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슬픈 약속
1) 좋은 사람들
1979년 10월29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세상이 어수선했다. 하지만 나는 민주화를 향한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나의 마음 한가운데에는 온통 SK이와 약속한 금메달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해 초겨울(12월)에 나는 정익진 관장님의 추천으로 제천읍사무소에 입사했다. 그리고 1980년 제천 군에서 시로 승격되면서 나는 제천시청에 소속되어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운동하는데 지장이 없는 부서인 수도과 수원지에 근무를 하게 되었다.
지만영 선배와 같은 조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내가 연습하러 갈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손해봉씨가아무조건없이나와도와주시곤했다.
수원지에는 여과지위로 체력 운동하기 좋은 잔디밭이 있었고 저녁에는 겨루기 상대를 찾아 여러 곳의 체육관을 돌아 다녔다. 밤늦게 돌아오면 손해봉씨는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위의 좋은 사람들 덕분에 나는 홀로 운동하지만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2) 국가대표선발 전
1980년 3월 나는 국가대표 2차선발전에 약 20일간의 맹훈련 속에 출전하였다. 전국대회에서 입상한 선수들이 출전하는 대회인지라 한 경기 한 경기가 결승전 같았다. 놀랍게도 세계대회에서 연속 우승한 밴텀급의 김종기선수가첫 경기서 패하였다. 올라온다면 나와 8강에서 만나게 되는데…….김 선수를 이기고 올라온 선수는 경상대의 최승룡 선수에게 패하여 최 선수가 나와 8강에서 맞붙게 되었다.
코치 없이 경기장에 나가자 청주의 송석중선수가 재빨리 흰수건과 물병을들고 뛰어와서 호구를 매주면서 세컨석에 앉았다.
1회전 중반 공격하는 최선수의 가슴을 향해 오른 주먹을 뻗었다.
그 순간, 발차기를 시도하는 상대의 무릎을 스친 나의 주먹은 위를 향하여 최선수의 목을 강타했다. 최선수는 목을 잡고 나뒹굴었다. 그러나 고의가 아닌 것으로 판단한 심판은 나에게 경고를 주지 않고 경기를 속행했다. 주심의 경기 속행에도 계속 엄살을 부리자 주심은 그에게 감점을 선언했다.
2회전 그의 주특기인 왼발 뛰어 찍기를 보고 짧게 뒤차기로 맞받았다.
아랫배를 강타당한 상대는 붕 뜨며 보기 좋게 다운이 되었다.
3회전, 자신이 생긴 나는 상대를 향하여 몸통 오른발 앞 돌려 차기에 이어 360도 회전 앞돌려 차기를 차는 순간, 상대의 오른발이 나의 옆구리에 꽂혔다. 아차, 하는 찰라 두 번째 상대의 공격이 이어져 순식간에 2:2(나의 점수는 감점1점과 득점1점으로 순수 득점2점인 상대가 이기는 결과)가 되었다.
경솔한 경기 운영이었고, 나의 자만이 낳은 결과였다. 또한 대한태권도협회의 경기규칙이 해마다 바뀌는 과도기였다. 결국 최승룡선수는 최종 선발전에서 김종기(세계선수권 3회 우승, 정범수(세계선수권1회 우승)선수를 차례로 이기고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아시아 태권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3) 직장 생활
제천 수원지에는 수 십 년 동안 잘 가꾸어 놓은 등나무와 향나무 그리고 회양목과 소나무 등이 잘 어우러진 그림 같은 곳이었다. 숙직을 하고 새벽에 나가 보면 어느새 누가 빗자루로 깨끗이 청소하여 놓곤 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손해봉씨가 자기 근무시간이 아니더라도 매일같이 청소를 해 주었던 것이었다.
5월 어느 날 지만영선배가 사표를 내고 함백탄광으로 떠나면서 책을 한 권 선물하였다. 안병욱 선생님의 ‘뜻있는 곳에 길이라는’ 책이었는데 나의 인생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6월에는 손해봉씨가 용석 취수장으로 가시고 청전 동장 하시던 이동주씨가 나와 한조가 되어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동주씨는 장기를 잘 두었는데 그 덕분에 나는 장기를 조금 배웠다.
유월이 가기 몇 일전에 SK가 제천에 와서 전화를 하였다.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그녀와 의림지에 갔다.
천 삼 백 년 전에 만들어진 의림지의 노송들은 우리를 반겨 주는 듯 했다.
우륵이 가야금을 타며 즐겼던 폭포 옆 노송 아래 제비바위에 앉아 잠시 쉬는데 SK는 피곤한지 잠이 들었다. 한참 바라보다 나는 그녀에게 입맞춤을 했다. 바람에 들킬 새라 가슴 조이며…….주위에서는 새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나의 가슴 뛰는 소리만이 들렸다.
초등학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홍사구의 묘에 참배하고 저녁 식사 후 막차로 떠나는 SK를 배웅하는데 그녀가 말했다.
- 오빠! 약속 잊지 마. 그리고 작년처럼 다치지 않게 운동해"
- 그래 알았어. 너도 아프지 마!"
기차에 오르던 그녀가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나는 함께 기차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후회하였다.
제천역 광장으로 나온 나는 택시에 올라타며 부탁을 했다.
"지금 출발한 기차를 따라 잡아 주세요"
다행이도 송학역에서 기차를 탈수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SK의 마르지 않은 눈물을 보고 손수건을 내밀었다. 깜짝 놀라며 바라보는 SK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 도저히 혼자 보낼 수가 없었어!"
SK의 볼을 타고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며 나는 그 녀를 지켜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했다.
밤차의 기적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치며 어둠 속을 질주한다.
4. 슬픈 약속
1980년 7월 나는 병역신체검사를 마치고 다음날 제61회 전국체전 충북 대표선발전에 출전하여 결승에서 심판들의 견제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대회에서 수차례 입상했던 김학만 선수를 이기고 도 대표로 선발 되었다.
지난해의 경험을 토대로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부상을 당하지 않게 몸 관리를 하면서 착실히 훈련을 하였다.
언제부터인지 누군가 체육관 창문에 몰래 메모와 함께 우유와 빵을 놓고 갔다. 궁금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하루는 마음먹고 지켜보고 있노라니 한 아가씨가 살며시 다가와 우유와 빵을 놓고 가는 것이 보였다. 뛰어가 부르니 깜짝 놀라며 돌아선다.
경림이었다.
고등학교시절에 수련하는 것을 잠시 본 적이 있는 두 살 어린 후배였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 고마워!
그녀는 겸연쩍어 하면서 뛰어 간다. 체육관 옆 대양물산에 근무하는데 간식으로 나오는 것을 안 먹고 주는 것이라며.....
8월16일 여름 햇살이 뜨거운 오후!
100마력의 모터 소리에도 선명하게 다급한 외침을 들었다.
- 박주사 빨리 와
급하게 밖으로 나가니 이동주씨가 옷 입은 채로 물 속에서 소녀 둘을 안고 나오고 또 다른 소녀 둘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20마력의 취수 모터는 어른도 헤어나지 못하는 흡입력을 갖고 있기에 변전실로 뛰어가 차단기를 내리고 밖으로 나와 물속으로 뛰어가 소녀 하나를 건져 나왔는데 소녀가 말한다.
- 아저씨 제 동생 살려주세요!
개울을 쳐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또 소녀가 울부짖듯이 외친다.
- 아저씨 내 동생 죽어요. 살려 주세요
아차! 싶어 모골이 송연해 지는 것을 느끼며 넓은 개울로 뛰어 들었으나 물이 너무 깊고 청태 때문에 주변이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헤엄을 치며 찾기 시작했다.
인근에 있는 농부들도 가세하여 찾는데 한참 만에 누군가 외친다.
- 찾았다.
바라보니 한 소년이 물속에서 건져져 나오는데 항문이 벌어지고 입술이 파랗게 변한 것을 보고 아! 늦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미친 듯이 인공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주위에 한분이 나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가로 젖는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 연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년의 시신은 검사의 확인 절차를 거치느라 부모가 데려 갈 수 없었다.
소년은 삼대독자라고 했다. 가슴이 아팠다.
수은등의 푸르스름한 불빛 아래에서 비를 맞으며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데 이동주씨가 막걸리를 한 병 가지고 오셨다. 막걸리를 한 잔 마시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의 근무시간이었고 그 시간에 소년은 죽었다. 소년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래,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하지만 지켜보아 주렴. 이번 체전에서 우승하면 너에게 메달을 줄게
나는 소년의 시신 앞에 약속하고 돌아서는데 SK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음날부터 나는 가혹한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가운데 SK의 편지와 경림의 격려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매일 같이 오던 SK의 편지가 일주일째 오지 않았다. 궁금하여 SK의 집으로 전화를 하니 그녀의 아버지가 받는다.
- SK는 여행을 떠났어. 한 보름 걸릴 거야. 자네의 금메달 소식이 올 때쯤 돌아 올 걸세.
5. 제61회 전국체전
최선을 다한 나의 훈련은 만족스러웠다. 도지사와 기관장의 배웅속에 도착한 전북 이리는 폭팔로 얼룩진 상처를 딛고 아름다운 도시로 꾸며져 있었다. 시내 구경을 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대진표가 나왔다. 이번 전국체전부터는 다득점제이며 라운드 시스템으로 치른다고 한다. 두발이 공중에서 얼굴을 가격하면 3점, 얼굴 2점, 몸통득점은 1점, 다운이면 2점이었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예선부터 3분 3회전이었다.
예선 첫 상대는 제주도 대표선수!
1회전 시작과 더불어 이정제동(以靜制動: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압함)의 전술로 임했다. 스텝이나 속임 동작을 하지 않고 움직임 없이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는 상대의 허점을 찾아 순식간에 득점을 올리는 전술이었다.
왼발로 빠르게 공격하는 상대의 얼굴을 향해 시도한 나의 뒤 돌려 차기가 간발의 차로 얼굴을 스쳐가자 상대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더니 이내 상대는 짧게 모션을 주더니 오른발 들어 찍기로 공격을 하였다. 이때다 싶어 오른발 몸통 앞 돌려 차기로 받아 차는데 상대의 공격이 갑자기 앞 밀어 차기로 바뀌며 나의 가슴을 강타했다. 실내를 가득 메운 관중의 함성 속에 나는 공중으로 붕- 뜨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주심의 카운트 속에 나는 서서히 일어나며 자세를 취하였다. 이어진 그의 움직임을 보고 오른 주먹으로 강하게 지르는데 상체를 약간 숙인 상대의 얼굴에 사정없이 나의 주먹이 꽂혔다. 나딩구는 상대를 일으켜 세우고 얼굴을 살펴보던 주심이 나에게 바로 1점 감점을 선언한다. 코치 석을 보니 당황한 정해열 코치가 담배를 빼 무는 것이 보였다.
작년과는 달리 나마저 진다면 유례없이 충북선수단은 전국체전 예선 첫 경기 13연속 패배를 기록하게 될 판이었다.
주심이 득달같이 주의를 준다. 나는 코치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여유를 보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전술을 바꾸어야 했다. 이동제정(以動制靜:움직임으로 고요함을 제압함)으로.... 속임동작으로 상대를 유인하여 헛점을 찾아야 했다. 짧게 헛동작을 주니 상대는 일보 뒤로 물러난다. 이어 나는 왼발을 먼저 허공에 살짝 차고 오른발을 굴러 허공에서 오른발을 차는 척 하다 왼발 앞차기로 상대의 얼굴을 가격하였다. 이른바 공중 삼단 앞차기였다. 상대는 주먹으로 맞받으려다 보기 좋게 얼굴을 강타 당했다. 이어진 주심의 카운트 속에 1회를 끝내는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코치 석으로 가니 코치는 말했다.
- 이제 동점이다. 됐다. 슬슬해라.
나는 씩 웃으며 2회 3회를 최선을 다해 경기를 치루고 호구를 벗는데 나의 도복에 상대의 피가 사방 묻혀 져 있었다. 치열한 3분 3회전이었다.
준준결승전은 충남대표 오창근 선수와의 대전이다.
1회전 중반 접근전서 오선수가 무릎으로 나의 허벅지를 가격하여 경고를 받은 상태에서 왼발 몸통 앞돌려차기가 성공하여 1:0으로 1회를 마치고 나의 코너로 돌아오는데 왼발이 마비되어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었지만 상대에게 허점을 보일 수가 없어 억지로 발을 옮겨 천천히 돌아와 의자에 앉으니 코치석으로 온 정만순 교수님께서 말씀하였다.
- 승동아! 우리 선수단 옆에 교육감님을 비롯하여 여러 기관장이 응원하러 오셨다. 그리고 이리남중학생들이 응원하고 있다. 그러니 꼭 이겨라.
머리를 돌려 바라보았다. 이리 남중학생 수 십 명과 교육감님과 여러 기관장들께서 목소리 높여 응원한다.
- 박승동 이겨라! 이겨라.
응원의 목소리가 메아리 쳐 온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 해 지면서 콧등이 찡-해온다. 정해열 코치님이 수건으로 나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하신다.
- 다리 어떠니, 할 수 있겠어.
눈을 감으니 수원지에서 죽은 소년의 시신과 SK의 얼굴이 떠오른다.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으로 걸어 나갔다.
신들린 듯한 나의 파워(힘)과 스피드에서 밀린 오선수는 여러 차례 다운을 당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밤새 허벅지 통증으로 잠을 설치고 아침에 일어나니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도복을 겨우 입을 정도로 허벅지가 퉁퉁 부어있었다.
코치 및 임원들이 동메달을 확보했으니 기권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나는 죽어도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준결승전은 강원도 대표와 치렀다.
사력을 다해 경기에 임했으나 나의 부상을 간파한 상대는 나의 오른발을 견제하며 1, 2회전에서 2점을 득점했다. 3회전에 나는 최후의 선택을 해야 했다. 부상당한 왼발을 사용하여 2점을 획득했으나 라운드 시스템 제도로 인해 나의 패배가 선언되었다.
의무석에서 치료를 받고서야 간신히 걸음을 걸을 수가 있었다.
경기장을 나오는데 복도에 걸려 있는 거울에 나의 모습이 비춰졌다. 거울 앞에서 또 하나의 야위어진 나의 모습을 보노라니 나 자신이 가엾게 느껴졌다
수 많은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나는 피로 얼룩진 도복을 벗으며 스스로 위안하듯 중얼거렸다.
- 그래 난 최선을 다 한 것이야....."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당분간 도복을 입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6. 亡 草
1980년 12월 24일!
잿빛 먹장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는 폭설을 쏟아 붓고 있었다.
밤 11시 30분! 카톨릭 다방에서 문을 닫기 위해 정리하는 종업원의 눈치 속에 애꿎은 성냥개비만 부러뜨리던 나는 네 번째 제천에 도착하는 태백선 열차 시간에 맞춰 제천역으로 나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 SK에게서 건강이 악화되었는데도 크리스마스이브에 굳이 나를 찾아 오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마중을 나갔으나 마지막 승객이 나오고 역무원이 들어갈 때까지 눈을 크게 뜨고 기다려도 그녀는 나오지 않았었다. 하루 종일 그렇게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나는 그녀가 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그녀는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막차가 도착하고 모든 승객이 나왔는데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아픈데 안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무원이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거짓말처럼 SK는 나타났다. 나는 뛰어가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감싸주며 나는 택시를 잡았으나 그녀는 걸어가자고 했다.
눈을 맞으며 팔장을 끼고 걸어가면서 나는 그녀를 나무랐다. 왜? 고집을 피우냐며.... 그런 그녀는 야속하다며 눈물을 떨구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손을 꼭 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목에는 지난 체전에서 받았던 동메달이 걸려 있었다. 집으로 걸어가며 SK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 오빠, 내일 수원지에 같이 가 응?"
" 왜?"
"오빠가 저번에 수원지에서 죽은 소년에게 메달을 준다고 약속했다며"
"그랬지. 하지만 너와의 약속이 먼저라......"
" 오빠! 이제 됐어. 내일 가서 약속을 지켜! 그리고 이제 그런 약속 하지 마! "
" ........"
다음날 수원지 옆 개울에서 나는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늦게나마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그녀를 나전까지 바래다주고 막차로 나오는데 나전역의 가로등 아래 홀로 서서 떠나가는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니 지금 막차로 떠나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두려움이 가슴속 깊이 파고들면서 안타까움 속에 스며드는 아픔을 견디기 힘들었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나왔으면......이토록 견디기 힘들진 않을텐데......
아지랑이 춤추고 버들강아지 움트는 봄날 그녀는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오빠와 같이 망초를 보고 싶다고.....
지난여름 그녀가 제천에 왔을 때 하얀 꽃잎에 노란 수술이 달린 조그만 꽃을 보고 말했다.
"오빠! 저건 국어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망초래!"
"웬 망초"
"우리나라가 일제에 망할 때부터 전국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외래종이래"
"저 꽃 몽땅 꺾어 버려야겠네."
"포기 해 오빠! 지독한 꽃들이야."
"나쁜 놈들이군. 저거 먹어 치우는 짐승들 없나"
그런 나를 보면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그녀!
나는 하늘을 날아 갈 것 같았다.
그러나 끝내 그녀는 나와 같이 망초를 볼 수 없었다.
그것이 마지막 편지가 될 줄은 상상도 못한 채 나는 여름을 기다렸고 그녀와의 약속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수원지의 정다운 벗들과 함께…….
[ 제2부 슬픈 약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