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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통해 본 조선 선비의 유배생활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 선비의 유배생활을 살필 수 있는 기록, 유배일기
‘귀양’이라는 말로 잘 알려진 유배형은 중죄를 지은 자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관 땅에 보내 종신토록 살게 하는 형벌이다.
그런데 여기 오해가 있다. 유배형을 일반들에게만 행해진 형벌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정치범으로서 양반 관료들이 유배된 사례가 많기는 하지만 평민, 노비들도 유배형에 처해지곤 했다. 또 하나 조정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의 관찰사 직권으로도 형사 잡범을 유배형에 처할 수 있었다.
유배형은 형기가 종신이라는 점, 유배지에서 노역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늘날로 치면 ‘무기금고’에 비유할 수 있다. 조선의 여러 정치인들이 겪었던 유배형은 자신의 생활 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지역에 처박혀야 하는 종신 추방형이었다. 조정에 복귀할 가능성이 큰 자인가 실세한 인물인가에 따라, 그리고 관리 신분인가 일반 무지렁이인가에 따라 유배길에서의 이들에 대한 처우는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유배형은 사형 다음의 중형이었고 유배지로의 노정은 물론 그곳에서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었다.
최근 관찬(官撰) 기록뿐만 아니라 유배가사 등 문학작품 등을 분석하여 조선시대 귀양살이의 여러 다양한 면모들이 생생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 가운데 유배형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유배 일기이다.
유배일기는 여러 종류가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몇 가지 꼽으면 다음과 같다. 먼저 관직자의 유배일기로는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도 성주로 유배간 묵재 이문건의 『묵재일기(默齋日記)』, 중봉 조헌이 1589년(선조 22) 함경도 길주로 유배가서 쓴 『북적일기(北謫日記)』, 이항복이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다가 1618년(광해군 10) 북청 유배길에 올라서 쓴 일기인 『백사선생북천일록(白沙先生北遷日錄)』 등이 있다.
그리고 위리안치 죄인에 대한 일기로는 1722년(경종 2) 회와 윤양래가 함경도 갑산에 유배간 과정을 쓴 일기인 『북천일기(北遷日記)』가 있으며, 관직이 없는 유생 이필익이란 자가 1674년(숙종 즉위) 2차 예송 때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안변으로 유배가 그곳에서 쓴 일기인 『북찬록(北竄錄)』이 있다.
이밖에도 여러 종류의 유배일기가 남아 있는데 이들 일기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조선 선비들의 유배지까지의 노정, 유배지에서의 생활상을 추적할 수 있다. 이들 유배일기를 중심으로 그밖에 법전, 문학작품 등 관련 자료를 통하여 조선시대 다양한 유배인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한다.
2. 유배지의 선정
유배형은 죄인의 거주지에서 유배지까지의 거리에 따라 2천 리, 2천 500리, 3천 리등 세 가지 등급으로 나뉘며, 죄가 무거울수록 더 먼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3천 리 밖으로의 유배가 가능했는가 하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 워낙 땅이 넓다보니 세 등급으로 유배를 보내는 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래서 죄수가 정해진 유배지로 이동할 때 빙빙 돌고 돌아 해당 거리를 채우게 했으며, 아예 1430년(세종 12)에는 죄의 등급, 죄수의 거주지 등을 고려하여 대상 유배지를 정해버렸다.
규정에 따르면 죄인이 전라도에 사는 경우 유배지로는 경상도와 강원도, 함경도 고을이었으며 함경도에 사는 경우에는 강원도, 평안도, 경상도, 전라도 고을로 한정했는데, 다른 도 역시 마찬가지로 각각 대상 유배지가 정해졌다. 또한 ‘유 2천 리’는 거주지로부터 600리 밖 고을, ‘유 2천 500리’는 750십 리 밖 고을, ‘유 3천 리’는 900리 밖 해변고을이 유배지가 된다. 말이 3천 리이지 실제 유배지는 900리 밖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수교정례』의 현종 13년(1672) 수교에서 보듯이 현종 때에는 최소한 1천 리 밖으로 유배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등 유배지 조항은 뒤에도 여러 차례 원칙이 바뀌었다. 또한 실제 운영 면에서도 원칙과 많은 차이를 보이기도 했는데, 유배지를 배정하는 데 정실이 개입되어 거주지 인근 고을에 형식적으로 유배를 보내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왕족들을 유배 보낼 때에는 한양 근교인 강화도, 교동도 등 섬 지역이 애용됐다. 실제로 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의 유배지이자 광해군이 잠시 머문 곳도 교동도였다.
사실상 조선시대 거의 전 국토가 유배지였다. 19세기에 편찬되어 유배지까지 가는데 필요한 일정을 기록하고 있는 『의금부노정기(義禁府路程記)』를 보면 336개 고을이 유배지로 이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의금부노정기』에는 의금부에서 유배를 보내는 죄수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이 도성을 출발하여 각 유배지까지 가는 데 필요한 일정을 적혀 있다.
3. 조선시대 대표적 유배지는?
유배지 가운데 가장 혹독한 곳으로는 아무래도 삼수, 갑산과 같은 함경도 변경 고을이나 흑산도, 추자도, 제주도 등의 외딴 섬을 들 수 있다. 이들 지역은 거리도 거리이지만 워낙 변두리다 보니 해당 지역 사람들이 살기에도 기후나 물자 등 생활 여건이 열악했다. 특히 섬 지역은 육지와 차단되어 있어서 유배인들의 배소 이탈 염려가 없는 최적의 유배지였다. 반면, 유배인들에게는 운 좋게 중간에 사면되어 유배에서 풀려나거나 죽지 않는 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악몽 같은 땅이었다.
조선 전기까지는 아무리 먼 유배지라도 변경 지역이나 해안 마을에 죄인을 유폐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정쟁이 격화되면서 이들 지역 대신에 섬 지역으로의 도배(島配)가 크게 늘었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 다도해의 여러 섬들이 그것이다.
특히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인 제주도는 본토와 격리된 절해고도(絶海孤島)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조선시대 많은 관리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관리만이 아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의 최종 유배지도 제주도였다.
처음 강화도에 유배된 광해군은 교동도 등 이곳저곳을 몇 차례 옮겨다니면서 15년을 떠돌다가 1637년 제주도에 들어와 1641년 67세의 나이로 병사하기까지 마지막 몇 해를 이곳에서 지냈다.
지금의 제주시 이도동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추앙하는 조선시대 다섯 관리의 위패가 모셔진 ‘오현단(五賢壇)’이 있다. 이들 제주 오현은 김정, 김상헌, 정온, 송인수, 송시열 등으로 이중 김정, 정온, 송시열 세 명이 유배인이다. 제주도에서 유배인들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당시 제주도의 3개 읍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가운데 특히 대정현으로 유배인이 몰렸다. 이곳은 제주도에서도 가장 바람이 드세고 척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중죄인을 종신 유폐시키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제주도 외에 유배지로서 악명을 떨친 곳으로는 전라도 연안의 망망대해 외로운 흑산도, 추자도, 거제도, 신지도 등 조그만 섬들이 있다.
그런데 제아무리 중죄를 지은 유배인들이라도 열악한 섬에 평생 방치해 둔다는 것은 가혹한 처사였다. 이 때문에 절도絶島로는 유배를 보내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지기 했다.
영조는 1726년(영조 2)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흑산도에 귀양을 보내지 못하도록 했으며, 2년 뒤에는 관아도 없고 사람도 많이 살지 않는 조그만 섬에는 유배를 보내지 않도록 지시했는데 이 수교는 영조 때 만든 법전인 『신보수교집록』 권5, 형전刑典 「추단推斷」 항목에 실려 있다. 또한 고종 초기에 만들어진 『대전회통大典會通』 권5, 형전 「추단」 항목에서는 추자도와 제주도 3개 읍 가운데 하나인 제주목 유배를 원칙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이들 척박한 섬으로 유배인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1801년(순조 1) 천주교에 연루되어 흑산도에 유배된 것 은 유명한 일이다.
4. 호송 책임자와 유배 경비
이제 이들 유배인과 유배지까지의 노정을 함께한 호송 책임자, 경비 문제 등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유배인이 관원 신분일 경우 호송 책임은 의금부에서, 관직이 없는 평민 천민은 형조에서 담당했다. 그런데 같은 관원이라도 등급에 따라 호송관이 달랐는데 정2품 이상, 즉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 이상 고위 관원은 의금부 도사가 맡았다. 그리고 여타 관원들의 경우도 당상관은 서리書吏, 당하관은 나장이 나누어 맡았으며, 관직과 무관한 평 천민은 지나는 고을의 역졸이 번갈아가며 호송을 책임졌다.
지금처럼 편리한 교통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이상, 죄인들이 유배지까지 하루 이틀만에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며 여러 날에서 수십 일이 소요되는 것이 예사였다. 규정상 하루 평균 80~90리는 가야 했기 때문에 이동 수단으로는 말이 이용됐다.
관리가 유배를 갈 경우 지나는 고을에서 타고 갈 말과 음식을 지원받는 것이 관례였으나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으며, 더욱이 관직이 없을 경우 유배지에 도착하기까지 드는 비용은 대개 유배인 자비로 해결해야 했다. 선조 때 광해군 책봉을 건의한 정철이 실각하자 그 일파로 몰려 1591년 함경도 부령에 유배된 홍성민은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타고 갈 말 여섯 필, 옷가지와 음식물 등을 장만하느라 가산을 털어야 했던 상황을 문집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압송관의 여행 경비까지도 어느 정도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 압송관 입장에 서도 죄인의 압송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으므로 으레 수고비를 챙겼다. 이러한 지출이 유배인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기도 했음은 그들이 남긴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대명률』에 의거하여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법적으로 가족을 동반하여 유배지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허용됐다. 유배인의 가족 동반을 허용하는 이러한 조치는 1449년(세종 31), 1790년(정조 14)에도 재천명됐다.
숙종 때 대표적인 영남사림의 한 명이었던 이현일이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甲戌換局으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갈 때 아들 이재뿐만 아니라 조카, 노비 등이 동행했는데 이는 이재가 부친 이현일의 유배길을 시종하면서 쓴 일기인 『창구객일 蒼狗客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낯선 유배지에 가족을 데리고 가기란 쉽지 않아서 가족을 동반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5. 유배가는 길
어떤 직책, 어떤 신분인가에 따라 압송관도 달랐듯이 유배지로의 긴 여행길도 죄인의 처지에 따라 대우가 크게 달랐다.
관직이 없는 자이거나 평민․천민들은 대개 정해진 시간까지 유배지에 도착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 이른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이동하거나 밤을 꼬박 새워 가는 경우도 있었다. 1672년(현종 13)에 허적을 비판하다가 함경도 갑산에 유배된 윤경교는 경상도 의령에서 함경도 갑산 유배지까지 기한보다 7~8일 정도 지체하여 도착했다는 이유로 추가 징계가 내려졌다.
이에 반해 조만간 정계 복귀 가능성이 높은 관리, 제법 힘깨나 쓰던 돈 많은 양반들 의 경우 유배길의 불편함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이들은 고을 수령과 지인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지나는 길에 선산先山에 들러 성묘를 하거나 중간에 며칠씩 쉬어가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조선대학교 김경숙 교수의 유배 일기 분석에 따르면 일부 관직자들의 유배길은 죄를 짓고 벌을 받으러 간다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여유만만했으며, 심지어 호화판 유람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722년(경종 2) 위리안치의 명을 받고 갑산으로 유배길에 오른 윤양래는 전체 18일의 여정 동안 가는 곳마다 고을 수령으로부터 후한 접대는 물론 많은 노자를 받았다. 그가 중간에 얼마나 많은 물자를 제공받았던지 수령이 챙겨준 물건을 싣고 가던 말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넘어지는 일까지 발생했다. 심지어 윤양래의 호송관인 의금부 도사는 같이 동행하지 않고 별도로 출발했으며 중간에 험준한 고갯길에서는 자신이 타고 가던 가마를 제공하기도 했다.
1589년(선조 22) 함경도 길주로 유배된 조헌은 경유지인 안변에서 부사와 활쏘기와 만찬을 즐기다가 다음 날 술이 깨질 않아 출발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유배길에 오른 이항복은 가는 길에 함흥과 홍원에서 기생 덕선과 조생의 집에서 묵기도 했다. 특히 기생 조생은 유배인 윤선도와의 술자리로 인해 그 총명함이 한양까지 알려져 있었는데, 이항복은 유배 가는 에 일부러 그녀를 만나는 호사를 부린 것이다.
한편, 섬으로 떠나는 유배길은 육지와는 사정이 또 달랐다. 간혹 파도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도로 가는 유배인을 실은 배가 풍랑 때문에 표류하여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전라도관찰사나 제주목사의 보고가 간혹
등장한다.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가 아우 김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라도 강진을 출발해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한 사실에 안도한 것을 보면 제주도 유배길은 그곳 생활만큼이나 힘든 여정이었던 듯하다.
이처럼 유배길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으나 분명한 것은 조정에서 힘깨나 쓰던 관리일지라도 유배길의 불편함은 다소 해소될 수 있겠지만 절대 마음까지 홀가분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죄를 짓고 벌을 받으러 떠나는 길인만큼 배소에서 벌어질 앞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6. 보수주인과 유배생활
유배에 처해져 유배지로 떠나는 여정이 사람들마다 제각각이었듯이 유배지에서의 삶또한 지역, 시기, 신분에 따라 다양했다. 유배지에서 유배인의 생활을 좌우하는 자로는 고을 수령을 첫 번째로 꼽아야 할 것이다. 유배인의 관리 감독을 총괄하는 수령은 유배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거처와 보수주인保授主人 선정을 좌우했다.
보수주인은 현지에서 유배인의 숙식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어떤 보수주인을 만나느냐 는 앞으로의 생활의 질이 걸린 중대 사안이었다. 자신의 가족들을 챙기기도 빠듯한 생활에 군식구가 느는 일이므로 보수주인이 유배객 떠맡기를 영 내키지 않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고을 사람들 입장에서 유배인들은 손님을 뜻하는 유배객, 정확히 이야기하면 불청객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보수주인은 수령의 명을 거역하기 쉽지 않은 읍내의 아전, 군교軍校, 관노官奴 등 관속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 백성들의 경우 관에서 유배인을 배정할라치면 갖은 핑계로 빠져나가기 일쑤였고 어쩔 수 없이 떠맡는 경우에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보수주인들이 유배인들에게 행패부리는 일도 많았다.
1797년 벗 강이천의 유언비어로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간 김려의 『감담일기坎窞日記』에 의하면 그의 보수주인은 고을의 말단 아전붙이인 군뢰軍牢 김명세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명색이 사대부인 자신에게 욕을 해대는가 하면, 때로는 “네가 빈손으로 와서 공밥만 먹고 있으니 그래, 이게 나라의 명이냐 관가의 명이냐” 하며 고함을 지르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나마 이 정도의 호통은 양호한 편이었다. 서울여자대학교 정연식 교수가 유배가사를 분석하여 밝힌 것처럼 정조 때 대전별감 출신으로 추자도로 유배를 간 안조환(安肇煥)은 노골적으로 보수주인으로부터 구박을 받았다. 그는 추자도 유배지에서의 비참한 생활 모습을 유배가사 「만언사萬言詞」에 묘사했는데, 추자도에 도착한 첫날 아무도 그를 맡으려 하지 않아 관원이 강제로 한 집을 지정하자 집 주인은 그릇을 내던지며 그에게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유배인이 유배지에 도착하면 거처를 정해야 했지만 보수주인에게 내맡겨진 처지에서 돈이 없으면 궁색한 꼴을 면할 수 없었다. 관에서 특별히 보살펴주지 않는 이상 심한 경우 끼니 걱정까지 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고을에서는 보수주인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맡기는 대신 고을민 전체가 돌아가면서 급식을 제공하게 하기도 했지만 유배인이나 고을민이나 마뜩찮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다산 정약용은 곡산부사 시절 고을에 배정된 유배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예 기와집 한 채를 사서 유배인들을 모두 그곳에 지내게 했고, 고을 기금을 별도로 마련하여 이들의 곡식, 반찬, 생활용품을 충당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유배인들의 거처를 ‘겸제원 兼濟院’이라 했는데 고을 백성들과 유배인 모두를 편하게 했다는 데서 붙인 이름이다.
사실 조정에서도 고을의 골칫거리인 유배인 배정에 신경이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1784년(정조 8)에는 흉년이 든 재해 지역에는 유배인을 내려 보내지 못하도록 했으며, 이보다 4년 뒤에는 아예 한 고을의 유배 숫자를 10명으로 못 박았다.
7. 산 무덤이나 다름없는 ‘위리안치’
유배인들은 고을 경내를 벗어나지 않는 한 이동에도 큰 제약이 없었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원칙적으로는 유배지에 가족을 데리고 와 살 수도 있었다. 다만 마땅한 호구책이 없는 이상 척박한 변방이나 시골마을, 외딴 섬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유배에 처해질 경우 가족은 고향에 두고 혼자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위리안치’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위리안치형은 무거운 죄를 짓고 국왕의 큰 노여움을 산 왕족이나 관료들에게 종종 내려졌는데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조치였다. 위리안치에 처할 경우 가족 동반 자체를 금지시켰음은 물론 집 주위에 탱자나무 따위로 가시울타리를 둘러 감옥살이나 다를 바 없는 감금 격리 조치를 취했다.
형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 전라도 익산 등지에 안치安置된 화의군 이영, 한남군 이어에게 의금부에서 거주지 제한 조치를 취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의 1464년(세조 10) 기사에 나오는데, 이 무렵 위리안치된 죄인의 감금생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집의 담장 밖에는 나무로 일종의 바리케이드를 쳤으며, 열흘에 한 번씩 음식을 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갔다. 또한 담장 안에 우물을 파서 생활하게 했으며, 행여 집안사람과 내통하거나 물품을 제공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처벌했다.
한편, 집 주위를 둘러싼 가시울타리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높아서 낮에도 햇빛조차 볼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중종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함경도 온성에 위리안치된 기준奇遵의 경우 가시울타리의 높이가 4~5길丈, 울타리 둘레가 50자尺였다
고 하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오빠로 1776년 흑산도로 유배된 김구주도 문집 속에 자신의 거처 주변 울타리의 높이가 3길 정도였다고 쓰고 있다. 또한 경종 때 명천에 유배된 윤양래의 집 주위 울타리 높이도 5길이었다. 이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위리의 높이는 5~9미터에 달하였던 셈이다.
이처럼 높은 가시울타리가 처마를 가려 집안에 햇빛이 들지 않아 대낮이라도 한밤중과 같았고, 숨을 쉬려고 해도 공기가 통하지 않았다는 기준의 불평이 지나친 과장은 아니었던 듯하다. 실제로 고을 사람들은 기준의 집을 ‘산 무덤生冢’이라 부를 정도였다.
갑갑한 감금생활은 안치된 죄인에게 자연히 탈출을 떠올리게 했을 법하다. 실제로 인조반정으로 졸지에 폐세자가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된 광해군의 아들 왕자 이지(李祬)가 땅굴을 파 울타리 밖으로 통로를 낸 뒤 밤중에 빠져나가다가 나졸에게 붙잡혔다.
이보다 앞선 1569년(선조 2)에는 전라도 보성군에 안치된 종친 신의(申檥)는 소홀한 감시망을 뚫고 아예 제멋대로 밖으로 나가 대담하게도 남의 애첩 몸에 손을 대 조정에 압송되는 일도 있었다.
8. 극과 극의 귀양살이
비록 생면부지의 땅에서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기는 했지만 유배인들의 생활에 큰 구속은 없었다. 대신 한 달에 두 차례, 즉 초하루와 보름에 행하는 고을 수령의 점고點考를 받아야 했다. 점고는 유배인의 도망 여부를 확인하는 조치였던 것이다.
일반 평민 천민들과 달리 양반 관리 출신으로 유배온 자들에 대한 점고는 고을 수령들이 배려를 해주는 것이 예의였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유배인이 사족士族인 경우 관청으로 불러들이는 대신 좌수 별감이나 아전들로 하여금 대신 점검하게 할
것을 수령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그런데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아서 점고가 때로 굴욕적이기도 하였다. 1781년 진도에 유배된 김약행은 관찰사가 점고를 강화하는 바람에 불시 점고를 받기 위해 수시로 관아를 오고 가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이보다 4년 앞서 정조를 시해하려고 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조정철은 점고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에 남기고 있다. 그의 한탄에 따르면 점고 때 관청에서 유배인을 호명할적에 성은 빼고 이름과 죄명을 부르는 등 관아에서 유배인에 대한 적절한 예우는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대개 유배인의 심사가 편안할 수는 없었으며 처우 또한 조정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유배를 온 건지, 유람을 온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호화판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1853년(철종 4) 함경도 명천에 유배된 김진형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김진형은 이조판서 서기순을 탄핵하다 관직을 삭탈당하고 명천에 유배되어 두 달 동안 생활했다. 그곳 생활을 자신이 지은 가사 「북천가北遷歌」에 자세히 소개했는데, 「북천가」는 앞서 소개한 안조환의 「만언사」와 함께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유배가사다.
「북천가」에서 그는 자신의 유배 생활을 과시하는 내용을 스스럼없이 표현하였는데, 자신의 방탕한 일상을 남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김진형은 유배지 명천으로 오는 길에 이미 여러 수령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명천에 도착해서는 삼천석꾼을 보주수인으로 배정받아 넓은 집에 살며 그곳 선비들과 어울리고 음주가무를 즐겼다. 또한 배소를 벗어난 경성의 칠보산 구경을 떠난 것은 물론, 무 살도 안 된 기생과 동침하며 방탕한 풍류를 즐겼다.
김진형보다 조금 앞선 1840년(헌종 6) 10월에 제주도 대정현에 당도하여 1848년 12월 해배될 때까지 귀양살이를 한 추사 김정희 역시 딱히 군색한 생활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처음 대정현에 도착한 그가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거처로 삼은 곳은 읍성 안 송계순의 집이었다.
송계순은 관의 명령으로 미리 집을 수리해 세간과 기물을 완비하고 노비까지 마련해
두었는데, 김정희는 그의 문집에서 보수주인 송계순이 매우 순박하며 좋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그는 거처를 옮겨가며 대정현에서 무려 8년 넘게 외로움을 달래야 했지만, 하인 서너 명이 한양과 제주를 오가며 그의 수발을 들었고 제자들도 몇 차례나 귀한 책을 사서 보내는 등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여유로웠다.
앞서 언급한 김진형 등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유배인 대부분은 유배지에서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았다. 무엇보다 마음의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중종 때 기묘사화로 전라도 능주에 귀양 간 조광조는 자신을 ‘화살 맞은 새’라 표현하고, 제주도 유배인 조정철은 ‘부평초 같은 신세’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무엇보다도 정계 복귀 가능성이 없는 인물이나 빈한한 사람의 경우 유배생활이 길어 질수록 생존을 위한 극도의 수치와 고통까지 경험해야 했다. 제주도의 최초 여성 유배인으로 알려진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는 1613년(광해군 5) 제주도에 유배되어 왕비를 낳은 귀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막걸이를 팔며 생활해야 했다고 전한다.
이보다 앞서 선조의 왕세자 책봉 문제로 실각한 정철의 일파로 몰려 1591년(선조 24) 함경도 부령의 귀양길에 오른 홍성민도 그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큰 곤란을 겪었다. 그는 해안지방에 흔한 소금을 내륙지방에서 팔아 곡식으로 바꾸면 그나마 호구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위의 의견을 듣고 데리고 온 종과 함께 상업에 나서면서 차라리 농부가 부럽다고 토로했다.
더 궁색한 경우도 많았다. 1798년 서른네 살의 나이로 추자도에 유배된 대전별감 안조환의 귀양살이는 비참함 그 자체였다. 유배지에 도착한 첫날부터 주인으로부터 온갖 냉대를 받은 그는 한동안 처마 밑에서 자야 했음은 물론, 일 년 내내 달랑 옷 한 벌로 버티며 버선이나 이불도 없이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다.
두둑한 돈이 있는 것도 아니요, 코흘리개 아이들이라도 가르칠 학식을 쌓아둔 것도 아닌 이상 척박한 외딴 섬에서 살아남으려면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흡사 종살이 처럼 주인집 마당쓸기, 불때기, 쇠똥치기, 도랑치기, 집 지키기 등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안조환은 마침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비렁뱅이처럼 동네를 돌며 동냥을 하기에 이른다.
9. 유배지에서의 정약용
조선시대 심각한 정치 대립의 와중에서 유배를 비켜간 관리들은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그야말로 행운아였다. 유배는 조선의 정치인들에게 결코 낯선 형벌이 아니었으며, 그들에게 처량하고 비참한 유배지에서의 삶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척박한 불모의 땅 유배지에서도 학문과 예술은 그 꽃을 피웠다.
실제로 유배의 고통을 이겨내며 시대의 아픔을 극복해나간 조선의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활발한 창작활동을 통해 후세에 길이 남을 명작을 남기기도 했는 데, 조선 최고의 지식인 다산 정약용이 그중 한 명이다.
정약용은 정조가 죽은 이듬해인 1801년(순조 1)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경상도 장기에 유배됐다가 같은 해 10월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됐다. 강진에서 그는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무려 18년의 세월 동안 외로운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다.
당시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는 박석무가 번역한 『유배지 에서 보낸 편지』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절절한 가족 사랑과 학문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편지에는 다산의 진한 가족애가 녹아 있다. 외딴 흑산도에서 외롭고 고달프게 귀양 살던 형님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 지아비를 유배보내고 자식들을 키우며 정을 삭이던 한 살 연상의 부인 홍씨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남다른 사랑. 정약용은 특히 장성한 두 아들의 글공부를 늘 걱정했다.
우리 집안은 화를 입은 폐족(廢族)이니 남보다 학문에 더욱 정진하라는 것이다.
정약용의 학문에 대한 열정도 애틋한 가족애 못지않았다. 그는 유배지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채찍질에 힘을 쏟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의 불후의 저작 『목민심서』,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 등은 모두 유배지 강진에서 이룩한 쾌거였다. 그에게 있어 유배의 시련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니라 그저 빛나는 성취의 하나의 계기가 됐을 뿐이었다.
<참고문헌>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1991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작과비평사.
김경숙, 1998 「조선시대 유배형의 집행과 그 사례」 『사학연구』 55·56.
양진건, 1999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제주도 유배인 열전』 문학과지성사.
정연식, 2002 「조선시대의 유배생활-유배가사에 나타난 사례를 중심으로-」 인문논총 9.
이종묵·안대회, 2011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북스코프.
심재우, 2011 『네죄를 고하여라: 법률과 형벌로 읽는 조선』 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