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다MASADA(히브리어 מצדה,바위성채)
예루살렘 남동쪽 사해인근 유대 사막지대위에 세워진 마사다는 로마제국 헤롯왕이 BC.37~31년에 건설한 전략적 요새인 동시에 제2궁전이었다 수천명의 장정이 수년간 자급자족이 가능한 천혜의 메사(Mesa,정상은 7만㎡에 달하는 평면이고 주위는 벼랑인 지형)지형으로 해발434m에 위치한 첨단 도시였다 이곳에 처음으로 요새를 건설한 사람은 하스모나왕조 알렉산더 안나이우스(BC.103~76)황제 이지만 체류형 규모를 갖춘 시설은 헤롯이 유일하다 마사다는 3층규모의 제1궁전과 단층형의 제2궁전, 그리고 75만리터 저장규모의 물탱크와 연결수로가 있어서, 당시 건축기술의 탁월함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AD. 66년, 로마제국의 유대반란에 반기를 든 967명의 유대교 분파 “열심당”원들이(셀롯당,Zealots) 마사다 로마수비대를 기습공격 제압하고 “에리아자르 벤야이르”(Eliezer ben Yair)의 영도아래 2년간 투쟁하며 저항한 것이다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함락당하고 성전마져 파괴되었다는 소식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좌절감에 빠뜨렸다
AD. 72년, “플라비우스 실바”장군의 지휘아래 로마제국 10군단(Fretensis)은 마사다로 진격했다 무게 20KG의 돌무더기의 공성전에도 불구하고 천혜의 요새 마사다는 전혀 요동하지 않았다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천 명도 되지않는 유대인 수비대는 1만5천명에 달하는 로마제국 정예군인과 맞서서 2년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
기병전에 강한 로마제국 군인들은 점점 지쳐가고, 그들이 가져온 식량도 바닥이 나고 있었다 이때 로마군대는 마사다 서편방향에 고원과 같은 높이의 성채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동원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유대인 노예들이었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민족을 향하여 죽고 죽이는 피를 볼수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성채는 착공 6개월만에 완성되기에 이르고 AD. 73년 4월15일, 로마제국 군대는 마사다를 총공격해 들어갔다
요새가 완성되어 갈 무렵, 마사다 광장의 회당에는 유대인들이 다함께 모여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마사다 함락 하루전날 밤, 유대 지도자 벤야이르는 유대인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우리는 로마를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참되시고 의로우신 만인의 주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우리의 부녀자들은 치욕을 당하며 우리의 자녀들은 노에로 팔려 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자유가 있을 때 우리 스스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합시다 로마군인들이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의 죽음을 보고 비탄에 빠지게 합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로마제국의 노예가 될수는 없다는 신념아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유대인 율법은 자살을 엄격하게 금하였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 서로를 죽여갔으며, 최후 2인가운데 한사람이 나머지 한사람을 죽이고 마지막 한사람은 자살을 하는 방식으로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남자들은 먼저 자신의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 남자들은 제비를 뽑아 10명을 뽑고 이 사람들이 나머지 모든 남자들을 죽였다 그리고 살아남은 10명가운데 다시 1명을 뽑아 9명을 죽이고 최후의 남은 한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967명 가운데 960명이 이러한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마사다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연로한 여자 한사람과 엘리에셀의 친척 여자와 어린아이 5명에 불과하였다
마사다는 모두 화염에 휩싸였지만 다행히 식량창고만은 안전하게 보관되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식량이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신념을 보여주기 위한 신앙적 결단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로마제국이 공성을 활용해 마사다를 진격해 들어갔을 때 그들은 단 한명의 유대인들도 죽이지 못했다
1만5천명의 로마제국과 967명 마사다 유대인들의 전쟁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누구일까?마사다에는 여자 두명과 다섯명의 아이들이 마지막 생존자로 남아 있었지만 공포에 가까운 자살광경에 기겁을 한 로마군인들이 이들을 죽일수 없었다고 전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 되었으며 역사속에서 신앙적 신념을 지켜간 사람들에 대한 복음이 되었다
마사다가 함락된 후 AD. 135년, “하드리아누스” 로마황제는 유대인들을 강제로 해산시켜 세계각지에 흩어 놓았으며, 1945년 5월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는 그날까지 “디아스포라”의 나그네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의 버려짐과 흩어짐속에서도 그들이 지켜가야 할 신앙적 신념은 그 어느곳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갑바도기야 300년의 지하생활속에서도 차라리 미칠지언정 신앙적 신념은 결국 살아남았듯이, 마사다의 신앙적 신념은 전 세계 낯선 땅, 그 어느곳, 어느 환경에서도 변질되지 않았다
그 후, 마사다는 “앗사바”, 즉 “저주받은 땅”이란 이름으로 불리워 지며 2,000년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곳이 되었다 그러나 1955년, “이가엘 야딘”(Yigael Yadin) 등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 마사다는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였고 역사속에서 잊혀졌던 도시, 마사다는 신앙의 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마사다는 유대민족의 용기와 신념의 상징으로서 이스라엘 청년들은 해마다 마사다를 행진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Never Again!)는 구호는 이스라엘 국방부가 신병훈련소 훈련기간중 마사다행진에 참가하는 군인들이 마지막으로 외치는 용기의 상징이 되었다
길이 620m, 폭 120m, 둘레 1,300m에 달하는 마름모형의 마사다 서편과 북편에는 헤롯궁전이 있다 북편 궁전은 벼랑 끝에 세운 3단테라스형 현애궁전으로 1천명의 장정들이 사용가능한 4,000㎥의 물탱크와 엄청난 규모의 곡물창고, 그리고 로마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초대형 목욕탕이 있다 헤롯은 맛사다 외벽에 성벽을 쌓고 38개의 탑을 세웠으며 각각 110개의 방과 대중소 등 각각의 목욕탕을 건축하였는데 이것은 유대율법에 의한 “마크베”(정결탕)로 추정되는 것이었다 마크베는 스룹바벨이 예루살렘성전을 재건축한 제2성전시대(BC. 520~516년) 이후 발견된 적이 없는 것으로 그 물은 하늘에서 떨어진 순수한 빗물로만 채워야 하기 때문에 마사다의 목욕탕 구조와 일치점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화려한 요새궁전으로 지었지만 정작 이것을 건축한 헤롯은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마사다에는 양피지에 기록된 시편81~84편과 레위기, 에스겔, 신명기, 유대민족의 해방된 기쁨을 묘사한 희년서, 외경 “벤시라”의 지혜서 등 14개 파피루스 문서가 발견되었다 마사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요새는 하나님이었다(시편18:2) 그들은 1만5천명 로마정예군인과 맞서 결코 패배하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은 오늘의 이스라엘 청년의 가슴에 남아 여전히 심장을 두드리고 있다 신앙의 신념은 이런 것이다 그 어떤 상황과 환경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신념인 것이다 로마제국과 타협하며 생명을 구하였다면 그들은 잠시나마 안위를 취하며 생명을 연장하였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이름은 치욕적인 역사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치욕적인 삶보다 승리의 죽음을 선택하였다 마사다는 이제 전설로 남아 우리의 신앙을 조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