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묘년에 영광에서 태어나다
소태산대종사의 시조는 신라 시조의 왕인 박혁거세요, 중세에 그 본을 얻기는 밀성대군이며,
그 후에 경기도 양주군에 대대로 살다가 7대조 구계공 박억 때에 전라남도 영광으로 옮겨왔다.
소태산대종사의 부친 박성삼은 처음에 군서면 마읍리에 거주하다가
소태산대종사의 탄생 7년 전에 백수면 길용리 영촌으로 이사했다.
소태산대종사의 부친 법호는 회산(晦山), 법명은 회경(晦傾)이며,
모친 강릉 유씨는 법호는 정타원(定陀圓), 법명은 정천(定天)으로 후에 받았다.
부친은 어릴 적에 집안이 가난하여 비록 학문을 익히지는 못했으나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평생에 많은 사람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고,
모친은 천성이 매우 어질어 항상 덕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소태산대종사의 부친은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장녀는 군서 김씨 가로 출가했고,
장남 군옥은 결혼하여 길룡리에서 살았으며,
차남 만옥은 결혼했으나 일찍 요절했고,
차녀 도선화는 법성 이천 서씨 가로 출가했으며,
3남은 소태산대종사이며,
4남은 동국으로 소태산대종사에 의해 최초의 표준제자 중 1인이 된 육산 박동국 대호법이다.
소태산대종사는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마을(202번지)에서
1891년(辛卯) 5월5일(음 3.27)에 탄생했다.
소태산대종사 탄생가는
뒷산 봉우리인 상여봉(코끼리봉)을 중심으로
좌측으로 설래바위봉(서래봉)과 우측으로 옥녀봉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옥녀가 코끼리 옆에서 서토(西土)에서 불법을 가지고 올 성현을
촛불(정관평 건너 촛대봉)을 밝히고 기다리는 형국이라고도 한다.
소태산대종사 탄생가에서 아우 동국도 탄생하였으며,
구호동으로 이사하자 숙부인 세윤이 살다
그 후 외숙인 칠산 유건 대호법이 이웃(194번지)에서 이사와 살았다.
소태산대종사는 평소에 자신의 탄생과 관련해서
"공자님도 태어나실 때 이가 나 있었다고 하여 다시 공자님 같은 분 못 태어나시게 하였고,
부처님도 옆구리로 태어나셨다 하여 길을 막았다.
위대한 분들이 모두 기적으로 옆구리로 낳고 동정녀가 낳았다하여
다음 성자가 못 나오도록 길을 막으셨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어린이)이 어머니께 '나 낳을 때 꿈 어떻던가요?' 물을 때
'아니, 너는 별 꿈 없이 낳았다'고 하면
'나는 공자님과 같이도 못 되고, 부처님과 같이도 못 되겠네' 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냐.
그러니 과거 성자들이 한 것은 말할 것이 없고, 내 역사를 쓸 때에는 평범하게 쓰라"고 했다.
또한 평소에 제자들에게 '기적의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며
열반 한두 해 전부터는 대중에게 혹은 개인에게 6가지를 자주 간절히 부촉하는 가운데
특히 "과거 세상에는 불보살들이나 회상을 연 도인들의 역사와 경전을 꾸밀 때에
태몽을 비롯하여 특별한 이적 특별한 예언 등을 많이 넣어서 장엄이 심했다.
그것이 그 분들을 신봉하게 하는 데에나 권선을 하는 데에는 다소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일반 대중 가운데에서는 큰 도인이 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대들은 나의 역사나 경전을 만들 때에
절대로 장엄을 실상에 넘치게 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했다.
정산종사는 소태산대종사의 탄생에 대하여
"과거에는 왕궁 부귀가에 나시고 이생에는 농촌 빈천가에 나시니,
그 역시 부처님의 제도방편이시다.
과거에는 부귀자로 극단의 빈천을 자초하여 부귀자를 깨우치고,
이생에는 빈한자로 엄청난 경륜을 펴시어 빈천자들의 힘을 돋우신 것이다"고 했다.
소태산 대종사 탄생가(원기 28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