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루기(二樂樓記)
중원中原 충주忠州에서 동쪽으로 죽령을 향하여 가다보면 그 사이에 즐길만한 산수가 한둘이 아니다. 황간과 수산 두 역을 지나면 청풍의 경계에 이르게 되고, 한 고개를 넘어 단양 경계에 들어서면 장회원에 이르게 되는데, 말고삐를 잡고 그 아래로 나아가면 갈수록 점점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그리하여 별안간 우뚝 솟은 적석봉우리가 보이고, 겹겹으로 두른 산봉우리와 자욱한 푸른 이내가 좌우동서를 구분할 수 없게 하고 눈을 어지럽게 하여,바록 교묘한 가상가라도 능 히 분간하지 못할 정도가 된다. 벼랑이 열리고 협곡이 트인 곳에 한 강물이 그 가운데로 쏟아지는데, 푸른 쪽빛이 일렁인다. 강의 북쪽 기슭의 험한 낭떠러지 위 수백 보의 성이 있어 가히 숨을 만한데, 옛 이름이 가은암(可隱巖)이다. 내가 그 앞에서 말을 멈추자, 안개로 길이 아득하고 흐릿하여 도낏자루를 썩혔다고 하는 옛 고사가 생각났다. 이러한 절경에 아무 이름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비로소‘단구협(丹丘峽)’ 이름을 붙였다.
自中原東行 向竹嶺 其間山水之可樂者不一 過黃間壽山兩驛 行盡淸風景 踰一岾入丹陽界 得長會院 按轡⑴其下 漸入佳境 *轡⑴고삐 비 忽見積石斗起 攢峯疊翠⑵攢모일 찬, 疊겹쳐질 첩, 翠물총새, 비취색 취. 이내: 해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 迷左右眩東西 雖巧曆莫能較也 岸開峽坼⑶ 坼터질 탁, 가라질 탁 一江中注 溶漾⑷藍碧 漾출렁거릴 양. 江北岸側之絶險 上數百步 有城可隱 舊名可隱巖 余立馬其前 煙霧路迷 依俙然有란柯之想⑸
俙: 비슷할 희, 어슴푸레할 희, 歹+柬=歹+闌: 썩을 란 惜絶境之無稱 肇⑹名之曰 丹丘峽 肇⑹비롯할 조, 시작할 조
협곡을 지나자 동쪽으로 산은 더욱 기이하고 물은 더욱 맑았다. 여기서 10리쯤 더 가자 협곡이 끝나는데, 마치 연인과 작별을 하듯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뒤돌아보아야했다. 거기서 바로 동쪽을 바라보면 지척 거리에 赤城이 강에 임해있고, 조금 걸으면 작은 배로 가로 질러 건너는 나루 곧 下津이 있다. 그 나루에서 위로 십리쯤 거슬러 올라가면 또 관도官渡가 있는데 이곳이 곧 상진上津이다. 철벽같은 벼랑이 천 길 높이 솟아 아래의 나루 강물을 위압하고 있는데, 내 가슴이 두근거려 가히 올라갈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이름 붙이기를 ‘서골암’이라 하였다. 이 상진의 근원은 강릉부 오대산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골자기를 돌고 돌아 서쪽으로 5,6백리나 멀리 달려 왔으므로 비록 가벼운 배라도 그 갈레를 끝까지 찾기는 어려웠다. 돌다가 순하게 흐르는데, 하진에 이르기 전에 남쪽에서 흘러오는 작은 내가 있는데 옛 이름이 남천이다. 남천의 왼편기슭에 날아갈 듯한 다락이 서 있으나 이미 어두워 오르지 못하고 드디어 군의 객관에 투숙하였다.
有峽谷而東 山益奇水益淸 行十里峽盡 回首如別佳人 十步九顧 直東而望 赤城無咫尺 臨江有步
小艇橫渡 卽下津也 泝津而上十里許⑺ 又有官渡 卽上津也 鐵壁千尋 壓峙津流 悸余魂 莫可攀也⑻ 倉名之曰樓鶻巖⑼ 津之源 出江陵府之五臺 縈回壑谷⑽ 西走遙遙五六百里 雖輕舟 莫得窮其派也 返而順流 未及下津 有泉自南而來 舊名南川 川之左岸 有樓翼然 日已暝黑不可登 遂投郡館 *泝⑺거슬러올라갈 소 許접미사: 그쯤 ~되는 곳에 ⑻攀 더위잡을 반 ⑼鶻 송골매 골 ⑽縈얽힣 영, 壑골 학
그 이튿날 군수 황린이 다락에 오르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함께 올라 험함을 잡고 바라보니, 제비는 날고 닭은 벌레를 쪼며 까치는 울로 손님은 이르렀는데, 산 구름은 높고 손님은 잇닿았고, 가을빛은 금수를 바른 듯하였다.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병풍처럼 한 누각을 둘러싸고, 남천 물은 난간 밑으로 소리를 내며 흘러 내려가 상진의 물결과 숲 그늘 가에서 합류하였다. 어제 말과 배위에서 보던 것이 모두 술잔과 궤석 사이에 펼쳐져 있으니, 대체로 두 눈으로 거두는 것이 두 다리로 얻은 것보다 많았다. 벽 사이를 보니 비해당(匪懈堂)⑾이 쓴 ‘이요루(二樂樓)’라는 큰 세 글자의 편액이 마치 밝은 달밤에 야광주같이 찬연한데, 옮길 수 없는 그 광채를 계산(溪山)이 머금어 빛을 내고 있었다.
내가 한껏 즐거움을 가누지 못하여 황후黃侯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오직 어진 자만이 산을 즐길 수 있고,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능히 물을 즐길 수 있으며, 百世의 일을 알아야 지智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면서 부질없이 산수에 마음을 치닫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대체로 사람은 인지仁智 의 본성을 갖추지 않는 자가 없으나 인지의 단서를 확충하는 사람은 드물다. 능히 확충해야 하는 그 인지는 나의 분수 밖의 물건이 아니다. 산의 고요함을 체득하여 옮기지 않고, 물의 움직임을 체득하여 침체함이 없어서 한 마음의 덕을 편안히 하고, 만물의 변화를 두루 살핀다면 이 두 가지 요산요수樂山樂水⑿의 참된 즐거움을 자신이 겸하여 얻을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황후는 안상安詳한 자질이 있고 또 사리事理에도 밝은데 어버이 모시기에 편리한 것 때문에 이 고을을 맡았으니, 이미 그 어버이에게 인仁을 실천한 것이다.
그 효도로 백성을 가르쳐서 한 고을을 다스리는데 얼마 되지 않는 백성을 부리며 척박한 토지에 대한 조세의 부과와 징수를 적절하게 조치하고, 회계장부대로 정부의 부세에 이바지하고, 또 여력을 누대까지 써서 허물어진 것을 수리하여 옛 모습을 유지하였으니, 황후의 仁과 를 여기에서 볼 수 있겠다. 황후가 능히 여기에 마음을 두어 그의 학문이 천리 유행의 극치에 이르고 무사한 정치를 행할 수 있다면,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이 곧 자신의 인지와 일치가 될 것이니 황후는 휩쓸지어다. 만약 술잔을 희롱하고 관현악에 도취되어 여기에 올라와 즐겁다 하면서, 다만 아련히 솟을 것은 산이요, 묘연히 흘러가는 것은 물이라고 여겨, 그 빼어나고 맑다는 것만을 기뻐할 뿐이라면, 장차 나막신을 신고 깊은 산을 찾았던 사강락(謝康樂)⒇과 같고, 은혜 갚으려고 공무를 폐기했던 孟東野①와 다를 바가 없으리니 두 가지 즐거움의 뜻에 도리어 누가 될 것이다. 무릇 함께 오른 우리가 어찌 서로 이 점을 힘쓰지 않겠는가. 함께 오른 자는 누구인가? 花山 權景裕, 沙執 金世英과 아울러 黃侯의 아우 위(瑋)와 필(王+筆)인데, 모두 孔子를 배우는 사람들이다. 드디어 이것으로 서로 권면하고 또 뒤를 이어 이 누각에 오르는 자에게도 끝없이 면려하는 바이다.
⑾懈 게으를 해, 匪懈堂: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 李瑢으로 호가 해당, 시문에 능하고 글씨 잘 씀 *二樂樓 이요루 ⑿智者는 樂水하고, 仁者는 樂山한다. 智者動하고 仁者靜하고 智者樂하고 仁者壽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에 밝아 물이 흐르듯 막힘이 없으므로 물을 좋아한다고 한 것이다. 또한 지적 욕구를 만족하기 위하여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며, 그러한 것들을 즐기며 산다. 어진 사람은 의리를 중히 여겨 그 중후함이 산과 같으므로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어진 사람은 대부분 고요한 성격이며, 집착하는 것이 없어 오래 산다는 것이다.(논어, 雍也)
翌日 郡守黃侯璘請登⒀ 遂與攀檻⒁而眺⒂ 則燕飛而鷄啄⒃ 鵲噪而客至⒄ 嶺雲連於上岳 秋光抹於錦繡 層巒疊嶂⒅ 環擁乎一樓 而南川之流 汨㶁於欄楯之下⒆ 上津之波 合沓於林樾之際
昨日所役於鞍馬舟楫之上者 皆在於杯觴几席之間 蓋兩眼所收 有加於兩脛之所得矣 視壁間匪懈堂瑞扁二樂樓三大字 爛然如明月夜光 彩不可挹
余欣然吾不可支 顧謂黃曰 惟仁者 然後能樂山 三月不違者 殆庶其於仁 百世可知 可謂知未及於此 而徒馳情於山水 不幾於自誣乎 夫仁莫不具仁智之性 而善能充仁智之端 能充其仁智 非吾分外之物 體山之靜而不遷 體水之動而無滯 安一心之德 周萬物之變 則二者之眞樂 吾得而兼之矣 侯以安詳之資 且達於理 便養乞郡 旣能仁於其親 而敎其孝而治一境 役鮮少之民 賦礫瘠之土措置得宜 能應簿書而供賦征 又用餘力於樓臺 葺其頹碎而無廢舊貫 侯之仁且智可見 侯能於此致曲 學至於天理流行之極 而行其所無事 則高山流水 乃吾仁智之一體矣 侯其勉之哉 若弄杯酌醉絃管 登眺以爲樂 但觀其隱然峙者山 杳然逝者水 喜其秀且淸而已 則又將有理屐窮山如康樂 投金廢務如東野 而有添於二樂之義矣 凡我同登者 盖相與勉之 同登者誰 花山權君景裕 沙熱金君世英竝侯弟瑋 필(王+筆) 皆學孔子者也 遂以相勉 而又勉繼登者無窮云
⒀璘 옥빛 린, ⒁檻우리 함, 감옥 함 ⒂眺 바라볼 조 ⒃啄쫄 탁 ⒄噪떠들석할 조, 새가 떼지어지저길 조 ⒅ 巒뫼 만, 璋 반쪽홀 장, 구기 ⒆㶁 물갈라져나갈 괵 楯 난간 순
⒇사강락:남조 송나라의 시인 사영운으로 봉호가 강락이다. 산수 시인으로 유명, 등산을 좋아해 오를 때는 나막신 앞굽을 떼고 내려올 땐 뒷굽을 떼곤 하였다. ①맹동야 당나라 때 시인 맹교로 동야는 그이 자이다. 장적이 정요선생이라 했고, 한유와 절친한 사이다. 沓:유창할 답, 물이 끓어 넘칠 답 樾:나무그늘 월, 나무 觴술잔 상 爛:문드러질 란 挹:뜰 읍, 물을 풀 읍, 葺: 지붕일 집, 기울 즙, 頹:무너질 퇴 碎:부술 쇄 杳然하다: 넓고 넓어서 아득하다. 屐:나막신 극 屐履: 신, 유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