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두리강습소의 설립과 운영
박영규(남, 1931년생), 송서환(남, 1929년생)
* 팽성읍 도두1리 거주 / 2009년 2월 3일 도두1리 노인정
도두1리는 도두리벌, 황새울벌을 간척하며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의 역사는 150년 내외로 추정된다. 박영규, 송서환씨는 도두1리에서 100년 이상을 거주한 토박이로 이장, 새마을지도자로 오랫동안 봉사하였으며, 2009년 현재 박영규씨가 노인회장이다.
필자)도두리 강습소의 설립과 운영에 대하여 알고 싶어 찾아뵈었습니다.
박)도두리 강습소는 우리마을 지주였던 정운봉씨가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박양훈, 박승훈씨가 노력해서 만든 학교입니다. 마을에서는 정씨와 박씨가 부자였는데 마을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지요.(박영규씨는 꼬박꼬박 표준말, 존대말을 쓰려고 노력함)
필자) 박양훈, 박승훈씨는 형제인가요?
박, 송)사촌 간이었죠. 박양훈씨는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이 잘 안 되고 있던 중에 강습소를 운영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대한청년단도 했지요.
필자)학교현황 좀 말씀해주세요.
박)강습소는 4년제였습니다. 박양훈, 박승훈 선생님이 가르쳤구요. 저기 말랭이(신대4리) 교회 아래에 밭이 있죠? 거기에 학교가 있었어요. 건물 1동인데 교실 2칸하고 교무실이 한 칸 있었어요. 선생님이 두 명이다보니까 교실 한 칸에 두 개 학년씩 가르쳤습니다.
필자)학생 수와 학비는 어떠했나요?
박)학생 수는 그 때마다 달랐어요. 한 40, 50명, 또는 70, 80명 그랬지요. 강습소다보니까 학생들 나이는 들쭉날쭉이었구요. 30살짜리도 있고, 8, 9살짜리도 있었고. 학비는 월사금이 있었어요. 육성회장이었던 정운봉씨가 내놓은 땅에서 나오는 것도 있어서 어렵지는 않았어요. 논 1천 평인가 내놓았어요. 농사지어서 학교 운영비로 쓰라고. 학생들이 학교공부하면서 농사짓고 그랬지요.(논1천 평은 희사한 것이 아니라 소유권은 정운봉씨가 갖고 소출만 학교에서 쓰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땅은 학교가 본정2리로 옮겨가면서 정운봉씨가 회수하였다)
필자)해방 후 학교가 옮겨갔다는 말이 있던데요?
박)해방되고 본정리 아리랑고개에 있는 미군부대 후문(CPX라고 함) 안쪽으로 옮겼어요. 그 때 팽성학교(초등학교) 분교가 되었는데, 6.25 때 폭격을 받아서 학교건물이 파괴되었어요. 그래서 본정리 꽃산으로 옮겨갔지요.
필자)학교가 옮겨갈 때 주민들이 반대했을 텐데요?
박, 송)반대 많이 했지요. 정운봉씨에게 학교 대지를 구입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거절했어요. 동네사람들 원망이 많았지요.(이 문제는 박씨와 송씨의 의견이 달랐다) 유지급들과 교사들이 합심해서 부지를 마련하려고 노력했는데 그것도 잘 안 되었어요. 그러던 중에 노산 사는 유지(有志)가 대지를 줄테니 오라고 해서 꽃산으로 가게 된 거예요.
필자)어른신들은 도두리 강습소에 언제, 얼마나 다니셨나요?
송)나는 17일 다녔어.(송서환씨는 반말로 이야기함) 12살 때. 내가 둘째라 아버지가 형님을 먼저 보내놓고 내가 입학하자 일할사람 없다고 선생님께 내보내달라고 사정사정해서 퇴학받았지. 그 때부터 집에서 새끼꼬고, 가마니치고 먹고 살았는디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으니께 스스로도 포기되더라고.(박영규씨가 반말로 이야기한다고 지적하면서 한동안 말씨름을 함)
필자)그러면 학교 공부는 17일 만으로 끝났나요?
송)그럼, 그것이 끝이지. 한글은 형님이 공부할 때 어깨너머로 배웠고.
필자)박영규 어르신은 어떠했어요?
박)나는 소화 14년(1939) 가뭄 때가 8살이었는데 그 때 입학했어요. 박승훈, 박양훈 선생님께 4년을 배우고 졸업했지요.
필자)졸업한 학생들의 진로는 어떠했나요?
박)저는 졸업하고 그만두었지만 보통 부용초등학교(초등학교) 5학년으로 편입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필자) 일제 말에 학교에 다녔는데 교과목은 무엇이었나요?
박)한글은 안 가르쳤고, 일본말만 가르쳤어요. 산수도 가르치고. 박양훈 선생님도 조선어로 말하면 혼내주고 그랬거든요. 그 때는 학생들에게 종이쪽지 7장씩 주고 조선말 하면 서로 한 장씩 뺏었는데 많이 빼앗은 애들은 상 받고 빼앗기면 벌로 산에 가서 솔방울 주워오고 그랬어요.
필자)어르신이 배울 때는 선생님이 몇 분이었어요?
박)4명이었어요. 박양훈, 박승훈선생님 포함해서.
필자)꽃산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어떻게 되었나요?
박)6.25 때 비행장 옆이라고 폭격을 받아 학교가 다 부서졌어요. 그래서 정운봉씨에게 학교지을 밭 좀 희사하라고 지역사람들이 요구했더니 거절해서 학교가 어려웠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노양리 노산마을 정태희씨가 땅을 줄 테니 오라고 해서 1,300평 받아 학교를 짓고 옮겨간 거예요. 나중에 홍학사비각 옮길 때도 그 양반이 땅을 내놨을 거예요. 정태희씨 자녀들이 나중에 억울하다고 소송까지 했는데 패소했지요. 정태희씨를 설득한 것은 노양1리 뱃터에 살던 홍준희씨라고 해요. 그 분이 간청해서 정태희씨가 내 놓은 거라고 볼 수 있죠. 정태희씨는 가수하는 정태춘이 친척입니다.
필자) 옮겨간 뒤에는 어떻게 되었어요?
박)나중에 계성초등학교가 되었지요. 박양훈 선생님은 초대교장이 되고, 박승훈 선생님이 교감으로 일하고, 정승택씨는 교사가 되고 그랬지요. 학교가보면 박선생님(박양훈) 송덕비도 있어요.
필자)계성초등학교는 도두리강습소가 발전해서 설립된 학교이군요. 오랜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