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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祖 | 曾祖 | 祖 | 父 |
龍鳳 | 乙仁 | 霮 | 德之 |
1. 호군공휘주단비(護軍公諱淍壇碑) {전주최씨세적록}
- 호군공 제단 -
전북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惟我全州崔氏以高麗門下侍中文成公諱阿爲鼻祖是生諱龍鳳中郞將是生諱乙仁司醞署直長同正是生諱霮文科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是生諱德之文科藝文舘直提學烟村先生是生諱淍護軍護軍公以烟村公出宰南原時相宅遺後之命始居于舟巖而屢經兵燹護軍公之生卒筮仕墓所與配位失傳歷世廣覔終無確據憫恤之情豈忍言哉舟巖烟村公俎豆之地也且公杖履之所也意義並存故設壇于祠宇舊址以寓子孫瞻慕之誠鳴呼焄蒿裸鬯之際皇皇然不忘于中則冥冥之靈洋洋乎如在其上無疑矣庶可以伸曠世之宿憾矣乎
己亥三月下澣
後孫式烈謹識
우리 전주최씨는 고려 문하시중 문성공(文成公) 휘 아(阿)를 시조로 하고 있는데, 문성공께서 휘 용봉(龍鳳)을 낳으시니 중랑장이요,
중랑장공께서 휘 을인(乙仁)을 낳으시니 사온서 직장 동정이며,
동정공께서 휘 담(霮)을 낳으시니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 호조 참의 집현전 제학이시고,
제학공께서 휘 덕지(德之)를 낳으시니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직제학으로 연촌(烟村) 선생이시고,
연촌 선생께서 휘 주(淍)를 낳으시니 호군이시다.
호군공은 연촌공께서 남원 부사로 계실 때 집터를 잡아 주시면서 이곳에서 살라고 명(命)하시었으므로 처음 주암촌(舟巖村)에서 살게 되시었다.
그 동안 여러 번 있었던 전쟁으로 호군공의 태어나고 돌아가신 것이나 이력을 포함하여 묘소의 위치는 물론 배위(配位)에 관해서도 전해오지 않게 되었으므로, 오래 동안 널리 찾아보았으나 결국 확실한 근거를 찾지 못하여 죄스럽고 민망한 마음을 차마 말로는 형언할 수 없었다.
주암촌은 연촌공의 서원이 있었던 곳이며 또 공(公)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어서 두 가지 의미가 함께하는 장소이므로 주암서원(舟巖書院)이 있었던 옛 터(1)에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자손들이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을 다할 수 있게 하였다.
아아! 제사를 모실 때마다 황급하게 서두르며 허둥대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아득하고 그윽한 영혼께서도 의지하실 곳이 생겼으니 앞날을 활짝 펼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니 비로소 널리 밝게 펼칠 수 있게 되었으며, 대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물려 내려온 문제가 비로소 해결된 것이라고 하겠다.
1899년(고종 36) 3월 하순.
후손 식열(式烈) 삼가 지음.
* 각주 ----------------------
(1) 지사초등학교 뒤편에 있었던 주암서원이 철폐되었고, 그 자리에 호군공 제단이 세워졌다. 마을 노인들은 그 곳을 “절로안”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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