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홍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이 있다. 당홍은 멀리 고구려 때 당나라에서 귀화해 온 홍학사의 후예다. 토홍은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을 지낸 홍선행의 후손이다.
당홍과 토홍이라는 칭호도 바로 이같은 귀화파와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한다. 두 계보의 근원이 같은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토착파인 토홍의 역사보다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가 300년 이상 길다. 인구도 2000년 현재 토홍계는 30,662명으로 당홍계에 비해 훨씬 적다. 남양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의 지명이다.
토홍계 시조 홍은열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통합에 공을 세웠다.
조선 초기 당홍의 두드러진 인물로는 조선 개국공신 홍길민과 그의 아들 홍여방, 세조의 쿠데타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 홍윤성과 홍달손, 홍순손 형제가 있다.
홍윤성은 예조판서 등을 거쳐 세조 때 영의정에 올랐으며 홍달손은 좌의정, 홍순손은 판서를 역임하면서 남양홍씨의 기반을 닦았다.
1811년(순조11년) 평안도 농민반란을 주도한 홍경래도 당홍의 후손이다. 홍경래는 가산 다복동을 본거지로 우군칙을 비롯하여 각지의 장사, 기인, 술사 등을 모으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순조 11년 극심한 흉년으로 인심이 혼란해지자 2천 병력을 일으킨다. 평서대원수라 일컫고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가산, 박천, 곽산,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등 평북 일대를 휩쓸고 서울로 진격했다. 그러나 안주에서 관군에게 패하면서 그의 웅지는 꺾이고 말았다. 정주성에 웅거하며 재기를 노리던 그는 성 밑에 굴을 파고 화약을 터뜨린 관군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만주에서 항일무력투쟁을 벌인 전설적 영웅 홍범도 장군도 남양홍씨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