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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파:대영-득분-문경-송현-천-선-백(7세)
영양군 7세 諱伯을 파조로 모신다. 伯은 고려말 예문관 제학을 지냈으며 태조의 원종공신으로 공조판서에 올랐다. 태종초 함흥차사로 파견되고 그 후 이 일로 영흥에 유배되어 영흥본궁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 때 영덕의 본가를 영흥으로 옮겼는 바 이로 인해 종중에서는 관북파라 불렀다. 이 파는 한 동안 관향을 영덕이씨로 하였으나 1766년 예조정랑 諱창례(판서공12세)가 영천이씨로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손들은 함남신흥군 ,강원도 통천 ,인제,평창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1765년 영천이씨 최초의 족보라고 할 수 있는 관북가승보(1539년.판서공파)를 예조정랑 諱창례가 영천을 방문할 때 휴대한 이 후 영천이씨 선세계보와 각파의 계보가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덕분에 1741년 발행된 최초의 대동보인 (영천이씨성보=영천이씨 전체계파가 참여)가 발행될 수 있었다. 관북보의 선세계보는 그 후 시조공의 장파문중인 서승공파보에 의해 정확함이 확인 되었다.
또 영양군의 묘소는 충장공사화(1457년)이 후 근 300년간 남의 소유로 되어 있었는데 다행히 1765년에 전해진 관북보에는 영양군의 묘지문과 묘도가 있었는 바 후손들은 이 때부터 군과 감영에 진정을 하였다.역시 영천이씨 전체 계파가 참여하였다. 47년간(1765~1812 심묘송사) 끈질긴 송사 끝에 묘 속에서 나온 誌石등이 근거가 되어 되찾게 되었다. 1997년 후손들은 송사기간에 올린 진정서,관의 회신등을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영양군 심묘록이라 이름하였다.
이 때 묘지를 되찾은 열심은 영동정파 선조들이 단연 최고다수,최고열심 였었다. 또 관북보에 수록된 소위 영양군묘지문(익제 이제현 찬)에는 (諱박은 영양군의 2번째 子 諱유분의 初諱)라는 기록이 있었는데 이 묘지문은 여러가지 이유로 당시 영양군파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는데 일부 호사가들이 많이 회자한 듯 하다.
그래서 자료가 더 나올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지혜라고 할 것이다. 함부로 결정할 수 없으므로 기다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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