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공(經歷公) 응허(應虛)
이름(諱)은 응허(應虛, 과거에 응시할 때는 이름은 應奎)요, 자(字)는 문수(文秀)이며 부친 석(錫)과 숙인(淑人) 남원양씨(南原梁氏)사이의 4형제(兄弟)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가전(家傳)에 의하면 모친(母親)이 하늘의 정기를 받는 태몽(胎夢)이 있은 후 출생하였다 한다. 어려서부터 뜻이 높았고, 장성하여서는 효성(孝誠)과 봉양(奉養)이 지극하여 항상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형들과 우애(友愛)가 깊어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니 인근(隣近)에서 모두 칭송(稱頌)함이 많았다.
공은 기개(氣慨)를 숭상(崇尙)하고, 의지력(意志力)이 강해 큰 어려움이 가로 막고 있다하더라도 쉽게 좌절(挫折)하지 않고 돌파하는 대장부(大丈夫)였으며, 또한, 건장(健壯)한 풍채(風采)를 지니고 있어 사람들이 항상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의 생년(生年)에 대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바로 윗 형 응량(應梁)이 1495년(燕山君 원년)에 출생한 것으로 보아 1498년으로 출생했다고 가정해도 무방하다.
당시 부친 석(錫)은 조정(朝廷)에서 내린 음서(蔭敍)로 부사과(副司果)에 제수(除授)하였으나 현직(現職)에 나가는 것을 사양하고 오직 공맹학(孔孟學)에 전념하며, 4 형제(兄弟)의 훈육(訓育)에 정성을 쏟고 있었다.
응량(應梁)은 시(詩)․사(詞)․문(文) 등 문재(文才)에 뛰어나 모두들 장래에 가문(家門)의 큰 기둥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고, 응허(應虛)는 일찍부터 이 세상(世上)에 태어나 남아(男兒)의 장한 뜻을 펴고자 붓과 책을 물리치고, 궁마(弓馬) 등 무예(武藝)를 닦음에 소홀함이 없었다.
1537년(中宗 32년 丁酉)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였고 곧 도총부(都摠府) 경력(經歷)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고향에 계신 늙으신 부모의 봉양(奉養)을 잠시도 잊지 못하여 외직(外職)에 소원(所願)하였는데 마침 만경현령(萬頃縣令)으로 나가게 되었다.
목민관(牧民官)으로 재임(在任)할 때, 위엄(威嚴)과 자혜(慈惠)를 갖춘 백성의 어버이로서 훌륭한 업적을 쌓아 향민(鄕民)들의 드높은 찬사(讚辭)를 받아 앞날이 기대되었었으나, 조정(朝廷)의 정세(政勢)는 그렇지 못했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을 중심으로 소윤(少尹) 일파가 정계(政界) 요직(要職)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탁(混濁)한 조정(朝廷)의 흐름 속에 관직(官職)을 미련 없이 내 던지고 고향에 내려 온 응허(應虛)는 부모님께 효도(孝道)하는 기쁨 속에 틈틈이 손자병법(孫子兵法)과 동국병감(東國兵鑑) 등 병서(兵書)를 탐독하며, 남쪽 해안(海岸)에서 자주 발생하는 왜구(倭寇)의 침구(侵寇)를 걱정하고 있었다.
응허(應虛)의 예측(豫測)은 현실로 나타났다. 1555년(乙卯年)에 왜적(倭賊)들이 쳐들어 와 약탈(掠奪)과 방화(放火), 살인(殺人)을 자행함이 극심하여 전라도(全羅道) 일대의 치안(治安)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이를 달량포(達梁浦) 왜변(倭變)이라 한다. 급해진 조정(朝廷)은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임명하고 이를 토벌(討伐)하는 대임을 맡겼다.
그는 곧 병력(兵力)을 점검하고, 능력있는 장수(將帥)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일찍부터 응허(應虛)의 용맹(勇猛)과 지략(智略)이 뛰어남을 익히 알고 소탕(掃蕩) 작전에 참여 시켰던 것이다.
<명종실록(明宗實錄) 제 19권 1555년(乙卯) 7월조> 왜변(倭變)이 끝난 후
다시 향리(鄕里)로 돌아온 응허(應虛)는 자연 속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가 1558년(明宗 13년, 戊午)에 별세하였다.
선비 송교순(宋敎淳)이 공을 찬양한 글을 썼으니 다음과 같다.
풍악(楓岳)이 높고 높으니 장공(張公)의 유택(幽宅)이라. 공(公)의 재주 높고 널리 덕(德)을 베풀어 두터이 하니 그 이름 창성(昌盛) 하도다. 내 그대를 명(銘)하기 부끄럽기 그지없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안동권씨(安東權氏)며 아들 급(伋)을 두었다. 순창군(淳昌郡) 동계면(東溪面) 수정리(水亭里) 풍악산(楓岳山) 유향원(酉向原)에 합장(合葬)한 묘(墓)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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