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지맥 南海枝脈
한강, 금강, 섬진강과 낙동강을 구분하며 지리산을 거쳐 옥산으로 내려온 백두대간은 낙남정맥을 내보내고 하동 금오산을 지나 남해안의 중앙인 하동노량 앞 바다로 내려서고, 바다위에 놓인 남해대교 건너편 남해노량에서 산줄기는 또다시 시작된다.
산경표나 신산경표가 바다에 의해서 맥이 끊겼다고 표에서 제외시켜버린 남해도의 북쪽 남해대교에서 남쪽 미조 빗바위에 이르는 48.7km의 산줄기를 섬의 명칭을 따라 남해지맥(南海枝脈)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망운산, 납산, 금산 등을 지나는 이 지맥은 지리산과 섬진강 하구, 그리고 여수, 고흥, 사천의 산들과 함께 남해바다를 가까이 바라보면서 가슴이 확 트이는 시원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산줄기다. (두발로 읽은 산경표 http://user.chollian.net/~park56eh / 박성태)
(구간거리)
남해대교~0.6~산성산~1.5~구두산~2.0~녹두산(-1.4)~1.4~금음산~0.5~약치곡산~1.0~대국산~2.5~19국도~2.7~삼봉산(-0.2)~2.2~증봉(-1.2)~0.9~망운산~1.4~관대봉~3.6~평현고개~3.1~괴음산~1.7~송등산~1.9~납산~4.1~앵강고개~3.8~ⅹ566(호곡산-2.1)~3.5~금산(-1.3)~3.4~가마봉~3.8~망운산~2.9~빗바위 ...48.5km
산성산158 구두산377 녹두산450.5 금음산480.9 약치곡산455 대국산371 삼봉산420 증봉543 망운산786
관대봉595 괴음산605 송등산617 납산622 호곡산328 금산705 망운산287
(1/25000 지형도 도엽)
남해지맥 1구간
2011.07.29.(금)
산길 : 노량~가청고개
거리 : 9.5km
사람 : 조은산
구간거리
남해대교~0.6~산성산~1.5~구두산~2.0~×422~1.4~금음산~0.5~약치곡산~1.0~대국산~2.5~가청고개
Cartographic Length = 12.0 km Total Time: 06:00
자청타청(自請他請)으로 평일 연가를 하루 냈고, 별시리 갈데가 있나. 미뤄놓은 남해 첫 구간 땜빵이나 하자 싶다. 남해 원주민 객꾸이, 정하와 함께 하느라, 손님 기분 맞춰 주느라, 첫 구간을 뒤로 돌리고 둘째, 셋째 구간을 먼저 했기 때문이다. 이 오뉴월 땡볕에 선수들이 지맥산행에 따라 나설리 만무한 일이라 소문없이 혼자 남해로 들어갔다.
남해 가는 첫차 시간을 알아보면서도 요즘같은 삼복 더위에 20km가 넘는 길을 종주 하겠다고라? 안봐도 비디오다. 도중에 접을 일이 생길게 뻔하다. 그렇다면 일찍 나설 일도 없어 평소와 같이 아침 먹고 출근시각에 배낭메고 집을 나섰다.
지도를 짚어 보면서 가청고개 넘고 삼봉산에서 우틀해서 백년골로 하산하면 알탕이나 될라나 하고 통빡을 굴렸디만 이 역시 삼봉산은 쳐다만 보고 가청고개에서 종을 쳤다. 시간상으로도 그랬지만, 설사 시간이 충분했더라도 더 이상은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남해대교에서 첫봉인 산성산 오르면서 이리저리 긁히고, 산성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없는건지 찾지를 못한건지 뱅뱅돌리며 짜증을 부채질 했다. 19번국도 노량공원에서의 구들뫼 오름길 역시 제대로 된 길은 없다. 그 비탈 또한 얼마나 빡쎄던지 구두산만 넘고 산행 접을 생각까지 들었다.
구두산에서부터 널찍하게 확보된 길을 만나고 맨정신이 돌아오니 그런대로 잔행 할만 해 가청고개까지는 갔는데 무더운 날씨에 구두산과 금음산 오르내림의 만만찮은 고도차에 거의 녹다운 지경이다.
11:30 남해대교 출발
11:57 산성산
12:12 19번국도 노량공원
13:14 구들뫼
13:21 구두산
14:01 용강고개
14:44 ×422
15:28 금음산
15:53 약치곡산
16:21 대국산성
17:02 1024번 도로
17:30 가청고개
09:10 사상터미널
사상터미널 매표소 들어가니 08:30이다. 10분만 빨리 왔더라면 08:20 차를 탈 수 있었는데 10분 늦는 바람에 40분을 더 기다린다. 진교IC까지는 고속도로이고, 진교터미널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는 내릴사람 있으면 세워주고 탈 사람도 아무데서나 손만 들면 태워준다. 남해대교 건너기 전에 서는지 지나서 서는지를 물었더니, 역시나 원하는대로 세워준단다. (대교까지 9,600원)
남해대교 출발
사상 출발하고 두 시간이 더 걸려, 남해대교 건너 검문소 앞에서 내렸다. 하동 노량과 남해 노량, 대교를 걸친 양쪽 마을 다 노량이다. 경찰 검문소에는 내다보는 사람도 없고 건너편에 식당이 눈에 띄나 냉면이나 칼국수 같은 간단한 식사가 있으면 한 그릇 말아 넣고 올라가겠다만 메뉴를 보니 무겁기만 하고 식욕도 없어 가게에서 빵 한봉다리 사 넣고 출발한다. 검문소 뒤편 콘크리트 방벽 옆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잡풀이 뒤덮어 길이 잘 안보인다.
수풀을 헤쳐보면 나무계단길이 보인다. 무방비로 올라가다 거미줄을 홈빡 뒤집어쓰고 초장부터 욕질을 해댄다. 우거진 풀숲 바닥이 딱딱해 헤쳐보니 봉분없는 평장 묘다. 김해김공이신데 비문에 새겨진 날짜가 이상하다.
우측으로 돌아 올라가니 블록 참호가 있고 위쪽에는 돌무더기가 산성산임을 알리기라도 하는듯하나 더 이상의 산성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정상부는 아직 멀었는데 왼쪽으로 여럿 걸린 리본들은 노량공원으로 내려가는 길이라는 귀띔을 해주고, 정점이나 찍고자 더 올라가면 역시 잡풀에 덮힌 묘터인데 관을 쓴 묘비는 증숭정대부(贈崇政大夫) 남원양공이다.
추증(追贈)이란 관료의 사후에 직급을 높이는 일, 또는 관직 없이 죽은 사람에게 사후 관직을 내리는 일을 말하는데. 숭정대부는 종1품의 높으신 분으로 산줄기 타면서 흔치않게 만난 가선대부나 통정대부보다 위에 계신 분이다.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 보국숭록대부
종1품 숭록대부 - 숭정대부
정2품 정헌대부 - 자헌대부
종2품 가정대부 - 가선대부
정3품 통정대부 - 통훈대부
산성산 (山城山 ×158)
숭정대부 뒤쪽 바위에 올라서면 노량공원쪽이 빼꼼히 내려다보인다. 여기가 산성산 정점인가하고 내려가려다가 위쪽을 쳐다보니 언뜻 높이 걸린 리본 하나 보인다. 풀을 헤치며 올라가보니 산성산 팻말이 걸린 정상이다. 현재의 모습에서는 도무지 산성을 찾을 수 없고 그 이름에서나마 또는 지형적인 위치를 보건데 충분히 산성이 자리할만함을 짐작하겠다.
아까 봐뒀던 리본 걸린데로 돌아 내려오고, 노량공원으로 내려가는데 길 같은 길이 없다. 정점에서 왼쪽으로 치우쳤으므로 가능한 우측으로 붙어보니 산성산 뒤쪽에서 내려온 듯한 그런대로 흔적이 있는 길이 있다.
19번국도 노량공원
한 구간 다 한다는 계산에서는 거리도 있고 해서 빼먹을까 싶었던 산성산인데 역시나 별무소득이다. 이런줄 알았더라면 건너뛰고 노량공원에서 시작 하는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다.
도로를 건너면 노량공원인데 꾸미기는 해놨지만 일부러 찾아볼 만한 공원은 아니다. 남해관광안내도, 바다선녀상과 풀밭에 나무 몇그루 심어놓은게 다 형식적으로 보인다. 공원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면 남쪽은 덕신마을이고 왼쪽으로 가는 아스팔트 도로는 노량마을, 충열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노량, 충열사 하면 이순신이다.
불멸의 영웅 이순신장군께서 나라를 구하고 장렬히 순국하신 그 현장이다. 아마도 장군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진작에 일본의 밥이 되었을테니, 장군의 고귀한 희생을, 적어도 노량에 와서는 가슴 깊이 새기고 또 다져야 할 일이다.
1598.11.19 전쟁에 패하고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을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혼전 중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신 장군.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7년 끌던 전쟁을 끝냈건만 장군께서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지도 못한 채 세상을 뜨셨다. (노량해전)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싸움이 몹시 급박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일제가 만든 조선지형도(대정6년=1917)를 보면 노량마을 현 충열사와 관음포 이락사 위치에 ‘李舜臣碑’ 표기가 있다.
일본놈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자.
조선정벌을 위한 7년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그 막을 내린 곳이 이곳 노량해전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卒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꽁무니를 감추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내뺀데가 바로 이곳 노량이다. 누구 때문인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조선장수 이순신이다. 일본놈들에게 있어서 ‘이순신’은 이름 석자만 들어도 요즘말로 이가 갈리고 뚜껑이 열릴 지경 아닌가.
저네들에게는 그러한 이순신 장군의 비가 있는 지점을, 저들의 지도에 있는 그대로 정확히 표기를 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천황봉은 일본천황’론자들의 시각으로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하나.
그들의 주장에 맞춰 얘기를 해보자.
(지도에) 天王을 天皇으로, 임금왕(王)을 일왕(旺)으로 바꾸어 적는 판에 무슨 가당찮은 이순신이냐...
그 표기를 없애든지, 또는 ‘고니시유키나가 전승비’ 쯤으로 고쳐 적어야 되는거 아닌가...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순신은 고니시 군대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고 고니시는 살았으니, 멀쩡한 독도가 저그 땅이라 떠드는 넘들의 잣대로는 ‘고니시 전승비’가 이상할 이유가 없다.
지도제작 시점에서 생각을 해보자. 1917년이면 조선을 완전히 먹은 (저그생각) 상태이다. 다시 이 땅을 조선사람들에게 되돌려줄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완전히 일본땅이 된 마당에 무슨 ‘이순신’을 남겨놓을 필요가 있을까.
누차 얘기하지만, 지도는 지도일 뿐이다. 지도는 땅의 생김새와 그 곳의 명칭을 글자로 표기한 문서일 뿐이다. 최대한 사실과 근접해야만 어떤 일이든 할 수가 있다.
또한 덧붙여, 맥을 자르고 혈을 끊기 위해 “산줄기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도 솔직히 동의를 못한다. 그들의 철천지 원수인 이순신장군의 생가터나 사당 또는 무덤을 일제가 어떻게 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다. 이제 맹목적인 반일(反日) 보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극일(克日)을 해야하지 않겠나.
정면에 국립공원 간판이 있는 시멘트길로 올라간다. 망할 넘의 국립공원 간판에는 항시 출입금지, 통제, 과태료 등등이 따라 다니는데 이 백주대로에 [출입금지]라니, 차라리 공단이름을 출입금지관리공단으로 개명을 해라.
마루금은 우측 능선이나 들어 갈만한 구멍도 보이지 않고 나란히 가는 조은길을 외면할 이유가 없다. 오르면서 뒤돌아보면 남해대교와 연대봉이 보이고 금오산은 구름속이다. 시멘트길 따라 15분 올라가면 좌우로 갈라진다. 정면(우)은 구두산 허리를 도는 임도라 이 길로 가면 점잖게 구두산 빼먹고 용강마을로 바로 가겠다. 왼쪽 비탈로 올라간다.
감나무밭에서 시멘트길은 끝나 한참 앉았다가 올라간다. 숲으로 들어가면 길은 있는지 마는지, 짙은 넝쿨류 이파리가 뒤덮혀 있는데 부산일보 리본이 이리저리 안내를 한다. 급한 한피치 올라가면 묵은 임도에 올라서고 임도 건너 비탈은 더 경사지다. 땀이 줄줄 새고 숨은 터질 듯 차올라 몇 번을 쉬었는지 모르겠다. 용강마을에 떨어지면 끝을 낼까싶다.
가만히 앉았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판에, 뭐 묵고 살일 있다고 길도 없는 까꼬막을 벌벌 거리며 기어 오르는 인생이 참으로 딱하다. 왼쪽으로 올라가니 뚜렷한 능선길이 나온다. 왼쪽 아래에서 어디서 올라 온 길인지, 이런 길을 놔두고 고생만 직싸게 했다. 중간에 묵은 임도 만났을 때, 왼쪽으로 올라갔더라면 이 길을 만나지 않았을까.
구들뫼 (×377)
길을 만나니 반갑다. 비스듬히 올라가는 길을 따르면 별시리 봉우리도 아닌 그대로 이어지는 편백나무 숲길 정점이 지도상 구들뫼인데 표지판이나 어떤 표식도 없다. 아래 덕신리에 구들뫼 마을표기가 있는데 산이름까지 구들뫼라 했나. 널찍한 길로 제대로 된 사람 모습으로 걸어간다. 살짝 내렸다가 올라서면 구두산이다.
위 지도를 보면 구들뫼 위치에 枉池山(왕지산)이고 구두산은 없다. 산의 동쪽 문의리에 왕지(枉池)마을이 있는데 마을소개 글을 보면 태조 이성계와 연관된 枉자다.
(왕지마을) 금산의 정기를 마시며 기도를 마친 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풍광이 빼어난 설천면 왕지마을의 정취에 취해 잠시 다리품을 풀었다. 주민들은 이성계가 이 곳 굽은 고개를 넘어가 임금이 되었다 하여 '굽을 왕, 땅지'를 써서 '왕지'라 하였다.
(구두산)
구두산 (龜頭山 371m △남해411)
숲이 둘러싸 조망 없는 봉우리. 삼각점과 대구 김문암씨의 나무팻말이 걸려있다. 남해섬 전체를 거북으로 보면 거북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구두산이 되었나. 龜는 ‘귀’로 읽을 수도 있는데, 지리원 고시지명도 '구두산'이고 주변 이정표 표기 모두 ‘구두산’이다.
구두산을 지나고는 우측으로 꺾임을 유의하면서 계속 넓은 길 따라 내려가니 송전철탑이 나오고 그 앞에 우측으로 갈림길이 있다. [↑문의마을2.7km →용강마을1.2km] 이정표 앞에 배낭 내리고 또 쉰다.
남으로 향하는 송전선 위로 멀리 남해 최고봉 망운산이 보인다. 꼭대기에 구름이 걸렸고 앞 능선은 용강마을로 내렸다가 다시 오를 금음산 능선이다. 벌목을 했던 자리인지 뙤약볕이 뜨겁다. 구들뫼 오르기 전의 임도가 여기로 돌아왔다. [구두산0.2, 용강마을1km] 이정표가 있고, 임도를 가로질러 약간 우측에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잠깐 내려가면 시멘트길을 만나고, 멀리 바다 건너 광양제철 공장이 보인다. 창고 한동과 소나무 몇그루 있는 시멘트길 사거리 안부를 지나 둔덕을 넘으면 용강고개다.
용강고개
용강고개 (210m)
2차선 아스팔트 도로. 정면 반사경 뒤로 올라가면 밭인데 사료용 수수(?)가 내 키 높이로 빽빽히 들어차 있다. 뚫고 지나갈 엄두가 안나 도로로 후퇴하고, 우측 덕신리쪽으로 내려가면 [금음산3.0km]이정표와 시멘트길이 갈라진다. 10여m 되는 밭을 가로지르지 못해 우측으로 휘돌아 올랐다.
올라가는 시멘트길은 임도를 만난다. 이 임도는 금음산 북쪽 허리를 돌아 대국산성꺼지 이어진다. 건너편에 등산안내도와 이정표가 보이고 그 옆 도랑에 많지는 않지만 물이 보여 내려가 세수를 했다.
등로가 활짝 열린 편백나무 숲길로 20분 올라가면 둥근 밥상같은 바위가 하나있고 북으로 조망이 훤하다. 남해대교와 연대봉 금오산, 동쪽 바다건너 삼천포 와룡산까지 조망이 좋다.
남해대교 건너 연대봉, 금오산까지
동쪽으로 창선도와 사천
×422
갈대 무성한 능선에 올라서면 길은 자연스레 왼쪽으로 꺾어간다. 여기서 우측으로 분기하는 능선은 대동여지도에도 이름이 표기된 녹두산(鹿頭山 △450.5)으로 가는, 설천면과 고현면의 면계능선인데 길은 보이지 않는다.
널찍하게 다듬어 놓은 길을 따르니 흥이 난다. 스마트폰에 음악을 틀어놓고 딸랑 한 그루 나무가 만들어 주는 한줌만한 그늘에 짐을 내려놓고 웃옷을 벗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은 축축한 겨드랑이를 금새 말려준다.
금음산, 약치곡산 대국산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 줄로 나타나고 바로 아래 남치리 남치저수지와 멀리 망운산까지 하늘이 열린다. 벗었던 윗도리 도로 입으려다가, 티샤쓰는 배낭에 담고 맨몸에 망사조끼만 걸쳤다. 사람 하나 만날 일 없는 산만디에 체면도 걱정도 없다.
대국산성
남치저수지와 망운산
조은 패션
금음산 (金音山 480.9m △남해24)
2등삼각점과 정상팻말. 설천면 금음리에 금음산이다. 언제 쇠소리가 났는지 모를 일이고 조망도 없다. 나무에 걸린 ‘갈대’리본을 폰으로 찍어 갈대한테 전송했다.
(금음마을) 뒷산에 금을 캐는 곳이 있다 해서 '쇠소리'가 난다고 '쇠음산(金音山)' 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따온 마을이름이 금음(金音)이다.
[ ↑문항마을1.6 →대국산성1.5km] 이정표에는 ‘전망대200m’ 표시도 있다만 전망은 생략하고 우틀이다. ×460봉을 지난 안부에서 약간의 오름이 다리씸을 쓰게한다.
금음산
약치곡산 (藥治谷山 ×455)
리본 몇 개 걸려 있을 뿐 뚜렷하게 나타나는 봉우리도 아니다. 지형도에 藥治谷山(약치곡산)이 표기되어 있는데, 국토지리원에는 약이 아닌 ‘악치곡산’으로 검색이 된다. 풀초(艹)가 떨어져야 악자가 된다만 어느나라 말인지 이해가 안되고 유래도 못찾겠다. 인터넷 싸이트마다 약치곡, 악치곡, 낙치곡... 중구난방이다.
옛지도(1917년)를 보면 금음산과 약치곡산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있다.
현재의 금음산이 ‘藥芝谷山(약지곡산)’ 이고, 현재의 약치곡산이 ‘金音山’이다.
약인지 악인지, 봉우리는 볼품도 없고 내려서면 왼쪽으로 망부석 같은 바위가 있고, 길에서 몇발짝 벗어나 보면 호수같은 바다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남해읍이고 바다 건너는 창선이다.
알미늄 기둥을 박고 로프가 걸린 난간이 여럿 설치된 계단길이다. 2, 3구간에서 봤듯이 군에서 개설한 남해지맥 등산로인데 많이들 다니지 않는지 계단길 바닥은 잡초가 원래 제자리를 찾듯이 슬금슬금 덮고 있다.
강진만. 우측으로 남해읍이 보인다
대국산성
시멘트길 임도 (약치현 290m)
금음산에서 거의 200을 내려왔다. 어떤 지도에 약치현이란 표기가 있다만 좌우 어딜봐도 약치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깨끗한 시멘트길에 등산안내도와 우측은 남치마을 왼쪽은 진목마을 표지판이 있다. 정면으로 올라가는 넓은 길이 대국산성 가는 길이다. [대국산성0.4km]
시멘트길따라 올라가면 주차장 같은 공터가 있고 포장은 끝난다. 넓은 길은 계속 있지만 차는 더 이상 못 오를거 같다. 작은 트럭 한 대 주차되어 있는데 작업인부들이 타고 온 차다.
약치현 (약치곡산)
대국산성
대국산성 (大局山城)
산성 울타리 위로 올라가면 유래가 적힌 안내문과 좌우로 둥글게 이어진 돌담이 있는데, (이때만 해도 다시 돌아나올 생각은 없었다) 산성 한가운데 길로 올라가니 연지(연못)와 건물지가 있고, 남해읍을 보고있는 산불초소를 지나 올라가면 산성의 정상부다. 준희님 팻말이 나무에 걸려있다. [대국산 371m]
쪽빛 남해바다와 남해읍의 아파트들과 건너편 창선의 대방산 줄기가 바다를 감싸고 있는 듯하다. 망운산은 한층 가까워졌으나 정상부를 덮고 있는 구름은 그대로다. 천천히 여유롭게 보이는 곳 다 둘러보고, 내려가는 길이 어디있노...
그런데, 산성울타리 끝까지 올라왔는데, 정면으로 내려갈 수가 없다. 산성 담의 높이가 5m는 더 되겠다. 뛰어 내릴 수도 없고 수직담이라 내려다보기도 겁난다. 별수 없이 들어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제초제를 치고있는 아저씨한테 물어봐도 내려가는 길은 없단다.
대국산성은 올라가면 다시 올라선 자리로 되돌아 와야 된다. 들어가고 나가는 데가 한군데라는 말씀이다. [가청고개 1.83km] 이정표가 있는 산성 입구까지 되돌아나와 산성 울타리 아랫길로 간다. 작업인부 둘이서 산성 둘레에 제초제를 뿌리고 있다. 인사를 해도 들은척 만척이라 인사한 내가 뻘쭘하다.
산성 끝부분까지 와서 숲길로 들어간다. 길은 여전히 널찍하게 열려있다. [가청고개 1.42km] 이정표가 있고 넓은 길은 왼쪽으로 내려간다. 능선은 계속 이어지는데 마루금을 의심하며 정면 능선을 계속 타게되면 관당마을로 떨어지므로 이정표가 가리키는대로 내려가면 될 일이다.
10여분 내려가 왼쪽으로 보이는 시멘트길로 간다. 깨끗한걸 보니 시멘트를 깐지 얼마 안되는 같다. 시멘트길은 왼쪽으로 내려가고 정면에 원형 콘크리트 수조가 있는 비포장 수렛길로 들어간다.
마을길을 따라 내려가면 우측 멀리로 아스팔트 도로가 보인다만 아직 가청고개는 앞에 보이는 봉우리 하나 더 넘어야 된다. 지도에 표기된 1024번 도로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양쪽 논 사이로 난 농로길을 따라 건너편 비탈로 붙고 올라가면 대나무 숲이다. 밭을 지나 우측 산길로 올라가보나 너무 빽빽하다. 되돌아나와 왼쪽 시멘트길을 따라 간다. [가청고개 0.72] 이정표가 가리키는 산길로도 올라설 엄두가 나지않아 왼쪽으로 더 휘돌아 올라간다.
능선에 올라서니 가청고개가 내려다보인다. 길 따라 우측으로 꺾고 ×79봉을 지나온 마루금을 만나면 석축을 쌓은 울타리 안쪽에는 벌통이 많다. 10시방향 멀리 납산이 보인다. 시멘트길은 밭에서 끝나고 잠깐 덤불 사이를 빠져나가면 19번 국도다.
정태마을
납산(호구산)이 보인다
가청고개
가청고개 (42m)
19번국도 식당 유정가든이 있고, 옆 부동산 사무실에 사람들이 내다본다. 버스정류장을 물으니, 고 앞에 서 있으면 된다네. 버스정류장은 도마리로 더 내려가야 있지만 손을 들면 세워준단다.
관음포의 가청고개는 노량해전과 관련된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어느날 류성룡의 형 류운룡이 점을 쳐보니 3일 후에 일본 밀정이 중으로 가장하여 자기집에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후 3일만에 과연 중으로 가장한 밀정 두 사람이 자기 집으로 찾아왔다. 류운룡은 모르는 척하고 두 명의 중을 극진히 대접하고 술을 많이 먹여 취하게 하였다. 중들이 잠든 사이 류운룡이 중들의 행랑을 뒤져보니 자세하게 그려진 조선지도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몰래 꺼내어 관음포에서 강진만을 사이에 둔 좁은 육지 즉 가청고개를 푸른 물감으로 칠하여 바다와 같이 그려 넣고 다시 행랑 속에 넣어두었다. 그 후 노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조명연합군에 대패하고 패전한 잔여병이 관음포구로 들어와서 지도를 펴보니 강진만으로 해로가 있는 것을 보고 도망하였으나 가청고개가 가로막혀 지도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갇혔다고 하여 갇힌고개라고도 하고 지도에 푸르게 칠을 하였다고 하여 가청(加靑)고개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성의 당항포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있는데, ‘월이’라는 기생이 일본 밀정에게 술을 먹이고 밀정이 지니고 있던 지도에 당항포에서 서쪽으로 물길을 표시했단다. 후에 일본 해군이 이 지도대로 서쪽으로 나가다가 꼼짝없이 갇혀서 우리 수군에 전멸 당했다는 얘기다.
행장을 수습하고 있노라니 버스가 온다. 손을 흔드니 세워준다. 남해터미널까지 1300원이다 (6km)
터미널 건물 4층에 있는 사우나로 올라가니 ‘내부수리중’이 붙어있다. 아래층에는 ‘영업중’이라 해놓고 피곤한 사람 헛걸음 하게 만든다. 고약한 냄새 폴폴 풍기지만 별 수 있나.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그대로 올라탔다. 남해에서 부산은 11,600원(우등버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