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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계단에서 만난 시
―이춘실 시집『바람의 손』을 중심으로
김동원 시인·평론가
철학, 그리고 계단
그녀에게 시는 철학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만난 뜻밖의 선물이다. 6·25 전쟁 중 목사인 부친을 따라 월남하여 크로마하프 연주자로써, 서양철학과 고전을 깊이 사모한 신앙인으로써 갖은 고초를 거쳤다. 처음 만났을 때 고희의 그녀는 내게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기원전 399년)’를 열광적으로 소개하였다. 인간 무지에 대한 스승의 문답법에 대한 예찬론을 설파하였다. 하여 나는 그녀가 그리스 아테네를 마음속으로 무지 사랑한다는 것과 그녀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서양철학의 원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시기하던 자들이, 소크라테스가 신을 모독하고 청년을 타락시켰다며 사형에 처한 못된 짓까지도 들었다. 도망치라는 주변 사람의 권유에도 '악법도 법이다'며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별명은 '아테네의 등에'였다. 소나 말 등의 피를 빨아먹는 등에가 끊임없이 소를 괴롭혀서 움직이게 만드는 것처럼, 소크라테스 역시 살찌고 게을러빠진 아테네인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하도록 귀찮게 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는 그때 왜 그녀가 소크라테스에 반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소크라테스야말로 불온한 시인의 기질을 가진 반체제 인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반한 또 한 명의 스승은 초인(超人)을 불러낸 니체(1844년~1900년, 독일)였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흡수해 ‘生 철학’을 추구했으며, 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때 나 역시 니체의『반(反) 시대적 고찰』,『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미쳤던 적이 있어, 오히려 그녀에게 ‘철학으로써의 시 쓰기’를 권장했다.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 우상에 대한 파괴,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임을 니체가 지적했듯, 이 시대 우리에게 새로운 시적 방법론을, 그녀가 모색하길 꼬드겼다. 그러나 니체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깊이 분석하면서, 니체야 말로 ‘신은 죽었다’를 통해 ‘영원회귀’를 ‘부활’의 의미로 주창했다고 하였다. 궁극적으로 니체는 초인 ‘짜라투스트라’를 통해 영생을 긍정했으며, 유럽의 혼돈과 허무를 온몸으로 극복한, 하나님의 독신자라고 보았다. 얍삽하게도 나는 그녀에게 니체야말로 진짜 영혼의 시인이므로, 그녀에게 니체를 따라서 ‘시 쓰기’를 은근히 부추겼다. 하여, 그녀는 결국 두 스승의 궤적을 쫓아 ‘시’의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벼랑
시는 벼랑 끝에 놓인 절벽이다. 떨어지든지 기어오르든지 둘 중 하나다. 시어의 몸이 장소성이라면, 시어의 영혼은 시간성이다. 소통 가능한 시야말로 빛난다. 시인은 시를 남기는 사람이다. 시는 길 위에서 자신의 욕망을 반추하는 거울이다. 이춘실의 시집『바람의 손』은 벼랑의 앞에 선 ‘철학으로써의 시 쓰기’를 추구한다. 욕망은 세계를 인식하는 추동력이자, 타자의 상처를 꿰뚫어 보는 시안(詩眼)이다. 그녀는 ‘몸이 시의 꽃으로 활짝 피어나는 느낌을 시작(詩作)을 통해 받는다.’고 고백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라티우스의『시학』을 독해하면서, 그녀는 그리스의 비극과 희극을 자신의 시에 수혈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명제에 깊이 감명 받는다. 음악을 가르치면서 시론 강의를 듣기만 하다가 시 창작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즈음이다. 언제부터인가 ‘명시를 암송(暗誦)하면, 숭숭 구멍 뚫린 가슴 한켠에서, 시상(詩想)이 가득 채워져 옴을 느꼈다.’고 하였다. 하여, 그녀는 읽고 쓰는 기쁨이 이렇게도 벅차고 아름다운지, 전엔 까맣게 몰랐다고 하였다. 기억에 덮인 슬픈 유년 시절의 작은 이야기들을 시로 불러내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의 무늬를 직조한다.
별까지 가려면 달빛 창문에
오늘 밤 사닥다리 놓아야 겠네
땅거미 꺼진 앞산 위로
돋아난 샛별 곁에
불면하나 걸어야 겠네
밑도 끝도 없는 늙은 생각은
한밤중 또렷한 기억 되어
어둠의 소파 위에 혼자 앉는다
텅 빈 거실 유리벽에 움직이는
그 무수한 바람 그림자
촛불을 켜면, 밤의 입술 새로
수다처럼 풀려가는
그 옛날 어머니의 색실 뭉치
풀었다 되감았다 새벽녘까지
잔 생각 오고 가면
어느새 무릎 위에 잠든 어린 꿈
그 아이 별에서 내려오려면,
이 밤 또, 달빛 창문에 사닥다리 놓아야 겠네
―「사닥다리」전문
시간에서 주운 보석 중 가장 빛나는 것은 어릴 때의 추억일 것이다. 나쁜 추억은 불에 덴 것처럼 뜨겁지만, 좋은 추억은 달빛처럼 바스락거릴 것이다. 시는 피상적 관념보다는, 삶의 구체성에서 언제나 더 깊어진다.「사닥다리」는 꿈밖의 이야기이자, 꿈속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가닿은 이야기이다. 누구나 별까지 가려면 ‘사닥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것이 희망으로 올라가는 사닥다리이건, 절망으로 떨어지는 사닥다리이건,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별을 딴다는 것은 중요하다. 어른들은 삶이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아름다운 어린 시절의 보석 같은 추억을, 어디에다 놓고 왔는지를 모르고 산다. 하여, ‘불면’의 밤을 지세는 화자의 상념은, “밑도 끝도 없는 늙은 생각”으로 “한밤중 또렷한 기억”이 되어 찾아온다. 어둠 속 소파에 앉아 불안할 때, 어느 봄밤 맡았던 엄마의 냄새와 따스한 기억은 천국과 같은 것이다. 엄마는 “텅 빈 거실 유리벽에 움직이는” 바람 그림자가 되기도 하고, 어른어른 비치는 그 알 수 없는 적막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시인은 촛불을 켜고 “밤의 입술 새로 / 수다처럼 풀려가는 / 그 옛날 어머니의 색실 뭉치”를 풀어낸다. 엄마의 무릎을 베고 새벽녘 동이 틀 때 까지, 그녀와 나누었던 무수한 얘기를 풀었다 되감는 것이다. 그 옛날 소녀 시절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화자를 별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그 밤 달빛 창문에 사닥다리 하나를 놓아보는 것이다.
귀
보기는 하되 보지 못하고, 듣기는 하되 듣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는 들으려고 용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들려야 한다. 그것도 길을 가다가 우주로부터 홀연히 들려야 한다. 어떻게 보면 시란 언어의 비밀 열쇠 같은 것이다. 아니, 그보다 훨씬 깊고 오묘한 사유와 방법을 요구한다. 현대시의 경우, 시의 이해는 작가와 독자의 상호 관련 속에서 텍스트의 의미가 규정되고 배가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시는 시인을 떠나면 온전히 독자의 몫이란 뜻이겠다. 즉, 하나의 작품은 독자 수만큼 다양하고 새로운 의미로 재창조된다. 이춘실에게 있어 ‘시란 무엇인가’. 우주와 대상 사이, ‘부름’과 ‘응답’에 대한 아름다운 노래이다.「하늘의 귀」야말로, 한 시인이 어떻게 홀연, 우주의 영감(靈感)에 홀렸는지, 그 때, 그 순간, 그 자리의 비밀이 고스란히 시 행간 속에 절묘하게 드러나 있다.
거기에 바다가 있었다
절벽 위의 한 그루 노송
아찔, 불거진 혈관처럼 얽힌
바위를 감고 버틴 뿌리
먹고사는 일은
절벽도 나무도 고독했다
물안개 너머로 튕겨 나온
갈매기 한 마리
하늘의 귀를 물고
구름 위에 올려놓았다
―「하늘의 귀」전문
「하늘의 귀」는 시점이 하늘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이다. 삼라만상은 그 자체가 귀이자 눈이다. 시인에게 하늘의 존재는 ‘바다’와 일체이다. “절벽 위에 한 그루 노송”을 보는 순간, 그녀는 시를 보았다. 아니, 색체로 된 푸른 음악을 느꼈다. 시는 섬광처럼 왔다가 번개처럼 사라진 음표이다. 그녀의 시는 천지만물을 찰나에 드러내며 자연의 비밀을 푼다. “바위를 감고 버틴 뿌리”는 목소리도 말도 침묵도 아니다. 그것은, 삶을 움켜진 ‘손아귀’이자 “혈관처럼 불거진” 육화된 ‘몸’이다. 하여, “먹고 사는 일은” 인간이나 절벽이나 나무 역시 고독한 일하다. 그 고독의 시경(詩境)에 튕겨 나온 갈매기는 지혜의 비유다. 그 시적 비유를 다 듣고 있는 것이,「하늘의 귀」다. 이처럼 이춘실의 시는 언어의 표정, 언어의 동작, 언어의 의미까지, 시 행간의 여백을 통해 끝없이 확장한다. 누구나 다 시를 쓸 수는 있지만, 아무나 좋은 시를 못 쓰는 이유는, 사물의 안과 밖이 체험의 언어로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하늘의 귀」는 한 발짝 깊이 찌른 은유의 색다른 추상 이미지를 낳았다.
바람
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보이는 세계를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드러낼 때 빛난다. 왠지「바람의 손」은 제목에서 끌린다. 제목은 집의 대문이자 그 시의 표정이다. 제목이 좋으면 마냥 시가 좋아 보인다. 시의 값이 백 원이면 구십 원은 제목 값이다. 시를 쓰다보면, 제목부터 붙일까, 끝나고 붙일까, 고민, 고민하게 마련이다. 현대시에 있어 제목은 시의 성패를 좌우한다. 영 안 되면 어떤 시인은 ‘무제’라고 던져둔다. 이춘실은 ‘바람의 발’이라고 하지 않고 ‘바람의 손’이라고 하였다. 이상하게도 바람에겐 발의 감촉보다는 손의 느낌이 어울린다. 바람이 우리들의 몸을 ‘손’으로 어루만지기 때문일까.
참 아픈 하늘이었다
너를 부르면, 참 아픈 구름이었다
밤마다 달은
물속에서 꽃처럼 숨 몰아쉬는데
마음 한 자락 잡을 수 없는
바람의 손, 차마 찾지 못해
언제나 돌아서던
골목의 빈 그림자
참 아픈, 겨울이었다
자꾸만 너는 펄럭거리는데
가시나무 무릎 속 고개를 묻고
어둠은 바람 인양 쳐다본다
―「바람의 손」전문
몸이 없는 바람은 그러하겠다. “참 아픈 하늘” 위로 몰려다니겠다. 바람은 빈집이자, 빈 몸이자, 한 채의 구름이겠다. 하여, “너를 부르는” 모든 것들은 다 아픈 것이다. 밤마다 달은 물속에서 은빛 그림자로 숨을 몰아쉬는 ‘꽃’의 환영이다. 충만한 달이 꽃이 될 수 있는 것은,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시의 기양(技癢)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꿈을 꾸게 하고 끝내 그 꿈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달빛의 암시는, 시허(詩虛)이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몸 없는 것들에게 가 닿을 수 없는 공허이다. 그것은 놓쳐버린 한 사람에 대한 피맺힌 그리움이자 호곡(號哭)이겠다.
꿈
서정시의 본령은 감동에 있다. 사물과 사물 간의 응시와 관찰을 통해 그것의 교감을 세밀히 복원하여야 한다. 천차만별의 인간 세상의 희로애락을 소재로, 한(恨)과 카타르시스, 어둠과 밝음, 사랑과 이별을, 각각의 대응방식으로 그 시대 서정에 부응해야 한다. 근대의 서정은 느림과 고움, 향토와 정서의 문제에 집착했다면, 현대시는 기상천외한 소재와 미래 사회의 불확정한 소재로, 그 추상 표현에 몰두해있다. 오늘날 서정시의 역할은, 고독사와 외로움, 사회적 병리현상, 소박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경이로운 이미지를 재발견하여야 한다. 시에서 현실의 실종이야말로, 내용 없는 형식만 남게 되며, 그 형식은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기 마련이다. 하여, 삶의 다채로운 아이러니를 가시권에서 찾아내, 흥미롭게 재구성하여야하며, 언어를 벼리는데 절차탁마의 정신이 필요하다. 시는 늘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있다. 생의 절벽을 타고 내려가 다시는 못 올라올 쯤에서, 꿈은 시가 된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은, 꿈속 무의식이 이루어 주는 척을 한다. 하여, 이번 생을 돌아보면 누구나 후회와 자책뿐이며, 스스로 다음 생을 위로하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는, 그래서 좋은, 그 환영의 세계에서 위로를 받는다. 이춘실의「자꾸만 멀어지신다, 아버지」는 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연민이 안타깝다. 자꾸만 멀어지는 아버지를 통해, 부제의 슬픔이 감동적으로 형상화 된다.
자꾸만 멀어지신다, 아버지는
어둠 속 빈 골목처럼
자꾸만 멀어진다, 꿈속 아버지
오신 길 헛딛지나 말아야 할 텐데,
엄마가 좋아하던 복숭아를 싸 들고
달빛 강을 무사히 건너야 할 텐데,
아버지는 자꾸 멀어지신다
새벽녘 안개 속 들풀처럼 지워지신다
―「자꾸만 멀어지신다, 아버지」전문
「자꾸만 멀어지신다, 아버지」는 서정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평북 신의주가 고향인 시인의 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목사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애절하다. 한 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아픔으로 점철된 이 시는, 실향민의 외로운 기억 흔적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꿈속에서나마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하는 딸의 애틋함이 사뭇 눈물겹다. 어둠 속 빈 골목에서 서성거리는 귀혼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기억이 주는 슬픔에 맞닥뜨린다. 실제의 죽음보다 더 괴로운 것이 시적 허구의 세계이다. 좋은 서정시는 사람의 심장을 뚫는 힘이 있나 보다. “엄마가 좋아하던 복숭아를 싸 들고 / 달빛 강을 무사히 건너”기를 소망하는 대목에 이르면 숙연하다. 오신 길 헛딛지나 말고 무사히 저승으로 가시길 간절히 바라는 딸의 바램은, 근래 보기 힘든 사부곡(思父曲)이다.「자꾸만 멀어지신다, 아버지」속의 가장 명구는 “새벽녘 안개 속 들풀처럼” 지워지는 아버지의 부제이다.
벽, 그 너머
시는 시 아닌 것과 시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의 아름다움은 근본적으로 시를 구성하는 요소의 유기적 관계망에서 생겨난다. 시적 원리와 시적 질서를 지닐 때, 시는 고급의 언어가 된다. 최치원문학상 본상 수상작인 시,「벽」은 이춘실의 ‘철학적 시 쓰기’의 전범이다.
그녀는 수상 소감에서 시작(詩作)의 태도를 밝힌 바 있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매화는 무엇보다 열매를 일찍 맺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뜻이겠다. 나 역시 젊은 날 종교철학과 음악에 심취한 것은, 훗날 아름다운 시의 열매를 맺기 위한 생의 필연적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철학의 꽃은 시다.’라는 말을 깊이 새기고 산다. 이는 모든 만물이 다 시의 귀한 친구라는 말이겠다. 하여,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는 서정시를 줄곧 써 오면서 느낀 것은, 시야말로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진실과 감동의 세계에 속한다는 점이다. 나는 고운 선생처럼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려”보지도 못했으며, 창 밖에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며, 만 리 밖에 계신 그리운 사람을 애틋하게 그려본 적도 적다. 또한 당대의 불합리한 신분제도에 맞서 시대의 불의에 맞서지도 못했으며, ‘추야우중’,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과 같은 명시와 명문도 남기지 못한 나는, 자못 분발한다.”
붙잡아 놓고 다시 둘러보자
어디에 기쁨이 보람이 있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으니,
편한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고
하늘만큼 높이 우러르던
믿음 무너진 상처
예정된 순서대로 여기까지 왔으니,
아마도 마지막 언덕이겠지
잘 될 거야 한 번 더 힘을 줘 봐
손에 잡힌 마음은 꿈틀대고 있어
놓지 못해 저린 손아귀 단단히 잡아 줘
아니 아니라고 외치는 벽들의 소리
멍든 마음 무엇으로도 힘들다고
틈과 틈 사이 버려두지 말고
어루만져 사랑해 줘, 서로가 아프지 않으려면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해 줘
―「벽」전문
「벽」은 모호하다. 아니, 벽 자체가 철학적하다. 벽은 현실이다. 시의 벽은 최소한의 생각의 기둥과 영혼의 지붕으로 연결되어 있다. 벽은 안과 밖의 세계에 귀를 열어두고 산다. 하여 시인은 벽을 “붙잡아 두고 다시 둘러보자”라고 제안한다. ‘왜 우리들의 세계는 벽뿐인가?’ 묻고 있다. 당신의 벽 안쪽은 안전한가, 편한가, 아님 믿음이 “무너진 상처”의 벽뿐인가? 되묻고 있다. 시「벽」이 주목받은 까닭은, 철학으로 묻고 역설의 시로 답했기 때문이다. 궁극에 가서 인간의 마지막 비빌 언덕은「벽」을 타고 기어오를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음을, 시「벽」은 가리킨다. “잘 될 거야 한 번 힘을 줘 봐” 스스로 위로하면서, 다짐하면서, 꿈틀대는 마음을 다잡고 저린 손아귀를 끝까지 놓지 말기를,「벽」은 간구한다. 너와 나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좌와 우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 둘러쳐진 벽들은, 무너져야한다고 ‘벽’이 외친다. 이 시대 “멍든 마음”을 위로받으려면, “틈과 틈 사이 버려두지 말고 / 어루만져 사랑해 줘”야 한다고, 벽은 인간들을 향해 절박하게 외친다.
맺은 말
이번 이춘실의 시집『바람의 손』은 다양하고 깊다. 편 편마다 절로 곡절과 사유를 들춰보게 한다. 시「쿡쿠CUCKOO」는 시적 착상이 기발하다. 밥솥의 의인화를 통해 여성들이 일상에서 얼마나 ‘쿡쿠’를 의지하는지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신앙인으로써의 자세가 높이 돋보인「하늘 정원」은, 사후 천국의 세계를 나름 상상한 풍경들이 주목할 만하다.「구슬 가족」은 가족들의 소중함을 담담하게 엮은 작품이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이 한 줄의 사랑의 구슬로 꿰어져있다.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쓴「아 절망 절망 대한민국」은 시를 읽는 내내 가슴이 아렸다. 꽃 한 번 피어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간 청소년, 청년들의 죽음을 절통하게 형상화시켰다. 이 시대 어른들의 잘못을 질타하고, 사회 구석구석 만연한 부조리를 고발한 시이다.「카네기 홀」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얼마나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뜻대로 되지 않는 고통의 현실에서도, 음악은 그녀의 희망이었다. 카네기 홀 무대 위에서 백 오십대의 크로마 하프 연주단의 일원으로 연주하며 노래한 그녀는, 평생 음악의 한(恨)을 푼다. 청중들의 기립박수에 그녀는 전율한다.
마지막「기도」시편은 성숙한 자의 내면에서 울려 나온 성찰의 목소리가 맑고 높다. 신앙인으로써의 하나님에 대한 외경을 기도로 답한다. 고달픈 시작(詩作)을 향해 “고통이여, 절망이여, 글쓰기여!”라고 외친다. 이 모든 작업이 “그 분의 힘으로 손을 들고 /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써 내려갔음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어린 양으로써의 그녀는 은혜 받은 시인이다. “길 어두워 무서울 때 /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춘실의 시는 두 가지로 규정된다. 부드럽고 가벼운 신앙의 시와 무겁고 어두운 피란민의 정서다.「평양 곰탕」은 피란길 기차 지붕 위에서 다섯 식구가 어떻게 전쟁에서 살아남았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상처 난 역사의 흑백필름 같다. 부산 시립병원 담장 뒤로 몰래 데려가는 시체들을 바라보며 어린 소녀(시인)는, 온종일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구름을 뜯어 먹는다. 현실의 체험만큼이나 시의 풍경 또한 외롭다. 그렇다. 이번 이춘실의 시집『바람의 손』은, 때로는 서정의 풍경을 따듯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감정의 정화를 통해 철학으로써의 시 쓰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하여, 그녀의 시는 사물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 존재의 비밀을 훔쳐본 노래이자, 종교를 통한 자기 구원의 방식을 ‘시’의 옷을 빌려 독자들에게 걸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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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춘실 선생님
<바람의 손>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