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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7. 05 주일 낮예배 메시지
설교를 위한 묵상
지난 주일에는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길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회복하고 주님의 왕 되심을 믿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야기를 했다. 매우 느슨하고 집중력이 부족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정말 목표가 분명해야 하고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통일성 있게 전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여전히 주제는 하나님 나라다.
이번 주부터는 주기도문을 가지고 설교할 것이다.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서 그 자체 속에는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과 총 주제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주제는 하나님 나라다. 주기도문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읽어야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참조한 책은, 톰 라이트의 ‘주기도와 하나님 나라’다. 그리고 김세윤 박사의 ‘주기도문 강해’를 보조 자료로 참조할 것이다.
톰 라이트의 책은 6장으로 구성된 소책자와 같다. 이는 그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1995년 대림절 기간 중에 리치필드 대성당(Richfield Cathedral)에서 한 설교를 엮어 책으로 만든 것이다. 그 첫 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기도와 하나님 나라/톰 라이트
1. 주기도는 2천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한 기도문이다.
2. 주기도는 우리가 온전히 성숙하여 입도록 마름질된 옷과 같다. 그래서 이 옷을 자꾸 입어보면서 우리는 성숙을 추구해야 한다.
3. 이 옷은 원래 우리의 형님이신 예수님의 옷이다. 그리고 우리도 성숙하여 이 옷을 입으면서 형님처럼 살 것이다(롬 8:29, 히 1:6).
4. 아버지라는 호칭을 하나님께 한 것은 친근함의 표시기도 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소명이 담겨 있다. 출 4:22~23 참조.
① 노예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존귀한 분의 자유로운 자녀가 된다.
② 이것은 파라오에게는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③ 우리를 종살이하게 하는 그 세상과 권세자들을 인식하고 거기로부터 부르짖으며 자유를 구하는 백성의 기도다.
5. 장차 오실 메시아의 백성이 되는 기도다.-다윗 신탁(삼하 7:14)
①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②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의 언약을 맺으라고 초대하신다. –사 55:1,3)
6.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구원을 요청한다. 악에서 놓여나고, 포로에서 풀려나고, 빵을 풍족하게 갖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갈구한다.
7.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의 삶
① 아들은 아버지의 견습생-보고 듣고 배운다.
②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히 5:7~9 겟세마네 기도: 아버지, 이 길입니까?
③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는 프로젝트-새로운 출애굽, 이스라엘과 세상을 악과 불의와 두려움과 죄에서 구해내는 일
④ 그 일을 마칠 때,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8. 아버지라는 호칭에 담긴 의미
① 이중적 혁명과 예수님의 사명
②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성취되는 사명/혁명
③ 혁명의 목적: 세상이 치유되도록 세상의 아픔을 나누고 그 아픔을 짊어지는 메시아와 그 백성
④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 앞 길을 예측할 수 없음, 거룩한 대범함.
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서명
9.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시듯이 예수께서 우리를 보내심
① 현대 문화의 의도-세상의 아픔에 등을 돌리게 함, 스스로 아픔 없는 세상을 창조하려 함.
② 세상의 아픔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치유의 빛으로 인도하라는 사명
③ 승리를 축하하며 최종 승리를 완성해 달라는 간절한 청원이자 간구
④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영성이자 교회의 사명이다.
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형님을 닮아가고, 마침내 아버지처럼 자라나 그 식탁에서 함께 잔치할 것이다.
설교의 주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을 우리는 세 가지 경우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에 그 고백은 주께서 자유를 주시겠다는 약속이요 자유인이라는 선언이다(출 4:22~23). (2)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은 메시아의 백성이 된다는 선언이다(삼하 7:14). (3)예수 그리스도에게 아버지라는 고백은 구원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헌신과 순종을 결심함이요, 도제와 같이 그 뜻을 따르고 배우다가 마침내 그의 사명을 다 감당하고 외칠 때 부르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자들이요, 하나님이 구원하심을 믿는 자들이요, 메시아의 백성이 된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니만큼 위험한 고백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리라는 서약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서약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성취되며 이 세상의 아픔과 어둠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치료하고 회복하는 사랑의 길을 찾아 노력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다.
설교의 목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우리들, 그리고 주기도문에서도 그렇게 고백하라고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그 고백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거기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우리들의 사명이 담긴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는 다만 친근한 아버지를 떠올리지만 말고 그 아버지께서 어떤 계획과 의지, 그리고 우리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계시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그 아버지와 함께 하는 프로젝트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사는 올바른 길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기도문의 첫 마디는 하나님 나라를 가장 실감나고 간절하게 가르쳐 주는 말이라 하겠다.
설교 제목: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설교 본문: 마태복음 6:9
도입-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렇게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12월 5일에 공표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헌장을 모든 국민에게 가르쳐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국민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국민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이 헌장의 앞부분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면 국민이 계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헌장을 제정한 것으로 1911년에 이미 일본 천황이 조선총독부에 교육칙어(敎育勅語)라는 것을 내려 일본제국에 충성하는 국민으로 교육하기 위한 것이 모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일종의 기본정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1776년 7월 4일에 발표된 미국의 독립선언문에는 신대륙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결심을 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미국의 건국이념이 담겨있습니다. 거기에는 만민평등사상,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권, 정부를 조직하고 개혁하고 폐지할 수 있는 권리를 담고 있으며, 영국의 국왕이 얼마나 자신들을 괴롭게 하고 부당한 대우를 했는지를 밝혀 더 이상 그의 통치 아래서 살 수 없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기도해 온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주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가르침의 핵심과 사역의 목표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강령(綱領), 곧 근본정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이며, 그 근본정신을 따라 살 것을 다짐하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영국 국왕의 압정에 시달리지 않고 새 나라를 세우리라는 다짐을 한 사람들이 미국 독립선언문에 찬성하고 거기에 서명을 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서약문과도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렇게 예수님께 부탁 드린 것입니다:
누가복음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그러면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이 기도를 따라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운동을 하는 주의 백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정신을 배우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결정체를 배우는 것과 같은 것이며, 그 정신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올바른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섯 차례에 걸쳐 주기도문을 배우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우리 아버지!
영어로 주기도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말은, “Our Father!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말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예수께서는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친근하신 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친근한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스라엘은 내 장자다!-자유를 주시는 아버지!
그런데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에 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곧 지금의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살면서 종살이를 했는데, 그 종살이, 노예생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집트 왕을 부를 때 파라오라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바로라고 하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그들은 하루 종일 애굽의 신들을 위한 집을 건설하거나 임금의 궁궐을 쌓느라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음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애굽 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그러나 애굽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열 가지의 재앙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열 번째 재앙을 내리기 전에 마지막 최후통첩을 내립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출 4:22~23)
하나님께서는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장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해방의 희망을 붙잡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더 이상 애굽 왕의 종이 안 될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서 첫 단어인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단지 친밀감만이 아니라 혁명을 내포하고 희망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신다는 희망을 고백하는 것이며, 더 이상 압제를 당하고 종노릇 하지 않을 것을 결단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이 영국 국왕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을 결단한 혁명적 외침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안에 국왕으로부터 당한 불의한 일들을 밝히면서 더 이상 그 아래서 살지 않겠다는 결단을 담은 것처럼, 주기도문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로서 그 백성을 자유하게 하시는 출애굽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우리들은 이렇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우리들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겠다고 하신 주여, 그 일을 이루어주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자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자유가 없으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자유가 없다는 것은 어딘가에 누군가에 매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때 우리는 일본 천황에게 매여 있었습니다. 한 때 우리는 독재자에게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른 무엇에 매여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간성을 앗아갑니다. 오늘날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돈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니면 욕심에 묶여있기 때문일까요? 이웃과 더불어 화목하지 못하다면 이웃이 나빠서일까요 아니면 나의 이기심 때문일까요?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 8:32)”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반문합니다: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자유하게 되리라고 하느냐?” 그 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를 범하는 이마다 죄의 종입니다.
사람은 선과 정의를 행할 때 참으로 행복합니다. 죄를 범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 된 사람은 나쁜 주인을 나쁘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알코올 중독은 나쁜 것입니다. 도박 중독도 나쁜 것입니다. 성중독도 나쁜 것입니다. 인터넷 중독, 휴대폰 중독 등 모든 중독은 사람 구실을 못하게 하고 가정과 인생을 망가뜨립니다. 그러나 종으로 묶여 있는 사람은 차마 그 나쁜 주인을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고 좋게 말합니다. 중독이라는 말은 영어로 addiction이라고 하는데, 그 본래의 뜻은 좋게 말하다(ad+dicere)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망치고 있는데도 그것을 좋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묶여 있는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벗어나려고 하는데 안 됩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종노릇 하지 않고 아들이 되어 주님을 섬길 자유를 얻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이제 그렇게 자유를 누릴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다윗에게 약속한 은혜의 언약-그는 나에게 아들이 되리라!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에게 특별한 언약을 주십니다. 그것은 그의 후손으로 오는 이가 영원한 왕이 되며 그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삼하 7:14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다윗 왕의 계보가 나라의 멸망과 함께 중단됩니다. 더 이상 왕이 없고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이 나라 저 나라에게 종노릇합니다. 그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에게 약속한 은혜의 언약을 기억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지금 그 일을 이루소서. 우리에게 이루어주소서. 아버지,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자신의 삶이 종노릇하는 노예생활과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주기도를 통하여 자유를 구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신 주님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의미가 무슨 뜻인지를 안다면, 그의 줄기찬 주의 기도는 반드시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묶임에서 놓여남을 줄 것입니다. 힘써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던 것을 되게 하는 참 믿음을 줄 것입니다. 주의 기도를 통하여 참 자유에 이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시다.
종으로 파라오의 성을 쌓는데 인생을 허비하면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중독에 빠진 사람은 가정도 세울 수 없고, 교회도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참 자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삶이 바로 섭니다. 가정이 바로 서고 교회가 견고해집니다. 나라를 바로 세우는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참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의 아픔은 잊게 하고 자신의 즐거움에 온통 관심을 쏟게 합니다. 사명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그것이 현대문화의 의도입니다. 한 때 독재자들은 국민들의 시선을 정치에서 돌리기 위해 빵과 써커스를 도심에 많이 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스포츠와 스크린 그리고 성문화를 개방하여 국민의 혼을 빼앗는 것은 사탄적 술수입니다.
게임에 중독되면 아이의 굶주림도 잊어버립니다. 현대문화는 이렇게 우리 이웃의 아픔을 잊게 하려고 우리를 즐거움에 심취하게 합니다. 수업도 설교도 예배도 즐거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다릅니다. 선한 일, 보람 있는 일을 한 후에는 기쁨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중독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기쁨 대신에 쓰라림과 허무가 뒤따라 옵니다.
마귀는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시간과 인생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고 즐거움을 내세워 자신의 성을 쌓는 일에 우리를 부려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은 공부나 자신을 개발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대신에 다른 것에서 즐거움을 찾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학창시절이 마귀의 종노릇한 것으로 마감됩니다. 마귀의 종노릇하는 사람은 청춘을 독서와 학문 또는 기술의 습득과 인격의 도야라는 특권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서울대가 추천한 청소년을 위한 권장도서 100권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외국인과 자유롭게 말하고 글을 나누는 꿈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진실한 기독학생은 할 수 있습니다.
“소년아,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은 본래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william smith clark, 1826~1886)의 말입니다. 그는 본래 대학교수요 화학자, 식물학자, 동물학자였는데, 1866년에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삿포로 농학교의 초대교감으로 부임했습니다. 거기서 10년을 머무르면서 그는 농업기술을 가르쳤고 일본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일본을 떠날 때, 송별회장에서 그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Boys, be ambitious!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입니다. 그런데 본래 그 말은 뒤에 한 마디가 더 있다고 합니다. 즉, “Boys, be ambitious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야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야망은 사탄의 궁궐을 쌓는 헛된 야망이요 헛된 노력일 뿐입니다.
삿포로 구현청 건물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Boys, be ambitious. Be ambitious not for money or for selfish aggrandizement, not for that evanescent of all that which men call fame. Be ambitious for that attainment of all that a man ought to be.
소년이여, 야망을 가지라. 돈이나 자기를 드높이기 위해서나 명성이라고 부르는 덧없는 것을 위해 야망을 가지지 말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되어야 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야망을 가지라!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으로서, 사장으로서, 아내와 남편으로서, 그리고 목사와 집사와 권사로서 우리의 소임을 잊어버리게 하기 위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신의 종으로 부리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담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는 주님을 섬기게 하려고 구하여 내신 주님의 아들딸들입니다!” 주기도에는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가 있으며, 우리가 쌓아야 할 성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고백-나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가장 먼저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말은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교훈대로 가르치고, 아버지께서 하신 것을 보고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뜻에 따라 순종할 때, “정말 이 길이 옳은 것입니까?”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여쭈어가면서 그 길을 걸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순종과 배움의 과정을 마칠 때,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삶을 마감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 그 의미는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고 어둠을 몰아내기 위하여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감내한다는 결단이 포함됩니다. 주님의 혁명은 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기 희생과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메시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고백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가겠다는 믿음을 드러냅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위대한 행동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리켜 “아빠, 안녕!”이라고 말하는 뻔뻔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아버지께 배워도 될까요? 라고 조용히 묻는 것이며, 가능한 모든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다짐이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서명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철없는 아이처럼 이기심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며, 개인의 영적 진보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감정을 어루만져 달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아픔 가운데 서는 행위이며, 세상의 창조자 앞에 무릎을 꿇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입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신 아픔의 치유 사역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기념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고백 속에 담긴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라는 말 속에는 교회의 사명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는 삶이 어떤 것임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맏형 곧 큰 형이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히 1:6)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우리의 큰 형님께서 하시던 기도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요, 우리가 따라야 할 근본정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자유하게 하신다는 약속과 계획이 담긴 고백이며, 선언입니다. 또한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드리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 나라를 건설하는 참여자들이 됩니다. 비록 우리에게 총칼과 같은 무력의 싸움이 아니지만, 우리들은 이 민족과 세상의 아픔과 어둠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뛰어들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동참자들이 됩니다. 그 나라의 건설자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의 기도를 통한 기도 연습1
우리 아버지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께서는 구원하실 백성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지요,
우리를 구원하시고 건져주시고 책임져주시려고 저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면서 “내 아들”이라고 부르신 것처럼,
오늘 저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께서 하늘의 아버지께 끝까지 순종하신 것처럼,
저희들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끝까지 충성하고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저희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평안과 안정을 찾게 하소서.
저희들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