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基동의 유래
하기동은 예전에 행정구역상 洞으로 불리기전에는
아랫텃골 과 윗텃골(하기리1구) 이 있었고
초수골(최수골)·송림, 텃골 (하기리2구) 등의 옛마을과
매봉재·청태봉·통산 등의 야산, 승적골·토끼울 등의 골짜기가 있었다.
과거 하기(下基)라고 불리게 된 유래는 예전 대덕군 탄동면 하기리 1구에 텃골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었는데 윗마을의 윗텃골 과 아랫마을인 아랫텃골이 있었다.
옛날 텃골의 논이 농사가 잘되는 기름진 땅이 많아서, 외지 사람들이 자주 넘보며 껄덕거렸는데
이 동네의 힘이 장사인 사람이 텃세를 많이 부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텃골' 이라고 하였답니다.
아랫텃골을 한자로 下基라고 개명하면서 하기라 불리게 된 유래 였답니다.
윗텃골은(위터골)은 당연히 上基라고 하였을 것 입니다.
그런데 행정지명으로 개명 되면서 상기리 와 송림 초수골(송림리)을 합하여
하기(下基里) 라고 하였으며
나중에 하기를 1,2구로 나누면서
윗터골(上基)과 아랫터골이 下基里1區 가 되었으며, 송림과 초수골, 텃골재가 下基里2區가 되었다.
下基의 지명 유래가 되었던 아랫터골 마을은 노은지구 개발지역에서 제외되어
예전 그대로 호남고속도로 하행선 옆에 아직까지 동네가 존재하고 있다.
지금은 개발로 없어졌지만 우리가 흔히 부르던 탯골재가 있었다.
과거 개발전 노氏 집안 1가구가 모여 살던 곳 인데 그 마을이 텃골이었던 것 같다.
하기동이 되기까지는
과거 백제시대에 소비포현(所比浦縣),
신라시대에는 적오현(赤烏縣),
고려시대에는 덕진현(德津縣)과 공주부에 속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공주군 탄동면(炭洞面)에 속하는 지역이었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회덕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송림리(松林里)와 상기리(上基里)를 합쳐서 하기리라 한 뒤
대전군 탄동면에 속했다가 1935년 11월 대덕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 대전시 중구에 속하였으며 1984년 7월 대전시 유성출장소 관할이 됨에 따라
1989년 1월 대전시의 직할시 승격과 함께 대전직할시 유성구 하기동이 되었고,
1995년부터 대전광역시 유성구 하기동이 되었다.
송림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많은 동네라고 하여 松林 이라고 불리었고
초수골은
초수골은 이 마을 북쪽에 위치한 산형이 토끼가 만월을 보는 형체인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이며, 그 앞에 예전에 큰 못이 있었는데 못 가운데 물 위에 떠 있는 이름모를 풀이 있었다고 해서
草水골(최수골)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송림마을이 있던곳은 노은지구 개발전부터 침레신학대학이 들어 섰으며
그외의 지역은 송림마을 아파트와 노은브리젠힐스가 들어섰고
초수골은 송림마을 아파트가 생겼으며, 초수골 뒷산은 대전-당진간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터널이
뚫렸다.
신학대학 건너편의 롯데마트 지역은 예전 주막집이 있던 자리 입니다.
윗터골지역 역시 택지개발로은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섰다 .
우리 慶州李氏 菊堂公后 長浦公派 후손인 35世 諱 敬榮, 諱 鎭榮, 諱 喜榮 할아버지의
後孫들이 살던곳은 윗터골, 초수골, 송림 3개 마을 이다.
주변으로는 서쪽의 우산봉 높은산과
남쪽으로 지울(지룰), 저드리, 가막골, 은구비,곧은신작로,논골(농굴이라고 불리었음)
서쪽으로 외삼, 반석, 가래실, 소래실, 새미래,회병굴등의 역사적인 지명들이 많이 있었다.
지명 이름의 유래를 더 살펴서 기록을 하기로 하겠습니다.
위의 내용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 되시는 분들은 알려주기 바랍니다.
다음은 송림 초수골 주변 마을의 이름 유래 입니다.
- 가마골 : 가마골은 말이 목말라하는 형국, 즉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지세라 하여
갈마골이라고 한다, 또한 옛날에 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었다 하여 가마골이라 불렀 답니다.
현재 지족동 4단지 아파트 서쪽 산 중턱에 금강정사라는 절이 아직도 남아 있고
예전의 가마골 뒷산의 왕바위도 그냥 남아 있습니다.
- 공사실 : 예전에 이곳의 땅이 너무 토박하여 곡식의 수확이 적어 , 조정에서는 이 골짜기 들에서 농사
짓는 사람에게는 조세를 감면하여 주었다고 하여 공세실(控稅)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흘러
공사실 이라고 했다함.
- 죽궁이 : 지족동 가마골 남쪽에 있던 마을인데 대나무가 무성하여 숲을 이루었던곳이라
붙여진 이름
- 대울 : 대나무로 울타리를 하여 대울이라고 했다나?
- 소라실 : 지족동의 가마골 북서쪽의 골짜기를 말하는데
원래 지족동에 3실이 있다고 하는데 가마골 소라실과 가마골남쪽의 지족실, 그리고
공사실을 말한다.
이 3실에 명당이 있다고 전해 내려오는데 사람들이 명당을 찾다찾다 못찾고 지금까지
내려 왔다고 전한다.
가마골 소라실 마을은 남양홍씨 문중의 종산이 지금도 있다.
- 농굴 : 원래의 지명은 '논골' 인데 발음을 부드럽게 하다보니 농굴이 된것 같다
지금은 조금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흔히 부르던 '곧은신작로'를 기억 하실게다.
하기에서 유성으로 걸어가다 보면 은구비 부터 농굴다리까지 직선으로 곧게 뻗은
곧은 신작로가 있었는데 지금은 일부가 없어지고 농굴다리부터 절반 정도만 남아있다.
주변으로 화원이 들어섰고 우리 진영공파 문중 토지가 일부 남아 있다.
농굴다리는 월드컵 경기장 앞의 택지와 도로공사로 없어지고 지금은 지하배수로 로 변했다.
- 은구비(은구미):원래는 은동(隱洞)이었다.
예전 조선말기에 서양으로부터 신교(新敎)가 들어 왔을 때 한 신도가 이곳에서 참형
을 당했다는데 이 자손들이 종교에 허무함을 느끼고 숨어 살았던 지역이라 은동(隱洞)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길옆에 막걸리를 팔던 주막집이 있었죠.
그밖에 송림앞에 '저드리' 라는 마을이 있었다
첫댓글 좋은정보감사합니다 57년만에 들어보는 유익한 상식입니다
나 태어나서 자라고 어릴적살던 내 고향 지명 유래 잘 보고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