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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들떠 있던 사람들
동생이 온다! 가슴속에만 살아 있던 동생을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다는 것은 비 온 뒤 활짝 비치는 햇살처럼 황홀한 기쁨이었다.
2000년 8월 14일 우리 가족 일행은 올림픽 공원 안에 있는 파크텔로 모였다. 삼촌과 두 남동생과 한 여동생이었다. 이북에서 내려오는 가족 한 사람에게 할당된 최대 인원인 다섯 사람이었다. 대한적십자사에서 면담할 수 있는 5명의 명단과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주소를 적어 제출하라 했지만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더 많은 가족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했다. 개별 접촉 식사 등까지 합하면 6번의 기회가 있다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에 한 번에 5 사람씩이지만 교대로 더 많은 사람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여러 가족들의 신병을 확보하고 교대 상봉의 시나리오를 짜 놓고 있었다. 특정인 5명만 3일 동안 계속 만나야 한다는 것은 그 경비와 노력과 50년에 한 번 있는 기회를 생각할 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종으로 확인 한 것은 선택된 5명뿐이었다. 다른 친척들은 나이가 많아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허사였다. 「자기들 오씨끼리 똘똘 뭉쳐서 만나러 간다」고 아내가 불평하며 챙겨 준 짐을 들고 올림픽 파크텔로 온 것이다. 숙소는 온통 난장판이었다. 객실 배정을 받고 보니 5명 가족에 한 방씩으로 남녀 동숙이었다(그렇지 않은 가족도 있었다 함). 어려서는 한 방에서 같이 자기도 했지만 50이 넘은 여동생과 동숙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어떤 가족은 바깥사돈과 안사돈이 한 방으로 배정되었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기자들은 뭔가 기사꺼리를 얻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어떻게 해서 이산 가족이 되었느냐? 선물은 무엇을 준비했느냐? 준비한 선물을 좀 보여줄 수 없느냐? 만나면 맨 먼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이렇게 상봉을 하게된 소감이 어떠냐?
아예 이런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을 만들어 녹음해 두었다가 들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다가 적십자 안내원은 한 가족씩을 맡아 흩어지는 병아리들 모으듯 정신이 없었다. 각 방을 찾아와 적십자사가 마련한 선물인 손수건과 볼펜을 각 사람에게 하나씩 나누어주기도 했다.
우리는 오후에 각 가족 대표들이 모아 적십자사에서 베푼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다. 이 만남은 이산가족 상봉의 첫 단추를 끼우는 사건이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끝내지 않으면 2차 3차의 상봉이 순조롭지 않을 수도 있다. 상대방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하지 말라. 대답하는데 난처해하는 질문은 삼가 해라. 선물은 상식적인 선에서 하되 북쪽 동포가 좋아하는 품목은 유인물로 적어 놓았기 때문에 참고로 해라. 현금은 $1,000 이내에서 주도록.... 이런 주의였지만 별로 관심을 갖고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선물의 크기와 무게는 어느 정도라야 하느냐? 언제 갖다 줄 수 있느냐? 다만 빨리 만나서 선물은 전해 주고 싶은 생각 때문에 마음들이 들떠 있었다.
다음날 15일 코엑스의 상봉 장소에 오후 3시까지 가서 3시 반부터 면담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우리는 점심을 먹고 바로 2시쯤부터 탑승을 서둘렀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20대 정도는 될까 버스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각 가족마다 배정된 버스가 있었고 적십자 요원은 핸드폰으로 자기 식구들을 챙기고 있었다. 우리는 적집자사에서 나누어 준 손수건을 넣고 울 준비를 단단히 한 후 버스를 타러 갔다. 버스를 타러 가는데 한 사람이 꽃을 사 들고 왔다. 50년만에 만나는 가족에게 축하 꽃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꽃을 사러 호텔 지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축하하고 싶은 자기 심정이 다른 사람에게 뒤질 수 없었다. 꽃집은 수라장이 되고 버스가 출발하는 시간이 되어도 탑승자가 다 차질 않았다. 만일 적십자사가 전체 상봉가족들을 한 곳에 집결시켜 단체로 데려 가지 않았다면 시간을 지켜야 하고 보안이 필요한 이 상봉은 참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선두 차부터 맨 꼬리 차까지 점호가 끝나자 차는 한 줄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나갈 때 교통이 차단되어 줄지어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승용차에서는 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50년만에 있는 너무도 감격스러운 사건이기 때문에 짜증 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감격을 우리가 뽑힌 대표로 맛보기 위해 행진해 가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50년
코엑스에서 우리는 면회 장소로 한 줄로 걸어 들어갔다. 각 테이블에 북측에서 오는 사람을 한 사람씩을 배정하고 그 번호에 해당하는 가족이 미리 가서 그 테이블에 앉아 대기하게 되어 있었다. 100가정을 네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기자들의 취재 경쟁을 막기 위해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1/4상한은 YTN, 2/4상한은 KBS, 3/4상한은 MBC, 4/4상한은 SBS가 맡아 취재하기로 되어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며 복도를 걸어 들어가고 있는데 복도 양옆에 늘어선 사람들이 박수를 했다. 나는 혹 우리를 북측 인사로 오해하고 박수를 쳐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알아보고 박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50년 동안이나 사랑하는 가족을 가슴에 품고 얼마나 안타깝게 말도 못하며 살아 왔는가?> 하고 위로하고 축하하는 것 같아 와락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깐 기도했다. 「사랑하는 동생을 만나게 해주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손에는 그 동안 준비했던 우리 가족 사진들이 체계적으로 붙여진 사진 앨범이 들려 있었다. 홀홀 단신 이북에서 얼마니 외로웠겠는가? 나는 남녘에 이렇게 많은 혈육들이 살아 있다고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가 이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66년 12월이었다. 방첩대에서 동생이 이북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고 말해 주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쁨과 이북에 가족을 두었다는 두려움이 전율을 가져왔다. 그 뒤로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태 후 68년 1월에 청와대 기습을 목표로 무장공비 31명이 서울에 침입했다. 그 해 10월 말에 다시 울산 삼척지구에 120명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소식은 반갑고 두려운 소식을 들은 이후에는 살얼음을 걷는 조마조마한 뉴스들이었다. 제발 내려오지 말라. 한 하늘 아래 살아 있기만 한 것도 내겐 족한 소식이다. 75년에 나는 방첩대에서 출두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동안 접선한 일은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곧 연락하고 자수하는데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친절했다. 그러나 이렇게 불려갔다 나온 뒤는 힘이 빠지고 두려웠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인도하고 계셨다고 믿고 있다. 동생은 육사 16기생이다. 그는 육사를 수석으로 합격했으며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교관 요원으로 미국의 콜로라도 대학에서 학위를 하고 돌아 왔다. 또 나는 이북 동생의 소식이 전해 질 때 미국 하와이 대학의 동서문화 교류센터에 나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돈도 배경도 없는 시골 초등학교 교장의 자녀들이다. 하나님께서 일하는 사람들의 눈을 감겨 주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동생이 시인으로 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90년 9월의 일이다. 남북총리회담을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하고 있을 때 한겨레신문에 동생의 소식이 실렸다. 9월 4일이었다. 미국 LA에 살고 있던 김영희씨가 1990년 8월 13일부터 엿새 동안 열린 범민족대회에 북미주 대표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참석하여 동생 오영재씨를 만나고 술을 마신 기사를 자유기고가로 기고했던 것이다. 그 기사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우리의 밤 잔치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시고, 목이 쉬도록 노래를 많이 부르고, 또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린 이는 오영재였다.
그는 <반달>을 부르면서도 울었다. 어릴 적 고향집에서 동생들과 부르던 노래라고 했다. 혹 고향 소식을 들을까 하여 <통일예술>에 시 대신 회상기를 냈다는 오영재는 범밈족대회에 참가하는 해외동포단에 혹시 가족이 있을까 해서 그 명단을 열심히 들춰 봤지만 오씨 성을 가진 이조차 없었다고 서운해했다. 사흘에 한 번은 어머니 곽앵순 씨의 꿈을 꾼다는 그는 광주 사범 출신인 오유길 씨의 차남으로 「별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북으로 왔을 뿐, 당시 나에겐 아무 이념도 없었다」는 그는 누가 봐도 꾸밈없고 다정다감한 시인이었다. ............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밤 잔치에서 부르던 노래를 다시 불렀다. <우리의 소원> 등 통일 염원의 노래를 부를 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손을 잡았다. 서울에서 선배 예술인, 연극패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던 옛 시절이 생각났다. 평양에서 만난 북의 문인들과 그들의 어디가 다르단 말인가? 믿기 어렵겠지만 45년간의 장벽은 일주일간의 만남, 아니 단 하루만의 만남으로도 허물어질 수 있다고 감히 외치고 싶었다. 헤어질 무렵에는 빗속에 서서 모두 울었다. 남과 북, 북과 남은 아직도 멀리 서로 그리워만 하고 있었다. ....
동생의 삶이 분명해진 이때처럼 우리는 울고 기뻐한 적이 없었다. 글을 읽으면 그렇게 눈물이 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통일예술>을 구해 그의 수기를 읽었었다.
.....한 밤 중에 평양역에
사변으로 가득 찬 이 땅에서 살아 온 50여 평생, 쌓인 추억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은 군사복무를 마치고 내가 제대했을 때의 일들이다. 제대증을 받아 든 나의 심정은 착잡하였다. 남들은 부모형제들이 반기는 제 고향에 가게 되었다고 기뻐 들 했지만 나에게는 불비를 겪으면서도 살아 돌아오는 아들을 반겨줄 부모, 친척 단 한 사람도 여기 북녘 땅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여기서 나는 자기 한 생의 끝까지 몸에 붙이고 갈 직업을 선택하여야 할 시각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나간 다음에야 깨달음이 미치는 것처럼 부닥친 그 순간엔 언제나 현명하지 못한 법이며 더욱이 그 때의 나의 경우, 사회생활에 대한 리해와 지식이 너무도 박약했던 관계로 각이한 목적지로 향하는 렬차들이 저마다 승객들을 부르는 인생의 프렛트홈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올라탄 차칸이 평양시 서구역 건설 뜨레스트 로동자의 배치장을 쥐어 준 평양행 렬차였다.
밖에서는 늦가을의 찬비가 뿌리고 있었다.
빗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차창 가에 앉아 나는 난생 처음으로 가슴을 저미는 고독을 체험하였으며 분렬의 비극이 나의 일신상에 주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반겨줄 사람도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는 곳, 어린 시절 조선 지도를 그리며 연필로 그 이름을 적어본 것밖에 없는 평양, 그곳에선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그 어떤 인생행로의 발자욱이 그곳으로부터 이제 어디로 찍혀 갈지 알 수 없는 낯선 곳으로 나를 싣고 렬차는 빗속을 달리고 있었다.
함께 렬차에 올랐던 전우들이 도중 역들에서 내렸다. 그들에게는 맨발로 달려나와 안아 줄 감격적인 혈육간의 상봉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손을 놓지 않고 자기 집에서 며칠 쉬었다 가라고 간절히 권할 때마다 그들의 진정이 눈물겨웠고 그렇게 전우들이 내 곁에서 하나 둘 사라져 갈 때마다 나는 고독의 심연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더 깊이 빠져들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드디어 홀로 남아버린 나는 한 밤 중에 평양역에 내렸다. ....<통일예술에 실린 「나의 발자국」 중 일부>
나는 그렇게 외로웠던 그에게 이 가족 앨범을 안겨 주고 싶었다. 우리 형제와 자녀들은 벌써 부모님을 합해서 60명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외로움을 이제는 씻어야 한다.
3시 반에 오기로 되어 있는 북측 가족들은 한 시간이 넘도록 시간을 지연하며 초조하게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입구가 소란해지더니 꿈에 그리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내는 하나씩, 하나씩 끌어안고 우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너무 놀라고 반가워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떠났는데 굵은 주름이 잡힌 66살의 할아버지가 되어 내 동생 오영재는 나타난 것이다. <살아 있었구나> 흐느끼는 울음은 가족을 하나하나 안으며 멎질 않았다. 50년 동안 가슴에 숨어 있던 그리움이 폭발하여 나오는 울음이었다. 이것은 비단 이산 가족 500명의 울음이 아니고 이산가족 1세대 123만 명을 대신해서 우는 울음이었다. 아니 이 TV를 시청하면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모든 동포들의 울음이었다. 「어머니를 왜 좀더 기다리게 하시지 못했습니까?」 하는 것이 그의 첫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5년 전 95년 4월에 돌아 가셨다. 이제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오래 살아야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생명은 인간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산가족 중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들이었다. 이북 동생의 소식을 안 후 미주 민족문화 예술인 협회 회장으로 있던 김영희 씨를 통해 그들이 발행하고 있는 <통일예술>을 받아 보았을 뿐 아니라 그녀는 어머니와 전화를 할 때 그것을 녹음하여 이북의 동생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우리는 91년 8월 통일원에 북한주민 접촉신고를 내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사진, 어머니의 편지도 보냈을 뿐 아니라 동생의 가족 사진도 받았으며 특히 92년 어머니의 8순을 기해 동생으로부터 어머니 옷감과 인삼 등까지 보내 받게 되었다. 남은 옷감과 인삼 등은 통일원에 전시용으로 보낸 바 있다. 그러나 처음으로 생사를 확인하고 그 얼굴들을 대하게 되는 상봉 가족들의 감격은 얼마나 컸겠는가?
사모곡과 추모곡
동생 영재는 다음날 개별 면담시간에 부모님의 사진 앞에서 북한에서 가져온 술을 따르고 절하였다. 그리고 준비해온 추모시 일곱을 낭송하였다.
....가셨단 말입니까
정녕 가셨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어머니. 어머니 !
나는 그 비보를 믿고 싶지조차 않습니다. ......
개별면담 시간이라고 가족끼리 숙소에서 만나게 되어 있었는데 기자들이 쳐들어와 20분은 빼앗아 간 것 같았다. 그날 우리는 선물을 가방에 넣어서 가져갔다. 형제들이 각각 준비한 것들이었다. 북녘은 춥다고 해서 여름인데도 겨울 내의를 사러 다니고 오리털파커를 사서 넣고 시계를 살 때는 북녘에는 수은전지가 없을지 모른다고 5년은 쓸 수 있다는 값비싼 전지를 갈아 끼우고, 넥타이와 양말들을 사 넣었다. 우리는 선물을 간단히 설명했는데 그는 선물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또 그에게 지난 6월25일 밤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공연한 「한국 진혼곡」에 대해 설명했다. 그 날밤 130여명의 합창단과 40여명의 교향악단이 모여 공연한 진혼곡은 동생이 쓴 사모곡 여섯 편을 주제로 작곡하여 발표한 것이었다. 미국의 뉴올리언스 신학대학에서 학위를 마친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 이요한 박사는 16년간 한국에서 음악 사역을 하면서 동생의 시를 최근 읽게 되었다. 그래서 50년 동안 분단이 되어 서로 그리워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죽어간 안타까운 한국인 이산가족들의 영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이 영혼들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 진혼곡」을 지어 발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고 그의 작곡 동기를 설명했다. 또 이 진혼곡은 재편집되어 기독교 캐이블TV에서 그 후 4번에 걸쳐 전국에 방영되었다는 말도 하였다. 기독교 TV의 편성제작국장인 정성수박사가 진행하는 「내 마음에 한 노래 있어」라는 프로에 방영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나는 진혼곡의 두툼한 악보를 그에게 보이며 집으로 가지고 가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악보를 보고 또 팜플렛에 그의 사모곡 여섯 편이 다 영어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더니 가지고 가겠다고 말했다. 두 권으로 된 오씨 족보는 싫다고 하던 그가 그 책을 가져가겠다고 한 것은 의외였다. 남녘에서 펴낸 책들을 집에 많이 꽂아놓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남쪽을 연연해하며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팜플렛에 나와 있는 <늙지 마시라>는 그의 시를 읽으며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늙지 마시라
더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그의 마음속엔 어머니뿐이었다. 통일이 늦어져서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어머니 품에 안기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허전하고 아쉬운 것 같았다.
"우리도 오래 모시고 효도를 하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대신 든든한 형제들이 있지 않니?"
"형님, 형제들은 별입니다. 별은 여럿이 모여도 해가 되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태양입니다. 어머니 없는 고향은 진정한 고향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이제는 형이 아버지며 형수가 어머니입니다."
"형수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너에게 양복을 하나 사주고 싶다는데 어머니가 사준 것이라고 생각하며 가지고 가서 입으면 어떨까?"
그러나 그는 말했다.
"나 북녘에 옷 많습니다. 이 옷도 이곳에 올 때 김정일 장군께서 새로 해 주신 옷입니다."
그는 자기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문 올 때 넥타이도 사 주었으며 각자에게 남쪽 가족에게 줄 선물도 다 사 준 것이라고 했다.
"장군님 은혜로 우리는 잘 살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아니면 제가 어떻게 이 100명 가운데 끼어서 남쪽을 방문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 가정에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북녘에서 장군님은 우리 아버집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동생 가슴속에 깊숙이 들어앉은 김정일 위원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참 너의 은인이시다. 그러나 너에게 시를 쓸 수 있는 영혼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다만 그분이 그 재능이 꽃 피도록 길러 주신 것이다."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것은 장군님이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결혼할 때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그는 결혼할 때 입고 갈 옷도 없었으며 와이셔츠도, 넥타이도 없었고 심지어 양말까지 없어서 빌려 신고 결혼했다고 말했다. 결혼한 뒤 다 돌려주었는데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양말을 돌려 달라고 해서 그것까지 벗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런 자기를 작가학원에 보내어 시인이 되게 하고 사 남매의 아버지가 되어 시만 쓰면서 먹고살게 해 준 이가 누구냐고 반문했다. 신 없는 그곳에서는 감사를 돌린 대상이 없었던 것이다.
뭐 더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술과 담배를 가지고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남조선에 가면 진로 술을 사 오라 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줄담배를 피우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어머니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고 생전에는 술 덜 마시도록 계속 하나님께 기도 드렸었다고 말했더니 자기도 어머니의 술 적게 마시라는 편지를 받고 술을 줄였다고 말했다.
"이제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놓고 마시는 거야?"
"아니지요. 이제는 어머니의 편지는 유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술잔을 놓지 못했다. 그의 영혼이 공허한 것을 어떻게 하랴.
내 백성을 위로하라
다음날도 그는 또 시를 써서 신문에 발표했다. 그의 삶이 바로 시였다.
..정견과 신앙이 다르면
통일은 못합니까
만나서 얼싸 안으니
그 뜨거움도 같고 눈물도 같은데
이것이 통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지, 남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손으로 통일합시다
그 누가 이날까지
우리의 이 길고 긴 아픔을 알아주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통일을 선사했습니까
누가 우리의 통일을 바라기니 했습니까....
서로가 편지하고
서로가 전화하고
서로가 자유로이 오고갈
통일을 한시 바삐 앞당깁시다.....
마지막날은 고은 시인과 합작시를 썼다.
...북의 시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시로써 통일로 나아갑시다
남의 시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통일로써 새로운 시를 씁시다...
나는 공항으로 떠나기 위해 버스 안에 앉아 있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3일 동안 통일의 열기를 내뿜으며 얼싸안고 울다가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는 이 상황이 「이산가족」 만남인가? 떠나가면 집에 도착해서
"형님, 참 기뻤습니다.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애들도 선물을 받고 기뻐했습니다. 다음에는 한 번 놀러 오십시오."
이런 전화라도 받아야 하는데 떠나버리면 장막 저편은 어둠뿐이며 아무 소식도 들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할 때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허전한 가슴을 안고 돌아오는데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들려 왔다. 50년만의 극적인 상봉을 과시하기 위해 국가가 과다한 출혈을 했다.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하는 상봉이다. 그러나 나는 꿈이 아니고 현실에서 살아 있는 동생을 만나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다. 이것은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한국의 통일이 멀지 않다는 소망을 알리는 서창이다. 나는 헨델의 메시아에서 맨 먼저 들려준 테너 서창을 듣는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입었느니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며
정신적 고향 예루살렘을 잃어버리고 70년간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갈 날이 멀지 않다는 서창이다. 더 크게 구원자가 복역의 때가 끝났다고 말하며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전령을 보내는 서창이다.
나는 적어도 가상적인 동생이 아니고 체온이 전해지는 동생을 안고 난 뒤, 통일을 향해 우리 나라에 동이 트고 있다는 환상을 본다. 나뿐 아니라 우리의 상봉을 지켜본 국민들도 통일을 향한 같은 환상을 보았으리라고 믿는다. 상봉 2일 째에 긴냇, 권영환 선생은 인사동의 안국갤러리에서 「통일 시 모음전」을 하다가 동생의 시 「늙지 마시라」를 표구로 만들어 오른 팔을 쓰지 못하는 불편한 몸으로 들고 왔다. 동생에게 전해 달라는 것이다. 어찌 그의 염원이 동생의 시를 전해 주는 것이겠는가? 통일의 염원이었다. 50년만에 좀 출혈을 하면 어떤가?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사랑을 쏟으면 안 되는가? 소망을 갖는 자는 인내할 줄을 알아야 한다. 씨를 심으면 열매를 거두기까지 인내해야 한다. 철도가 개통되고, 편지를 주고받고, 전화가 소통되고, 전기를 나누어 쓰고, 경제 협력을 하는 가운데 통일이 무르익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인내해야 한다.
이 글은 이산가족 상봉 후 수기 모집에 응모한 글이다. 그러나 이 글은 채택 되지 않아 여기에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