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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보따리 풀기>의 줄거리:
보따리로 싸여 있는 것! 언제나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이야기 보따리 생각 보따리 정책 보따리 돈 보따리 등등.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보따리가 이 땅 위에서 풀려야합니다. 그래야 삶이 신바람이 나고 매일 매일이 새롭습니다. 알량한 내 뜻 내소원 치워버립시다. 대체 하나님이 당신의 보따리를 푸시는 삶은 어찌해야 이루어질까요?
보따리 풀기
(눅1:5-80)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보따리 풀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저희 집에 앨범에서 오래된 사진들이 모아져 있는 앨범이 따로 있습니다.
그 앨범 중에 제 사진이 아니라 저희 아버지와 어머님께서 결혼하기 전에 찍은 사진이 하나 있어요.
어떤 상황에서 찍은 사진이냐 하면, 소풍을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피크닉을 가신 거예요
완만한 경사가 진 풀밭에 자리를 깔고 젊은 아버지, 결혼도 하기 전이시죠, 아버지께서 비스듬히 오른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계시고, 어머니가 그 앞에 앉아 계시는 그런 사진입니다.
그 사진이 하도 인상적이라서 어머니에게 그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어렸을 적에 들이민 적이 있어요.
그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한 중학교 시절쯤 됐을까요?
그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소풍 도시락을 싸 갖고 오셨답니다, 당신이 싸 갖고 오시겠다고 그래서.
그래서 점심때가 돼서 자리를 깔고 앉아서, 이 도시락 보따리를 풀지 않습니까?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그때는 할머니와 고모가 만주에서 내려오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 그렇게 혼자 선생님 하시면서 살고 계실 때 도시락을 싸 갖고 오셨으니까 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그 당시 그 옛날에 남자가 도시락을 싸 갖고 왔다는 게 어떤 반찬을 싸 갖고 왔을까?
그래서 도시락 보따리를 탁 풀었는데 깜작 놀란 겁니다, 너무 의외의 것이 나왔다 그래요.
뭐냐 하면 빵을 싸 갖고 오셨답니다, 빵을.
쨈도 갖고 오고 뭐 버터도 갖고 오시고 어디서 구했는지 하여간 빵과 뭐 그에 어울리는 그런 양식으로 도시락을 싸 갖고 오셨다는 거예요. 아버지도 참 재미있는 분이시죠?
그래서 괜히 엄마 마음에 창녕에 살고 있던 이 시골처녀 마음에 기가 죽는 거예요.
양식을 그렇게 빵과 뭐 쨈과 그 쨈이 그 창녕, 그 시골에 뭐 있었겠습니까, 그 옛날에?
그걸 싸 갖고 와 먹는데, 그 다음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바로 앞에 한 가족이 와 가지고 자리를 깔고 또 소풍을 와서 도시락을 먹더라는 겁니다.
그 집이 도시락 보따리를 풀어서 내는데, 영락없이 한국 도시락이에요.
보리가 섞인 밥에다가 반찬을 잔뜩 싸 갖고 먹는데 보니까, 열무김치를 싸 갖고 와서 손으로 들고 뜯어 깨물어 먹고, 그리고 풋고추하고 이 쌈장을 가지고 와서 풋고추를 푹푹 찍어서 먹는데, 어머니가 마른 빵을 쨈 발라서 뜯으시면서 그것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아주 혼이 났다고… 제가 다 침이 넘어가네요.
혼이 났다 그러시는 말씀을 제가 기억합니다.
‘보따리 풀기’
삶의 여러 방면에서 이 보따리 풀기라는 말이 쓰이잖아요?
근데 항상 보따리 풀기라는 말과 같이 연관 지어서 생각되는 것은 의외성입니다, 의외성.
말문을 열고 저 사람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데, 저 사람이 저렇게 유머 있는 사람인 줄을 몰랐고, 그렇게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는 줄을 몰랐고, 그 사람의 인생의 보따리를 풀어내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고생한 사람인줄 몰랐습니다, 고생한 티가 하나도 않나요.
돈 보따리를 풀기 시작하는데 돈이 그렇게 많은 줄을 몰랐습니다.
이 보따리 풀기의 매력은 언제나 의외성이 있습니다.
뜻밖의 상황이 보따리 안에 있는 내용물이 펼쳐지는 것, 이게 바로 보따리 풀기의 재미에요.
인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보따리를 풀어야 보따리를 풀어 내셔야 재미가 있습니다.
인생에 신바람이 납니다.
그리고 보따리 풀기에 따라다니는 게 의외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서 보따리를 풀어야 우리의 하루하루가 날마다 새로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어마어마하게 길게 쓰여 있는 이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례요한이 태어나는 과정과 예수님께서 태어나는 과정을 기록한 얘기입니다.
마태와 마가와 요한 그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에 대한 얘기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되어가는 중에(다른 복음서에는), 구약에 예언된 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여,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자’라고 하는 입장에서 잠깐씩 언급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는 아예 세례요한의 아버지가 되는 제사장 사가랴와 그 어머니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아서 늙어서 이젠 도저히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 무자한 상태로 인생이 점점 황혼기에 접어들어서 마감을 하고 향해가고 있는 중에,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사가랴에게, 그것도 제사장으로서 성소에서 분향단에 불을 붙이고 분향을 하고 있는 중에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예언을 통해서 세례요한이 태어나고, 세례요한이 태어나서 이름이 지어지는 과정, 이것도 또한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바로 이 엘리사벳과 사가랴와 친척관계에 있었는데 이 마리아에게 또한 가브리엘 천사가 똑같이 와서, 예수님을 잉태하게 될 것을 예언하게 되고, 고지하게 되고 그리고 이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 만나서 서로 기뻐하는 모습, 마리아의 찬가 이러한 것들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흔적조차 없는 내용들이 기록되어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왜 누가는 이런 이야기들을 썼을까요?
마태와 마가에서는 그냥 이 땅에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복음의 역사를 기술해 나가기가 급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잉태되고 태어나게 됐는가,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사역을 해 나가실 때에 그 사역을 준비하는 자로서 잠깐 등장시키고 맙니다.
근데 누가는 왜 이렇게 마태와 마가에서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다 제거한 이야기를 여기서 등재시키고 있을까요?
말씀 드린 것처럼 누가의 관심은, 하늘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근데 그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대하여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세밀하게 깊게 배려하고 계시고 생각하고 계시고 계획하고 계시는가를 드러내 보여주고 싶은 것이에요.
누구의 삶에 대해서?
데오빌로와 같은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과 친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당신의 생각의 보따리가 많은지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풀어서 드러내야 될, 생각의 보따리 뜻의 보따리 계획의 보따리가 엄청나게 많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19절에 보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네가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천사가 말하자 사가랴가 깜짝 놀랍니다.
‘내가 나이가 지금 얼마인데 아이를 갖습니까?’ 그때 19절에 이 가브리엘이 말하는 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이게 유안겔리온이에요.
복음이라고 말할 때,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할 때 쓰는 그 단어입니다.
‘좋은 소식’
이게 바로 하나님의 보따리 안에 감춰진 내용이라는 거예요.
그걸 가브리엘 천사가 와 가지고 하나님의 보따리를 풀어놓는 겁니다.
감추어져 있던 것들을 풀어 놓는 거예요.
똑같이 마리아와 사가랴가 반응하는 태도가 뭐냐?
의외성이에요, 의외성.
뜻밖의 일을 만나게 됩니다, 뜻밖의 일을.
그리고 마리아와 사가랴가 기쁨의 찬가를 올리게 됩니다.
이게 바로 신앙생활 하는 맛이라는 거예요.
언제나 뜻밖의 일들이 하나님의 보따리가 풀어지면서 내 삶에 나타나게 되는 것, 이게 바로 신앙생활의 생명력이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보따리가 풀려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보따리가.
그 하나님의 보따리가 그러면 어디에서 풀립니까?
나한테는 지금 하나님의 보따리가 풀리고 있는지 아닌지 이걸 알려면 의외성이 준비되어야 됩니다, 의외성.
하나님의 보따리가 풀리려면 그 의외성이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의외성이 죽어버리면 하나님의 보따리가 풀릴 수가 없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예레미야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는 거 여러분 아시죠?
33장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너희에게 응답하겠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너희에게 이루리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보시면,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만나는 기회가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 할 때에 우리 기도의 내용들이 다 뭐냐 하면, 내가 소원하는 것들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주어지면 그 문제에 대해서 이 문제가 풀려나가는 해답은, 이렇게 이렇게 진행되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예측하고 감을 잡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원하는 응답은 언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마음상태가 아닌 거예요.
언제나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이 예측되어 있고,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의 기도 속에서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것을 이루어 주세요, 이것.
심지어는 어떻게까지 얘기하는가 하면, ‘구체적으로 기도해라’ 이렇게까지 얘기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래서 ‘내년도까지는 연봉 얼마가 되게 해 주세요, 내년도 까지는 교인이 몇 명 뭐 500명이 되게 해 주세요’ 구체적으로.
크고 비밀한 일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보따리가 풀릴 때에 그 보따리가 풀리는 배경이 될 수 있는 의외성이라는 게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보따리가 풀릴 때 사가랴와 마리아에게 나타나는 보따리가 풀리는 배경이 뭐냐 하면, 사가랴와 마리아의 마음에서 느껴지는 의외성, 뜻밖의.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아이를 임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때,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고…’
또 그 당시 많~은 처녀들이, 처녀가 메시아를 잉태한다고 하는 이사야서의 예언 때문에 베들레헴에 모여 가지고 결혼하기를 거부하면서 메시아를 잉태할 것을 기도하고 있던 처녀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전~혀 그런 예상과 소원을 갖고 있지 않았던 그런 사람입니다.
의외성이 보전 된다는 거예요.
의외성이 보전될 수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보따리를 풀어내신다는 얘깁니다.
사가랴도 나이가 많아 가지고 이젠 애를 낳을 것을 접어 버렸습니다, 접어버린 상태에요.
그런데 나타나서 의외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될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생각의 보따리가 있습니다.
당신의 계획의 보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못 풀어내시느냐 하면, 우리 마음속에 의외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보따리를 풀어내지 못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서프라이즈를 위해서, 깜짝 놀라는 기쁨을 위해서만 그러신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마리아에게 지금 예수님의 잉태가 뜻밖의 일입니다.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을 말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보따리가 풀릴 때, 그것이 의외의 일이 되어야 되는 마음가짐이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뜻밖의 일이, 하나님의 보따리를 푸는 모든 일들이 뜻밖의 일이 되려면, 완벽한 뜻밖의 일들로만 이루어져 나가려면 내 뜻이 없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뜻밖이라는 것은, 내 뜻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뜻밖의’라고 하는 이 표현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려면, 내 뜻을 아예 없어 버리면 전부 뜻밖의 일이 되어 버리는 거지요.
전부, 모든 것이 다 뜻밖의 일이 되어 버리고, 이렇게 뜻이 없어져 버리면, 하나님의 뜻의 보따리가 열릴 때마다 의외가 됩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어떤 태도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하나님의 보따리가 풀렸나요?
정혼한 여자, 약혼한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될 경우에, 아버지가 밝혀지지 않는 그런 임신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약혼한 남자의 아이가 아닐 경우에, 파혼을 당함은 물론, 길거리로 끌려 나와서 돌에 맞아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계집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지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뜻 자체를 자기 삶과 연관 지어서 자기의 뜻을 갖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마리아의 삶의 태도가 언제나 어떤 태도였냐, 이게 지금 가브리엘 천사 앞에서 당장에 생겨난 마음의 태도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럴 경우에 마리아의 마음 태도가 어떤 거였냐 하면, 이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자기의 뜻을 내세워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가랴도 마찬가지에요, 제사장이 아이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치명적이었습니다.
랍비를 랍비 신분에서 파면할 때에 일곱 조항의 기준을 갖고 있었는데, 그 조항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랍비로서 아내가 없고, 아내는 있는데 자식이 없을 경우에 랍비의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중의 복이오, 기업 중에 기업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기업인 자식도 없는 자가 남을 가르치는 랍비의 신분에 있을 수 있느냐, 그래서 랍비로부터 떨쳐냈다’ 이런 규정들이 있습니다.
랍비는 아니지만 제사장의 입장에서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가 자식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가랴가 의롭다고 말하고, 계명과 율례를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그 당시 계명과 율례를 지키는 이유는 다 세상 복을 받기 위해 율법주의에 입각했었습니다.
근데 세상 복을 주지도 않는데도 계명과 율법을 견고하게 지켜 나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 세상을 향하신 뜻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서 자기의 뜻과 소원을 주장하지 않고 살았다는 얘깁니다.
내 뜻이 죽은 사람, 모~든 일이 다 뜻밖의 일입니다.
왜? 내 뜻이 없으니까, 내 뜻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행동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33년의 생애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시려고 했던 당신의 생각과 뜻의 보따리를 풂의 연속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스스로 종의 형태를 띠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뜻을 죽여 버리신 것입니다.
당신의 뜻을 죽여 버릴 때, 이게 어렵고 절제 금욕 뭐 이렇게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단어와 연결이 되어있는 것같이 느껴지지만, 뜻을 죽인다는 이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신바람 나는 인생의 핵심내용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뜻을 죽일 때 하나님의 뜻의 보따리가 풀려나오면서 모든 게 뜻밖의 일인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 밥 먹고 세끼 먹고 사는 것도, 내가 내일 뭐할까?
주님 말씀대로 내일 걱정하지 않고 내일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지금 내 마음은 영원하신 하나님만 생각하고 살아갈 때에, 내일 아침에 해가 뜨고 내가 잠에서 깨어나잖아요, 뜻밖의 일이 되는 거예요.
‘어이구, 내가 이거 깨어나다니…’
내일을 향한 뜻이 없으니까, 내일을 향한 뜻이 죽었으니까.
내일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의 보따리가 열렸을 때에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는 게 뜻밖인 거예요.
‘아! 내가 밥을 먹다니…’
날마다 새로운 이유는, 내 뜻이 죽어버려서 하나님의 뜻의 보따리가 날마다 풀려나갈 때, 사가랴가 아이를 갖게 된다는 일에 깜짝 놀라 뜻밖의 일 앞에 부닥치듯이, 마리아가 자기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기가 예수라는 메시아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 앞에서, 뜻밖의 일에 깜짝 놀라는 것처럼, 그리고 찬양하는 것처럼.
왜 찬양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라고 하는 이 땅에 있는 이 티끌 같은 존재에 대해서 깊은 배려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겁니다.
그 사실에 기쁜 거예요.
어떤 일이 이루어지느냐는 둘째 문제이고, 하나님의 보따리가 풀려져서 어떤 일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느냐는 두 번째 대할 문제이고, 하나님께서 나한테 이렇게 자세하게 세심하게 깊은 계획의 보따리를 갖고 계신다는 그 사실에 감격하는 겁니다.
여러분, 누가도 마태나 마가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 부활과 승천하신 주님의 그 사건들을 경험하고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이야기가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이 연관성을 피해서는 어느 것도 기록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걸 먼저 경험했기 때문에…
경험자들로서 그 십자가의 의미를 이처럼 찾아내는 겁니다.
자, 사가랴와 마리아에게서 누가가 보고 있는 것이 뭡니까?
의외의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보따리가 풀려납니다.
근데 왜 이들에게 이렇게 축복 된 의외의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들에게는 뜻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뜻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보따리로 풀려 나올 때 그 사건이 의외의 사건이고 감격과 기쁨의 사건이 됐던 것이에요.
누가가 우리에게 얘기하는 게 뭡니까?
십자가에서 이 세상 삶에 대한 우리의 뜻을 죽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의 보따리가 풀려날 것이고, 내일이 주어지는 것도 의외의 일이 됩니다.
우리 뜻밖의 일이 될 것이에요, 왜?
내 뜻이 죽었으니까, 내일을 살겠다는 내 뜻이 죽었으니까, 내일이 내게 주어질 때 그 날이 얼~마나 의외의 날이요, 뜻밖의 날이요 얼마나 새롭겠습니까? 얼마나 새롭겠어요.
아~무런, 다른 사람들이 볼 때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날은 특별한 날입니다.
그날은 의외의 날이고 뜻밖의 날인 겁니다.
십자가에서 내 뜻을 죽이면, 하나님의 뜻의 보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풀려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가랴가 놀란 것처럼, 마리아가 놀란 것처럼 이 기쁨의 놀람 속에서 하루가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마음에 의외성이 언제나 유지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 뜻이 온~전히 내 삶에 대해서 죽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의 보따리가 풀릴 때마다 의외요 뜻밖이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은혜인 것을 우리가 깨달으며 그 감격과 그 새로움 속에 젖어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남편이 일이 없어 집에 있는 문제에 대해 '나는 죽었다, 죽은 사람이다'라고 계속 외치고 있으면서도 이런 저런 생각과 계획을 갖게 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밖에'에 대한 확신이 없었음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