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平調詞
李 白
雲想衣裳花想容(운상의상화상용)
春風拂檻露華濃(춘풍불함노화농)
若非群玉山頭見(약비군옥산두견)
會向瑤臺月下逢(회향요대월하봉)
구름은 그대의 옷인 듯, 꽃은 그대의 얼굴인 듯 한데
봄 바람은 난간을 스치고 이슬맺힌 꽃은 농염하기 그지 없네.
만일 군옥산 꼭대기에서 본 서왕모가 아니라면
필시 달 밝은 요대에서 만난 선녀가 틀림없네.
一枝濃艶露凝香(일지농염노응향)
雲雨巫山枉斷腸(운우무산왕단장)
借問漢宮誰得似(차문한궁수득사)
可憐飛燕倚新粧(가련비연의신장)
한떨기 농염한 꽃,이슬이 향기를 머금었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겠다던 무산선녀도 애만 끓는구나.
잠시 묻노니, 그 옛날 한궁의 미녀들 어찌 그대와 비하리오
아릿다운 조비연이 단장하고 나온듯 하여라.
名花傾國兩相歡(명화경국양상환)
常得君王帶笑看(상득군왕대소간)
解釋春風無限恨(해석춘풍무한한)
沈香亭北倚欄干(심향정북의란간)
모란꽃도 경국지색의 미인도 즐거움에 취한 듯
우리 임금 기뻐서 바라보며 미소짓네.
살랑이는 봄바람에 온갖 근심 보내고
미인은 심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어 서있네.
청평조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이며, 당시의 궁중시인이었던 이백이 청평조사 7언4구 시로서 연작 3수를 지었다. 이 詩는 당나라 현종이 즐긴 환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청평조사 (淸平調詞)는 당 현종 (唐 玄宗)이 모란이 만발한 심향정 (沈香亭) 에서 양 귀비와 함께 잔치를 베풀고 여흥을 즐기던 중 당대의 명창인 이 구년 (李 龜年)을 시켜 노래를 부르려고 할 때 이태 까지의 시에 흡족하지 못한 현종이 그 당시 궁정 시인으로 있었던 이 백에게 새로 시를 지을 것을 명했습니다. 이 때 이 백은 술에 만취되었으나 즉석에서 양 귀비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시 세 수를 지었습니다. 본 시는 양 귀비를 노래한 작품으로 주제 대상 자체가 명시 되지 않은 묘한 시로, 즉석에서 노래가 되어 불러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주제 대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양 귀비를 한나라의 성제 (成帝)를 유혹한 조 비연(趙 飛燕)과 비유한 대목이 있어 양 귀비의 모함으로 이 백은 궁중에서 추방되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빌붙어 있는 무리들의 한심한 작태는 여전한 모양입니다. 씁쓸한 맛이 감도는 시입니다만 이 백의 일필휘지의 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어떤 정치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지말고 그냥 "미인을 미인으로 칭송한 시" 정도로만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청평조사 (淸平調詞) : 청평조라고 하는 음악의 곡조에 맞추어 지은 가사를 뜻합니다.
운상의상 (雲想衣裳) : 구름을 보니 옷을 연상한다는 의미입니다. 구름 같은 옷
화상용 (花想容) : 모란꽃 과도 같은 용모
함 (檻) : 모란꽃 밭의 난간, 불함 (拂檻)은 난간으로 바람이 솔솔 분다는 의미입니다.
로화농 (露華濃) : 꽃에 맺힌 이슬방울. 또는 빛나는 이슬방울을 꽃에 비유한 것 으로서
아지랭이가 꽃가지에 짙게 피어오르는 모습을 나타낸 것 입니다.
약비 (若非) : 만약 ~이 아니라면,
군옥산 (群玉山) : 산해경 (山海經)에 나오는 전설적인 산.
서쪽에 있으며 신선인 서왕모 (西王母)와 더불어 아름다운 선녀들이 산꼭대기에
살고 있다고 전해 집니다. 일설에는 곤륜산 (崑崙山)을 말하기도 한다고는 하나 확
실치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서왕모와 양귀비를 대비한 것 입니다.
회 (會) : 반드시, 필경, 향 (向) : ~에서
요대 (瑤臺) : 초사 (楚辭)에 나오는 전설적인 선경 (仙景).
오색 옥으로 만들어진 대지 (臺地)로 선녀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실녀와 양귀비를 대비하고자 한 것입니다.
구름을 보니 그대 (양 귀비)의 옷이 생각나고, 모란꽃을 보니 그대 (양 귀비)의 아름다운 모습이 연상됩니다. 봄바람은 화원의 난간을 가볍게 불어 스치고 꽃에 맺힌 이슬방울은 짙게 영글어 봄색이 온천지에 가득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선녀같은 그대는 만약 서왕모가 산다는 군옥산 꼭대기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선녀들이 살고 있다는 요대에서 달 밝은 밤에나 만날 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현종을 따라 모란꽃밭으로 나온 양귀비를 마냥 칭찬했습니다. "구름 같은 옷 (雲想衣)" "꽃다운 얼굴 (花想容)"은 정적인 묘사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봄바람은 사뿐히 난간을 스치고 (春風拂檻)" 라며 급하게 동적인 묘사로 전환하였습니다. 이것은 구름같은 옷소매를 난간에 쓸어 스치며 모란꽃 송이 사이를 누비는 양귀비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물의 대상을 좁혀 꽃송이로 우리의 초점을 모으고 다시 꽃송이에 맺힌 영롱한 이슬방울을 대비시켜 농염하게 맺히고 엉긴 아지랭이를 통해 아름다운 화심과 더불어 양귀비의 사무친 사랑의 정을 응결시켜 돋아나게 하였습니다. 화려한 즐거움 속에서 현종과 양귀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선녀들이 떼지어 사는 선경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양귀비를 신선과 선녀인 서왕모와 질녀를 대비시킨 상태입니다. 아부의 극치를 보는 듯 합니다. 이 백의 전혀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변려문騈儷文, 이백, 청평조사淸平調詞, 하지장賀知章
당시唐詩는 중국인의 정신문화의 정수라고 할 정도로 아직까지도 그 문화적 가치가 높습니다.
당대에 시가 성행한 이유는 육조시대 한문문체의 하나인
변려문騈儷文(변체문騈體文, 사륙변려四六騈儷 또는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함)의 성행과
과거 진사과에서의 시험에 시가 포함된 점을 둘 수 있습니다.
당시의 발전과정은 초당, 성당, 만당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 성당 50년간은 시의 황금시대로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백거이白居易, 한유韓愈 등을 배출했습니다.
낭만주의 시인으로 두보와 함께 이두李杜로 불린
이백(701~762,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青蓮居士, 적선인謫仙人)은
성당盛唐 때 오늘날의 쓰촨(四川성인 촉나라의 창명현彰明縣 또는
안서도호부安徐都護府 소속의 쇄엽성碎葉城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백의 선조는 수나라 말에 서역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간쑤성 농서현에 위치했고,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아시아에서 장사를 하던 무역상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백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백은 남성적이며 용감한 것을 좋아해 청소년 시절에 독서와 검술에 정진했고,
25세에 촉 지방에서 나와 아버지의 유산을 소비하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유랑생활을 하며 강남江南 지역을 여행했으며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람하기도 했고, 민산岷山에 숨어 도교를 수양하기도 해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종이 즉위하던 해인 742년에 이백은 장안長安(지금의 시안西安에서 시인
하지장賀知章(659-744?)을 만났습니다. 측천무후가 즉위하던 해인 695년에 장원급제하여
진사가 된 뒤 725년에는 예부禮部 시랑이 되고 집현전 학사가 된 하지장이
태자(훗날의 숙종(재위 756~762, 현종의 아들)의 빈객賓客(교육담당)일 때
이백을 한번 보고는 적선인謫仙人이라 불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백은 술을 사
그와 함께 즐겼다고 합니다. 이백을 당나라 6대 황제 현종玄宗(685-762)에게
추천한 이가 하지장입니다.
하지장의 인정을 받은 이백은 오균 등의 추천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습니다.
이백은 43세 되던 해인 744년에 현종의 부름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의 관직을 하사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했으나, 그가 맡은 임무가 단지 포고문 초안을
마련하거나 한낱 궁정 시인으로서 현종의 곁에서 시를 지어 올리며 임금의 치적을
칭송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이백이 궁정시인일 때
현종과 양귀비楊貴妃의 연회장에서 지은 시입니다. 이로 인해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에 떨쳤으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아 하지장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으며 장안의 한량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 데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장은 시와 글뿐 아니라 초서와 예서에도 능했습니다.
그는 장욱張旭, 회소懷素와 더불어 당초삼걸唐草三傑로 불렸고, 또 이백, 이적지李適之, 왕
여양王汝陽, 최종지崔宗之, 소진蘇晉, 장욱, 초수焦遂 등과 더불어 취팔선醉八仙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백은 제멋대로인 태도 때문에 현종의 충신 환관 고역사의 미움을 받고 권문귀족들의 모함을 받아
1년 만에 궁정을 쫓겨났습니다. 이백은 당나라 중기에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 등이 일으킨
안사安史의 난亂(755∼763)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십여 년간,
동쪽으로는 허난성 뤄양洛陽을 지나 노魯 지방까지, 남쪽으로 오월吳越 지방까지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744년에 뤄양에서 두보를 만났고
두보와 석문石門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 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했고 더 남하하여 광릉,
금릉金陵(장쑤성 난징南京)에서 노닐었고 다시 회계를 찾았습니다. 허난성 카이펑開封에서는
고적과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후에 산둥 지난濟南의 도교의 사원인 도관道觀 자극궁紫極宮에
들어가 도교에 정식으로 귀의해 도사道士가 되기도 했습니다.
새로 즉위한 숙종의 동생 영왕永王 이린李璘이 장강 남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이백을 그의 막료로 발탁했고, 이로 인해 56세였던 이백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왕은 숙종과 대립하다 싸움에서 패했고, 결국 거사는 역모로 간주되어 이백 역시
연루되어 심양尋陽(지금의 장시江西성 주장九江시)의 옥중에 갇혔습니다.
뒤이어 야랑夜郞(지금의 구이저우貴州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었으나 삼협三峽(양쯔강 상류 협곡)
부근까지 왔을 때 곽자의 등 술 친구, 시 친구들의 도움으로 759년에 사면되어 강남으로 돌아왔습니다.
말년이 되어 이백은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고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했으나 노쇠한 탓으로
61세에 안후이安徽성 당도當塗의 현령이었던 종숙 이양빙에게 의탁해 살며 빈객으로 있으면서
얼마 뒤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장강 채석기採石磯에서 장강에 비치는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동정호로 뛰어들어 익사했다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