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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으로 며칠을 보냈다. 사실 여행은 설렘이다. 금번 여행은 1920년대 항일무장단체의 하나인 신민부 결성 90주년을 기념해서 신흥무관학교 기념 사업회에서 주관한 북만주 일대의 유적지 답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지역은 10여년전에 다녀온 기억은 있지만 하얼빈의 안중근 기념관이나 정율성 기념관 그리고 발해의 옛 성터 등은 처음이기 때문에 기대가 크다.
첫째 날(7월27일)
서둘러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아내와 같이 버스를 타고 잠을 청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만나는 장소에 갔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를 일률적으로 착용하고 있어서 우리 일행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사무국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 수속에 관한 내용을 전달받고 탑승을 기다렸다.
- 안중근 의사기념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권총으로 저격하였다. 이토를 저격한 후 안중근은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한국 만세라는 뜻이었다. 이것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이토를 살해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항일 의지를 만세계에 천명한 것이며 일본의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현장에서 체포한 안중근을 뤼순 감옥에 가두어 이듬해인 1910년 3월 26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옥중에서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한국과 일본, 중국이 합심하여 서양 제국주의열강을 막아내자는 ‘동양평화론’을 제창 하지만 완성되지 못한다. 사형된 후 고국 땅에 묻어 달라는 그의 유언과는 달리 그의 유해는 아직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가 방문한 안중근 기념관은 옛 하얼빈역 1층안에 이토를 살해한 곳이 보이는 장소에 마련되었다. 여기에는 안중근의 출생과 의병활동 그리고 안중근의 옥중에서 주장했던 동화평화론 등의 내용을 전시하고 있었다. 기념관 규모는 큰 편은 아니었지만 당시 현장의 느낌을 살린 면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유리창 너머로 안중근이 저격한 장소와 이토 히로부미가 살해된 장소가 표시되었으나 그곳까지 갈 수 없어 안타까웠다. 나오면서 방명록에 ‘선생님의 뜻을 깊이 새기겠습니다’라고 썼다. 하얼빈역은 흑룡강성의 성도답게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 >
- 인민 음악가 정율성 기념관
정율성은 1933년 형인 정의은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2기생으로 입교하여 항일운동의 대열에 합류한다. 그 뒤 민족혁명당 당무를 보는 한편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음악공부를 하였다. 항일구국운동이 한창이던 1936년 남경에서 오월문예사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 김성숙(정율성 외숙모 김필례여사 형부)· 박건웅(정율성 누나 정봉은 남편) 등이 건립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담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남경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연안에 도착하였다. 이후 연안에서 섬북공학에 다니고, 1938년 5월부터는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활동했으며,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해 12월부터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배치되어 음악을 가르쳤다.
음악을 작곡하는 한편 1941년 7월부터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섬감녕분회, 이듬해 12월부터 태행산(太行山)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 등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4월 다시 연안으로 돌아온 뒤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다. 1950년 9월 중국으로 갔다가 같은 해 12월, 중국인민지원군의 한 사람으로 귀국하여 전선 위문활동을 전개하였다. 1951년 4월 중국으로 가 1976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작곡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정율성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5남3녀 중 3명이 일찍 사망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이들 형제는 1910년대 수피아학교 교사를 지낸 부친 정해업과 외가(외숙부 최흥종-신간회 전남지회장 역임)의 영향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심이 남달랐다. 일제는 만세 시위가 수그러들자 본격적으로 시위자 색출에 나섰다. 이른 바 '체포령'이었다. 효룡과 충룡에게도 체포령이 떨어졌다. 마음 놓고 숨 쉴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식민지의 땅. 형제는 중국 망명을 단행했다.
큰형 정효룡은 화순지역 3ㆍ1운동 주도, 상해 임시정부 교통부 서기, 임정 독립신문사 직공, 상해 임정 선전원 국내 침투 및 활동, 정치범죄 처벌법 위반 징역 1년 수형 , 조선독립청년단 군자금 모집사건 연루, 판법 위반 징역 1년 6월 선고를 받는 등 항일 운동가로 출옥 후 1934년 40세의 나이로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남 정충룡은 1920년대 중국 대륙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운남 강무당 군사학교를 다녔던 항일투사였다. 또 임정의 진로를 개척하려던 국민대표회의의 청년 대표였으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의열단이었다. 충룡은 1927년 숨졌다. 4남 정의은은 1933년 중국 난징의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1기생으로 입교하였으며 그 후 국내로 들어와 군사학교 학생 모집 임무를 비밀리에 수행하였으며 그후 해방 후 냉전과 분단, 유신 등 반공체제하에서 가족의 피해를 염려해 사실상 칩거하였으며 1980년 사망한다.
우리가 방문한 정율성기념관은 하얼빈시 송화강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벽면에는 ‘인민음악가 정율성기념관’이라고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정율성이 작곡한 ‘인민해방군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정율성의 출생과 활약상이 시대별로 잘 전시되어 있었다. 2층에는 그가 연안 이후에 활약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정율성 기념관을 나오면서 당시의 독립투사들은 이념을 떠나 오로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사람으로 오늘날 이들에 대한 평가는 이념의 잣대가 아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맞춘 올바른 평가를 해야 한다고 기대해 본다. 송화강의 황혼은 너무도 아름답고 평온해 보였다.
우리 일행은 저녁 식사 후 하얼빈 광장으로 진출하여 여행에서의 맥주파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특히 특급배우 박춘우선생님의 노래 솜씨는 탁월했다.
<인민음악가 정율성 기념관>
둘째 날(7월28일)
- 신민부 본부 터
1920년대 독립운동은 일제의 간도참변이후 어려운 상황에서 전개되었다. 특히 자유시 참변이후 남만주 지역에서는 참의부가 임시정부 직할부대로서 역할을 하였고, 중간지대에서는 정의부가 북만주 지역에서는 신민부가 결성되어 항일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석두하자진 이정표가 있는 도로였다. 이곳 어디쯤 신민부 본부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한 것이다. 우리 일행은 연거푸 사진 촬영에 바쁘다 현장 기록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신민부 본부터 추정지>
신민부 본부터를 확인한 후 일행은 한·중 우의 공원이 있는 흑룡강성 혜림시로 향하였다. 이곳은 김좌진을 비롯한 항일 투사들의 활동과 한인들의 이주 역사, 일제의 침략상을 널리 알 릴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 되고 있다. 제1실은 1860년부터 시작된 한인들의 만주지역 개척사와 독립운동 관련 내용을 전시 하고 있다. 제2실은 만주를 비롯한 국내ㆍ외에서 전개된 3ㆍ1운동과 봉오동전투 및 청산리 전투 등을 보여주고 있다. 제3실은 청산리전투 후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 등 독립 운동의 시련의 역사와 함께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각종 독립운동 단체의 성립, 이 시기 김좌진의 활동에 대해서 전시하고 있다. 제4실은 1931년 일제의 침략전쟁에 맞선 한중 연 합 무장투쟁 과정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제5실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 후 한국과 중국의 교류 관련 내용을 전시함으로써 한중우의의 상징적 인 공간으로 꾸며 놓았다.<자료집>
각 실별로 돌아다니면서 자료가 될 만한 사진들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특히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지역의 현재 사진들이 나에게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우리의 항일 운동사를 시대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 놓은 점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항일 투사들의 정신을 본받고 이들의 독립운동에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과 존경의 마음을 느꼈다.
< 한·중 우의 공원>
-김좌진 장군 순국지
흉상 뒷면에는 그의 이력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조금은 제고 되어야 할 내용이 있었다. 1917년 대한광복군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김좌진이 참여한 대한광복회(대한광복군단)의 부사령 역할을 두고 한 말 인 것 같다. 확인해보아야 할 사안이다. 또 하나는 1921년에 조직된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으로 되어있는데 이 부분도 대한 독립군단의 부총재로 정정되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가진 인물이라 해도 역사적 사실은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았다. 순국지 광장 앞의 넓은 평야는 아마 이곳에서 지낸 조선인들이 개척한 기름진 농토로 보였고, 이곳을 지나는 농부가 소가 끄는 수레에 앉아가는 모습에서 1960년대 우리 시골 마을의 풍경을 연상하게 되었다.
<김좌진장군 순국지>
셋째 날(7월29)
- 신민부 결성지
< 신민부 결성지 추정지>
- 발해 상경 용천부 유적지
발해 성곽의 외성과 내성의 남문 연결로가 바로 주작대로인데 이것은 당의 수도였던 장안성을 모방한 유적지임을 다 아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가 발해가 고구려 문화의 바탕위에서 당의 문화와 말갈의 전통문화를 융합하여 발전시킨 나라임을 알 수 있다. 발해성의 상경용천부유적지를 밟아보는 기분은 큰 보람으로 다가왔다. 연거푸 카메라를 들이댔다.
발해유적지를 떠나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을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이 향후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따른 이해관계 속에서 발해의 역사가 고구려사와 더불어 일찍이 자신들의 역사라고 억지 주장하여 중국내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이탈을 방지하고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과의 경쟁에서 선점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도 이러한 중국의 의도를 면밀하게 고찰하고 여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모색해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발해 상경유적지>
- 두만강 나루터
이제는 두만강이다. 우리가 이동한 지역은 도문지역이다. 10여년 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 지역이지만 남북 분단을 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가슴한편으로는 항상 무거운 마음으로 가는 곳이다. 같은 민족이지만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대치하고 있는 현실이 항상 아쉽다. 지난번에 갔던 곳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서는 중국과 북한을 오갈 수 있는 방법이 도로를 통한 방법과 열차를 통한 방법 등이 있는데 우리가 간 곳은 열차가 왕래하는 곳 부근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철로의 색깔이 구별되었는데 검은색을 띤 곳이 중국관할이고 그 이외 지역은 북한관할이란다. 남북한의 관계개선을 위해서는 상호간의 인정을 바탕으로한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바탕위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남북간의 관계는 협력과 우호관계로 발전할 것이며 이산가족의 아픔을 하루라도 빨리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우리 일행은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두만강에 발을 담그고 기념촬영을 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버스는 두만강변을 따라 용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역 두만강에서>
- 용정중학교(대성중학교 옛터)
우리가 방문한 용정중학교는 길림성 용정시에 위치한 학교로 대성중학교 옛터에 여러 학교가 합쳐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성중학교는 윤동주, 문익환을 비롯한 우리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한 학교이다. 이곳에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잘 정리하여 보존하고 있었으며 특히 윤동주시인의 서시를 새긴 비석과 흉상도 조각해서 전시하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로 유명한 이상설선생님의 항일운동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상설 선생님은 이곳에 1906년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세워 항일운동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데 앞장선 인물로 이후에는 연해주로 건너가 성명회, 13도의군, 권업회, 대한광복군 정부 등을 세우는 등 많은 역할을 하신분아다. 안내원의 자세한 설명도 이곳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했던 답사단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용정중학교내 윤동주시비>
넷째 날(7월30일)
- 백두산 등정
< 장백폭포 전경>
다섯째 날(7월 31일)
- 정리하며..
이번 답사는 신민부 결성 90주년 기념 항일 유적지를 중심으로 답사가 이루어졌다. 일제강점을 전후하여 우리 민족은 이곳 북간도 지역에 항일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정착하여 독립운동을 할 인재를 양성하고 무력항쟁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곳이다. 1906년 이상설이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기반으로 독립 운동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후 서전서숙은 1908년 명동학교로 이어져 왔고 1911년에는 대종교 중심의 중광단 1919년에는 북로군정서로 맥을 있게 된다. 김좌진이 이끌었던 북로군정서는 1920년 봉오동전투로 피해를 입은 일본이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대규모 병력을 집결하여 독립군 소탕에 나섰을 때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과 연합하여 일본군 병력에 큰 승리를 얻었던 대표적인 북간도 군사 단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 이후에 일본은 간도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 대해서 무차별한 학살을 자행하게 되니 바로 경신참변(간도참변)이 그것이다. 경신참변으로 많은 희생을 당한 우리 민족은 1921년 전열을 정비하여 대한독립군단으로 결성되었고 약소민족 국가를 후원한다는 소련의 혁명세력의 도움을 받으러 자유시로 이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회주의계열 두 한인 무장단체의 세력싸움에 휩싸이게 되고 만다. 게다가 지원을 기대한 소련으로부터 무장해제를 요구받았고 이를 거부한 수많은 독립군이 희생을 당한다. 그 뒤 일부는 소련 사회주의 무장 세력에 협력하거나 또는 포로가 되어 그 곳에 남게 되고 나머지 세력은 북만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남만주지역에서는 1922년 대한통의부로 결성되나 여러 단체가 분열되면서 육군주만참의부(1923), 정의부(1924)라 결성되었고 북만주에서는 신민부(1925)로 재편된다. 이후 신민부를 이끌었던 세력은 당시 독립운동과정에서 나타난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국민부로 통합되었고 이어 한족총연합회를 구성하기 하기에 이른다.
<항일유적지 답사단>
언제나 여행은 즐겁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친 애국지사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방문하는 것은 그 어느때 보다도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 오직 조국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던진 애국지사들의 나라사랑의 마음을 다시한번 되새긴다. 이러한 의미 있는 답사를 소개해주시고 기회를 주신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님이신 김순흥 교수님께 먼저 감사의 말씀드린다. 또한 개개인 다양한 분야의 답사단을 새로운 환경에서 하나의 공감대로 뭉칠 수 있도록 무리 없이 이끌고 지도해주신 신흥무관학교100주년 기념 사업회 방 국장님과 김 팀장님 그리고 답사에 참가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또 다른 여정을 준비하는 설렘으로 이 글을 맺는다.
- 광주숭덕고 김명수.
* 본문의 내용은 답사자료집과 단원님들 사진을 참고하였습니다.
첫댓글 답사기를 너무 잘쓰셔서 글쓰기를 포기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답사내내 좋은말씀 기억에 남습니다. 건강하세요^^
저는 2013 태항산답사를 다녀왔었는데 장소는 틀리지만 답사단의 화기애애하며 의기에찬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수 있는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ㅎ
저는 올 1월에 태항산 답사 다녀왔습니다. 조선의용군 항일운동의 현장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립니다. 항일운동에 온 힘을 기울인 윤세주, 진광화 열사의 활약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지요. 감사합니다.
장백폭포를 우리는 비룡폭포라고 불렀던 것으로 압니다.
사진 멋집니다. 글을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
네 맞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