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냥’이라는 은사
김 동 근
나는 지닌 것이나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오히려 없는 것이 많은 편이다. 나에게는 글 솜씨가 없다. 어쩌다 심정문학회를 통하여 문단에 등단하였지만 제대로 된 문학작품도 하나 없기에 감히 작가라는 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경인종합일보의 칼럼리스트 겸 논설위원이라는 직함은 있지만, 필력을 내세울 정도는 아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교육을 전공하여 2개의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였으나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말재주도 없다. 그런 모습으로 군대생활에서는 신병교육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목회를 하였고, 학교현장에서 교직으로 정년을 했으니 한편으로는 한심하였다는 생각도 해 본다.
나는 배짱이나 배포, 과감한 결단력도 없다. 틀리다거나 나쁘다는 말은 거의 안 쓰고, 다름과 차이를 존중해 주는 편이다. 판단을 하거나 결정을 하는데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글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만약에 자식과 부모가 싸우면 누구 손을 들어 주어야 될까, 자식들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해야 되느냐라는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글쎄’라는 말로 답변을 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답답하다거나 멍청도에 흐리멍덩하다는 소리도 듣는다.
파라과이에 섭리가 진행이 되던 한때는 참부모님의 관심과 신뢰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아쉬운 점을 참부모님은 알고 계신 듯하다. 1995년도 브라질 새소망농장에서 참부모님과 단둘이 담화를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깊어가는 밤 야외 평상마루에서 ‘김 선교사는 형태(남미대륙회장 김형태)와 같은 배포가 필요하다’는 자상한 조언의 말씀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자부심은 강조하지만, 불확실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책임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에는 신중을 기하는 편이다. 참부모님의 섭리가 파라과이에 집중되던 1995년도에 전 세계 지도자들이 한남동 공관에 모였을 때 참부모님께서 파라과이 섭리를 놓고 희망찬 말씀을 하던 중에 파라과이 선교사인 자신을 불러 세우셨다. 파라과이 복귀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라는 말로 답하니 무슨 말이 그러냐며 양에 안 찬다는 표정이셨다. 주변에서 ‘자신 있다.’라고 답하라는 조언을 듣고, 당당한 목소리로 ‘자신 있습니다.’를 외치니 ‘그래야지’라는 추억도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나는 욕심이 많은 편이라 생각을 하는데, 혹자는 욕심이 없다고도 한다. 1990년대 초에 파라과이 선교사로 브라질을 개척한 김형태 남미대륙회장을 모시고, 5년여 활동을 하다가 1995년도에 참부모님의 명에 의하여 브라질과 파라과이를 떠나게 되었다. 김형태 회장은 함께 지내던 동안의 소회를 말하면서 ‘김 선교사는 욕심이 없는 것이 단점’이라는 조언의 말을 마지막으로 전해 주었다. 하나님을 찾고, 참사랑을 외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양보와 배려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가끔은 가식적인 생활을 하게도 된 것이 그렇게 보였다는 생각이다.
나는 영생과 영혼에 대해 고민을 하거나 목마른 신앙을 하지도 않았다. 진리를 찾기에 갈급한 적도 없었으며, 몽시나 계시, 영적인 특별한 체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생결단, 전력투구, 실천궁행’이나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과 같은 용어를 감당할 정도의 간절함도 없다. 한때는 통일교회에 미쳤다는 소리도 들어 보았다. 그러나 통일교회라기보다는 ‘통일교회 일에 미쳤다’라는 말이 맞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융통성이 없다는 말도 듣는다. 윤리․도덕을 담당하여 ‘착하고 바르게 살라.’는 말을 전하다 보니 때로는 정직과 공평한 모습을 의도적이고 위선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였다. 재활용분리 수거를 하여 폐휴지에 마스크를 끼워 버린 것을 발견하고 들고 오니 가족도 한마디 한다. 학비 걱정을 하는 제자가 장학금 신청에 필요한 봉사활동 확인서 부탁도 정직을 내세워 챙겨주지 못하였다. 혈연, 지연, 학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멀리하게 되니 학생이나 동료, 또는 주위로부터 고지식하고 답답하며 바보스럽기를 넘어 짜증이 난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매사에 신중하여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편이고, 아는 길도 물어서 갈 정도이다. 1994년도에 원리연구회 학사장으로 활동할 당시에 교회 내에서는 소위 김암산 장로 파동으로 논란이 있었다. 동료 학사장과 함께 김암산 장로를 직접 찾아갔다. 말씀 중에 궁금한 사항을 계속 질문하게 되니 말씀 도중에 하품을 하는 등 몹시도 피곤한 분위기에 일찍 마치게 되었고, 돌아오는 길에 전해주는 ‘장안학사장은 너무 소심해서 큰일을 하기는 어렵겠다.’는 소리를 듣고 김암산 장로가 사람은 제대로 보는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신봉하다 보니 복권·증권·부동산의 투기나 투자, 명분이 없는 선물 등에는 관심이 없다. 체면치레를 싫어하면서도 체면과 염치에 신경을 많이 쓰려고 하다 보니 꼰대 소리를 듣고 있다. 또한 보릿고개를 넘으며 없이 자란 경험으로 아끼고 다시 쓰는 것에는 습관이 되었다. 게다가 만물주관을 배웠고, 환경활동을 하다 보니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빈 그릇 활동을 강조하다 보니 아내로부터도 ‘쫌팽이’, ‘쩨쩨하다’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하였다.
내가 못한 일을 하였거나 안 해 본 것을 한 사람에게는 관심을 갖거나 존경을 표하는 편이다. 또한 어릴 적에 부모님으로부터 많이도 들어 보았던 ‘액땜’이나 ‘탕감’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지난날의 잘못이나 앞으로 닥쳐올 액을 다른 가벼운 곤란으로 미리 겪음으로써 무사히 넘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매사에 긍정적이고, 감사와 존경이라는 말을 남발한다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우연을 신앙으로
나는 속리산 자락의 보은이라는 산간벽지에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농업에 관심이 있거나 목표가 있기보다는 그냥 어쩌다 농업고등학교 농업과로 진학을 하였다. 입학과 더불어 개인에게는 기본으로 작업복이 있고, 농기구실에는 삽, 낫, 호미가 실습도구가 갖추어져 있다. 농업과의 주요과목으로는 전작(田作), 답작(畓作), 특용작물, 채소원예, 농업공작 등이 있고, 실습장소로는 논과 밭, 온실 하우스 등이 있으며, 미술이나 음악 시간은 없다.
농업이라는 것은 때와 철이 있기에 봄에 씨를 뿌려야 여름에 성장을 하고, 가을이면 수확을 할 수가 있다. 하여 수업에는 농업과목이 우선이고, 국영수 등의 일반 과목은 차선으로 수업을 건너뛰기가 빈번하여 주 한 시간짜리를 건너뛰게 되면 수업을 한 시간도 안 하게 되는 주가 빈번할 수밖에 없다. 아침 첫 시간부터 논과 밭에서 실습이라고 일을 할 때는 대부분 짜증스럽게 느끼게 되지만, 나의 기본 생각은 어차피 할 일은 남 먼저 솔선하고자 하는 생활이 재미가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애교심이나 학업, 진로에 대하여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공부하는 것이 어색해 하는 분위기이었다. 한번은 정기고사를 앞두고 김홍주라는 친구가 집에서 시험공부 다하고 학교 와서는 안 하는 척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 발단이 되어, 그럼 누가 공부를 안 했는지 시험성적 결과로 내기를 하자며 제안을 하였다. 그리하여 시험에 정답을 피하게 되어 전 과목이 거의 0점이 되는 결과가 되었고, 반에서 일등을 다투던 자신이 꼴찌가 된 것이 문제가 되어 상담실에 불려간 적도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생활은 특별한 꿈과 목표가 없이 시작을 하였고, 대부분의 학생들과 같이 대학진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2학년 말에 통일교회와 인연이 된 후에도 교회에 드나드는 것에 재미가 있어서 교회활동에만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며 보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한 달도 서울 전국성화학생총회 참석으로 3일, 성화학생 하계전도로 진천교회에서 21일, 그리고 교구 7일 수련 등으로 집을 떠나 공부에는 관심이 없이 교회활동으로 바쁘게 보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된 후 오정근 담임선생님의 수업(전작) 시간에 일어났던 일이다. 통일교회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며,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담임선생의 보은여고 2학년인 딸(오미숙)이 외가에 놀러 간다고 하고는 성화학생 21일 하계전도로 진천교회로 함께 참석을 하였다. 그런데 기간 중에 담임선생님이 장인의 부고로 처가에 가 보니 딸이 없어 소동이 벌어졌고, 교회로 연락이 와서 그 학생은 도중에 귀가를 하였다. 딸이 통일교회 가는 것으로 가족의 불화가 생겼고, 7일 금식을 부모에 대한 반항으로 보았다는 말, 급기야는 나의 성적을 문제 삼는다. 반에서 1, 2등을 하던 김동근이도 통일교회에 빠져서 성적이 엉망이라는 말까지 곁들이며 교회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학교시험에 관심이 없어서이지 교회활동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할 말이 없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당시 노병승 교역장님께 보고를 드리니 교회 이미지를 실추시켰으니 반드시 책임을 지고, 체면을 세우란다. 대학진학에는 전혀 관심도 없이 보냈는데 예비고사 3개월 정도를 남겨놓고, 도전을 하라는 말씀이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시작을 하여 2주 정도 해 보았으나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또한 나보다 성적이 못한 친구가 합격을 하고, 내가 실패를 하면 오히려 교회 체면을 더 구기는 것 같아 교역장님을 찾아뵙고, 포기라는 말씀을 드렸더니 믿고 하라신다.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두 달여를 나름 준비를 하였다. 결과는 믿기지 않게 합격을 하였다. 통일교회 신앙에서 아마도 가장 감동적인 사건으로 기억이 되는 것 같다. 담임선생도 합격소식과 함께 전체 앞에서 ‘통일교회에도 하나님이 있는 것 같다.’라는 말씀을 전해준다.
아쉬움의 미덕
나는 흔히 말하는 표현력도 충분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가장 평범하면서도 소중하게 활동하는 것에 대하여 이유나 목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고등학생 시절 같은 반에 이창희 친구가 부탁 하나 들어 달라는 말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찾아간 것이 통일교회와의 인연이 되었고, 어쩌다 보니 반세기 동안 통일교회 신앙을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설득력이 있게 말씀을 전하거나 전도를 할 능력에는 부족함으로 가득하다. ‘왜 통일교회 신앙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제대로 된 설명보다는 좋았다는 표현으로 ‘그 냥’이라고 답할 뿐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들을 사랑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 냥’이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지나고 보면 나에게도 있는 것도 많았다. 좋은 인연도 많았고, 주위로부터 많은 도움이 있었으며, 많은 행운도 뒤따랐다. ‘그 냥’이라고 한 일이 재미가 있었고, 의미도 있었으며, 보람도 느꼈다. 바보 같은 이미지가 사람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고,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비웃음에는 신뢰감을 더하여 주었다.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비우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빈 곳을 채워지는 것이 재미가 되어 오히려 욕심으로 변하게 되었다.
지나온 삶 자체가 하늘의 은총이요, 은혜라는 믿음을 갖게 되니 생활 자체가 감사함의 연속이었다. 그것을 우연이라고 말도 하지만, 나는 인연이라고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하늘의 소명이라 믿고 있다. 그것이 나의 신앙이고, 통일교회 신앙의 이유이었고, 목적이 되었다.
<프 로 필>
충북 보은 출생.
건국대학교, 선문대학교 신학대학원 졸.
원리연구회 학군장, 해외 선교사. 중․고교 교사 엮임.
|
첫댓글 김동근 선생님
그냥 이라는 인사 좋은 글 올려 주셔서 심정문학18호 설램 속에
기다려 지네요
귀필로 기쁜일만 가득 하시길 바람니다
수고 많으 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