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헤르만헤세 지음
김재혁 옮김
2566. 11. 11
바라문의 아들
집안의 그늘 속에서, 나룻배들이 떠 있는 강가의 햇살 속에서, 사라수 숲의 그늘 속에서, 무화과나무의 그늘 속에서, 바라문의 아름다운 아들인 어린 매는 역시 바라문의 아들인 친구 고빈다와 함께 자랐다.
미역을 감거나, 신성한 목욕재계를 하거나, 신성한 제사를 지낼 때면 그의 밝은 어깨갸 강가에서 햇볕에 갈색으로 그을렸다.
망고나무 숲에서나, 동무들과 놀이 할 때나, 어머니의 노래를 들을 때나, 성스러운 제사 때나, 학자인 아버지의 가르침을 들을 때나, 현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땐자 그의 검은 두 눈엔 그림자가 흘러들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싯다르타는 현인들이 나누는 대화에도 끼였고, 고빈다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침잠법을 사용하여 고빈다와 함께 명상의 기술을 연마하기도 했다.
벌써부터 그는 말 중의 말인 옴을 소리 없이 발하는 법을 익혀 알고 있었다.
맑게 사유하는 정신의 광채를 이마에 띤 채, 들숨과 함께 옴을 소리 없이 안으로 발하고, 날숨과 더불어 옴을 소리 없이 밖으로 발할 줄도 알았다. 이미 그는 마음소게 깊은 곳에서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삼라만상과 하나의 존재인 아트만을 느꼈다.
모든 것을 잘 깨우치고 지식욕에 불타는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가슴속에서는 기쁨이 솟구쳤다.
아버지는 아들이 장차 위대한 현자로 그리고 사제로, 바라문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성장 할 것으로 내다밨다.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볼 때나, 아들이 자리에 앉거나 일어서는 모습을 볼 때면, 그의 어머니의 가슴속에서는 환희가 샘솟아 올랐다.
튼튼한 아들을, 아름다운 아들을, 날씬한 두 다리로 걷는 아들을, 완벽한 예를 갖추어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싯다르타를 볼 떼면,
이마를 반짝이고 날씬한 엉덩이를 흔들며 왕 같은 눈매의 싯다르타가 읍내의 거리를 거닐 때면 바라문의 젊은 딸들의 가슴 속에서는 사랑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들 누구보다 그를 더 사랑한 사람은 그의 친구이자 역시 바라문의 아들인 고빈다였다.
그는 싯다르타의 눈과 부드러운 목소리를 사랑했으며, 그의 걸음걸이와 몸놀림 하나하나에 깃든 완벽한 예절을 사랑했고, 싯다르타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는 그의 정신을, 그의 드높은 불같은 사고를, 그의 불타는 의지를, 그의 숭고한 소명의식을 사랑했다.
고빈다는 싯다르타가 범속한 바라문이나 게으른 제사관, 사람을 홀리는 탐욕스런 장사꾼, 허영심에 빠진 속 빈 웅변가, 사악하고 교활한 사제, 그리고 또한 수많은 양떼들 속에 섞여 있는 멍청하고 순하기만 한 한 마리 양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 고빈다 그 역시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주변에 널린 그런 바라문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멋진 싯다르타를 따르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싯다르타가 신 같은 존재가 된다면, 싯다르타가 언젠가는 빛나는 존재들의 반열에 오른다면, 고빈다는 그의 친구로, 그의 동반자로, 그의 하인으로, 창을 든 그의 호위무사로, 그의 그림자로 그를 뒤따를 생각이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싯다르타를 사랑했다. 그는 모든 이에게 기쁨을 선사했으며, 그는 모두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정작 싯다르타 자신은 기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의 기쁨이 되지 못했다.
무화과나무 정원의 장미넝쿨 흐드러진 길을 거닐거나, 명상의 숲 속 푸른 그늘에 앉아 읶거나, 매일매일 속죄의 물로 손발을 씻을 때나, 짙은 그늘을 드리운 망고나무 숲에서 제사를 올릴 때나, 흠잡을 데 없이 예의바른 행실로 모두의 기쁨이 되어 이들에게서 사랑을 받을 때도 그는 가슴속에서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꿈들이 그를 찾아왔고, 강의 물결을 따라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그에게 밀려왔다.
밤하늘의 별빛에 실려 반짝이며, 햇살에 녹은 채로, 꿈들이 그리고 영혼의 불안스러움이 그에게 다가왔다.
제사의 향에 실려, 읊조리는 리그베다의 시구에 실려, 늙은 바라문들의 가르침에 이슬져 떨어지며 다가왔다.
싯다르타는 가슴속에 불만을 키우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이, 또한 친구 고빈다의 사랑이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도, 달래줄 수도, 마음을 채워줄 수도 흡족하게 해줄 수도 없을 것임을 진작부터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아버지와 그의 다른 스승들이, 그리고 현명한 바라문들이 그에게 자신들이 가진 지혜의 가장 훌륭한 대부분의 것을 전달하였으며, 기다리고 있는 그의 그릇에 그들의 지혜를 가득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릇은 아직 가득 차지 않았고, 그의 정신은 아직 만족하지 않았으며 그의 영혼은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해ㅛ고 그의 심장은 진정되지 않앗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목욕재계라는 것이 훌륭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물일 뿐, 죄를 씻어내지는 못했으며, 정신의 갈증을 낫게해주지도 못했고, 마음의 불안을 없애주지도 못했다. 제사 의식과 신들에게 축원을 비는 일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이것이 전부란 말인가?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행복을 주는가?
그리고 신들이란 무엇인가?
정말로 세상을 창조한 존재는 프라자파티인가?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그 존재, 그 유일자이자 단독자인 아트만이 아닐까?
신들이라는 존재도 나와 너차람 창조된, 시간에 종속된 무상한 형상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지내는 일이 과연 훌륭하고 올바르고 의미 잇는 최고의 행위가 될 수 있는가? 대체 누구에게 제사를 올리고, 대체 누구에게 존경을 표할 것인가,
그 존재, 유일자인 아트만 말고? 그러면 아트만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는 어디에 사는가, 그의 영원한 심장은 어디에서 고동치는가?
누구나 각자 안에 깨뜨릴 수 없이 지니고 있는 가장 내적인 것, 자신의 자아 속이 아니라면 그 어디에서? 하지만 이 자아, 이 가장 내적인 것, 이 궁극의 것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살이나 뼈도 아니며., 사유나 의식도 아니라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은 가르쳤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어디에 있는가? 그곳을 향해, 자아를 향해, 나를 향해, 아트만을 향해 뚫고 들어갈 만한 다른 길이 있는가?
아, 아무도 그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도 그 길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도, 스승들과 현자들도, 그리고 성스러운 제사의 노래들도 그 길을 알지 못했다! 바라문들과 그들의 성스러운 책들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이들은 관여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모든 것 그 이상의 것에 신경을 썼다.
세계의 창조, 말의 발생, 음식의 생성, 들숨과 날숨의 생성, 감각의 질서, 신들의 행위 등, 무한히 많은 것을 그들은 알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단 하나의 유일자, 가장 중요한 것, 오로지 중요한 단 한 가지를 모른다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실제로 성스러운 책들 중의 많은 시구들, 특히 사마베다의 우파니사드에 들어 있는 많은 구절들은 이 가장 내밀하며, 이 가장 궁극적인 것에 대해 아름다운 말로 표현하고 있다.
"너의 영혼이 온 세계이다"라고 그곳에 적혀 있으며, 인간은 잠 속에서 깊은 잠 속에서 자신의 가장 내적인 것에 다가가며 아트만 속에 산다는 말도 적혀 있다. 이 구절들 속에는 놀ㅇ라운 지혜가 마법의 말로 모아져 있다. 지혜로운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지혜로운 바라문들에 의해 집적된 이 어마어마한 인식의 총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심오한 지식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삶 속에서 실천했던 바라문들, 사제들, 현자들 또는 참회자들은 어디 있단 말인가?
아트만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을 마법으로 잠에서 깨워 삶 속으로, 매 걸음마다, 말과 행동마다 되살려낼 수 있는 달인은 어디에 있는가?
싯다르타는 덕망 있는 많은 바라문들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그의 아버지를 잘 알았다. 아버지는 순수한 학자로서 누구보다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정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행동거지가 차분하고 고상했으며, 생활은 깨끗했고, 말씀은 지혜로웠으며 그의 이마에는 곱고 고귀한 생각들이 살고 잇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는 , 그처럼 아는 것이 많은 아버지는 더없는 행복 속에서 살고 있는가.
아버지는 평온을 얻었는가.
아버지 여교ㅣ 구도자, 목마른자에 지나지 않는가?
아버지는 갈구하는 자로서 언제나 거듭하여 성스러운 샘물에서 목을 축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제사를 지내고 책을 읽고 바라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왜, 그렇게 무결점이신 분이 매일 죄업을 씻어야 하는가,
왜 매일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려 애써야 하는가,
매일 새롭게? 아버지 안에는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가?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원초의 샘이 흐르지 않나?
바로 그 원초의 샘을 찾아야 한다.
자기 안에 있는 원초의 샘을, 이 원초의 샘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제외한 다른 것은 모두 탐색, 우회, 착오에 지나지 않는다.
싯다르타의 생각은 이와 같았다. 이것이 그의 갈증이었고, 이것이 그의 번민이었다.
그는 찬도기아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다음 글을 읊조리곤 했다.
"참으로 브라만이라는 이름은 진실이다.
이것을 아는 자만이 나라다 천상의 세계로 날마다 들어간다."
천상의 세계가 가까워오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기는 했지만, 한 번도 그는 그 세계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궁극적 갈증을 풀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 가르침을 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현자들,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 중에서도 그 천상의 세계에 완벽하게0 도달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영원한 갈증을 완전히 푼 사람도 없었다.
"고빈다" 싯다르타는 친구에게 말을 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