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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연극소설-궁리' <2> 세종프로젝트와 공작인 장영실
궁리(窮理)-장영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국제신문 2012-04-03
- 양맹준 부산박물관장과의 방담(하)
만원권 뒷면의 진실- 만원권 앞면은 세종대왕인 줄 알지만,
뒷면은 장영실이 제작한 천문기구 '혼천의'와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사실은
누구도 모르고 있다.
다음주부터 연재할 '궁리'는 만원권 뒷면의 비밀을 밝혀내는 연극 소설이다.
#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 아무리 타고난 공작인이라지만 천민이 어떻게 그런 방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을까?
# 양맹준 부산박물관장
; 장영실 재주를 알아본 세종이 그를 중국으로 유학을 보냈다네
한번 보면 뭐든 만들어버렸으니까
양맹준: 사실 기득권 세력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임금은
먼저 민중들에게서 지지 기반을 이끌어 내지.
이건 역사를 아는 자들에게는 초보적인 공식이지.
세종이 왜 한글을 만들려고 했겠나?
훈민정음 맨 앞에 그 이유가 나와 있어,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아니 하므로~ 바로 이 말일세.
백성들이 쓰는 말과 글이 다르다는 거야.
말은 조선말인데 글이 중국어거든.
그래서 배운 자들만 지식을 독점하고 백성들은 그냥 소 돼지 짐승처럼 말 못하고 살고 있다,
이 말이거든. 그래서 세종이 한글 만들어 가지고 직접 백성들과 소통을 시작한다, 이 말씀이야.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가지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뭔 줄 아는가?
용비어천가를 지은 거야.
용비어천가의 내용이 뭐냐하며는, 쉽게 말해서 즈그 할아비 선전이거든.
그 다음에 세종이 집중적으로 찍어낸 게 농사직설이라는 책하고 향약집성방이라는 책이다.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이 뭐냐 하면은 농사짓는 법이야.
그 당시 흉년이 들고 세수가 줄고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농사를 잘 지어 수확을 많이 거둬들일 수 있는가를 책으로 가르친 거지.
봉건사회에서는 농어민 생산력이 바로 수입원이고 국력이거든.
그래서 한글로 쉽게 풀이해서 나눠 준 거고,
향약집성방이 뭐냐 하면 병이 들면 중국에서 약을 수입해 가지고 썼는데
이 약재의 가격이 알파가 붙어 있으니까 엄청 비싼 거야.
이거를 한국산으로 만드는 법을 가르친 거야,
향약이라는 게 바로 조선 토종약이다.
그거 내용을 보면 정말 웃긴다.
축농증 걸리믄 오이꼭지 그거 따 붙이고
머리 박 터지면 된장 찍어 바르고 이런 거 써 놓은 게 향약집성방이다.
백성이 병이 안 들어야 성을 쌓든가 돌을 깎든가 군대 보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쉬운 한글로 책을 만들어 찍어 낸 거라.
이윤택: 그러니까 한글을 만든 목적이 대단히 현실적이군.
양: 그럼, 세종의 국가 경영은 지금의 삼성그룹 이 회장도 못 따라 가지.
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가차 없이 잘랐지.
지금 독도 영유권 문제가 생긴 것도 세종의 공도 정책 때문이랄 수 있지.
이: 공도정책(空島政策)?
양: 생산성이 없는 지역에는 아예 사람이 살지 않도록 주민을 철수시켜 버리는 거,
그게 공도정책(空島政策)이야.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면은 관리 월급 줘야 하고
울릉도에서 생산되는 거를 육지로 가져 올라카는데,
배 한번 파손돼 버리믄 하나도 못 가져오고 돈만 지출이 되니까
제법 큰 섬이라도 생산성이 적으면 마 빈곳으로 남겨 놔라. 그랬단 말이지.
다 그런 거 때문에 지금 독도 문제가 생기고 그러는 거지.
이: 세종이 왼갖 것까지 신경을 썼구만.
앙부일구(仰釜日晷) 晷(구); 그림자. 햇빛
조선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대표적인 해시계이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보급된
이 해시계는 오목한 솥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앙부일구(仰釜日晷)라는 이름도 그러한 형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1434년(세종 16) 장영실이 처음 만든 앙부일구는 종로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가(南街)에 각각 쌓은 석대 위에 설치하여 한국 최초의 공중시계 역할을 하다가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2개의 앙부일구는 그로부터 2∼3세기 후에 만든 것으로 전의 것과 제작 기법이 같다.
양: 한 마디로 멀티 플레이어야.
완전히 새로운 국가 창조자지.
원래 태조 이성계가 여진족의 피가 섞인 북방사람이라는 설도 있었고,
당시 북방 사람은 천민이라는 고정 관념이 있었지.
특히 임금이 여진족의 피가 섞였다면 말이 되겠는가.
그래서 전혀 연고가 없는 양반 마을 전주를 본으로 삼으면서 족보까지 바꾸었지.
그렇게 할애비를 용비어천가로 재창조 해 내고,
아비가 피바다를 이루면서 닦아 놓은 영토를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시스템으로 운영해 나갔다,
이 말일세.
여기서 국가 권력의 핵심을 쥘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칼자루가 바로 천문 역법일세.
임금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이치를 딱 자기가 받는다는 거.
그래서 자신이 곧 태양이고,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순행한다는 거
이게 동양의 운명적 제왕론이거든.
임금은 자연의 이치를 알고 자연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제왕들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관을 벗고 꿇어 앉아 기우제를 지냈지.
물론 비는 언제라도 내릴테니까 비 내릴 때까지 빌고 있는 거지.
그래서 세종은 자연과 천문 역법을 다스릴 수 있는 전문가를 원했고,
이 대목에서 장영실이란 타고난 공작인(工作人)을 만난 거지.
이: 공작인(工作人)이라니?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
조선시대에 낮과 밤의 시간을 재는 데 사용한 의기(儀器)이다. 1437년(세종 19)에 4개를 만들어 만춘전, 서운관, 평안도와 함경도의 병영에 두었다. 지름 68㎝로 구리로 만들었다.
양: 호모 파베르(Homa Faber), 공작하는 인간, 몰라?
호모 사피엔스가 생각하는 인간이고,
그 다음 단계가 호모 파베르 공작하는 인간으로 진화하지 않나.
인류학자 호이징언가 하위징안가 하는 양반이 논했잖아.
그 다음 수순이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지.
장영실은 타고난 공작하는 인간이야.
장영실은 별스런 사전 지식 없이 그 어떤 물체라도 한번 척 보면,
그 물체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해 내고 다 만들어 버리지.
심지어 그 물체의 허점까지 파악하여 더 버전업된 물체로 재생산해 내기도 해.
바로 이런 장영실의 천재적인 모방과 재조립 능력 때문에 명나라 조정에서 난리가 난 적이 있지. 중국 천체 기구를 그대로 베껴 만들면서 더 발전된 단계로 재창조해 내었거든.
그래서 중국에서 장영실을 잡아 들여라 난리가 났다지.
세종에게는 장영실의 존재야말로 자신의 국부론을 실현하는 마이더스의 손이었지.
처음에는 농사기구를 고치고 만드는 손재주를 보이더니
화약도 만들어 내고,
활자 만드는데도 참가하고,
자격궁루라고 요즈음으로 말하면 디지털 물시계도 만들고,
여민락이라고 박연이 집대성한 조선음악 악기도 만들고 하다가
급기야 천문역법을 관측하고 조선의 시간을 수치로 계산하여
조선식 천문기구까지 다 만들어 내었지.
물론 조선의 시간은 이순지라고 젊은 천문학자 겸 수리학자가
중국의 시간과 다른 조선의 시간표를 계산해 내었지.
이순지는 오차 범위 영점 대 이하로 다음해의 일식 시간을 딱 맞추었지.
그러나 이순지는 학자지 공작인은 아니거든.
이순지가 조선의 표준시간을 계산해 낸 수리학자라면
장영실은 자격루라고 당대 세계 최고로 정교한 조선의 물시계를 만들어 낸 발명가였지.
그러나 이 물시계는 장영실의 독창적인 발명품은 아니었네.
중국 역대 최고 수준의 물시계인 연화루를 보고 만들었지.
여기다가 12시가 지나면 자동적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방식을
아랍의 시계 기술자 알자지리의 기술을 첨가했지.
또 여기다가 지렛대 모양의 숟가락을 이용해 동력을 전달하는 방식을 더했는데,
이는 일찍이 비잔틴 지역에서 개발해 낸 시계 기술이지.
장영실은 이 모든 것을 다 베끼고 종합해서 자신만의 변증법적인 물시계를 창조해 낸 거지.
이: 일개 지역 천민이 어떻게 그런 방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지?
양: 세종이 일찍이 장영실의 재주를 알아보고 중국 유학을 보내었지.
가서 두루 살펴보고 눈 여겨 둘만한 것은 눈 속에 담아서 오라고 말이야.
장영실은 중국에 체류하면서 자기 눈에 담기는 것은 모조리 머리 속에 다 찍어 돌아온 거지.
여기서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네.
장영실이 중국 유학 당시 중국에 그대로 머물러 살라는 유혹을 받았다고.
조선에 돌아가 보아야 지역 출신 천민에 다문화 가정 출신인데 미래가 암담할 수밖에 없잖아.
그러나 중국에서는 장영실의 신분이 자유롭단 말일세.
기술자로서 대우 받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일세.
그러나 장영실은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돌아왔다네 왜?
이: 왜 장영실은 천민 신분을 받아들이면서 귀국했을까?
양: 세종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때문이지.
장영실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 봐 주는 세종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었어.
장영실의 재능도 사실 주군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서 나오는 기적 같은 것이었어.
세종이 영실아, 조선의 시간이 중국의 시간과 다른데
어떻게 하면 조선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단 말이야.
그러면 장영실은 그때부터 생각하기 시작하는 거야.
조선의 시간이 중국과 다르든지 말든지 알 바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작자가
참 난감하기 짝이 없는 형이상학적인 요구를 세종에게서 받은 거거든.
그러면 장영실은 그때부터 두개골이 작동하기 시작 하는 거야.
그러면서 그 두개골에서 뚝딱 시계가 나오는 거야.
그게 장영실의 천재성이고. 주군에 대한 믿음이 만든 경이로운 천재성이지.
이: 응, 그런 인간이 있어. 수학 점수를 만점 받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녀석 말이 아무리 어려운 수학문제고 처음 대하는 문제인데도
수학 문제만 보면 저절로 답이 보인대.
또 우리 극단에 그런 무대 제작자가 있어.
무대 디자인도 할 줄 모르는 작자인데 어떤 무대를 만들고 싶다 그러면
디자인도 없이 그냥 뚝딱 만들어버려.
양: 글쎄 그런 인간이 바로 공작하는 인간이지.
그러나 그런 인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역시 자신을 알아봐 주고 믿음을 주는 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이지.
장영실이야말로 그런 인간이었어.
부산포 바닷가에서 왜구 토벌대장으로 온 이천 장군의 눈에 띄어 그를 따라 다녔고,
이천의 소개로 궁에 들어가서는 세종의 눈에 들어 기적 같은 일을 닥치는 대로 해 내었어.
장영실에게는 이천이 아버지였고 세종이 자신이 섬겨야 하는 주군이었어.
장영실은 세종의 신임을 받아 상의원 별좌라는 벼슬을 얻지만,
자청해서 세종의 침소를 관리하는 내시 노릇까지 했다네.
그만큼 장영실의 눈에는 세종 밖에 없었네. 세종이 세상의 전부였다네.
세종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발명해 낼 수 있었어.
주군이 내리는 수학문제는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답이 보이는 거야.
주군에게 그 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지. 그런 인간 있잖아.
이: 그래 알겠어, 장영실이 어떤 인간인지….
이 세상에도 더러 그런 인간이 있지.
특히 연극하는 배우들에게서 그런 대책 없는 인간을 발견하고는 하지.
그러나 배우들에게 주군은 관객이지.
자신의 존재를 지켜봐 주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전부를 걸지.
아름다운 존재증명이라고나 할까.
정리=이윤택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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