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지맥(江華支脈) 강화도는 행정구역상으로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의 북서부 황해상에 위치하고 있는 섬이다. 강화도는 1개 읍, 13개 면으로 면적은 약 302.14km2, 인구는 약67,000명, 세대수는 약 28,600세대이다. 이는 제주도(1,848.2km2), 거제도(378,795km2), 진도(319km2)에 이어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강화도의 역사적으로 변해온 지명을 살펴보면, 상고시대에는 "갑비고차" 라 하였고... 서기475년 고구려(장수왕)때에는 "혈구군" 으로, 서기844년 신라(문성왕)때에는 "혈구진" 으로, 서기1363년 고려(공민왕)때에는 "강화부" 로, 서기 1895년 조선(고종)때에는 "강화군" 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최근 1995년에 "경기도 강화군" 에서 "인천광역시 강화군" 으로 바뀌었다.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반도의 역사를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하겠다. 선사시대의 유물, 유적으로 하점면 장정리와 화도면 사기리, 동막리 등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신석기 유물도 강화도내의 여러곳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거석(巨石) 유적인 지석묘(고인돌)가 하점면 부근리를 비롯한 도처에서 80기 이상 발견되고 있어서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사람이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강화도는 남북28km, 동서16km, 면적302.14,km2 로서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강화도는 원래 두곳의 섬, 즉 원래의 강화도와 마니산을 중심으로한 고가도(古加島)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고려시대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하나의 섬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강화도를 북에서 남으로 잇는 강화지맥의 마루금을 긋기가 애매모호하다. 강화도가 본래는 김포반도와 연결되어 있었으나 오랜 침식작용에 의하여 구릉성 섬으로 분리되었다가 한강, 임진강에서 유출되는 토사가 쌓이면서 다시 김포반도와 연결되었다. 그 후 염하가 한강에서 분류하여 김포와 강화 사이에 해협을 이루면서 다시 섬으로 독립하였다.
강화도에는 고도400m 이상되는 산이 마니산(469m), 혈구산(466m), 진강산(443m), 고려산(436m), 별립산(400m)이 있는데 그 중에서 단연 돋 보이는 강화지맥의 최고봉 혈구산은 한반도의 중심지에 위치한 지점으로서 이곳 혈구산에서 백두산 정상까지 499km, 한라산까지 486km의 거리이다. 강화지맥은 대간이나 정맥등에서 갈라져 가지친 지맥(枝脈)이 아닌 단순히 강화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지맥(支脈)이다 강화지맥은 강화도 최북단에 위치한 양사면 철산리 해안에서 시작하여 제적봉(115m), 별악봉(130m), 저담산(167.3m), 성덕산(215m), 봉천산(291.1m), 시루메산(250m), 고려산(436.3m), 혈구산(466m), 퇴모산(338.9m)을 거쳐서 덕정산(325m)에 이르러 여기서 남동쪽으로 뻗어가는 산줄기는 정족산(221m), 길산산(336m)을 거쳐서 강화도 최남단 길상면 장흥리 택리마을앞 강화만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4.1km의 산줄기이고, 덕정산에서 또 하나의 분맥 산줄기가 진강산(441.3m), 마니산(469m)을 거쳐서 분오리 마을앞 강화만에서 그 맥을 다한다. (강화군 행정지도) 강화지맥 개념도 및 지도/ 도상거리 34.1km(실거리42km)
(고도표 확대해서 보세요) 산행날짜:2012년 3월 11일 02시 산행시작- 오후3시40분 산행종료 날씨: 들머리에서 강한바람과 강한 눈발.. 강한 바람 그리고 맑음 누구랑: 홀로 강화지맥 답사를 조만간에 해야 겠다고 마음먹고 있다가 이런저런 약속을 모두 뒤로 미루고 가방을 챙깁니다. 잠실에서 2호선 전철타고 영등포구청에 내려서 5호선 송정역까지 갑니다. 1번 출구로 나와서 3100번을 기다리는데 좀처럼 차가 오지 않아서 60-2번 버스를 답니다. 버스는 초지대교를 건너고 나는 곧바로 내려서 좌측100 전방에있는 해수 찜질방에서 휴식하고 들머리로 갈 예정..찜질방에는 집나온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지데로 쉬지도 못하고 밖을나와 미리 예약해둔 택시를 기다립니다. 택이리(들머리)까지는 약 20분 소요되고 요금은 12000원입니다.
강화군 마스코트 강돌이 입니다.
기사님께 부탁해서 꺼꾸로된집 앞에서 인증사진 남김니다. 기사님께서는 강화도 홍보를 위하여 저에게 책 한권 주시며 끝까지 안전산행 하라고 격려말씀 남기고 오던길로 가십니다
마을 앞에서 산행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돌풍과 눈발이 날립니다. 삽시간에 천지가 하얗게 변해벼렸습니다.
어김없이 택리 마을에도 나를 환영하는 견공들 짖는 소리를 뒤로하고 들머리로 올라섭니다.
초입은 반듯한 임도길 입니다.
정자을 지나고..
잠시후 길도없는 잡목 길을 치고 올라 다시 능선으로 진입 합니다.
잠시후 조망이 훌륭한 암봉에서 오던길과 초지대교를 조망합니다. 카메라고 고물이라 내가 본 많큼 그림이 찍히지 않습니다
첫 이정표 입니다.
길상산 정상에서 혼자 놉니다. 테그에서 서쪽 밤풍경은 너무 시적입니다. 평화스러운 바다와 뻘위에 조명등이 깜박이고 달님이 은은한 조명을 비춰줍니다.
길상산(336) 삼각점
길상산吉祥山(△336.1m)은 예로부터 왕에게 진상했다고 하는 명품인 약쑥 일명 사자족애獅子足艾가 많이 났으며 쑥이 많이 나는 마을을 이름하여 쑥박다리라 하였고, 화약을 만드는 약쑥을 많이 재배한 곳이라고 합니다. (인천의 산과 하천. 인천 역사문화 연구실)
길상산 고도가 잘못 표기된듯 합니다.
밤새도록 나랑 놀아줄 달님..너무 예쁨니다.
13번 군도 로얄 관광호텔 앞을 내려 섭니다.
정족산 방향으로 길을잡아 진행합니다.
마루금따라 올라서면 삼랑성 성벽이 가로막고 .. 밤길에 심한 경사면을 적절히 가다가 성벽을 올라서서 좌측으로 진행합니다
복원공사가 한창인 삼랑성 알바주의 구간입니다.
삼랑성(三郞城) 서문(西門) 삼랑성은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에 위치한 석성으로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불리운다 사적 제130호인 삼랑성은 지정면적이 75,000평, 산성둘레 2.3km로 전등사 일대를 둘러싸고있는 산성으로 단군의 세 아들(三郞)인 부루(扶婁), 부소(扶蘇), 부여(扶餘)의 삼형제가 쌓은것으로 전해지고있다.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고, 후에 토성자리에 표면이 거친 할석(割石)으로 석성을 쌓아 오늘날까지 보존되고있다. 삼랑성은 성 안밖을 할석으로 겹축하였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쇄기를 많이 박아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있다. 이 삼랑성은 고려시대에도 몇번의 보수가 있었던것으로 보이며... 1739년 영조15년에 중수를 하면서 남문에 종해루(宗海樓)라는 문루를 건립하였고, 1764년에 다시 성을 중수하였으며, 조선말기까지 계속적인 보수가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삼랑성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고종때인 1259년에 삼랑성안에 가궐(假闕)을 세웠다고 하며... 조선 중기에 장사각(정족산 사고)을 지어 실록을 보관하였으나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약탈하고 남은 전적과 실록은 규장각으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고한다. 삼랑성은 해발 221m의 정족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쪽의 계곡에 수구와 남문이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남쪽 안부에 위치하고있으며, 남문은 해발 107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위치하고있다. 성벽이 꺽여지는 곳마다 10여곳의 곡성을 두고,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성(稚城)을 두고있다. 본래 삼랑성에는 동서남북에 네곳의 문루(門樓)가 있었으나... 이 가운데 문루가 남아있는 곳은 남문 뿐이며 종해루(宗海樓)라 부르고있다. (자료)
찬바람만 불어오는 정족산 삼랑성 정상입니다.
3000산 오르기 리본도 보이고...
밤나무 단지를 지나고..
마을 식수 탱크가 있는 고개를 지나고..
18번 군도가있는 포장 도로에 내려서고.. 다음 옹벽을 돌아갈 생각으로 조금 걸어서 선두1리 표석을 찍고 돌아와 계속 진행합니다.
운동시설을 지나고..
17번 군도 강남중학교 앞을 지납니다.
좌측으로 도로를 한참 걸어 갑니다.
71봉 방향으로 길을 잡습니다.
마을길과 그저 밋밋한 등로을 갑니다.
별 특징없는 71봉 입니다.
농로와 임도길 걸어서..
길정저수지를 좌측에 끼고 한참 걷다가..
부대 철망 옆으로 끼고 돕니다.
해병대 진강산 포병부대 담장을 타고 공동묘지 방향으로 올라섭니다....
수많은 음택에는 후손들의 사랑이 가득합니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좌틀해서 진행합니다. 바람은 세차게 불고 목도 마르고 해서 바람없는 곳에서 보온병 물로 간식을 먹습니다.
236.4 삼각점. 부근에는 운동시설이 있습니다.
조금씩 날이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조망도 서서히 관척되고..
멀리 덕정산 (깃발2개) 정상이 올려다 보입니다.
덕정산 정상 잘 정돈된 방화선과 또하나의 분맥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정상넘어 조망입니다.
(건너편 진강산 조망입니다.) 이곳에서 우측 남서쪽 방향으로 진강산~마니산으로 이어지는 또 한 줄기의 분맥이 뻗어가고 있습니다.
어둠이 거의 사라지고..
눈에덮힌 낙엽이 시간의 흐름을 알게 합니다.
강화의 일출은 더욱 강렬해 보입니다.
길도없는 등로를 내려서면 한수농장이 나옵니다.
한수농장을 지나서 마을길을 걷습니다.
이곳에서 아침을 먹으려 했는데 문은 열려있는데 주인은 없고.. 2번도로 농업기술쎈터 앞을 그냥 통과 합니다.
농협기술쎈터 안으로 들어가 당직하시는 분께 인사하고 물 보충도 하고 커피고 마시고 싸온 떡으로 아침으로 해결하고 쉬어갑니다.
억겁의 세월이 빗어낸 바위
곧이어 퇴모산에 올라섭니다. 조망 좋습니다.걸어온 길과 가야할 길이 반듯하게 보입니다.
420봉 삼각점을 지납니다. 박무가 아직 덜 걷혀서 먼곳은 희미 하지만 그런데로 조망 좋습니다.
혈구산을 올려다 봅니다. 저기가 우리나라의 중심위치라죠.
아무도 없는 혈구산에 오릅니다. 정말 조망 좋습니다.
혈구산(穴口山)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에 위치한 혈구산은 해발고도 높이가 466m로 용혈의 근원이자 고려 정기를 품은 산으로 여신의 성격을 띠었으며, 예로부터 용이나고, 국가의 재난을 알리는 곳이다. 대운산(戴雲山)이 하늘에 닫아있다는 의미를 지닌 산으로 마니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머리부분에 해당하는 곳이라 전해진다. 혈구산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면 가슴이 벅차고 힘이 저절로 솟구치는 살아 숨쉬는 산으로 정기가 산 정상으로 항상 넘쳐 흐르고있다. 또한 강화 중앙부에 위치하여 강화 전경을 고루 볼 수 있는 산이다. - 강화군청 -
혈구산에서 가야할 고려산이 눈앞에 보이고..
걸어온길을 조망하고 가슴에 매달려온 지도첩이 사라진걸 알았습니다. 베낭을 두고 오던길을 달려가 봤는데 안보이더군요. 퇴모산까지도 있었는데...오늘은 초입에서 베낭 커버도 잃어버리고.. 아마도 시그널 작업할때 풀섶에 떨어진듯..지도가 없으니 답답 합니다.
동서남북 거침 없습니다.
다시 한 컷 담아보고 다음 길을 향하여 내려 섭니다.
비박장소가 딱인듯한 바위를 지납니다.
2봉을 지납니다.
2차포장도로의 4번 군도가 넘어가면서 내가면 고천리와 강화읍 국화리를 연결하는 고개 고비고개(나래현) 입니다.
고비고개의 ‘고비’는 강화의 옛 행정관서가 있었던 곳으로,‘고읍古邑’에서 유래된 지명입니다. 고읍’은‘고비’고부’로도 불렀습니다.
편한 콘크리트 길를 오릅니다.
작은 고개를 지납니다. 이정표가 예쁘네요.
등로에서 내려서는 지점에서 목책을 넘어서 올라 철조망을 딛고 넘어서면 미군부대 철망 휀스를 마주 합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철망따가 갑니다.
부대 때문에 8부 능선에 정상 표식을 만들어 놨더군요.
다시 도로에 올라서서 도로를 따라 내려 갑니다.
대형 사진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한장 부탁합니다.
전설이 깃든 고려산 오련지 입니다.
성큼 다가온 봄소식 입니다.
적당히 도로를 따르다가 좌측 헬기장 방향으로 걸어가면 시루메산이 나옵니다.
정상은 벙커로 되어있고 그 꼭대기 안테나에 이곳이 어딘지를 알려주는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벙커를 넘어서 등로를 잡아 가다보면 산불 안전 감시탑이있는 곳으로 올라섭니다. 선답자들은 이곳을 오르지 않고 안부로 오르내리는 모양입니다. (작은 막사와 감시철탑)
감시중인 어르신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 이곳에서 진행방향 우측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는데... 저는 선답자의 트랙을 따라서 능선 끝자락으로 내려가 봅니다. 간벌목으로 길은 엉망이고 비스듬히 마을로 내려 섭니다.
마을에 내려서니 개판입니다.
강화 부근리 점골 지석묘(支石墓) 인천광역시 하점면 부근리 743-4번지에 위치한 해발 20m의 고인돌로 상석과 4매의 지석이 잔존해있는 전형적인 탁자식의 지석묘이다. 2000년 12월 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포도밭을 지나는데 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주인의 정성이 가득합니다.
7번 도로를 건너서 봉천산으로 향합니다.
마을회관 지나서 수퍼에서 음료수 한병 먹고 5층석탑이나 다녀올까 생각 마루금에서 너무 이탈 되어있어 다시 원 위치로 복귀 그냥 능선으로 올라갑니다
(알바주의)
봉천산에 오르니 조망좋고 시원합니다.
이북땅도 조망되고..
봉천대(奉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정면 신봉리 산63번지에 위치한 봉천대는 봉천산 정상에 돌로 쌓아올린 장방형의 제단이다. 강도지에 의하면 고려때 축리소(祝釐所)로 사용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을 행하던 곳으로 높이 5.5m, 밑지름 7.2m의 장방형 사다리꼴 모양의 제단이다.
※봉천산(奉天山 291m)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신봉리 일원 봉천산은 291.1m로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가족끼리 등산하기에 적합한 산입니다. 봉천산에 오르면 고려 때 나라에서 제천의식을 행했던 제단이었으나 조선중엽에 이르러서는 봉수대로 사용했던 봉천대가 있습니다. 또한 멀리 개성의 송악산 등 북한의 산야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펼쳐집니다. 봉가지는 하음 봉씨의 시조인 봉우가 태어났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연못입니다. 고려 예종 때 봉천산 밑에 사는 한 노파가 연못가로 물을 길러 갔을 때 하늘에 구름이 끼고 우레 같은 소리가 나더니 수면에 석함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석함 뚜껑을 열어보니 옥동자가 들어있어 이 아이를 왕에게 바쳤고 왕은 봉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는 커서 재상이 되어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고 이로부터 하음 봉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봉천산 아랫자락에는 이 노파를 닮았다는 석조여래입상이 있습니다. 이 입상은 고려시대의 것으로서 큼직한 머리카락과 큰 눈 , 두꺼운 입술을 가지고 있어 소박하면서도 둔중한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친근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석조여래입상의 옆쪽에는 봉천사지 오층석탑이 있습니다. (자료)
성덕산 정상에는 운동시설이 있고 조금 높은 곳에 삼각점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끝자락을 향해서 갑니다.
조금 가면 저담산이 나온다는 예기죠..
마루금에서 조금 떨어진 저담산 다녀 옵니다.
저담산에서 북녘을 바라봅니다.
정상부 바위
다음은 별악산 입니다.
철계단이 설치 되어있고 오르는 곳곳마다 조망이 훌륭합니다.
별악산 정상입니다.
넘어사면 크다란 바위 조망터가 있습니다.
별악산은 양사면 북성리 남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167.3m이며 베락바우, 베라 바우산으로 불렀는데
1919년 일제가 지도를 간행하면서 순 우리말을 음만을 가차하여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별악봉別岳峰이 되어
산에 담긴 뜻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벼락 바위 밑에 동굴이 바다로 통하여 소리치면 메아리 쳤다고 하나 언제부터인가 동굴이 막혔다고 합니다.
북쪽이 눈앞에 있습니다.
이번에는 평화 전망대를 향해서 갑니다.
우측으로 돌아 갑니다.
이렇게 생긴곳을 따라내려 갑니다.
녹색 휀스 못미쳐서 헬리포터 가장자리에 삼각점이 있습니다.
녹색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됩니다.
제적봉
붉은 무리를 제압한다는 뜻입니다.
안보 교육장으로 정말 잘 만들어 놨더군요.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면 이북 사람들의 움직을 관찰할 수 있는 이곳
흐르는 강줄기 처럼 조용하기만 합니다.
제적봉 삼각점
출입로로 내려 갈까 하다가 다시 마루금으로 복귀 끝 지점으로 내려 갑니다.
준비시간 30분 빼고나면 약 13시간 30분쯤 걸린듯 싶군요.
총 45km 에서 헛걸음 3km.....여기저기 주변산 들리면 적어도 42km 는 넘어 보입니다.
날머리에서 2번 버스를 타고 강화역으로 나와서 식사후
3000번 타고 송정역에 내려서 전철타고 집으로 복귀 저녘8시 도착했습니다.
가깝고도 먼 강화 나드리를 마침니다.
본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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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홀로 외로이 산행도 참잘하십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반은 가본곳이고 반은 사진으로 답사 완료, 시간 있으면 홀로 답사한번 해야 지.. 사진 잘 보았습니다. 수고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