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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석: "개혁주의 전천년설" (2)
게시일 : 2016-11-04
2 개혁주의 전천년설의 주요해석
1. 첫째부활의 성경적 해석
종말론에서 먼저 연구해야 할 표적標的은 천년기설의 논쟁에 앞서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몇 가지 근원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천년기설에 있어서 부딪치는 첫 번째 난제는 첫째부활이다. 역사적 전천년주의의 문제점은 '첫째부활'에서 기인한다. 우리들이 수용해온 첫째부활론은 성경적인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이런 부활관은 역사적 전천년주의나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나 칼빈주의나 알미니안주의나 모두 똑같은 신학적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말하자면 주님 재림하실 때 주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고 모든 살아 있는 성도들이 변화 받는다는 부활관인데 이 부활을"첫째부활"이라고 정의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천년왕국 후에 부활 하는데 이 부활을 둘째부활이라고 규정한다. 더 놀라운 일은 무천년설에서는 이 첫째부활에 아주 독특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데 저들은 첫째부활을 그리스도인들의 거듭나는 사건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엄밀히 이런 부활관은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성경적 해석이 아니며 또 성경적 진리도 아니다. 만약 주님 재림하실 때 죽은 모든 성도들이 부활한다면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성도들이 변화한다면 무천년주의가 되어 버린다. 천년왕국은 지상에 세워지는 물질적 세계다. 말하자면 회복된 에덴이다. 에덴에 살았던 아담과 하와가 부활한 몸이나 변화 받은 몸으로 살았던 것은 아니지 않는가?
부활한 몸이나 변화 받은 몸은 성도들의 최종적인 구원을 이루는 신령한 몸이다. 이 몸은 영원한 도성인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우리의 몸이 영원한 생명으로 변신하는 신령한 몸이다. 천년왕국은 새 예루살렘이 아니며 육신 그대로의 몸으로 살지만 죄 없는 몸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개혁주의신학에서는 아직까지 이 오류의 둘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잘못 해석된 첫째부활론이 너무나도 오랜 기간 깊숙이 신학을 장악해 왔고 그 신학이 교회로 이런 부활관을 따르게 해 왔다. 이 문제에 감히 도전할 신학자가 없었기에 이런 부활론이 별 문제없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1) 첫째부활은 성경에 단 한곳에만 나와 있다.
첫째부활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우리는 먼저 첫째부활의 대상자들을 성경에서 찾아내야 한다. 많은 성도들은 아직까지 배워온 신앙적 관행으로 첫째부활을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죽은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고 살아 있는 성도들은 모두 홀연히 변화 받아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알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활문제가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부활을 다루는 신학자 조직신학자 종말론 신학자들의 눈이 이곳에 고정되어 있고 여기서 눈들이 감겨져 있기 때문에 더 진전되지 못한 채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그토록 헤매어 왔다.
그러면 성경은 첫째부활의 대상자들에 대하여 무엇이라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인가? 첫째부활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계20:4절 말씀한곳 밖에 없다. 그러므로 첫째부활에 대한 정의는 이곳에 계시된 말씀을 빼놓고는 내릴 수 없다.
계20:4-5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부활이라"
첫째부활 대상자들에 대한 계시는 성경에 오직 이곳에만 나와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첫째부활을 논할 때에는 이 말씀을 문제해결의 첫 번째 주제로 삼아야 한다. 첫째부활 자가 누구인가의 해답은 이 말씀 안에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다. 이 말씀에 더 보태도 안 되고 더 감해도 안 된다. 이 말씀을 비유로 해석하는 일은 보태거나 감하는 죄에 해당 된다. 이 말씀 안에 첫째부활의 정답이 있기 때문에 그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비유건 상징이건 받아드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첫째부활 문제는 영원한 미제로 남게 되며 엉뚱한 해석이 대체되어 부활에 대한 정확한 진리를 희석稀釋시켜 첫째부활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부활을 엉뚱하게 해석하는 일은 구원론에 치명상을 입히는 일이 된다. 지금의 이상한 첫째부활의 풀이가 신학계에서 계속 발목을 잡고 오답을 정답으로 주장하는 일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계속될 때 요한계시록은 미로迷路를 헤맬 수밖에 없게 된다.
① 두 종류로 구분된 첫째부활자
첫째부활자의 주인공은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4절에서 먼저 등장하는 첫째부활자는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인가?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란 표현은 그 어떤 비유나 상징으로도 대체시킬 수 없는 순교자들이다. 이들 순교자들은 그 후에 나오는 순교자들과는 달리 짐승인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기 이전에 순교한 성도들이다. 계6:9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에 등장하는 순교자들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면 두 번째로 등장하는 첫째부활자는 누구인가?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라고 표현된 대상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야 할 부분이 있다. 둘 다 동일한 첫째부활 자들이지만 여기 나오는 순교자는 첫 번째 순교자들과 순교하는 시기와 환경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짐승과 우상' 그리고 '이마와 손에 받는 짐승의 표'가 등장하고 있다. 이들이 순교한 시점은 종말에 짐승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기가 된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매우 강력한 기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성경에서 이런 시기는 7년 환난 기간을 의미한다. 곧 이 기간에 순교한 성도들이 또 다른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갈 자들이란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데 이 두 종류의 순교자들이 곧 첫째부활 자들임을 명시해 주고 있다.
그러면 왜 성경은 첫째부활의 대상인 순교자들을 두 종류로 구분 짓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계시록6장에 나와 있다. 제단아래서 순교자들의 피 값의 신원을 호소하는 영혼들의 간구와 또 이에 화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는 말씀에서 찾게 된다(계6:9-11). 제단 아래서 호소한 순교자들은 첫째부활의 첫 번째 순교의 대상자들이며 그 수효를 새롭게 채워야 하는 동무 종들은 두 번째 순교자들인데 이들은 계11장에서 1260일 동안의 예언사역을 하면서 짐승과 싸우다가 순교함으로 부활 승천한 두 증인의 경우를 의미해 주고 있다(계11:7-12).
7년 환난 중에 순교한 성도는 두 증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1260일 동안 예언을 하다가 그 끝에 가서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이들 순교자들은 6장11절에서 말씀해 주는 그 수를 채우는 순교자들이다. 앞선 순교자들의 동무 종들이다. 이들이 첫째부활의 두 번째 순서에 들어가는 순교자들인 것이다. 이 두 번째 순교자들의 부활에 대해 20장 4절에 '살아서'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의미이다. 만약에 '살아서'란 단어가 빠져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들 대상이 재림 시까지 생존해서 주님을 맞이하는 모든 성도들로 오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살아서'란 말은 헬라어 '에제산'으로 '살아나서'란 의미로 해석해야 맞다. 즉 죽었던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첫 번째 순교자들에 대해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이들이 아직 부활한 사실을 밝힌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두 번째 순교자들에 대해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했다. 이 상태로는 이들을 순교자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다음에 '살아서'란 말이 뒤따른다. '살아나서' 곧 이들의 부활을 말하는데 여기서 '살아서'라고 표현한 대상은 두 종류의 순교자 중 어느 한쪽만을 의미하지 않고 두 종류의 순교자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함께 살아나서(부활) 이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는데 이들에 대해 '이는 첫째부활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나 세대주의 신학자들이나 이들에 대해 '순교자들'이라고 해석하는 데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그리고 20장4절의 두 부류의 순교자들이 모두 첫째부활 자들임을 분명히 확인해 주는 말씀이 5절이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말씀 전반부에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문맥상으로 이들 두 부류의 순교자들 이외의 부활이 있다는 뜻이다. 첫째부활 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부활은 천년왕국 후에 있을 것임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 '이는 첫째부활이라'는 말씀은 이들 두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죽음에서 부활한 사실을 확정적으로 보여 준다. 여기서 '이는' 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대상은 4절에서 밝혀주고 있는 두 종류의 순교자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이들이 첫째부활 자들임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란 이 두 종류의 첫째부활 자 외의 부류에 속한 자들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 나오는 부활이란 말은 영적 의미를 지닌 말이나 상징적이나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분명히 두 종류의 순교성도들이 그들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실제적인 육체적 부활사건을 가리킨 말이다. 그런데 무천년주의 자들은 첫째부활을 영적해석으로 방향을 돌려버린다. 그리스도인들의 중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어불성설도 그 정도가 지나쳤다. 무천년설을 합리화 시키려는 신학논리에 집착한 나머지 성경해석을 이처럼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순교성도들의 부활을 무슨 신학적 근거로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중생이라고 해석하는가? 신학이란 이름으로 성경을 이렇게 미장美匠해도 되는 것인가?
여기서 무천년주의 자들의 첫째부활론을 잠깐 살피고 갈 필요가 있다. 무천년주의 자들이 즐거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요5:24-25절 말씀이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첫째부활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 주님은 복음을 듣고 그 영적생명이 살아나는 영적사건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혹은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 대한 해석으로 요3:3절에서 니고데모에게 이처럼 말씀해 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를 믿으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이 영적사건에 대해 거듭나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거듭나는 일은 중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죽은 육신이 다시는 죽지 아니하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부활과는 결코 연계시킬 수 없다. 믿는 자가 얻는 영생은 영적생명이고 죽은 사람이 얻는 부활은 육이 변화되는 신령한 생명이다. 이것은 비유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연결시킬 수 없는 사건이며 죽은 자의 부활을 살아 있는 자의 영적생명의 변화와 동일시시키는 표현은 비유로나 상징으로나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뿐 아니다. 첫째부활 자들의 대상을 분명히 명시적으로 밝혀 놓았다. '예수를 증언함과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라'고 하였고 이들이 살아나는 일에 대하여 "이는 첫째부활이라"고 밝혀 놓았다.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 살아나는 사건을 첫째부활이라고 하였다. 이 요5:24절의 예수를 믿는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씀과 계20:4절의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첫째부활에 관한 이 말씀은 영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상징적으로 비교하거나 적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건너 뛸 수 없는 한계가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과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 어떻게 동일한 첫째부활의 대상자로 연계시킬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신학적 해석은 비유와 상징으로 부활이라고 하는 중대한 진리를 변질시키는 무서운 오류이며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주장한 것이라면 무서운 죄를 짓는 일이며 궁색한 무천년설을 합리화 시키려는 시도였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바른 해석의 방향으로 돌이켜야 한다.
부활에 대한 오해는 중생을 첫째부활이라고 우기는 무천년설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이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역사적 전천년설에도 있다. 역사적 전천년설에서는 세대주의자들과 똑같이 첫째부활을 죽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부활관은 그 이후에 나오는 계시들도 무리한 해석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부활관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부활관인가에 대해서는 그 모순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천년왕국은 결국 허상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들이 변화 받으면 그들의 거처는 천국인 새 예루살렘이지 이 세상에 속하는 천년왕국이 아니다. 신령한 몸을 가진 성도들이 어찌 이 땅에서 육신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의 주장대로 천년왕국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곳에서 생산되고 번성하는 새로운 인류는 누가 낳은 것인가? 왜냐하면 부활하고 변화 받은 성도들은 육신적인 생식기능을 가지고 자녀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있다. 그러면 천년왕국에서 태어난 2세들은 언제 부활하는가? 부활한 부모가 육신을 가진 자녀를 낳는 일도 희한한 일이거니와 그 육신을 가진 2세들은 그러면 언제 변화 받는 것인가? 죽는 과정을 거친다면 그들은 언제 무엇 때문에 죽으며 그들은 또 언제 부활하는 것인가? 그러면 그들의 부활은 첫째부활인가, 아니면 둘째부활인가?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 있다면 그들은 언제 변화체가 될 것인가? 그들은 이 문제의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데서 파생하는 성경적 모순은 신학으로도 주경학으로도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첫째부활의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요한계시록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매해 맞이하는 부활절 때마다 설교구성에 교회목회자들이 많은 곤욕을 겪어왔다. 성도들의 첫째부활, 마지막 부활, 성도의 변화, 휴거, 천년왕국 등 모든 중요한 계시들이 가야할 제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릇된 주해로 하나님의 말씀인 요한계시록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미궁 속에 잠겨버리게 만들었다. 물론 그 책임은 분별없이 제멋대로 해석한 신학자들의 몫이다.
② 고전15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순서
우리는 부활을 말할 때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의 순서가 기록된 성경을 찾아야 한다. 성경에는 성도들의 부활에 관한 부분적계시가 많지만 차례에 대해서는 단 한 곳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15장22-26절이다. 이를 보충해 주는 계시는 50-52절에 있다. 이 두 곳 말씀을 제쳐두고 부활의 순서와 상황을 논해서는 안 된다. 다른 곳의 부활에 관한 언급은 부분적 계시에 불과하며 부분적 계시로 부활의 정의나 결론을 내려서는 올바른 해석을 시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전15:22-26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위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순서이다. 이런 순서는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만 계시된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제쳐놓거나 이 말씀을 신학적 논쟁거리로 삼아 잘못된 해석을 내린다면 부활에 관한 올바른 해석은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에게서도 기대할 수 없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란 말씀은 아담 안에서 죄로 말미암아 사망을 선언 받은 모든 인류를 총칭한다. 다음에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삶이란 영원한 생명인 부활을 의미한다. 23절 이하에서 이 사실을 말해주며 그러나 그 부활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각기 자기 차례가 있다는 것이다. 부활이 다르다는것이 아니라 부활에는 각기 그 순서가 있다는 뜻이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라고 말씀해 준다. 생명이요 부활이신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 주님의 부활이 있기 전에는 그 누구의 부활도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또한 '첫 열매'란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도의 부활 순서에서 초월해 있다는 의미를 준다.
주님의 부활 다음에 나오는 대상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행되는 성도들의 부활이다.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속한 자요'라고 했다. '다음에는' 이라고 나오는 부활은 사람가운데 첫 번째 부활인 첫째부활자가 된다. '다음에는'이란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있을 부활의 첫 번째에 속한 성도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부활의 순서가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 한번 있을 사건을 순서란 말로 표현할 순 없다. 순서란 둘 이상의 대상이 있을 때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첫 번째 부활의 대상자로 나오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속한 자'라고 했다. 즉 예수님의 재림 시 함께 내려오는 성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가? 아니다. 이에 대한 그 해답이 계17:14절에 나온다. "그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이 말씀 초두에 나오는 '그들이'란 적그리스도와 그가 거느린 군대를 말한다. 이들은 아마겟돈에 강림하시는 예수님을 대적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대적이 될 수 없다. 주님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하여 공중의 새들의 만찬이 된다. 그런데 재림하시는 주님에게는 그에게 속한 일련의 무리가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고 했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세대주의자들이나 이들과 같은 부활론을 펴고 있는 그 수많은 역사적 전천년주의 자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고 있는가? 그들은 그 성경적 근거로 살전4:16절 말씀을 인용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이 말씀에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육신이 죽어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들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로 순교성도들이다(계20:4전반부).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이 주님 재림 때에 죽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로 끝난다면 바울이 고전15장에서 구태여 그리스도 안에서 있을 부활의 순서라고 말하면서 논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죽은 모든 자들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 다음에 있을 성도들의 부활이요 이 부활로 성도들의 부활이 끝난다면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의 순서란 표현을 왜 썼겠는가? 문제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속한 자 외에도 그리스도인의 부활이 계속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을 논하고 그 순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계17:14절에 나오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속한 자들로 등장하는 성도는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모든 죽은 성도들을 의미하거나 일반 모든 성도들을 통틀어 호칭하는 말이 아니다. 일정한 자격을 갖춘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에 대해 계19:14절에서 이처럼 밝혀주고 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이 말씀은 앞서 언급한 계17:14절에 나오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속한 자와 한 맥을 이루는 무리들이다. 재림하시는 주님이 인솔하고 내려오는 하늘군대들이 있다고 밝혀 주고 있다. 이들은 하늘의 천사들이거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이 아니다.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이라는 말씀이 그를 대변하고 있다. 이것은 성도들 중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춘 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선발된 특별한 성도들임을 알 수 있다.
14장에 보면 하늘의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이 등장한다. 이들은 일정한 자격을 갖춘 무리들이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총수이거나 육적 유대인들이 아니다. 144000에 대해 4-5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다.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이들에게 적용시킨 다섯 가지 자격요건은 계17:14절의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과 일맥상통한다.
③ 마지막에 있을 성도의 부활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144000의 정체다. 144000의 베일을 벗기지 못하면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심연深淵에 빠지게 된다. 성경의 계시대로의 진행이 불가능하다. 이 문제는 이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여기서는 먼저 이들이 천년왕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할 첫째부활 자들임을 말하고자 한다. 또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와 함께 내려오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사실과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첫 번째 순번에 속하는 성도들임도 함께 밝히고자 한다.
그러면 이제 이들 다음에 부활할 그리스도 안에서의 순서를 보기로 하자. 만약에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속한 자들이 죽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이라면 다음 순서는 필요치 않다. 성도들이 모두 부활해 버렸는데 또 부활할 대상자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고전15:24절에서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여기서 '그 후'라고 말씀해 주는 시기는 23절 '다음에는'이라고 밝혀주는 사건에 이어지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시고 그가 강림하실 때 함께 내려오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의 부활이 있는데 이 부활이 첫째부활자이다. 그리고 다음에 부활이 또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라고 한 '마지막'은 '그 후'에 있는 부활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의 마지막임을 알리는 문법적 표현이다. 물론 이 마지막 부활의 순서는 그 이전에 있은 다음에는 이라고 밝힌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속한 자들의 부활 후에 있을 순서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부활이 성도들의 마지막 부활이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부활은 첫째부활과 마지막 부활두 종류의 부활로 구분된다.
세대주의자들이나 역사적 전천년설의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마지막 부활이 불신자들만의 부활의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 언급해 주는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후 마지막에 있을 부활도 의인의 부활이어야 맞다. 마지막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두 번째 순서인데 이 마지막 부활이 불신자들만의 부활이라면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첫 번째 부활뿐이다. 그렇다면 부활의 차례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여기에서 왜 악인의 부활을 논하겠는가? 이렇게 문장을 살펴보거나 문맥을 연결시켜보면 그 해답이 자명하다. 끝내 불신자들만의 부활로 우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마지막 부활에 성도들의 부활이 포함된다면 그들이 세워놓은 첫째부활의 신학적 이론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쌓아 올린 부활론은 공중 분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는 그 이상의 낭패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첫째부활에 근거하여 논증한 모든 사건들이 신학적 방향을 잃게 된다. 그들은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모순된 부활론임에도 이 구실 저 구실을 붙여 결사적으로 방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의 시기에 대해 25절에서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명시해 주고 있다. 그러면 그 후 마지막 때에 있을 부활의 시기는 언제인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시다. 그 다음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시기는 주님 강림하실 때라고 했다. 그런데 그 다음번에 있을 마지막 부활의 시기에 대해 24절에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의미하는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가 어느 때인가? 그 다음 말씀이 해답해 주고 있다. 25-26절에서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라고 하셨다. 여기서 '그가'는 예수님 자신이시다. 이어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라고 한 시점은 천년왕국 끝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무리들을 물리칠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들은 무저갱에서 풀려나와 만국(천년왕국)을 미혹하는 사탄과 그 사자의 무리들과 이에 미혹된 자들로 마지막으로 심판해야 할 주님의 원수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을 이루시기 위해서 '반드시 왕 노릇' 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왕 노릇은 언제 행사하시는 왕권을 의미하는 것인가? 무천년주의 자들처럼 교회시대에 성도들과 함께 누리는 그 왕권을 가리키는가? 무천년주의 자들은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문맥상 논리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장인 고전15:50-54절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계시해 주고 있다.
고전15:50-54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0절이 명시해 주는 '혈血과 육肉이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본향을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유업의 나라 새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이 말씀에서 이 나라에 입성할 수 있는 대상을 언급하고 있다. 혈과 육을 가진 존재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또한 썩는 것도 이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혈과 육은 우리의 살아 있는 육신의 몸을, 썩는 것은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죽은 몸을 가리킨다. 사람이 혈과 육을 소유한 상태 그대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죽은 몸으로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새 예루살렘은 부활한 몸으로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을 유업으로 받을 그 시기에 성도들의 부활이 있게 된다. 이 부활이 고전15:24절 '그 후 마지막'에 있을 그리스도 안에서 있을 성도들의 두 번째 부활이다. 계20:5절에는 첫째부활 자들 외에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 천년이 지난 후'에 있을 성도들의 마지막 부활에 참여할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이런 사실에 대해 '비밀'이라고 전제한다. 51절에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라고 하였다. 부활과 변화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말씀하고 있다. 그 비밀의 요지는 이렇다. 마지막 나팔이 불 때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들은 변화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과 변화가 동시에 일어날 것임을 말한다. 썩는 것을 의미하는 죽은 자들은 부활하고 혈과 육을 가진 살아 있는 자들은 변화 받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모두 신령한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인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비밀인 이 같은 부활과 변화의 시기에 대하여 재림의 때라고 하지 않았다.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명시하고 있다(참고/사25:8). 이 말씀은 사망이 존재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이라고 하신 계20:14절 말씀이 성취되는 때를 가리킨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주 재림의 때가 아니라 천년왕국 후 흰 보좌 심판 시에 있을 일이다.
그러므로 살전4:16절에서 말씀해 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는" 부활의 대상은 주 재림 때에 주님께 붙어 하늘군대로 내려오는 성도들을 가리킨 것이다. 이들에 대해 계17:14절에서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고 하였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직접 주님과 함께 아마겟돈으로 내려와 짐승의 군대와 싸우는 성도들로 이들에 대해 계19:14절에서 백마를 타고 주님을 따르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라고 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와 함께 내려오는 성도들은 계20:4절의 순교성도들로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할 첫째부활 자들이다. 역사상 죽은 모든 성도들이 부활해서 주님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주님 재림하실 때 모든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내려온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논리는 너무도 무책임하고 부활의 전후문맥을 무시한 처사로 역사적 전천년설의 천년왕국이 무천년주의 자들의 비아냥거림을 자아내는 아주 기형적인 나라가 되어 버렸다. 부활하고 변화 받은 몸이 천년왕국에 들어가고 그들에 의해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2세들이 출산하여 번성할 것이라는 동화童話의 나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인가? 흰 보좌 심판 시에 생명의 부활로 살아날 그 수많은 성도들을 심판의 부활자로 둔갑시켜 지옥 심판을 받게 만들었으니 이런 신학적 오판의 책임은 과연 누가 어떻게 져야 하는 것인가?
이것을 간추려 정리한다면 첫째부활은 주 재림 때에 있을 순교성도들의 부활을 말한다. 이들이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자들이다. 천년왕국이 지난 후 흰 보좌 심판 시에 나머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부활과 그때까지 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가 있게 된다. 그래서 20장5절에서 이 사실에 대하여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부활이라"고 한 것이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부활 자들을 제외한 모든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왕국이 지난 후 흰 보좌에서 부활할 것이란 뜻이다(요5:29,계20:11-12).
계20:11-12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2. 그리스도인의 변화와 그 시기
종말에 있을 사건 중 성도의 변화와 그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변화는 살아 있는 성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상태에서 썩지 않는 몸을 덧입는 변화체(부활체)가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1) 부활과 변화의 시기가 중요한 이유
부활과 변화는 같은 맥락의 성경용어이다. 모두 인류의 종말에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있을 일이다. 그 순간 돌발적으로 생기는 신령한 몸으로의 변신을 뜻한다. 부활은 죽은 자들의 살아나는 사건이다. 변화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홀연한 변신을 말한다. 부활이나 변화나 모두 신령한 몸으로 변화 받는다는 사실에 같은 의미를 갖는다. 만약 이 사건(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이 잘못 해석되면 필연적으로 천년왕국의 해석이 잘못될 수밖에 없다. 변화의 시기가 주의 재림 시라고 해석한다면 천년왕국에는 모든 성도들이 변화 받은 신령체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천년왕국 후 마지막 부활때에 성도의 몸이 변화 된다고 해석하면 천년왕국에는 변화 받지 않은 몸으로 살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육신의 몸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2) 부활과 변화에 대한 무천년주의 자들의 반격
무천년주의 자들이 지금 역사적 전천년주의 자들을 향하여 신학적으로 큰 소리를 치는 이유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부활과 변화의 성경적 모순을 지적한다. 역사적 전천년설에서는 주의 재림 시에 죽은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는 모든 성도들이 변화 받는다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천년왕국의 필요성이 어디 있으며 더 이상의 종말의 진행이 왜 있어야 하느냐는 반론을 들고 나온다.
무천년주의 자들의 이런 주장은 타당하고 매우 성경적이다. 성도들의 부활과 변화는 인류의 맨 마지막 시기에 있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전천년주의 자들은 이런 무천년주의 자들의 반격에 속수무책이다. 우물쭈물 엄버무리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바는 인류의 부활이 마쳐지고 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가 끝나면 그 즉시 신령한 몸으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된다. 불신자들은 둘째사망 곧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게 됨으로 모든 사항이 종료하게 된다. 그래서 무천년주의 자들은 죽은 성도가 부활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이 변화 받았는데 무엇 때문에 천년왕국의 존재가 필요하냐고 반문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주 재림 때에 부활과 변화가 모두 이루어진다면 천년왕국은 존재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이같은 무천년주의 자들의 주장이 옳은 이유는 천년왕국은 부활체나 변화체가 살아갈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완전히 거룩한 몸을 입은 성도들이 땅에 세워지는 천년왕국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필요도 없다. 무천년주의 자들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 뿐 아니라 신령한 몸을 위해 예비하신 그리스도인의 처소는 천년왕국이 아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이처럼 역사적 전천년주의 자들의 부활관과 변화관은 스스로 결정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3) 이에 대한 개혁주의 전천년설의 견해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역사적 전천년주 자들의 해석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가?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증언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을 책망한다. 이 문제를 개혁주의 신학적 견지에서 깊이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변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결정적인 성경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기인한다.
살전4:16-17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6절에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하였다. 이어 17절에는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고 하였다. 공중휴거 시에 있을 이 놀라운 두 가지 사건이 핵심이 되고 있다. 둘 다 주께서 강림하실 때 있을 일이다. 역사적 전천년설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재림 이전의 죽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로 해석한다. 재림까지 살아있는 성도들은 변화 받는다고 한다. 이런 해석은 세대주의 자들과 다름없다. 함정이 여기에 있다. 이로 말미암아 오해를 초래하게 되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 보기로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표현이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로 해석할 수가 있다. 이런 해석은 순교자의 첫째부활과 성도들의 마지막 부활을 구분 짓지 않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첫째부활로 잘못 판단한데서 나오는 잘못된 해석이다. 이로 인해 초래되는 또 하나의 모순이 생긴다. 첫째부활 자들만이 천국 백성으로 새 예루살렘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된다. 그 외 첫째부활에 속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불신자들로 지옥에 갈 자들이라고 단정을 짓는다. 이 주장에 따르면 첫째부할자 외에는 모두 구원 받지 못한다. 마지막에 부활하게 될 모든 성도들도 불신자 부류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20:5절의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을 4절의 순교자들의 첫째부활자 외의 일반 성도들로 보지 않고 구원 받지 못한 불신자들로 취급하고 있다. 역사적 전천년설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마지막 부활을 그들 나름대로 둘째부활이란 신학적 명칭을 부치고 있다. 그러나 둘째부활이란 단어는 성경에 없으며 마지막 부활이라고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요11:24). 그 마지막 부활에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라고 하였다(요5:29,행24:15)
역사적 전천년설의 해석을 따르게 되면 또 하나의 문제점이 따른다. 천년왕국 백성이 부활한 성도들과 변화 받은 성도들로 구도構圖가 만들어진다. 죽은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는 모든 성도들이 변화 받아 함께 휴거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천년왕국에 내려와서 그 나라의 백성들을 구성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부활과 변화는 천년왕국의 해석에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연결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모순은 여기서부터 생기게 된다. 천국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는 성도들도 영이 부활하여 신령한 몸을 덧입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천국 낙원에서 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게 아니라 육신이 살아가는 땅으로 내려와서 변화 받고 천년왕국에 들어온 성도들과 함께 천년동안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논리에 맞지 않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말인가? 천국에서 살아가는 성도가 지상인 천년왕국에 내려오고 부활하고 변화 받은 성도들이 천국이 아닌 땅에서 천국에 있는 성도들과 어울려 천년 동안 살아간다? 그런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어디 그뿐인가? 그들이 땅에 거주하여 살아가면서 천년 동안 가정을 갖고 부부관계를 가지며 자손을 번식한다고 한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너무도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이 도대체 어떤 신학적 근거로 펼칠 수 있는 것인가? 또 하나 천년왕국에서 태어난 2세들의 구원문제다. 바다의 모래보다 그 수효가 더 많은 이들은 변화 받을 수 없게 된다. 첫째부활로 부활과 변화가 마감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년왕국 2세들은천년이 지난 후 흰 보좌 심판 때 둘째부활 자들로 모두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인가? 이렇게 역사적 전천년주의에서의 천년왕국 해석은 자가당착이 극에 달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전천년설에 손을 흔들고 무천년설로 기우는 것이다.
이런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신학자들의 노력으로 성도들은 부활체나 변화체로 들어가고 불신자들은 이대로의 육신의 몸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천년왕국에서 자손을 번식하게 되고 그들 중 마귀의 미혹을 받은 자들이 곡과 마곡의 세력을 이루어 그리스도와 대적하다가 멸망 받는다는 주장을 편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논리는 더 이상하게 전개된다. 세상에서 더욱이 7년 환난 중에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들이 어떻게 지상의 낙원인 회복된 에덴 천년왕국에 들어가 천년 동안이나 그 놀라운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인가? 모순은 어디 그 뿐인가?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곧 일곱째 대접 심판이 세상에 내려진다. 이 일곱째 대접 심판은 큰 성인 이 지구가 세 갈래로 갈라지게 되고 세계에 산재하는 모든 도서島嶼도 없어지게 되고 높은 산악도 살아지며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불로 소멸하게 된다(계16:17-21). 이 심판에 지상에 살아남을 생명체는 하나도 존재치 않는다. 이에 대하여 습1:2-3절에서는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런 일곱째 대접 심판에서 지상의 성도들을 구원하여 천년왕국 백성으로남기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가 성도들의 공중휴거인 것이다. 이제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지상에는 단 한명도 존재치 않고 오직 공중으로 휴거된 성도들뿐이다. 그런데 불신자들이 이 일곱째 대접 심판에서 어디서 피했다가 살아남으며 그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천년왕국에 들어가 불신의 상태로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고 천년 동안 살아간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천년왕국 안에는 성도들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따로 있고 불신자들이 살아가는 사탄의 왕국이 따로 있다는 것인가? 사탄은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 있는데 그들이 살아가는 천년왕국은 무저갱과 직통되는 곳인가? 역사적 전천년주의 자들은 이같은 모순의 늪에서 하루 속히 빠져나와야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바른 해답을 찾도록 하자. 먼저 성도들의 공중휴거 시 그 몸이 어떻게 변화 되느냐는 문제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17절에는 변화란 말이 없다.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변화란 말을 왜 집어넣었나? 고전15:51-52절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말씀에서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는 말씀을 그들은 고전15:52절에서 살전4:17절로 옮겨다가 접목?木시켰다. 가당치도 않은 이런 인용은 억지요 신학적 독단이다. 이런 오용은 신학이 저지른 크나큰 과오다. 서로 짝이라고 연결한 성경이 사건의 내용도 성취의 시기도 전혀 다른 별도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옮겨놓아서는 안 될 자리에다 엉뚱한 구절을 임의로 갔다가 놓고 그 해석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살전4장은 재림 때에 있을 휴거에 관한 말씀이다. 반면에 고전15장은 마지막 부활의 시기에 관한 말씀이다. 천년왕국 후 흰 보좌에서 마지막 부활 때 있을 사건이다. 그때 살아남아 있을 성도들에 대한 신령한 몸으로의 변화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전혀 다른 시기에 있을 일을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역사적 전천년주의는 이런 모순을 정당화 시키고 있다. 이런 오류는 성도들의 부활의 시기를 주 재림 때로 보고 있기 때문에 기인된 것이다. 그때에 성도들의 공중휴거도 있게 되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고린도전서 15장의 변화에다 연결시킨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휴거와 변화는 사건도 다르거니와 시기도 다르다. 성도들의 휴거는 주 재림 때이지만 변화는 천년왕국 후에 있을 별도의 사건이다. 이렇게 고찰할 때에 주의 재림 시 죽은 성도들은 모두 부활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은 모두 변화 받는다는 신학은 너무나도 모순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세대주의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천년왕국을 이처럼 부활하고 변화 받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이상한 나라로 만들어 놓았다. 성경 어디에도 이런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천년왕국은 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가상假想의 나라에 지나지 않는다.
(4) 데살로니가전서 4장16-17절의 올바른 해석
그러면 여기서 살전4:16절에서 말씀해 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자의 부활문제를 살펴보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우리는 이 문제를 살피기 전에 부분계시部分啓示와 전체계시全體啓示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이 두 계시가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성경에는 중요한 문제일수록 그 사건에 연결된 계시가 여러 곳에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성경 특별히 종말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그 계시의 구별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있다. 부분계시와 전체계시를 서로 오해하거나 오용하는 경우에 있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해석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살전4장은 재림 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부활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부활에 관계된 부분계시이다. 부활의 전체적인 내용을 들어내고 있는 전체계시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를 오해할 때 첫째부활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부활론이 이상하게 꼬이게 된다.
부활을 논할 때에 제일 먼저 찾아보아야 할 성경은 부활의 순서를 명시하고 있는 고전15:22-26절이다.
고전15:22-26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여기에서 성도의 부활은 두 번임을 밝히고 있다. 한번은 주 재림하실 때 있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다. 그 다음은 흰 보좌 심판 시에 있을 마지막 부활이다. 전자는 순교자들의 첫째부활이요 후자는 그 나머지 성도들의 생명의 부활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첫째부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순교성도들이란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는 말씀이 계20장4-5절에 나와 있다.
계20:4-5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순교자들의 부활이 첫째부활인데 이들의 부활에 대해 고전15:23절에서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라고 구분 짓고 있다. 또 이들에 대해 계17:14절에는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이들은 부활성도들인데 특별한 사명을 이룬 성도들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순교자들 곧 첫째부활 자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수효가 있다(계6:9-11).
이들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첫째부활자가 될 순교자들이지만 한 부류는 7년 환난 이전에 순교한 성도들이다. 또 하나는 7년 환난 중에 순교하는 성도들이다. 이들의 순교의 시점이 다른 것처럼 이들의부활의 시점도 다르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순교자들을 통틀어 첫째부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이 주의 재림 때에 함께 하늘군대로 내려오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인 것이다.
그러면 이들 두 번째에 속한 첫째부활 자들의 부활시점은 언제인가? 이들 환난 중 순교자들은 계11장에서 두 증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계11:7-12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두 증인은 144000의 수효로 등장하는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다. 이들은 전3년 반 예언의 사역 후 짐승에 의해 순교 당한다. 그리고 삼일 반 후 부활승천 하여 시온산에 올라가 있게 된다(계14:1). 이곳에 있다가 주 재림 때에 하늘군대로 아마겟돈에 내려오게 된다(계19:14, 두 증인과 144000에 대한 사항은 다음 항목에서 논하기로 한다).
이처럼 첫째부활자 가운데 환난 중 순교자들은 전3년 반 끝에 가서 부활하게 된다. 그러면 나머지 환난 전 순교자들은 언제 부활하는 것인가? 살전4:16절에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는' 이들이다. 제단아래서 하나님께 피 값의 신원을 호소했던 환난 전 순교성도들이다. 이처럼 문장적으로 배치해야 부활에 관한 모든 성경구절이 질서 있게 정돈된다.
그리고 이들 첫째부활 자들은 주님과 함께 주님께 속한 하늘군대로 지상에 내려오기 위해서 부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때 성도들은 변화 받지 않은 채 육체의 몸으로 공중으로 올려간다. 이때에 성도들이 변화 받는다면 성경은 무천년이 되며 천년왕국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낙원에서 안식하고 있는 성도들은 '그 나머지 죽은 자들'로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 부활하는 마지막 부활에 속한 성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내려올 수가 없는 것이다. 주의 재림 시 주님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올 성도들은 아마겟돈에서 짐승의 군대들과 싸울 하늘 군대들이다. 낙원에 있는 전체 성도들과 공중으로 휴거된 성도들의 수효처럼 그렇게 엄청난 숫자일 수가 없다.
혹자는 육신의 몸을 가지고 어떻게 공중으로 들림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지금 우리는 달月에까지 유인우주선有人宇宙船을 타고 왕복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우주인들이 변화 받은 몸으로 달나라에 다녀온 것이 아니다. 이제 민간인 우주여행도 가능해졌다. 나아가 화성에까지 정착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지구 밖으로 갔다고 신체가 변화되는가?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살아 있는 육체를 공중으로 휴거시킬 수 없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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