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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대방고지(帶方故地)가 된 온다라(百濟)
※ 김부식(金富軾)이 인용(引用)한 지나사서(支那史書)들은 동명(東明)의 후예(後裔) 구태(仇台)가 온다라(百濟)의 시조(始祖)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三國史記卷第二十三(삼국사기권제23)百濟本紀第一(백제본기제1)始祖(시조)]
北史及隋書 皆云 東明之後有 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북사(北史)』및 『수서(隋書)』 모두에는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가 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탁(公孫度)이 그의 딸을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쪽 나라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다.]
☞ [北史卷九十四(북사권94)列傳第八十二(열전제82)四夷(4이)百濟(백제)]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爲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가 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탁(公孫度)이 그의 딸을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쪽 나라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 백가가 바다 건넘으로써 백제로 이름하였다.
☞ [隋書卷八十一(수서권81)列傳第四十六(열전제46)百濟(백제)]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漸以昌盛,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가 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탁(公孫度)이 그의 딸을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쪽 나라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 백가가 바다 건넘으로써 백제로 이름하였다.
※ 김부식(金富軾)은 구태왕(仇台王)을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수수께끼로 기록하고도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서는 AD.121년에 후한(後漢)의 현토성(玄菟城)을 포위(包圍)한 고구려(高句麗)를 쫓아냈다고 기록했습니다.
☞ [三國史記卷第十五(삼국사기권제15)高句麗本紀第三(고구려본기제3)太祖大王(태조대왕)]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菟大守姚光遼東太守蔡風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王乃遣弟遂成 領兵二千餘人 逆煥光等 遂成遣使詐降 煥等信之 遂成因據險以遮大軍 潛遣三千人 攻玄菟遼東二郡 焚其城郭 殺獲二千餘人
69년(서기 121) 봄, 한나라 유주(幽州) 자사 풍환(馮煥), 현도 태수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風)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략해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임금이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병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했다. 수성이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는데 풍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마침내 수성이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도, 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夏四月 王與鮮卑八千人 往攻遼隧縣 遼東太守蔡風 將兵出於新昌 戰沒 功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 以身扞諷 俱歿於陣 死者百餘人
여름 4월, 임금은 선비(鮮卑) 8천 명과 함께 요대현(遼隧縣)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풍이 병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에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는 스스로의 몸으로 채풍을 호위하여 막았으나 채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冬十月 王幸扶餘 祀太后廟 存問百姓窮困者 賜物有差
겨울 10월, 임금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백성들을 위문하고, 차등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肅愼使來 獻紫狐裘及白鷹白馬 王宴勞以遣之
숙신(肅愼)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 가죽 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임금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보냈다.
十一月 王至自扶餘
11월, 임금이 부여로부터 돌아왔다.
王以遂成統軍國事
임금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12월, 임금이 마한(馬韓)과 예맥의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쳐 막고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 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70년(서기 122), 임금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를 쓰면서도 지나사서(支那史書) [후한서(後漢書)]를 그대로 베끼면서도 고구려연합군(高句麗聯合軍)에 가담한 마한(馬韓)에 대해서는 또 한번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 [後漢書卷五(후한서권5) 孝安帝紀第五(효안제기제5)]
○建光元年(121)春正月,幽州刺史馮煥率二郡太守討高句驪·穢貊, 不克. ……
○ 건광원년(121) 봄 정월에 유주자사 풍환이 두 개 군의 태수를 인솔하여 고구려․예맥을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夏四月,穢貊復與鮮卑寇遼東,遼東太守蔡諷追擊, 戰歿. ……
여름 4월에 예맥이 다시금 선비와 함께 요동군을 침범하자, 요동군 태수 채풍이 추격하다 전사하였다. ……
甲戌,遼東屬國都尉龐奮, 承僞璽書殺玄菟太守姚光. ……
갑술일에 요동속국 도위 방분이 가짜 새서를 받들고와서 현도군 태수 요광을 죽였다. ……
(八月)鮮卑寇居庸關, 九月, 雲中太守成嚴擊之, 戰歿. 鮮卑圍烏桓校尉於馬城, 度遼將軍耿夔救之. ……
(8월) 선비가 거용관을 침범하자, 9월에 운중군 태수 성엄이 그들을 쳤으나 전사하였다. 선비가 마성에서 오환교위를 포위하자 도요장군 경기가 그를 구원하였다. ……
(冬十一月)鮮卑寇玄菟. ……
(겨울 11월) 선비가 현도군을 침범하였다. ……
冬十二月,高句驪·馬韓·穢貊圍玄菟城,夫餘王遣子與州郡幷力討破之.
겨울 12월에 고구려․마한․예맥이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을 보내어 주․군의 군대와 힘을 합쳐 그들을 토벌하여 쳐부수었다.
○延光元年(122)春二月,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夫餘王子,尉仇台也.擊高句驪·馬韓·穢貊, 破之, 遂遣使貢獻. ……
○ 연광(延光) 원년(122) 봄 2월에 부여왕이 아들을 보내어 병사를 거느리고 현도군을 구원하게 하자 부여왕의 아들은 위구태(尉仇台)이다. 고구려․마한․예맥을 공격하여 쳐부수었으며 이어서 사신을 보내 헌물을 바쳤다. ……
☞ [後漢書卷八十五(후한서권85) 東夷列傳第七十五(동이열전제75) 高구려(고구려)]
建光元年春, 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 捕斬濊貊渠帥, 獲兵馬財物. 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 遣使詐降, 光等信之, 遂成因據險阸以遮大軍, 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 焚城郭, 殺傷二千餘人. 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 而貊人已去.
○ 建光 元年(A.D.121; 高句麗 太祖王 69) 봄에, 유주자사 풍환과 현토태수 요광과 료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를 붙잡아서 목베고 병마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궁은 이에 사자 수성에게 군사 2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요광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수성이 사자를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니 요광 등은 이를 믿었다. 수성은 이 틈을 타 험요지를 점거하여 [요광 등의] 대군을 막고는 몰래 3천여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토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명을 살상하였다. 이에 [후한은] 광양·어양·우북평·탁군·[요동]속국에서 3천여명의 기마병을 출동시켜 함께 [요광 등을] 구원케 하였으나, 맥인이 벌써 돌아가버렸다.
夏, 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殺略吏人.蔡諷等追擊於新昌,戰歿, 攻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 俱沒於陳, 死者百餘人.
○ 여름에 다시 요동의 선비[족] 8천여명과 함께 요대[현]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채풍 등이 신창[현]에서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공조인 경모와 병조연인 용단과 병마연인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가리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사람이 백여명이나 되었다.
秋, 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 與州郡幷力討破之, 斬首五百餘級.
※ 구태왕(仇台王)은 AD.121년 때 사람인데, 구태왕(仇台王)에게 딸을 주어 아내 삼게 했다는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탁(公孫度)은 AD.190년 사람입니다.
☞ [三國志卷八(삼국지권8) 魏書八(위서8) 二公孫陶四張傳第八(2공손도4장전제8)]
初平元年,度知中國擾攘,語所親吏柳毅﹑陽儀等曰:「漢祚將絶,當與諸卿圖王耳.」
※ AD.190년 사람 공손탁(公孫度)의 딸을 AD.121년 사람 구태왕(仇台王)이 아내로 맞이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늙었습니다.
공손탁(公孫度)이 사위 삼은 사람은 구태왕(仇台王)의 손자라면 어울릴 것입니다.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동이역사(東夷歷史)를 깎아 버린 지나사서(支那史書)에서 구태왕(仇台王)의 손자를 찾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 [三國志卷三十(삼국지권30)魏書三十(위서30)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오환선비동이전30)]
(후한)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환제, 영제의 재위 146-189년), 한(韓), 예(濊)[註018]가 강성하여(한나라의) 군현(郡縣)이 능히 통제하지 못하자 (군현의) 백성들(民)이 다수 한국(韓國)으로 유입(流入)하였다.
※ 진수(陳壽)는 쇠코왕(素古王)과 구지왕(仇知王)의 새나라(倭)를 [삼국지 한전]에서는 환영지말(桓·靈之末)의 한예(韓濊)라고 기록하고, [삼국지 선비전]에서는 한인(汗人), 한국(汗國)이라고 기록했습니다.
☞ [三國志卷三十(삼국지권30)魏書三十(위서30)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오환선비동이전30)]
鮮卑
熹平六年,遣護烏丸校尉夏育,破鮮卑中郎將田晏,匈奴中郎將臧旻與南單于出鴈門塞,三道並進,徑二千餘里征之。檀石槐帥部衆逆擊,旻等敗走,兵馬還者什一而己。鮮卑衆日多,田畜射獵,不足給食。後檀石槐乃案行烏侯秦水,廣袤數百里,停不流,中有魚而不能得。聞汗人善捕魚,於是檀石槐東擊汗國,得千餘家,徙置烏侯秦水上,使捕魚以助糧。至于今,烏侯秦水上有汗人數百戶。
희평6년(177년), 호오환교위 하육과 파선비중랑장 전안, 흉노중랑장 장민이 남선우와 함께 안문새를 나가 세 길로 나란히 2천여리를 정복하러 나갔으나 단석괴가 거느린 선비군에게 깨져, 장민 등이 달아나고 병마 열 가운데 하나만 겨우 돌아왔다.
선비 무리는 날로 늘어 농사와 목축, 수렵으로 먹여 살리기 어려워졌다. 후에 단석괴가 오후진수를 행차하여 살펴보니 수백리에 넓게 펼쳐진 물이 흐르지 않고 머물렀는데 물 속의 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한인들이 고기를 잘 잡는다는 말을 듣고, 단석괴가 동쪽으로 한국을 공격하여 천여가를 붙잡아 오후진수 물가에 옮겨 고기를 잡게하여 식량을 돕도록 하였다. 지금까지 오후진수 상류에는 한인 수백호가 살고 있다.
※ 새나라(倭) 구지왕(仇知王)은 결혼동맹(結婚同盟)한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처음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으로 옮겨 온다라(百濟)를 개국(開國)했는데, 진수(陳壽)는 한예(韓濊)를 정벌(征伐)하여 대방군(帶方郡) 주민(住民)을 채웠다고 거꾸로 기록했습니다.
☞ [三國志卷三十(삼국지권30)魏書三十(위서30)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오환선비동이전30)]
韓(한)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집해25]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후한 헌제) 건안(建安: 196-220년. 백제 肖古王 31년~仇首王 7년) 중,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지(荒地)를 나눠 대방군(帶方郡)을 세우고[집해25],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보내 유민(遺民)을 수집(收集)하고, 군대를 일으켜 한(韓), 예(濊)를 치니 구민(舊民)들이 점차 나왔고 이후로 왜(倭), 한(韓)이 마침내 대방(帶方)에 복속하였다.
[집해25]兩漢志, 樂浪郡屯有縣. 李兆洛云, 今朝鮮平壤城南. 丁謙曰, 帶方郡治所在, 前人均未言及. 漢地理志, 樂浪含資縣有帶水, 西至帶方, 入海. 査京畿道北境, 有臨津江, 發源江原道伊川郡, 北至開城, 西南入海, 正在樂浪之南. 再南, 卽百濟境. 以形勢揆之, 當卽漢時帶水. 然則伊川郡, 其漢之含資縣乎. 辰韓渠帥, 先詣含資降. 可知含資, 實辰韓至樂浪孔道. 今伊川郡, 居平壤東南, 情形尤協. 以此觀之, 臨津江, 於開城西南入海, 非卽帶方郡地之所在耶. 今定以開城郡爲帶方, 或相去不遠矣.
[집해25] 양한지(兩漢志)(한서지리지와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낙랑군(樂浪郡)의 둔유현(屯有縣)이다. 이조락(李兆洛, 청) 왈, 지금의 조선 평양성(平壤城) 남쪽이다. 정겸(丁謙) 왈,, 대방군(帶方郡)의 치소가 있던 곳에 관해서 예전 사람들이 모두 언급하지 않았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함자현(含資縣)에 대수(帶水)가 있어 서쪽으로 흐르다 대방(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진한(辰韓)의 거수(渠帥)가 먼저 함자(현)에 도착해 항복했으니 함자(현)이 실제로 진한(辰韓)에서 낙랑(樂浪)에 이르는 공도(孔道, 요로, 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 결혼동맹(結婚同盟)한 공손연(公孫淵)의 요동국(遼東國)과 구지왕(仇知王)의 온다라(百濟)는 황하(黃河) 북쪽, 지금의 하북성 남쪽에 나란히 있다가 AD.238년에 위(魏)나라 태위(太尉) 사마의(司馬懿)가 요동국(遼東國)을 평정(平定)할 때, 함께 해(害)를 입었습니다.
진수(陳壽)는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개국(開國)한 온다라(百濟)를 기록하지 않고, 그냥 대방군(帶方郡)이라고 왜곡(歪曲)했습니다.
☞ [三國誌卷八(삼국지권8)魏書八(위서8)二公孫陶四張傳(2공손도4장전)]
二年春,遣太尉司馬宣王征淵.
경초2년(238년) 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 사마의司馬懿)을 보내 공손연을 쳤다.
六月,軍至遼東.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圍塹二十餘里.宣王軍至,令衍逆戰.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宣王令軍穿圍,引兵東南向,而急東北,即趨襄平.衍等恐襄平無守,夜走.諸軍進至首山,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復擊,大破之,遂進軍造城下,爲圍塹.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雨霽,起土山﹑脩櫓,爲發石連弩射城中.淵窘急.糧盡,人相食,死者甚多.將軍楊祚等降.
6월, 군(軍)이 요동(遼東)에 도착했다.
공손연은 장군 비연(卑衍), 양조(楊祚) 등을 보내 보기(步騎) 수만으로 요수(遼隧)에 주둔케 하고 주위 20여 리에 참호를 팠다. 선왕(宣王)의 군대가 도착하자 (공손연은) 비연(卑衍)으로 하여금 이를 맞아 싸우게 하니 선왕(宣王)이 장군 호준(胡遵) 등을 보내 격파했다. 선왕(宣王)이 군대에 명해 포위를 뚫고 군대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향하다 급하게 동북쪽으로 돌려 양평(襄平)으로 나아갔다. 비연 등은 양평에 방비가 없는 점을 두려워해 밤중에 달아났다.
제군(諸軍)이 전진하여 수산(首山)에 도착하니 공손연이 다시 비연 등을 보내 영격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했다. 다시 이를 공격해 대파하고는 진군하여 (양평)성 아래에 이르러 성 주위에 참호를 팠다. 때마침 장마비가 30여 일 동안 내려 요수(遼水)가 크게 불어나 운선(運船, 물자를 운반하는 배)이 요구(遼口)에서 곧바로 성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비가 그치자 토산(土山)을 쌓고 노(櫓, 망루)를 세우고 발석(發石, 투석기), 연노(連弩)를 만들어 성 안으로 쏘았다. 공손연은 군급(窘急, 궁지에 몰려 매우 급박함)해졌고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장군 양조(楊祚) 등이 항복했다.
八月丙寅夜,大流星長數十丈,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壬午,淵衆潰,與其子脩將數百騎突圍東南走,大兵急擊之,當流星所墜處,斬淵父子.
8월 병인일(7일) 밤, 길이 수십 장에 이르는 큰 유성(流星)이 수산(首山) 동북쪽으로부터 양평성(襄平城)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임오일(23일), 공손연의 무리가 무너지니 아들인 공손수(公孫脩)와 함께 수백 기를 거느리고 포위를 돌파해 동남쪽으로 달아나자 대병(大兵)으로 급히 들이쳐 유성(流星)이 떨어진 곳에서 공손연 부자를 베었다.
城破,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傳淵首洛陽,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성을 함락하여 (공손연이 임명한) 상국(相國) 이하 수천 명의 수급을 베었고 공손연의 수급을 낙양(洛陽)으로 보냈고, 요동(遼東), 대방(帶方), 낙랑(樂浪), 현도(玄菟)가 모두 평정되었다.
※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公孫淵)을 토멸(討滅)할 때 ‘모두 평정되었다(悉平)’는 ‘대방(帶方)’은 공손강(公孫康)이 처음 설치했던 대방군(帶方郡)에 주민(住民)이 없어 황지(荒地)이었던 곳에 공손강(公孫康)의 매제(妹弟), 구지왕(仇知王)의 새나라(倭)를 옮겨, 온다라(百濟)로 개국(開國)했던 곳입니다.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철저한 진수(陳壽)는 온다라(百濟)의 나라 이름 대신, 대방(帶方)이라는 땅 이름만 쓰고, [삼국지(삼國志)동이열전(東夷列傳)]에서는 예(濊), 한(韓)으로 왜곡(歪曲)했습니다.
☞ [三國志卷三十(삼국지권30)魏書三十(위서30)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오환선비동이전30)]
○ 濊傳(예전)
自單單大山領以西 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漢末更屬句麗.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의 서쪽은 낙랑(樂浪)(군郡)에 소속되고 (단단대산)령 동쪽의 7현(七縣)은 (동부)도위(都尉)가 주관하였고 모두 예(濊) 사람들을 백성(民)으로 삼았다. 뒤에 도위(都尉)를 폐지하고 그 거수(渠帥, 우두머리, 수령)를 봉해 후(侯)로 삼았으며 지금의 불내예(不耐濊)가 모두 그 종(種)이다. 한나라 말에는 다시 (고)구려(句麗)에 복속되었다.
○ 韓傳(한전)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집해25]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후한 헌제) 건안(建安: 196-220년) 중,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지(荒地)를 갈라 대방군(帶方郡)을 세우고는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보내 유민(遺民)들을 수집(收集)하고 군대를 일으켜 한(韓), 예(濊)를 치니 구민(舊民)들이 점차 (한국으로부터) 나왔고 이후로 왜(倭), 한(韓)이 마침내 대방(帶方)에 복속하였다.
※ 구태왕(仇台王)의 손자(孫子) 구지왕(仇知王)이 건국(建國)한 온다라(百濟) 땅이 대방고지(帶方故地)가 돼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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