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의 창작(詩⋅poetry)적 진화 - 시산문>
정드는 식탁
신현림
(시인 사진작가)
여자 둘에 남자 한 명. 우리가 앉은 자리를 배경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이 곧 사라지겠지. 하며 나는 멍하니 해를 바라보았다. 황홀한 노을이 카페 유리창을 가득 물들였다. 테이블에는 따뜻하게 구운 시나몬 베이글과 커피가 놓여 있었다. 친구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먼저 운을 떼었다.
“눈을 떴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인연은 더러 있었지만 같이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의 품에서 잠들고……이런 일상생활을 평생 딱 한 번 제대로 누려 보았어. 그나마 곁에 있는 모습에 더없는 평화를 누린 추억이 하나라도 있음에 감사해. 헤어질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어. 이젠 싸늘한 바람 소리만 들려. 방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향기는 사라지고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남은 나 자신을 발견하고 오열하곤 해.”
그녀의 이야기는 곧 내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가슴이 아렸다.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겠지.
친구는 곁에 앉은, 자그마하니 샤프하게 생긴 남자에게 물었다.
“선생님도 그런 적 있으세요?”
그는 발그레하게 뺨을 물들이며 미소를 지었다.
“저는 매일 오열하는데요.”
친구와 나는 쿡쿡 웃었다. 그의 모습이 날마다 오열할 만큼 고독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찻잔을 들며 말했다.
“우리는 절망적으로 나약해져 있어요. 친구나 가족한테조차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나이가 들면 소심해지죠.”
“꼭 나이 탓도 아니예요. 이 시대엔 소심함과 나약함이 누구에게나 병균처럼 깃들어 있어요.”
사내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꾸하면서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래, 우리는 온통 긴장한 채로 어디서 올지 모르는 고통과 상처들을 가로막거나 도망치려만 든다. 그러면서도 마을을 충족시킬 우정과 사랑, 일과 여행 같은 행복하고 흥미진진한 시간이 오기를 기대한다. 그 기대나 욕망이 강렬할수록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에 떤다. 그래서 모두 부산스럽게 바쁘기만 하다. 어디로 흘러갈지도 모른 채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혼란의 상태에서 외로움은 점점 깊어만 간다.
뉴스와 인터넷을 통해 고통과 상처, 죽음과 괴로움이 생중계되는 세상. 자신을 표현하기도 어렵고 이해받기도 쉽지 않다. 정말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주고받을 방법은 없을까? 그때 친구가 베이글에 잼을 바르며 말했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다 외로울 걸. 다들 컴퓨터나 핸드폰, 텔레비전만 들여다보면서 뭐 하는지 모르겠어.”
“지하철에서 DMB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긴 해. 우리는 기계에 의존한 채로 막연히 인생이 바뀌길 기다리는 허깨비들 같아. 아니, 체념하며 그냥저냥 사는지도 몰라.”
내 말이 끝나자 저녁 바람이 주변을 크게 훑고 지나갔다.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진짜 친해지려면 서로에게 무장해제를 해야 돼.”
“그래. 베이글이 식기 전에 잼 발라 먹으며 친해져야 돼.”
후배의 말 위에 남자의 말이 딸기잼처럼 발라졌다. 나도 맞장구쳤다.
“맞아. 허심탄회하게 조갯살같이 여린 속까지 보이고 솔직해져야 친해지지. 그게 사랑의 기본일 거야.”
“침대를 타고 달리는 수밖에 없어.”
내 시집 제목을 빗댄 친구의 농담에 다들 후후 웃고 말았다. 가게마다 등을 켜서 환히 불빛이 쏟아져 흐르기 시작했다. 그 이쁜 풍경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서로에게 아주 솔직해질 최적의 장소는 어디일까?
그건 바로 침대고, 식탁이고, 소파다. 그 장소에서는 서로에게 투명하고 성실해질 수 있다. 밥을 먹고,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공간, 진정 깊이 정들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는 그 공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점점 늘어나는 솔로들의 침대는 외롭다. 대화가 없는 부부도 외롭기는 마찬가지. 식탁이나 공원의 벤치 같은 일상의 공간을 더욱 편안하고 예쁘게 가꿔보면 어떨까. 가령 오늘 시나몬 향기가 퍼지는 저녁의 테이블처럼.
사랑은 식탁이나 탁자 같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사랑은 거창한 곳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의 섬세한 배려다.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로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사랑받기 위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상대가 무얼 필요로 하는지 세심해져야 한다. 함께 있어야 할 때와 피해줄 때가 언제인지 살펴야 한다. 언제 가만히 있고, 언제 행할지를 섬세하게 헤아리는 것이 사랑의 중요한 방법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미소 짓는 사람이 그립다. 화날 일이 있어도 지그시 참을 줄 알아야 사랑도 편안히 스미게 마련인데, 그게 쉽지 않다.
사랑하는 법을 꾸준히 연습하고 훈련할 수밖에 없다. 어디 인격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던가. 또한 온전히 자신을 내주고 헌신하려는 각오가 없다면 서로 믿을 수 없고, 사랑을 이룰 수도 없다. 순간마다 진심을 다하는 ‘올인’의 자세가 절실하다.
서로가 시시한 사람이었다면 훗날 쉽게 잊힌다. 생각해 보라. 한 번뿐인 인생이 아닌가. 그런데 애틋한 사랑, 진한 육수 같은 우정 하나 지니지 못했다면, 우리는 과연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현림 산문 작품집 <만나라, 사랑할 시간이 없다>)
|작법공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정답이 없는 것 같다는 게 최선의 대답일 것이다. 이미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쓴 사람들이 충분히 있는데도 또다시 같은 제목의 책을 쓰는 사람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에 관한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문학예술의 주인은 감상자라는 사실이다. 예술은 작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감상자를 위해서 존재한다. 마치 집이 건축가가 아닌 집주인을 위해서 지어지는 것과 같다. 건축가는 자신의 취향대로 집을 짓지 않고 집주인이 요구하는 대로 집을 짓는다.
예술창작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작가의 개성과 사상이 없는 예술은 탄생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감상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작품으로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술의 운명이다. 독자의 사랑을 받기 전에는 문학예술 작품은 아직 작가의 자궁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예작법의 문제는 <어떻게 작품을 만들면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 <어떻게 작가의 독창성을 살릴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은 성질이 안 맞는 두 사람처럼 항상 서로를 배반하려고 한다. 이것이 창작의 어려움이다.
작법공부를 하면서 이 같은 엉뚱한 생각에 빠지게 된 까닭은 이 작품의 첫 문장 때문이다.
‘여자 둘에 남자 한 명. 우리가 앉은 자리를 배경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이 곧 사라지겠지.’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께서는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무엇을 느꼈는가? 필자는 마치 작품 속 현장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어떤 평안과 눈물을 느꼈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평안해서, 너무 사람이, 석양이 따뜻해서.
필자는 독자다. 독자인 필자가 이 문장을 읽고 사람이, 석양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을 느끼는 순간 이 문장은 비로소 문학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작가 신현림 시인은 책 서문에 이런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나는 꿈꾼다. 나의 글과 사진이 누군가에게 하늘을 볼 때와 같은 위안을 주면 참 좋겠다고.’
‘나의 글과 사진이 누군가에게 위안’을 느끼게 되는 독자가 생길 때가 작품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이다. 시인, 작가, 예술가들은 바로 그 순간의 작품탄생을 위해서 작품을 창작한다. 작가의 바람대로 누군가에게 ‘하늘을 볼 때와 같은 위안’을 줄 수 있는, 그런 창조적 감동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그것이 작법이다.
필자가 공부하고 있는 |작법공부|란 다른 것이 아니다. 필자가 느낀 감동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 원인, 그 작법을 공부하자는 것이다.
여자 둘에 남자 한 명. 우리가 앉은 자리를 배경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이 곧 사라지겠지. 하며 나는 멍하니 해를 바라보았다. 황홀한 노을이 카페 유리창을 가득 물들였다. 테이블에는 따뜻하게 구운 시나몬 베이글과 커피가 놓여 있었다. 친구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먼저 운을 떼었다.
이 문장이 왜 그렇게 필자의 마음에 따뜻한 눈물 같은 감동이 되었을까? 그 ‘왜?’가 바로 작법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필자가 이 작품의 |작법공부| 초고를 쓴 것은 한 달 전 일이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지금 원고 검토를 하며 다시 생각해도 ‘시를 읽었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다른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운문)작품이 아니다. 산문작품이다. 그런데 필자는 분명 시를 읽고 눈물 감동에 빠진 것이다.
‘산문작품을 읽고 시를 읽은 감동에 빠졌다?!’
‘말이 되는가?’
‘말이 안 되는가?’
금호 편집후기에 필자는 ‘5줄 산문의 시 양식을 발견한 후 비로소 문학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보이게 되었다.’고 썼다. ‘지금 안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이라고 말한 작가가 있다. 필자도 꼭 같은 심정이다.
시는 곧 운문이라고 아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오랫동안 운문 그릇에 시를 담아내 왔기 대문에 그런 오해가 생겼을 뿐이다. 시는 모든 곳에 있다. 밥상 위에도 있고, 화장실에도 있다. 화장실에서도 시를 만나면 눈물이 흐른다. 필자는 이 작품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였다. 운문이 아닌 산문작품에서 시를 발견한 것이다. 산문도 시를 창작하면 시작품이 된다. 이 사실을 문학청년 시절에 알았더라면…….
이 작품 |작법공부|에서 한 가지 남겨 둘 숙제는 어떻게 글을 쓰면 이 작품의 문장처럼 독자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간명하게 읽혀지는 문장'을 쓸 수 있는 것일까, 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