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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배고픈 복음, 배부른 복음>의 줄거리:
마음이 배고픈 복음이 있습니다. 죄사함 받고 영생을 약속 받았으나 지금 나는 배가 고픕니다. 칭의에 초점이 맞추어진 복음 이해를 넘어 마가는 배부른 복음을 강력하고 단호하게 첫머리부터 우리 앞에 들이댑니다. 요한에게 세례받으실 때 일어난 모든 일은 우리가 예수이름으로 세례받을 때 주어질 배부른 복음의 내용을 아주 그림 같이 제시합니다.
배고픈 복음, 배부른 복음
(막1:9~15)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배고픈 복음과 배부른 복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배고픈 복음과 배부른 복음.
무슨 복음이면 복음이지 배고픈 복음이 있고 배부른 복음이 있느냐, 이렇게 물어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복음을 듣고도 배고픈 상태에 여전히 머물러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됐다고 보기에는 좀 어폐가 있고, 복음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를 못한 겁니다, 그래서 배고픈 상태로 복음을 듣고도 머물러있게 됩니다.
복음을 제대로 온전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면 배가 고플 수가 없는데, 또 이 배고프다는 얘기는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실까 봐 미리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가난하다’라고 하는 경제적으로 재정적으로 복음을 듣고서도 가난한 채로 남아있는 것을 배고픈 복음이라고 말한 게 아닙니다.
마음이 고픈 거예요, 분명히 복음은 들었는데 마음이 고파요.
마음이 고프다는 것은, 복음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쁜 소식을 들었는데도 받아들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루고 싶은 게 많습니다,
이것저것 갖고 싶은 게 많습니다, 배고픈 상태로 남아있는 거예요.
복음을 듣고도, 복음을 받아들이고도. 아직도 뭔가가 부족합니다.
마음에서 이것이 있어야 되겠다고 결핍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게 배고픈 복음이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여러분 다 아시겠습니다마는, 세례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고, 그 사건 뒤에 광야의 시험을 받으시고,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는 주님의 공생애 일성(一聲)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앞에서 마가가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준비해야 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곧바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면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마가가 우리에게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은, 8절에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베푸실 거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세례요한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실 텐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일어날 일들이 무엇인가를,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그대로 다 드러내보여 주신 거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될 만큼 죄를 지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에요.
근데 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느냐, 우리가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을 때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받으신 거라는 거예요.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사람 중에서,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일처럼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무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만,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사람 중에서 이 일들이 일어난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읽은 일들이.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을, 복음을 받을 때 일어날 내용들을 그 윤곽을 분명하게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것이 된다는 거지요.
여러분 마가가, 자기의 복음을 쓸 때 우리가 읽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이게 아주 독특해요.
4복음서가 다 다른데, 마태복음은 우리가 읽었던 바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얘기합니다. ‘데오빌로 각하에게 내가 써서 보냅니다’ 그런 내용이고.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 달라요.
그럼 그 의미가 어떻게 다른 겁니까?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라고 시작한 이유가, 예수님의 사역을 구약에 연계성을 갖고 이해를 하면선 구약부터 이루어져 왔던 선지자들의 활동과 예언활동이 완성된 것으로 크게 보고 있습니다, 구약과의 연관성하에서 보고 있고.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라는 이 ‘사실에 대하여’라고 하는 말을 굳이 쓴 것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어진 이 공생애의 사역의 내용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역사 지평 위에서 보고 있는 겁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예수님의 사건을 보고 이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고.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땅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지상의 공생애 사역을 탈 시간적이고, 탈 공간적인 영원한 세계의 연관성하에서 보고 있다는 거예요.
마태는 구약과의 연관성, 누가는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을 이 세상의 역사적 지평 위에서 보고 있고, 요한은 영원성과의 연관성에서 보고 있다 그러면, 마가는 이 복음을 어떤 연관성에서 보고 있는 겁니까?
구약적인 연관성도 아니고, 누가처럼 이 세상의 역사적인 지평 위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요한처럼 영원성의 관계에서 보는 것도 아닙니다.
마가가 예수님의 이 사역을 복음으로 이해할 때 이 복음은 어떤 맥락에서의 복음이냐?
직접! 지금 현재 실존하고 있는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복음이 무엇이냐를 보는 거예요.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곧바로 움켜쥐는 겁니다.
Setting을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Setting을 고려하지 않고, 놓여 진 자리를 고려하지 않고,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곧바로 나 자신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이냐를 묻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가 이야기 하고 있는 이 복음 속에 나타난 것이, 지금 현재 나를 문제 삼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현재 나를, 지금 현재 내가 이 복음 앞에서 복음을 받아들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아예 초두에 윤곽을 뚜렷하게 제시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나에게 일어나는 일, 이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이 세례는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께 이렇게 세례를 받을 것이에요.
예수님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얘깁니다.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마리아 코스워크를 밟는다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죽고, 장사 지내고, 무덤에 머물러 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는 겁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고 말했어요.
세상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어떻게 얘기하느냐 하면 ‘하늘이 갈라졌다’고 얘기합니다.
예수님 위에서만 하늘이 갈라진 거예요.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 많이 있지만, 유독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만, 예수님 위에 있는 하늘이 갈라집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향하여 굳게 닫혀있던 하늘이 갈라지고 열려있는 곳은 어디냐?
예수님 위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합한 자들에게만 하늘이 열려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 위에만 열려있기 때문에.
그 하늘이 갈라지면서 나타난 일이 뭐냐 하면, 그 하늘 안에 머물고 계시던 성령께서, 예수님!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모습을 갖고 계신 예수님에게로 성령이 임하십니다, 비둘기같이 성령이 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성령이 주어지면서 곧바로 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는 거예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것이 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하늘이 갈라지면서 성령이 임하고, 이게 지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마리아 코스워크, 십자가의 길과 부활까지에 도달하는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일인데, 그 사람 위에는 주님과 연합했기 때문에 하늘이 갈라져 있습니다.
하늘이 갈라져있기 때문에, 하늘에서부터 성령이 주어집니다.
성령이 주어지면 반드시 들리는 것이 뭐냐 하면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고 하는 말씀이 들리게 되어있다는 거예요.
자,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인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뭐겠습니까?
여러분,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얘기는, 사랑과 기쁨으로 축약된 인간관계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 이것은 내가 내 아들을 사랑한다, 아니면 아내를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 남편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내 마음 안으로 그를 가득히 받아들여 내 빈 마음을 채운다는 얘깁니다.
내 빈 마음이 채워질 때는 언제나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빈 마음이 채워지는 게 기쁨이에요.
결핍을 느낀다는 것은 배가 고프다는 거예요, 배에 공복감을 느낀다는 얘기고, 그리고 기쁘다는 것은 그 공복으로 있던 배가 채워졌다는 겁니다, 그때 기쁨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이것이 복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이 뭐 새삼스러운 얘기냐? 아~주 새삼스러운 얘깁니다.
오늘의 번제 시간에 자주 들린 얘기지만, 기독교 전체를 볼 때 너무나 새삼스러운 얘기에요.
왜냐하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 지나칠 정도로, 칭의!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여김을 얻었다라고 하는 칭의! 의롭게 칭하게 된다는 사실에 지나칠 정도로 복음의 무게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칭의는, 복음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일어나는 일에 시작에 불과한 것이에요.
내가 죄 사함을 받았다, 그리고 그러므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약속 받았다, 죽은 다음에 영생을 약속받았다는 이 사실은, 여기에 머물러 버리면 복음의 내용을 절반밖에 이해를 안 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거지로 살던 자가 목욕재계하고 깨끗하게 됐습니다.
죄 사함으로 깨끗하게 된 것처럼, 죄 사함을 받아서 왕을 배알할 때 입을 수 있는 예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왕 옆에까지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죄 사함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좋아요, 그래서 거지가 깨끗하게 목욕재계하고 아름다운 예복을 입은 다음에 왕 앞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습니다.
그런데 삼 일째 굶은 거지에요.
왕궁에서 임금 앞에 나갈 자격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 거지의 배를 채워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왕 앞에 나갈 자격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는 몰래 왕궁 주방에 가서 밥을 훔쳐 먹게 되는 거예요.
죄 사함 받았습니다, 영생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
마가가 문제시하고 있는 지금 내가 배가 고픈 거예요, 지금 내가 만족이 없는 겁니다.
자꾸 목사님들은 할 수도 없는 일, 본인들도 안 되는 일들을 강요하는 거예요.
죄 사함! ‘처음 예수 믿었을 때 죄 사함의 그 감격을 계속 유지 해야지, 유지 해야지.’
그럼 당신은 그 감격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죄 사함 받을 때만 눈물 흘리고 콧물 흘리고, 이런 죄인을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나의 죄악 됨을 그 뿌리까지 본 뒤에, 그것이 죄 사함을 받게 되서 너무너무 감격해서 몇 날 며칠을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데, 10년 지나 20년 지나도록 어떻게 그 죄 사함의 감격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설교시간에 자꾸 그 죄 사함의 감격을 유지하라고 강요하는 겁니까?
불가능한 얘기에요.
근데 오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라는 말이 나와요. 무슨 얘깁니까?
죄 사함 이후에, 하늘이 갈라지면서 성령이 임하시면서 성령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로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사랑하는 하나님이 내 마음의 공복을 채워주는 관계, 이게 복음의 완성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칭의에 초점을 두는 겁니다.
저는 이게 사도 바울이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도 바울이 칭의에 관한 얘기를 엄청 많이 합니다마는, 사도 바울의 전체 서신의 사상이 오직 복음을 칭의에 무게 중심을 둬서 이해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루터가 그랬어요, 루터가.
그런 거에 비해서 캘빈이, 캘빈의 신학사상 전체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축약할 수 있도록 사상을 전개한 것은, 너무나 너무나 루터의 사상에 비해서 발전적이고 더 균형 잡힌 사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넘어 간 것이.
칭의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 사상이 넘어가요.
연합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사랑과 기쁨의 조건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가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였느냐? 그러면 지금 여기서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고백이 너를 향해 나가야 되는 것이고’, 복음을 받아들인 자 모두에게 일어날 일을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인바, 내게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고백이 나가야 되는 것이고…
또한 주님이 하나님을 향해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아버지를 향해서도 내 사랑하는 아버지요 내 기뻐하시는 분이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어야 된다는 얘기고, 그것이 죄 사함 받았다고 하는 것에서 공복을 움켜쥐고는 채울 게 없으니까, 하나님아버지로 채우라는 얘기를 별로 말을 안 해요, 그러니까 채울게 없으니까 결국 어디로 돌아갑니까?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런 잘못 된, 미치지 못하고 있는 복음이해, 이것을 넘어서도록 마가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요 여러분!
죄 사함 받았다, 나 구원 얻었네, 너 구원 얻었네, 우리 구원 얻었네, 좋다 그럽니다.
구원 얻었습니다, 죄 사함 받았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배가 고픕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 것을 다시 주워 먹겠다고 돌아가는 겁니다.
돈 좀 많이 벌어봐야지, 건강하게 오래 살아봐야지, 하는 일마다 형통해야지, 자식들 좋은 대학에 입학해야지.
전~부 이 세상 것으로 도로 돌아가서 그것으로 배를 채우려고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기독교가 잘못하고 있어요, 팔 걷어 부치고 하나님으로 배부를 것을 외쳐야 된다는 겁니다.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고, 복음의 과정 중에 하나에 속하는 것이라는 얘기에요.
영생 얻었다? 미래로 미뤄둘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마가는 지금 현재 복음이 내게 주는 의미를 들이대고 있고, 마가복음 전체의 의미가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에,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일어날 일들의 내용을 꽉~꽉 채워서 지금 현재에 일어날 일들을 꽉꽉 채워서 우리들에게 제시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과의 교통의 관계에서 하나님으로 가득~ 차신 상태, 하나님으로 만족하신 상태에서 광야로 나가 시험을 받습니다.
광야 40일과 구약성경에서의 광야 40년 그 의미가 거의 일맥상통하는 거예요.
어떤 의미가 있는 겁니까?
광야에 나가서 40년 동안 지내는 동안에 Job exchange가 일어납니다, Job exchange.
Job exchange가 뭐에요?
광야에서는 인간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일을 위하여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삶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먹고 살고 입고, 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겨집니다.
사람들이 내 일이라고 생각했던 Job이 하나님의 Job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이제 나의 Job은 광야에서 무엇이 됩니까?
오직 하나님에게만 신경을 집중시키는 겁니다.
아무것도 다른 일이 없는 예에요.
내가 먹고 살 일은, 마실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내 산에 임재 하셔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동행하고 계시는, 말씀으로 함께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에게만 신경을 집중시키는 일을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복음을 받아들인 자에게서 일어나는 일인 것을, 주님께서 40일 동안 금식기도하며 시험 받으시는 동안에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마귀의 시험이 뭐였습니까?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하면.
세 가지 모두가 다.
세상에서 인기 얻고, 세상에서 높은 사람으로 존귀함을 얻고, 명예 얻고 인기 얻고 잘 먹고 잘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겁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경계 안에서 잘살 수 있는 길을 마귀가 시험할 때, 예수님께서 그 모든, 세상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이것은 내 Job이 아니다’ 하고 뿌리치시면서 시험을 이겨내십니다.
이게 바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뭐하고 있느냐?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당신이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땅에서 이루고 싶은 일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하나님아버지로 배부르니까.
그럼 이제 하나님아버지께서 이루고 싶은 것만 일어나게끔 되어있는 거예요.
이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일어날 일들이라는 사실을, 마가가 아주 명확하게 outline 을 제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포인트는 여러분, 배고픈 복음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죄 사함 받았다! 이거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루터는 자기 죄의 문제를 끌어안고 있다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이점에서 그의 사상이 완전히 매듭이 지어진 듯합니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루터는 루터로 끝나야 되지요.
아직까지 거기에 매여 있습니까?
그래서 다행인 것은, 칭의는 하나님께 나간다고 하는 이런 형식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서 하나님으로 내 배를 채운다는, 공복의 배를 채운다고 하는 의미가 포함 돼야 됩니다.
그런 면에서 캘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연합이라고 하는 관계를 의식한 단어로서 신학을 정립해 나갔다는 것은 너무 다행한 일이라는 거지요.
루터는 나의 죄 사함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라는 것에 집중한 반면에 캘빈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라는 것에 집중한 것이 참~ 좋은 일이라는 거지요.
여러분! 마가복음을 통해서 앞으로 우리의 배가 불러지는 역사가 경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죄 사함 받았지만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나는 마음이 고픕니다.
죽은 뒤에 영생을 약속 받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고픕니다.
이것은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인 상태가 아닙니다.
지금 내 위에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면서 그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감지하고 느끼고 체감하게 하시며,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내 마음이 가득가득 채워져서 기쁨이 누려지고 또 내가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는 그런 복음의 삶을, 마가복음을 통하여 온전히 체득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