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08-11-05 18:31 |최종수정2008-11-05 23:31
“저는 케냐 출신 흑인 남성과 캔자스 출신 백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를 키워준 백인 외할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때 패튼 군단에서 복무했고, 할아버지가 바다 건너 전쟁터에 가 있는 동안 백인 외할머니는 폭격기 생산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들을 나왔고, 세계 최빈국 중 한 곳에 산 적도 있습니다. 노예의 피와 노예 소유주의 피를 함께 물려받은 흑인 여성과 결혼해서 이 혈통을 사랑하는 두 딸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피부색의 형제자매, 조카, 삼촌과 사촌들이 3개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연이 저를 일반적인 후보자들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4일(현지시간)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는 지난 3월18일 필라델피아에서 행한 ‘인종 연설’에서 다인종·다민족·다문화적 특성을 지닌 자신의 삶을 이렇게 축약했다.
정신적 스승인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의 ‘갓 뎀 아메리카(빌어먹을 미국)’ 발언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다. 그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큰 인종문제를 회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제기했다.
정치적 모험이었다. 하지만 당장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긴 호흡을 갖고 승부수를 던지는 오바마의 진면목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오바마의 인생은 이처럼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 ‘아웃사이더’에서 ‘코스모폴리턴’으로
오바마는 1961년 8월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태어났다. ‘버락’이라는 이름은 ‘축복받은’이란 뜻이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순탄치 못했다.
케냐 루오족 출신인 오바마의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는 하와이대 역사상 첫 아프리카 학생이었다. 케냐 지도자와 미국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온 참이었다.
경제학을 전공하던 그는 캔자스 출신 백인 여학생 스탠리 앤 던햄과 사랑에 빠졌다. 던햄의 아버지는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젊은 연인들은 60년 보금자리를 꾸미고 아들도 낳았다.
18세 소녀 던햄이 독립적이고 진취적이었기에 가능했던 ‘사건’이다. 당시는 미국의 전체 주 가운데 절반가량이 흑백 인종간 결혼을 불법으로 규정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한 행복은 짧았다. 63년 하버드대에서 박사과정 장학금을 받게 된 아버지는 홀로 하와이를 떠났다. 장학금에 가족의 생활비는 포함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부모는 그가 두 살 때 이혼했고, 아버지는 케냐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역시 대학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유학생 롤로 소에토로와 재혼해 66년 아들과 함께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오바마의 교육에 헌신적이었다. 한 주에 다섯 번씩 새벽 4시면 아들을 깨워 3시간 동안 영어를 가르쳤다.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을 읽게 하고, 미국 최초의 흑인 판사 서굿 마셜에 대해 말해주기도 했다.
어머니의 재혼이 다시 파경을 맞자 오바마는 어머니, 여동생 마야 소에토로-응과 함께 외조부모가 사는 하와이로 돌아왔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 오바마는 아버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재회했다. 하와이를 찾은 아버지는 농구공을 선물했다. 어린 오바마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농구를 했다”. 그는 푸나호우 고교 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운동으로 농구를 꼽는다. 케냐 정부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82년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오바마의 아버지는 몇 차례의 결혼에서 오바마를 포함해 8명의 아이를 얻었다. 여기에 어머니가 재혼해 낳은 여동생 마야까지 합하면 오바마의 형제자매는 모두 9명이 된다.
이들은 미국 본토와 하와이, 케냐, 중국 등 전 세계에 퍼져 ‘글로벌 패밀리’를 이루고 있다.
인류학도이던 어머니는 하와이로 돌아온 지 3년 만에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현지 연구와 사회운동을 위해서였다. 여동생 마야도 함께 떠났다. 외조부모의 집에 홀로 남은 오바마는 인종문제로 정체성 갈등을 겪었다. 농구에 미쳤고 술과 담배, 마약에도 손을 댔다. 그런 그를 따뜻이 감싸안은 이는 외할머니 매들린 던햄이었다. 미국 일간 시카고트리뷴은 “오바마의 어머니가 세계를 보는 눈을 키워준 ‘날개’였다면, 외할머니는 바위 같은 안정감과 미국인으로서의 뿌리를 심어줬다”고 전했다. 오바마가 ‘투트’라는 애칭으로 부르던 매들린은 손자의 백악관 입성을 보지 못한 채 대선 이틀 전인 지난 2일 눈을 감았다. 앞서 어머니 스탠리 앤은 95년 난소암으로 세상을 떴다.
오바마의 고교 시절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하지만 이 무렵 겪은 아웃사이더로서의 방황은 오바마에게 ‘쓴 약’이 된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관용을 체득함으로써 그는 ‘코스모폴리턴 오바마’로 거듭난다.
# ‘배리’에서 ‘버락’으로
고교를 졸업한 오바마는 하와이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간다.
LA의 옥시덴털대에 입학한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써오던 ‘배리’라는 애칭을 버리고 본명인 ‘버락’을 사용하게 된 것이 방증이다.
오바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인종 분리정책)를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하는 등 정치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좀더 시야를 넓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뉴욕 컬럼비아대 정치학과에 편입했다. ‘새 사람’이 된 듯 마약을 끊고 음주도 자제하며 학업에 열중했다.
방황하던 혼혈소년 대학 입학하며 정체성 찾기 시작 4년전
‘담대한 희망’ 연설… 전국구 스타로 떠올라
오바마는 1983년 대학을 마친 뒤 짧은 컨설팅회사 생활을 거쳐 85년 풀뿌리 사회운동가의 길로 접어든다. 시카고의 가난한 흑인들이 모여사는 ‘사우스 사이드’에서 주민들의 주거·교육환경 개선 등을 위해 헌신했다. 아이비리그 졸업생에게 걸맞지 않은, 연봉 1만2000달러짜리 일자리였지만 열정적으로 일했다. 후일 오바마는 이때의 경험이 정치력과 소통 능력을 키워줬다고 술회한다.
“빈곤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와 권력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오바마는 3년간의 시카고 생활을 마무리하고 하버드대 로스쿨에 들어간다.
이 시절 로스쿨 학회지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하버드 로 리뷰’의 첫 흑인 편집장이 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쓰게 된 것도 이 일이 계기가 됐다.
하버드에 몸담고 있을 때도 시카고와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여름방학 때 인턴 실습을 위해 찾은 시카고의 로펌에서 반려자 미셸 로빈슨을 만난 것이다. 그는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 토박이인 미셸의 ‘안정감’에 끌렸다. 세 살 아래지만 선배 변호사인 미셸은 처음에는 로펌의 규정을 들어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결국 마음을 열었고 두 사람은 92년 결혼했다.
사상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가 된 미셸은 프린스턴대와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와 시카고대학병원 대외업무담당 부원장을 지낸 커리어우먼이다. 이번 선거운동 과정에서는 가난한 노동자 가정 출신임을 강조하며 ‘보통 흑인’들이 오바마에게 느끼는 거리감을 메워줬다.
오바마는 “공직 선거에서 아내와 경쟁하면 내가 틀림없이 질 것”이라며 “아내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말할 만큼 미셸을 높이 평가한다. 부부에게는 두 딸 말리아(10)와 사샤(7)가 있다.
# 정치가로 그리고 백악관으로
결혼과 함께 ‘제2의 고향’ 시카고에 정착한 오바마는 민권소송 전문 변호사와 시카고대 로스쿨 교수로 일한다. 유권자 등록 운동을 시발점으로 차근차근 기반을 쌓은 그는 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98년 주 상원의원으로 재선된 오바마는 더 큰 꿈을 품고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하지만 민주당 내 경선에서 고배를 마신다.
오바마의 정치적 도약대는 2004년 7월 민주당 전당대회였다. 존 케리 당시 대선후보에 의해 기조연설자로 선정된 그는 “진보적인 미국, 보수적인 미국은 없다. 흑인의 미국, 백인의 미국, 라틴계의 미국, 아시아계의 미국도 없다. 하나의 미국이 있을 뿐이다. 불안 속에서도 담대한 희망을 갖자”고 역설했다.
연단에 오르기 전 무명의 주 상원의원에 불과하던 그는 연단에서 내려설 때는 ‘전국구 스타’가 돼 있었다. 넉 달 후 오바마는 흑인으로서 유일하게 연방상원에 입성했다.
2006년 오바마가 자신의 연설 내용을 딴 두번째 저서 <담대한 희망>을 펴낸 것은 더 큰 꿈을 향한 신호탄이었다. 그는 2007년 2월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옛 주정부 청사 앞 광장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이곳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투쟁을 선언한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만 해도 오바마의 출마 선언은 무모해 보였다. 40대 초선 상원의원이 ‘거함’ 힐러리 클린턴을 격침시킬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그러나 올 1월 민주당의 첫 경선지인 아이오와에서 승리를 거두며 거센 돌풍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변화와 희망의 메시지는 미 대륙 전역에서 ‘오바마니아(오바마+마니아)’를 양산했다. 힐러리와의 치열한 경쟁 속에 오바마는 혹독하게 담금질됐고 결국 6월 초 경선 승리를 결정지었다.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후보로 공식 확정되며 순항하던 ‘오바마 호’는 9월 초 암초를 만났다. 무명의 정치 신인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돼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다. 하지만 ‘페일린 바람’은 잠시였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을 시작으로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가 덮치면서 오바마는 다시 승기를 잡았다. 침착하고 냉정한 그의 대응은 ‘위기에 강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심었다. ‘준비 안 된’ 페일린의 잇단 자책점도 보탬이 됐다. 선거 막판 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오바마=사회주의자”라며 네거티브 전략까지 동원했지만 그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하와이에서 나고 인도네시아에서 자란 흑백 혼혈 소년의 ‘담대한 희망’은 역사를 만들어냈다.
<김민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