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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일본 언론, 통수권 간범들을 영웅으로 묘사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만주국 ④ 언론, 돌아서다
만주사변의 특징은 그전까지 군부의 확전 방침에 비판적이었던 언론들까지 일제히 찬성으로 돌아섰다는 데 있다. 대공황에 대한 해결책을 만주에서 찾고자 한 것이었지만 이는 시대의 목탁이란 언론 본연의 기능을 망각한 것이자 일본을 군국주의로 치닫게 만든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얼빈에 입성하는 일본군. 관동군은 와카쓰키 내각의 확전불가 방침을 비웃듯 하얼빈에 입성했다. [사진가 권태균]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만주군벌 장학량(張學良)은 북경 협화의원(協和醫院)에서 신병 치료 중이었다. 중국 국민정부의 장개석(蔣介石)은 관동군이 곧 도발하리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사변 일주일 전쯤인 9월 12일 장개석은 석가장(石家庄)에서 장학량을 만나 ‘일본이 도발할 경우 응전하지 말고 국제연맹에 제소하는 외교적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장학량이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관동군이 유조호 주변의 철로를 끊는 자작극을 일으키고 북대영을 공격했을 때 즉각 응전하는 대신 휘하 군대에 무저항 철퇴를 명했던 것이다(
이때 장학량의 동북군이 격렬하게 저항했다면 관동군은 그리 손쉽게 만주를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관동군은 1만~2만 명에 불과한 반면 동북군은 수십만 명이었다.
장개석의 무저항 철퇴 권고는 ‘안내양외(安內攘外)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먼저 국내의 홍군(紅軍:공산당군)을 소멸시킨 후 일본을 몰아낸다’는 정책이었다. 중국사의 전개 과정에는 외부의 침략보다 내부의 분열 때문에 무너진 적이 더 많다는 점에서 장개석의 ‘안내양외 정책’이 틀렸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러나 시대가 달랐다.
원세개의 북양정부가 몰락한 계기도 1915년 일본이 산동반도에 대한 독일의 권익을 차지하고, 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이 차지하겠다는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1919년 5·4운동의 과녁은 바로 일본이었다.
그런데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보다 홍군 섬멸을 더 앞세우면서 중국 민중이 원세개를 버린 것처럼 장개석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했다.
관동군, 내각의 ‘사태 불확대 방침’ 묵살
일제와 전투는 홍군보다 국민당군이 실제로 훨씬 많이 치렀음에도 ‘국민당=비애국적 군대, 공산당=애국적 군대’라는 개념이 퍼지면서 국민당 정부에 대한 광범위한 민심의 이반이 생겼고 ‘백만대군’을 보유했던 장개석은 모택동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가게 된 것이다.
1 심양으로 들어가는 일본군.
2 조선(점령군)사령관 하야시 센주로. ‘월경장군’으로 불렸다.
3 10월 쿠데타를 기획했던 조 이사무.
비단 민족적 자각이 아니더라도 이 무렵 일본군의 도발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자작극을 전개한 다음 중국 측의 소행으로 돌려서 공격하는 방식은 이미 하나의 공식으로 소문났다. 그만큼 육군유년학교와 육사 출신들이 주축이었던 관동군의 영·위관급 장교들은 전쟁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의 문제는 이들이 군부 내에 ‘사쿠라회(櫻會)’ 같은 비밀 사조직을 만들어 여러 차례 쿠데타를 기도하고 불법 침략을 일삼았음에도 처벌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行) 내각이 대공황의 유탄을 맞아 물러나고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내각이 들어선 것은 만주사변 4개월 전인 1931년 4월이었다. 와카쓰키 총리와 시데하라(幣原) 외상은 19일 아침 신문을 보고서야 만주사변 발발 소식을 알았을 정도였다. 시데하라 외상은 긴급 각료회의를 열어서 ‘사태 불확대 방침과 국지적 해결 방침’을 결정하고 미나미 지로(南次郞:조선총독 역임) 육군대신을 통해 관동군에게 정부 방침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관동군은 와카쓰키 내각의 지시를 비웃으면서 하얼빈으로 전선을 확대했다. 9월 19일 밤 와카쓰키 총리는 원로 사이온지(西園寺公望)의 비서 하라다(原田熊雄)에게 “나의 힘으로는 군부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폐하의 군대가 폐하의 재가 없이 출동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지만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무력감을 토로해야 했다. 미나미 육군대신은 “사태가 여기에 이른 이상 일본인 보호뿐만 아니라 만주와 몽고의 특수권익을 위해서 정부는 큰 결심을 할 때가 왔다”고 만주사변 추인을 압박했다.
정부에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 조선(점령)군사령관이 21일 오후 1만여 명에 달하는 혼성 제39여단 병사를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보냈다. 동북군이 저항한다면 1만~2만 명의 관동군으로 상대하기 버거우리라는 생각에 부랴부랴 조선주둔군의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조선주둔군의 불법월경은 자작극을 벌이고 이를 구실로 침략한 관동군의 행위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자작극은 누구의 소행인지를 놓고 다툴 여지라도 있었지만 불법월경은 그마저도 없었다. 이는 일본 군부에서 내각을 무시하는 근거로 즐겨 애용했던 일왕의 통수권(統帥權)까지 무시한 ‘통수권 간범(干犯)’에 해당했다.
통수권은 이토 히로부미가 프러시아(독일) 헌법을 모방해 만들었던
일본군이 내각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은 통수권이었다. 비록 제55조에 “국무(國務) 각(各) 대신(大臣)은 천황을 보필해서 그 책임을 진다”는 조항도 있었지만 군부는 자신들은 일왕에게 직속된 군대지 내각에 소속된 군대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 일본 군부가 전개했던 모든 군사침략에는 일왕이 최종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리가 성립한다.
이런 조항에 비추어 봐도 조선(점령)군 사령관 하야시가 마음대로 만주로 들어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통수권 간범’이었다.
그러나 와카쓰키는 하야시의 불법월경 사실을 알고 나서도 이를 처벌하는 대신 ‘이미 만주로 들어갔다면 어쩔 수 없다’고 추인했고 내각에서는 ‘만주로 들어간 조선군에게 특별 군사비를 지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일왕 히로히토는 불법 월경한 조선(점령)군에게 특별군사비를 지출하자는 안건을 추인했다. 그러자 22일 오전부터 ‘천황이 (불벌월경을) 재가했다’는 전보가 만주로 쏟아졌다. 이 조치로 일왕 히로히토는 만주사변의 최종 책임자가 된 것이다. 하야시는 이후 ‘월경장군(越境將軍)’이란 별명을 얻게 된다.
쿠데타 세력, 요정서 기녀 끼고 구국 외쳐
만주사변이 기존 사건과 달랐던 것은 일본 언론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 있다. 그전까지 만몽 문제에 대한 일본 군부의 방침을 비판하던 아사히(朝日)신문·히비신문(日日新聞)·지지신보(時事新報) 등은 20일 조간부터 손바닥 뒤집듯 과거의 논조를 바꾸면서 관동군 발표 내용을 앵무새처럼 보도하기 시작했다. 만주사변에 대한 일본 언론의 태도는 대국민 선동에 불과해 침략자들은 영웅으로 변모했다.
일본이 본격적인 군국주의로 치닫게 된 주요한 계기가 언론이 비평이란 본연의 기능을 망각하고 군부의 나팔수 노릇을 자처한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의 이런 태도에 발맞춰 사회 각 분야가 일제히 만주사변을 지지하고 나섰다. 군부의 망동을 막아야 할 추밀원 부의장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驥一郞:전후 A급 전범으로 종신형, 사후 야스쿠니 신사 합사)는 니노미야(二宮治重) 참모차장에게 “만주에서 일본군이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해도 미국이나 소련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없는데 왜 육군은 좀 더 공격적인 자세로 중국을 공격하지 않는가”라고 점령지 확대를 주장했다. 9월 25일에는 일화실업협회(日華實業協會), 28일에는 일본상공회의소 등이 만주사변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을 비롯해서 일본 전체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처럼 전쟁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른바 만주특수에 눈이 먼 것이다.
와카쓰키 내각을 더욱 위축시킨 것은 10월 군부 쿠데타 소문이었다. 실제로 삼월사건, 즉 3월 쿠데타를 계획했던 사쿠라회의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郞) 등은 초우 이사무(長勇) 소령, 다나카(田中<5F25>) 대위 등 영·위관급 장교들과 불확대 방침을 결정했던 와카쓰키 내각을 무너뜨리려 했다. 1931년 10월 21일 군부가 봉기해 와카쓰키 총리를 비롯한 모든 각료를 살해하고 군부내각을 세우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0월사건으로 불렸던 10월 쿠데타 계획도 삼월사건처럼 무위에 그쳤다. 교육총감부(敎育總監部) 본부장 아사키 지사로(荒木貞夫)의 보고를 받은 미나미 육군대신이 도야마(外山) 헌병사령관에게 주모자 구속을 명령했고 10월 17일 14명이 금룡정(金龍亭)에서 구속되면서 불발로 끝났다. 헌병대의 고사카(小坂慶助)가 ‘두 미희를 좌우에 거느리고 놀고 있었던 조 이사무(長勇)를 검거했다’고 회고한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쿠데타 세력들은 매일 밤 도쿄 시내 아카사카(赤坂)·신주쿠(信宿) 등의 고급 요정에서 미희를 끼고 술 마시면서 구국을 외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총리와 정부 각료 다수를 살해하려던 10월 쿠데타 주모자들에 대한 처벌은 며칠 근신이 전부였다. 반면 그들에 의해 살해당할 뻔했던 와카쓰키 내각은 그해 12월 무너지고 말았다. 1931년 12월 13일 뒤이어 취임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는 이듬해 5월 청년장교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5·15사건). 일본 사회는 통제불능의 집단정신병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일왕 “만주사변은 자위전쟁” 강변… 미·영 강력 반발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만주국 ⑤ 상해사변과 윤봉길 의거
제국 일본에는 교육칙어(敎育勅語)와 군인칙어(軍人勅語)의 두 칙어가 있었다. 1890년 일왕 메이지(明治)가 반포한 교육칙어는 “짐은 우리가 황조(皇朝)들의 도의(道義)국가 실현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기초로 생겨난 나라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충효라는 양대 기본을 주축으로……”라고 시작하는데 군국주의 시절 모든 교사와 학생들이 받들어 봉독(奉讀)해야 했다.
그보다 조금 이른 1882년 1월 일왕 메이지(明治)는 ‘군인칙유(軍人勅諭)’를 내린다. “우리나라의 군대는 대대로 천황이 통솔하고 있다”로 시작한다. 군인들의 정치 참여를 엄금시킨 것이 특징이었다.
“세론(世論)에 현혹되지 말고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다만 오직 군인으로서 자신의 의무인 충절(忠節)을 지키면서 의(義)가 험하기는 산보다 무겁고, 죽음은 큰 새의 깃털보다도 가볍다고 각오하기 바란다. 이 절조(節操)를 깨면 생각할 수도 없는 실패를 부르니 오명을 받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상해로 진격하는 일본군 탱크,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중국 19로군의 모습. [사진가 권태균]
이 칙유에서는 분명히 ‘세론에 현혹되지 말고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또한 이를 깨면 ‘생각할 수도 없는 실패를 부른다’라는 말은 군국 일본의 비극적 종말로 현실화되었다.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전쟁기계들은 어릴 때부터
청나라 숙친왕 딸이 ‘동양의 마타하리’로
해군 장교 후지이 히토시(藤井齊: 1904~1932)가
전후에 일왕 히로히토는
1 만주국 군대인 안국군 대장 복장의 가와시마 요시코(김벽휘). 청나라 황족 출신이다.
2 상해사변 때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일본항공대.
그러나 히로히토는 1932년 1월 8일 관동군의 만주침략을 자위전쟁이라면서 옹호하는 이른바 칙어(勅語)를 내렸다. 관동군이 북만주 치치하얼을 차지하고 남쪽으로는 1932년 1월 3일 발해 연안의 금주(錦州)까지 빼앗자 자위전쟁이란 말장난으로 이를 옹호한 것이었다.
만주 침략을 자위전쟁이라고 강변하는 이유는 1928년 8월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15개국이 체결한 부전조약(不戰條約)에 일본도 가입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외무장관 브리앙, 미국 국무장관 켈로그가 주도했기에 ‘켈로그-브리앙 조약(Kellogg-Briand Pact)’이라고도 불린다.
이 조약의 제1조는 국가의 정책수단으로 전쟁 포기를 선언했고, 제2조는 일체의 분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켈로그는 이 조약 덕분에 192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데, 자위를 위한 전쟁은 제재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만주 침략을 자위라고 강변한 것이었다. 국제사회가 즉각 제재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도 일본이 자위전쟁이라고 우겼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이때 심양이나 하얼빈 정도만을 점령하고 멈췄으면 만주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않은 나라들은 일본의 국지적 점령을 용인해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관동군은 금주까지 점령했고 일본 신문들은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기뻐 날뛰었다. 미국의 스팀슨 육군장관은 금주를 점령하고 기뻐 날뛰는 일본 신문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미국은 급기야 만주사변을 자위전쟁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대일 공세로 돌아섰다.
1905년 7월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차지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지 25년 만에 두 나라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만주사변을 일으킨 전쟁기계들은 만주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관동군은 드디어 중국 본토와 만주를 가르는 산해관(山海關)을 점령하고 욱일승천기를 꽂았다. 그리고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이용해 위성괴뢰국 만주국을 수립하려 했다. 일본이 만주를 직접 차지하면 부전조약 위반이므로 중국인들 스스로 만주에 독립국가를 세운 것이라고 강변하려는 책계였다.
미국과 영국의 자세가 점차 강경해지자 관동군은 또다시 모략을 꾸몄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동양의 마타하리’라고 불렸던 김벽휘(金璧輝: 1907~1948), 즉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였다. 본명이 애신각라 현우(愛新覺羅顯玗)인 가와시마 요시코는 청나라 숙친왕(<7C9B>親王)의 14번째 공주로 태어났다.
숙친왕의 고문이었던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의 양녀가 되어 가와시마 성을 쓰게 되는데, 청나라가 멸망한 직후인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다. 그 후 관동군 참모장 사이토 히사시(<658E>藤恒)의 중매로 몽골족 장군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3년 만에 이혼했다. 그 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영사관의 무관 다나카 유키치(田中隆吉: 1893~1972)의 애인이 되면서 첩보원이 되었다.
일왕, 상해 점령에 “전쟁 막았다” 칭찬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 관동군의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와 이시하라 간지가 가와시마의 애인인 다나카 유키치 중좌에게 만주에 쏠린 세계의 이목을 상해로 돌릴 수 있는 사건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사건이 상해사변이었다. 다나카 유키치 역시 히로시마 육군지방유년학교와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전쟁기계였다.
그는 패망 후인 1946년 1월 육군의 속사정을 밝힌
1932년 1월 10일 이타가키 등은 약 2만 엔의 자금을 상해로 보내 빨리 거사하라고 재촉했다. 다나카는 헌병대위 시게토우(重藤憲史)에게 실행을 맡기고 가와시마에게는 중국인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게 했다. 1932년 1월 18일 밤 일련종(日蓮宗) 승려 두 명이 신도 셋과 함께 ‘남무묘법연화경’을 외우면서 상해의 마옥산로(馬玉山路) 부근을 걷고 있을 때 반일(反日) 중국인들이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다나카와 가와시마가 돈으로 매수해 벌인 자작극이었다.
이 사건으로 상해 북사천로(北四川路) 및 홍강(虹江) 방면에 살고 있던 약 2만7000여 명의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때 다나카와 유키치의 공작으로 발포사건이 발생해 1월 28일 중·일 두 나라 군대가 충돌했다는 것이 다나카의 증언이었다.
와카스키 내각의 뒤를 이은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수상은 즉각 대규모 파병을 결정했다. 항공모함 2척과 구축함 4척을 포함한 대규모 해군 병력과 전 육군대신이었던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이끄는 상해파견군이 상해로 달려갔다. 채정해(蔡廷<9347>) 장군이 이끄는 상해 근방의 중국 19로군이 맞서 싸웠지만 항공모함까지 동원한 일본군을 꺾을 수는 없었다. 중국 민간인 사망자만 6000여 명에 달했다.
관동군의 예상대로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강하게 정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본은 상해에서 전투를 계속하는 한편 1932년 3월 1일 부의(溥儀)를 집정으로 삼는 만주국을 전격적으로 건국했다.
그리고 이틀 후 전투를 중지하고 3월 24일부터 정전협상에 나섰다. 4월 29일에는 홍구(虹口)공원에서 상해 점령 및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天長節) 행사를 개최했다.
상해를 점령해 기세가 드높던 이 행사장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 폭탄을 던졌다.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상해 일본거류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타(河端貞次)가 폭살되고 노무라(野村吉三<90CE>)·우에다(植田謙吉) 두 중장과 무라이(村井倉松) 총영사, 시게미쓰(重光葵) 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1933년 시라카와의 기일에 일왕 히로히토는 시종장 스즈키를 통해 “소녀들의 히나마쓰리(3월 3일의 전통 축제)날에 전쟁을 막아준 것을 기억하며”라는 단책[丹冊: 일본의 전통 하이쿠(俳句: 일본의 전통 시구)]을 하사했다. 시라카와가 남경까지 침략할 수 있었지만 상해만 점령하고 3월 3일 전투를 중지한 것을 ‘전쟁을 막아주었다’고 극찬한 것이다. 일왕 히로히토의 비정상적 의식 상태를 엿볼 수 있다. 이틀 전에 만주국을 수립한 일본으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기에 전투를 중지했을 뿐이었다.
만주국, 일본 대공황 해결… 한국에도 ‘만주 붐’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만주국 ⑥
일제와 손 잡은 부의
만주국은 역사 속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진 신기루 같은 왕국이었다. 그러나 활동무대가 절실했던 한반도의 청년들을 끌어들이는 블랙홀이 되었고 이후 한국사에도 깊은 잔영을 남겼다. 만주국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등장으로 극적인 효과를 드높였다.
1935년 4월 일본을 방문한 부의(오른쪽)가 히로히토 일왕과 같은 마차에 타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1931년의 9·18 사변, 즉 만주사변 소식을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애신각라(愛新覺羅) 부의(溥儀)는 천진의 일본조계지 안에 있는 장원(張園)에서 들었다. 선조들의 고향이 관동군에 유린되고 있다는 소식을 일본조계지 안에서 들어야 했던 부의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이다.
부의는 제국에 암운이 짙게 드리던 1906년 청조(淸朝)의 11대 광서제(光緖帝)의 동생 순친왕(醇親王) 재풍(載<7043>)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도광제(道光帝)였다.
그의 운명은 태어난 지 세 살이 채 안 된 1908년 서태후(西太后)가 임종을 앞둔 광서제의 후사(後嗣)로 지명함으로써 역사의 격랑 속에 빨려 들어갔다. 그해 11월 14일 서른일곱의 광서제가 독살설 끝에 세상을 떠나자 부의가 즉위해 선통제(宣統帝)가 되는데 서태후는 부의의 부친 순친왕을 섭정왕(攝政王)으로 삼아 어린 아들을 대신하게 했다.
2007년 광서제의 유발(遺髮:머리카락) 조사 결과 비소(砒素)가 검출되어 독살 의혹은 더욱 커졌는데 각각 서태후와 원세개(袁世凱)의 소행이란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부의는 1960년 자서전
1 만주국 지도, 1934년. 2 만주국 수도였던 장춘(당시 이름은 新京)에 있던 관동군 사령부. 사실상 만주국의 최고통치기관이었다.
부의를 다시 황제로 추대한 장훈복벽사건
1911년 손문(孫文)이 주도하는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순친왕은 원세개를 끌어들였지만 그는 혁명파와 손을 잡고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때 조선에 파견되기도 했던 원세개는 선통제 부의의 퇴위를 요구했고 협상 결과 청나라 조정과 중화민국 정부 사이에 ‘청제퇴위우대조건(<6E05>帝退位優待條件)’이 체결되었다.
골자는 부의는 퇴위 후에도 ‘대청황제(大<6E05>皇帝)’란 존호를 그대로 유지하며 황궁(皇宮:자금성 및 이화원)에서 생활하는 한편 정부로부터 매년 400만 냥의 생활비를 지급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부의는 명목상의 황제로 환관·궁녀들과 자금성에서 살았다.
그런데 황제 자리에 욕심이 난 원세개가 1915년 12월 제정(帝政) 부활을 선언하고 이듬해 원일(元日) 제위에 올랐다. 하남(河南)성 항성(項城)의 한미한 가문 출신 원세개의 즉위에 대해 북양(北洋)군벌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반대가 들끓자 원세개는 3월 퇴위했고 6월에는 사망했다.
이 무렵 부의는 두 번째 황제로 추대된다. 북양군벌의 장령이었던 장훈(張<52F2>)이 1917년 7월 1일 청조 부활을 선언하면서 부의를 복위시키고 자신은 의정대신(議政大臣)과 직예총독(直隷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이 된 것이다. 그러나 12일 만에 군벌 단기서(段祺瑞)에게 패해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도주했는데 이를 장훈복벽사건(張<52F2>復<8F9F>事件)이라고 부른다.
1919년 5월 부의는 중국어에 능통했던 영국인 관료 존스턴(Reginald Fleming Johnston·1874~1938)을 가정교사로 삼아 서구식 문물교육을 받았다. 훗날
부의가 일본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1923년 9월 일본의 관동(關東)대지진이었다. 지진 소식을 접한 부의는 요시자와 겐기치(芳澤謙吉) 일본 공사에게 자금성 내에 있는 보석 등을 의연금으로 전달했고 일본 정부는 대표단을 보내 부의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여기에 1924년 10월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이끄는 봉천군과 조곤(曹琨)·오패부(吳佩孚)·풍옥상(馮玉祥) 등이 이끄는 직예파(直隷派) 군벌이 맞붙는 제2차 봉직전쟁(奉直戰爭)이 발생하면서 부의는 더욱 일제와 가까워지게 된다. 봉직전쟁에서 승리해 북경을 차지한 풍옥상이 ‘청제퇴위우대조건’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는 부의를 자금성에서 내쫓았던 것이다.
마지막 황제의 안식처를 빼앗은 이 조치는 부의를 일본과 결탁하게 만든다. 당초 부의의 측근 정효서는 존스턴에게 상해나 천진에 있는 영국이나 네덜란드 공관으로 들어갈 수 있게 배려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내정간섭 우려가 일 것을 우려한 영국이 거부했다. 반면 관동대지진 때 인연을 맺은 요시자와 일본 공사는 즉각 부의의 요청을 수락하고 1924년 11월 북경의 일본공사관으로 들어오게 했고, 1925년 2월에는 천진의 일본조계지 내 장원으로 옮겼던 것이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를 일본 영사관이 관리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천진의 일본조계지에서 식객 노릇을 하던 부의는 선황들의 능(陵)이 도굴당하는 동릉사건(東陵事件)을 겪고 충격에 빠진다. 하북(河北)성 준화(遵化)시 창서산(昌瑞山)에 자리 잡은 동릉은 세조 순치제(順治帝)의 효릉(孝陵), 성조 강희제(康熙帝)의 경릉(景陵), 고종 건륭제(乾隆帝)의 유릉(裕陵), 문종 함풍제(咸<8C50>帝)의 정릉(定陵), 목종 동치제(同治帝)의 혜릉(惠陵) 등 5명의 황제릉과 자희태후(慈禧太后:서태후)의 정동릉(定東陵) 등 여러 황후의 능이 있었다.
그런데 국민혁명군 제12군 군장(軍長) 손전영(孫殿英) 군대가 건륭제의 유릉(裕陵)과 서태후의 정동릉을 도굴했다. 부의는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손전영이 이미 국민당 간부에게 손을 써 놓았기 때문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부의는 동릉사건 때 자금성 추방 이상의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천진의 일본조계지에서 울분을 삭이고 있던 부의에게 드디어 9·18 사변 소식이 전해졌다. 부의는 중국 정국에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지만 무대가 만주라면 사정이 달랐다. 게다가 만주를 둘러싼 국제 정세도 부의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당초 만주 침략을 기획했던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간지의 구상은 만주를 점령지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주를 일본이 직접 지배하는 것은 1922년 워싱턴회의에서 체결된 9개국 조약에 직접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포르투갈에다 일본과 중국까지 가입한 9개국 조약(Nine-Power Pact)은 각국 해군의 감축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중국의 주권·독립·영토보전에 관한 내용도 담고 있었다. 이 때문에 관동군은 만주를 직접 통치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만몽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중국의 행정적 지배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겠다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한국에도 영향
만주사변 발발 나흘 뒤인 1931년 9월 22일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 대좌, 이시하라 간지 중좌 등이 이런 내용 등을 담은
동북4성(길림·흑룡강·요녕·열하) 및 몽고를 영유해서 선통제(부의)를 우두머리로 삼는 신정권(新政權)을 수립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부의로서는 일본의 제의를 거부할 까닭이 없었다. 부의는 나아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와 일종의 충성맹세 비슷한 비밀협약을 맺었다. 새로 수립될 만주국의 외교, 치안, 국방과 국방상 필요한 모든 시설(철도·항만·수로·항공로)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일본에 위임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만주국 중앙 및 지방의 주요 인사에 대해서도 일본의 ‘지원과 지도’에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부의는 더한 사항이라도 양보할 생각이 있었다. 부의가 바란 것은 황제(皇帝)라는 칭호뿐이었는데 그나마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은 시기상조라면서 부의를 황제가 아닌 집정(執政)으로 결정했다. 부의는 이런 과정을 거쳐 천진의 일본조계지에서 6년 만에 나와 1931년 11월 13일 여순(旅順)의 남만주철도회사가 운영하는 대화(大和:야마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동양의 마타하리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김벽휘)는 천진에 잔류하고 있던 황후 완용(婉容)을 수행해 여순으로 향했다. 관동군의 공작을 받은 장경혜(張景惠)는 동북(東北)행정위원회 명의로 1932년 2월 18일 장개석의 국민정부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3월 1일에는 만주국(滿洲國) 건국 선언을 했다.
동북4성의 광대한 영토와 3400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만주국은 이렇게 역사에 등장했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홀연히 나타나 일본의 대공황을 일거에 해결하고 기근과 인구과잉에 시달리던 식민지 한국민에게도 ‘만주 붐’을 일으켰다가 군국 일제의 패망과 함께 갑자기 사라졌던 수수께끼 왕국이었다.
그러나 만주국이 한국사에 끼친 잔영은 깊고도 길다. 대표적인 예가 만주국에서 1937년부터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1961년 5월 15일 민주당 정부의 부흥부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는데 부흥부 차관 김준태(金濬泰)가 만주국 대동학원 출신이다. 1962년부터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