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의 시 읽기.2
- 적송 숲에 누워 -
적송 숲에 누워
아름드리 적송 숲에 누웠다.
야간 산행 중에
솔가지 일렁거리는 사이로 산별들 많다.
그 건너가 무등등계인가
애총에서 나온 해골 같은 별이, 별 때문에
솔잎에 광채가 서려 있다.
수만 개의 은못 뭉치가
일시에 날아들어가 박힌 밤 하늘 천장
솔가지 사이 그 흔적,
간간히 딱, 하고
나무삭다리가 부러졌다.
(월간문학 2008년 12월호)
최명길 시인의 시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구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진실한 체험적인 시인이라는 이유와 시적 에스프리(시 정신의 자유스러움)가 있어서 공부에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고래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이 살다 갔고 또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옳은 글을 쓰지 못 한 채 이름 만을 남기려고 애쓰다 간 사람 들도 많이 있습니다. 시인은 이름을 남기게 되지만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상태인 것이지, 의도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름을 남기려고 일부러 꾸며 쓰는 시들이나 남의 것을 모방하여 내세우려고 하는 글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일수록 자신의 작품이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욕심이 강하다 못해 지나치기 때문에 강릉말로 나대는 것입니다. 문인은 글을 쓰기 이전에 문인다운 품격이 있어야겠지요. 일부러 말을 꾸며 예쁘게 쓰려거나 아니면, 말을 비비 꼬거나 틀면서 이상스러운 언어들을 덧붙여 남이 보기에 신기하게 여겨주기를 바라는 시인들, 특히 쓸데없는 언어의 무수한 반복법 등은 그 한 예가 될 수 있겠지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덩어리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뒷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들어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썪여도
끄덖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죽었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줄만
한밤중에 자다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로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위의 시는 시의 가운데에 일정한 변화가 없이 일관되게 반복법을 사용하여 다소 지루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반복은 시의 효과를 높이는 매우 적절한 방법이기는 해도 너무 남발되어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앞의 시, <적송 숲에 누워>는 시를 어떻게 써야 한다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는 설명이 아니라 전달해야 합니다.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형상화가 필요합니다. 언어의 형상화는 언어를 통해 그림을 감상하는 듯 선명하게 머릿속에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먼저 언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겠지요.
언어를 두 가지로 분류할 때에 감각어와 관념어 또는 구체어와 추상어로 나누게 됩니다. 감각어는 사물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언어들입니다. 예를 들면 책상이나 칼, 연필, 산 등은 우리들이 이 말을 들으면 금방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나 ‘괴로움’ 등은 우리들이 이해는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 말만으로는 구체적인 모습을 떠오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언어들은 추상어, 또는 관념어라 합니다. 시 속에 추상어나 관념어가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념어가 많이 들어가면 갈수록 시가 생경(生硬:‘억지로 만든 것 같은’, ‘딱딱하고 느낌이 없는’ 등의 듯으로 쓰임)해진다고 합니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시를 봅시다. 이 시의 첫 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름드리 적송 숲에 누웠다.
커다란 적송 숲에 누운 모습을 금방 떠올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각어로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다른 모든 시의 구절들이 이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감각어들을 함께 찾아볼까요?
(1)솔가지 일렁거리는 사이로 산별들 많다.
눈으로 본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이를 ‘시각적 이미지’라고 합니다.
(2)애총에서 나온 해골 같은 별이, 별 때문에
솔잎에 광채가 서려 있다.
이 부분도 본 일을 썼기 때문에 시각적 이미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좀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수사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수사법은 본래의 사물을 잘 드러내기 위해 그와 공통점이 있는 다른 사물을 끌어들여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수사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시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애총에서 나온 해골’에 비유하였습니다. 만약 별을 ‘아이의 눈빛과 같은 별’이라 했다면 크게 새로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별을 노래할 때 눈빛이란 말을 사용하여 진부하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할 때는 남들이 사용하지 않아야 하고 그 말이 적절해야 합니다. 적절하지 않는 말은, 나타내려던 말과의 사이에 공통점이 적기 때문에 전달력이 약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읽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또한 시를 읽어서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를 통해 인생을 살아가는 괴로움 하나를 더 얹게 하는 일입니다. 오염은 환경오염만 심한 것이 아닙니다. 언어의 공해도 지금,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애총의 해골에 비유한 것은 지금까지의 별에 대한 달콤한 인식을 바꾸어주며 신선한 자극을 주는 직유의 방법입니다.
(3)수만 개의 은못 뭉치가
일시에 날아들어가 박힌 밤 하늘 천장
이 작품의 수사적인 백미는 바로 이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별의 이미지는 애총에서 나온 해골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전환의 국면을 받고 있습니다. 별은 어떻게 변신을 하고 있는가요? 수만 개의 은못 뭉치로 변신했습니다. 수만 수억 개의 은으로 된 작은 못 뭉치들이 하늘 속으로 날아가 박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화려한 즐거움입니까? 은 못 뭉치가 날아가 박히는 그곳이야말로 무등등계이지요. 높고 낮음이 없는 세계, 질서가 없으면서도 눈부신 질서를 발견할 수 있는 곳, 그냥 즐거워지는 지극한 즐거움, 극락의 세계입니다.
이 시가 사람들에게 뜻 없는 즐거움을 주는 무명(無明)에서 벗겨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간간히 딱, 하고
나무삭다리가 부러졌다.
이 부분도 감각어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앞의 모습과는 좀 다릅니다. ‘딱’하는 소리를 나타냈고 나무삭다리가 부러지는 모습도 나타내었습니다. 소리, 즉 청각적 이미지도 있고 시각적 이미지도 있습니다. 이렇게 두 개 이상의 복합적인 이미지로 나타내었기에 더욱 좋은 글이 되었습니다. 두 개 이상의 복합적인 이미지로 나타낼 때에 이를 ‘공감각이미지’라고 합니다.
지금 까지는 시를 쓸 때에는 그림처럼 어떤 모습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형상화’에 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최명길 시인의 체험적인 삶과 시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가를 살펴 볼 차례입니다.
최명길 시인은 산을 좋아하고 시를 보면 거의 산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산은 예부터 구도자와 은자들의 삶의 거처이며 성스러운 신전이었습니다. 큰 성당을 짓지 않아도 산은 그 자체가 신전이기에 굳이 많은 돈을 들일 필요도 없고 돈이 필요 없으니 굳이 신도들을 모으기에 혈안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요즘 각종 종교 단체에서 산 속에다 기도하는 집을 지으며 오히려 환경오염만을 부추기고 있는 모습은 바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지요.
최명길 시인은 이미 오래 전에 밤이 늪처럼 쓸쓸한 환영을 지나오며 삶의 집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마저 찢어 없앤 자리에 청정한 마음의 집인 띠풀 집을 지었습니다. 어느 날은 그 뜰에서 풀을 뽑는 늙은이의 모습으로 있다가 물을 건너고 드디어 야간산행에 나섰습니다. 그는 나무삭다리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하늘 천장에 박힌 은못 뭉치 같은 별을 보는 사람입니다. 물이 내는 소리는 바위와의 섞임에서 흘러나오듯, 그렇게 바람과 나무와 별과 섞여 사는 아무 것도 아닌 그러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시인입니다. 돈으로 치면 가장 값없는 일을 하며 지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맑은 영혼의 숲에서 이야기 하고 말하며 세속의 어리석음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은못 뭉치 같은 별빛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최명길 약력
최명길 시인은 1940년 강릉에서 태어나 강릉사범학교와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5년 현대문학 7월호에 ‘해역에 서서’ ‘예감의 새’ 12월호에 ‘자연 서경’ ‘은유의 숲’ ‘음악’등으로 등단한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78년 첫 시집 [花蝶詞] 출간하였다. 1981년 이성선, 이상국, 고형렬 시인과 더불어 ‘물소리’ 시낭송회를 시작했다. 1984년 시집 [풀피리 하나 만으로]출간, 1987년 [바람 속의 작은 집]이란 명상 시집을 발간하였으며 1991년에는 시집 [반만 울리는 피리]를 출간하였다. 1995년엔 시집[隠者, 물을 건너다]를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