 이 책의 제목은 바로 거기서 나왔다. 이 책이야말로 심청이와 길동이, 몽룡이, 흥부로 상징되는 이 땅의 학대 받고 고통 받는 민초들이 만들어 내는 희망찬 미래를 노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책의 지은이에 관하여
이 책의 지은이 홍순명(洪淳明) 선생은 1937년 강원도 횡성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동네 서당 훈장을 하던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 시절 책을 통해 김교신, 함석헌, 노평구 선생 같은 분들을 접하게 되면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전쟁 통에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초?중?고교 교사 시험을 통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17세부터 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며, 권위주의적이고 군대식인 교육관행과 입시 위주의 교육방식에 실망해 있던 중 대안학교인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 제대와 함께 바로 합류해 1960년부터 교사와 ‘행정상의’ 교장 생활을 하다가 2002년 정년을 맞아 퇴임했다. 대안학교의 존재 근거는 학교 공동체를 통한 교육의 이상과 본질 추구에 있으며, 입시교육이 아닌 전인교육이 교육의 지향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실현, 더불어 살기, 무너진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생태 교육 및 평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현재 2001년 세워진 주민 풀뿌리 대안대학인 풀무환경농업 전공부의 교사 대표로 있으며, 쓴 책으로는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기르는 풀무학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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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2/2(화)
노평구선생 추천 성서참고서목록을 올렸습니다.
노평구 선생께서 <성서연구> 300호(1979.12)에 게재한 성서공부 참고서 목록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갤러리>에 올려두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고자 하시눈 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미지를 복사하셔서 간직하셨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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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3/30(화)
[알림]독자마당 글쓰기를 당분간 제한합니다.
논처치닷넷은 무교회신앙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만든 홈페이지입니다.
누구든 마음대로 들어와 읽을 수 있고
또 논처치닷넷의 취지에 맞는다면 누구든지 자유롭게 글을 남길 수 있게 하려는 취지에서
회원가입이나 로그인 같은 별도의 설정 없는 "완전한 개방원칙"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4년 동안 운영을 하다보니 알아야 할 필요(?) 없는 분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결과 "광고" 목적으로 이 자리를 이용하는 분들이 극성스럽게 달라붙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요즘 들어 특히 심각해져서, 하루에도 여러 건 이런 광고물들이 독자마당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논처치닷넷 운영자가 24시간 이곳을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인하여,
당분간(!) 독자마당 글쓰기를 중지하기로 합니다.
단, 여기에 글을 남기실 분께서는 제게 이메일을 주시면
제가 편집하여 직접 독자마당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clio53@hanmail.net)
사실 이전에도 이런 방식(관리자가 메일을 편집하여 게시판에 올리기)으로 한 적이 더러 있었으니까 전에 없던 "새로운" 일을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부담없이 독자마당에 직접 글을 올릴 기회를 박탈하게 된 점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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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4/4(일)
[알림]홈페이지를 옮깁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무교회신앙 관련 자료를 처음 올린 것은 <다음 칼럼>에서 "어느 무교회주의자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쓰기 시작한 2000년 3월부터입니다.
이듬해인 2001년 7월 말 인터넷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뜻에서 도메인 주소를 얻어 무교회신앙 자료실(http://www.nonchurch.net/) 홈페이지를 열었습니다.
2004년 4월 현재 인터넷 글쓰기를 시작한지는 만 4년이 지났고,
홈페이지를 운영한지는 만 3년이 되어 갑니다. 홈페이지를 만든 다음부터 인터넷 글쓰기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다음 칼럼>보다는 홈페이지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볼품 없는 홈페이지임에도 그동안 많은 분들이 자료를 이용해주셨습니다. 하지만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가장 큰 도움을 얻은 것은 운영자인 저 자신이었습니다.
대단치 않은 신앙이나마 흔들림을 얼마간 줄여주는 버팀목 역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저의 홈페이지 운영방침은 <완전 개방>이었습니다. 로그인이나 회원 가입 절차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필요한 자료를 읽도록 하는 것이 저의 운영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해 운영하다보니 그것을 약점으로 여기고 상업광고들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악착스럽게 도배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 하나, 홈페이지를 운영하려면 아무래도 홈페이지 제작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저로서는 그런 지식을 배울만한 능력도 시간적 여유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홈페이지에 에러가 발생해도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정해진 홈페이지의 틀 안에 오래 머물다보니, 스바냐가 말한 "찌끼위에 가라앉은 자"처럼 타성이 생겨 안주하려는 경향이 생기게 되는군요.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하여 저의 인터넷 글쓰기 형식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포털 사이트 <다음>에 새로이 카페를 개설하여 홈페이지에 있는 자료를 모두 옮겨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cafe.daum.net/nonchurch
사실 저처럼 문서 기능만을 주로 사용하는 경우 <다음>에서 제공하는 카페 형식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여태껏 운영하던 홈페이지보다도 기능이 더 뛰어난 부분도 많더군요. (예를 들면 활자 크기나 색을 바꿀 수 있다는 점 등입니다.)
걱정이 있다면 지난 3년간 홈페이지를 이용하시던 분들께서 행여 불편해 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찾았다가 홈페이지가 사라져서 서운해 하실 분도 계실테니 그것도 걱정입니다.
논처치닷넷(nonchurch.net)이라는 도메인 주소도 놓치기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제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체제로 옮겨가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 홈페이지는 2004년 7월말까지는 도메인 주소가 유효합니다. 아직 4개월 정도는 여유가 있는 셈입니다.
그 동안 홈페이지를 찾아주신 분들께서는 새로 개설된 카페로 발길을 옮겨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자료는 틈나는대로 천천히 옮겨놓도록 하겠습니다. 묵은 글을 옮기는 작업을 하면서 저도 자료들을 다시 한번 읽어볼 기회를 가질까 합니다.
자료에 묻은 먼지를 잘 털고 닦아서 새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읽기에 편하도록 활자도 키우고, 약간의 색채를 사용하여 시각적 효과도 가미할까 합니다.
카페는 "글읽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명실공히 "완전개방"입니다.
그러나 상업광고를 차단하기 위해, "글쓰기"는 회원가입 절차를 거치도록 설정해 두었습니다.
(그래도 회원가입을 하시면 운영자에게 격려는 되겠죠? 가끔은 벽을 향해 말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마음 내키는 대로 원하는 때 와서 자유롭게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혹 부족하거나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면 제게 메일로 넌지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고쳐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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