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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가치체계에 반하는 긍정적인 말(사고)과 적극적인 사고의 위험성에 대해서 >
(비 성경적인 언어의 가르침과 인본주의 극치) 글 : 김 강 석 목사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긍정적인 말이 긍정적인 사고로 이어진다는 논리의 가르침을 어디서든지 빈번하게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특히 직장인들이나 청년 사업가나 아니면 학교나 관공서나 교회나 누구나 그 말에 대해서 선호하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지 아니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된다고 하기 보다는 된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뛰어들기 때문에 그러한 긍정적인 사고는 자기 스스로에게도 힘을 주지만, 더 나아가 이를 듣는 상대방에게도 힘을 주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물에 대하는 태도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생각과 언어 표현의 차이가 만드는 그 말 한마디의 차이가 실제로 결과에서도 서로 다른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논리의 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때 대한민국의 재계를 이끌며 많은 청소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던 전 김우중 대우그룹회장도 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자기 스스로에게도 긍정화법인 어퍼메이션(Affirmation)을 쓰면 좀 더 동기부여가 되고 긍정적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책을 써서 주창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하면 된다 라는 슬로건을 내 세우면서 청년들아! 일어서자 꿈을 품고 세계로 펼치자! 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먼 빈센트 필 이라는 사람이 쓴 적극적 사고방식을 주창한 그의 글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적극적으로 생각하라, 생각하는 대로 된다, 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맥락에서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주창했던 미국에 열풍을 가져온 로버트 슐러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인 론다 번(Rhonda Byrne)은 긍정적인 생각의 중요성을 역설한 주창자로 그의 저서이자 베스트셀러인 『시크릿(The Secret)』의 핵심 메시지로 세일즈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며 인기를 끌었던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개인이 마음만 먹으면 현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특히 긍정적인 생각의 중요성을 역설한 론다 번은 그의 저서 『시크릿』의 핵심 메시지로서 '끌어당김의 법칙(Law of Attraction)'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끌림의 법칙, 인력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끌어당김의 법칙은 "Like attracts like", 즉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즉, 뭔가에 대해서 생각하면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실제로 효과가 없는 것도 맹신하는 것으로 그 심리적 효과를 본다는 '플라시보 효과' 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끌어당김의 법칙은 그 첫째로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되, 부정적인 부분이 아닌 긍정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 째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믿고 그게 곧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개인의 자기계발은 물론 기업 세일즈에서도 적극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긍정적인 사고는 사람을 희망으로 이끌고, 또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는 행복한 결과가 될 것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는 불행한 결과가 될 테니까 고로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지게 되어 있다는 이러한 논리는 오늘날 기독교신앙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보편적인 다수의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부정보다 긍정을 선호하며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안에도 발 빠르게 대응하여 등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미국의 조엘 오스틴 목사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원하는 대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와 적극적인 자세로 희망을 가지라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한때 번영신학으로 유명했던 조엘 오스틴 목사의 주요 메시지였습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는 이런 메시지를 주창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에너지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활발히 사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인 <긍정의 힘>과 < 잘 되는 나> 에 대하여 긍정적인 낙천적인 성격을 개발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논리로 긍정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인 것처럼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법률에 따라 세상을 운영하시며, 믿는 이들의 믿음 충만한 명령과 욕구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하면서, 그는 대중에게 가르치기를 말을 해야 합니다! 당신의 말은 창조적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는 주 된 길은 우리의 말입니다!
그러하기에 당신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호의와 당신이 하나님의 호의를 선포하는 데에는 중요한 영적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하나님의 초월하시는 호의를 실제로 경험하신 분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하게 말로 선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조엘 오스틴 목사는 주창했습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이러한 중요한 그의 핵심 메시지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도와 그 잠재력을 개발하고자 합니다. 종교의 힘이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기쁨과 평화와 승리를 맛보고자 합니다! 인생을 승리하고자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믿는 사람을 돕고자 하십니다! 기억하십시요!
우리의 말이 성취 될 예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무엇이 닥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래를 예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당신의 말로 분위기를 바꾸어야 합니다! 좋은 것들을 부르십시요! 왜냐하면 승리를, 건강을, 넘치는 삶을, 그것이 여러분의 미래가 되기 때문입니다! ” 라고 설파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의 조엘 오스틴 목사인 그는 믿음이라는 단어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만을, 좋은 인생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그는 주창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은 맞지만 자신이 정말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앞에서 완전히 항복을 하는 행위가 신앙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 육적 자아에 대한 자기부정, 자기부인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도 마16:24절에서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 사람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의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과 야망을 이 땅에서 이루려고 했던 세상의 가치들을 말합니다.
또 다른 말로 힘의 논리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이 세상의 가치질서인 문화와 전통과 풍습과 관습, 상식에 따라 움직이며 살던 습관들이 이미 내 몸에 수년 동안 살아오면서 익숙하게 체질화 되어 있어서
그것이 양파껍질처럼 하나하나 겹겹이 쌓여서 나를 사로잡아 이 세상에 안주하도록 움직이고 있는 동인의 역할을 하는 그걸 가리켜서 옛 사람적 육적자아, 또는 자기아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자아가 뭡니까?
본래 철학에서 사용 된 용어입니다. ego = 개개인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내면의 실체를 말합니다.
한자로는 “ 스스로 自, 나 我”자를 씁니다. 어떻게 씁니까? 손수 변(手)에 창과(戈) 자를 씁니다.
이걸 해석해 보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내 손에 잡고 있는 것이 ”자아“입니다.
그런데 이걸 신앙 안에서 실행하거나 성숙시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기지식( 자기상식)에 기반을 두고 자기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못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삶으로 지향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롬10:2-3절 기록에서처럼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자기 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걸 가리켜 죽음(사망)이고 죄라는 것입니다. 악입니다. 자기주체적인 삶의 자리를 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래 인간은 피조물로서 객체의 자리에서 주체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끌려가는 삶의 자리인 객체로 그냥 서야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망(죽음)의 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스로 붙들고 있는 이 창(戈=我)을, 스스로 챙기고자 하는 자기 긍정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사고를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을 붙들며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환경과 상황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체(주인)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나를 통치하시고 주관해 가심으로 인하여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개발하거나 개척할 수 없다는 그 자리로 그냥 끌려가는 것, 그 객체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는 것을 가리켜 자기부정,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져야할“나”라고 하는 그 옛 사람적 그 육적 자아의 질그릇들이 겹겹이 쌓여서 자기의 방어 기재로( defense mechanism ) 삼고 자신을 숨기며 위장하고 포장하며 살아갑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라는 그 인본주의 틀 속에 묶여서?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그렇게 가장하고, 위장한 자기정체성을 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의 자신의 실상, 자신이 갖고 있던 자격, 조건, 능력, 배경, 열심 등으로는 하나님께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한 실체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식하는 것이 아! 나는 참으로 무능한 존재였구나! 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게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고, 이걸 자기부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옛 사람적 그 육적자아는 하나님나라 백성 됨의 삶의 원리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에 대하여(이 세상의 가치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마치 공동묘지에 그 수많은 시체들처럼 이제 더 이상 세상과 교통이나 교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도 시체들은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두렵다거나, 공포스럽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체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하여 아무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는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이 세상에서 시체들이라고 자처하며 사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처하는 환경이나 그들이 성취하는 성공이나 실패, 소유의 다소, 이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공격에도 반응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요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 시체이니까요?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했으니까? 그리하여 본래 피조물의 죽은 흙의 자리, nothing, 무능력자라는 그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고 자각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그 자리로 변해 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순종이라는 뜻은 내 뜻과 내 의가 하나님의 뜻 앞에서 꺾이고 부수어지는 자기부인의 삶을 가리켜 순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세례요한은 요 3:30절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여 왔다고 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하면서 참 된 보화를 드러내기 위해 세례요한 자신은 깨어져야할 질그릇으로서의 역할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타깝게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이 미국의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적인 사고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성경 빌4:13절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이 말씀을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으로 인해 “내가 뭐든지 믿습니다! 주여! 삼창과 함께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로 이해하여 성경의 본래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해석상의 오류를 낳게 함으로써 인본주의 신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도 무비판적으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데 그 문제가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본주의 사상은 하나님과 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적적인 사고방식은 스스로 도울 수 있고 자기발전, 자기계발, 자기완성이라는 심리학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엘 오스틴 목사인 그는 단지 축복을,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것들을 얻고 누리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결정적인 문제는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서 떠나 있다는 점입니다.
빌4:11-13까지를 잘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고 자 하는 의도는 이 땅의 굶주림, 배고픔 그런 부요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그 말씀이 없는 그 상태의 굶주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내가 알았고, 그걸 아니까 어떤 게 진짜 풍요인지 내가 이제 알게 되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게 풍요에도 처하고 비천에도 처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한 말입니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감옥도 견더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기가 바리새인으로 율법주의의 대표적 선두주자로 열심히 쌓아 왔던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의 것, 현상계 이게 나를 배부르게 하는 게 아니구나! 이게 인간의 가치를 결정 짓는 게 아니구나! 하고 사도바울이 깨달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배고픈 자가 맞구나! 굶주린 자가 맞구나! 그래서 나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배불러야 되는 거구나! 그래서 그러한 굶주림 속에서 그 하늘의 풍요를 깨달아 안자가 되었다, 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사고는 우울증을 앓는 환자들에게 있어서 심리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가 주창하는 긍정적인 사고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인본주의에 근거하는지 성경에서 근거하는지 마치 베뢰아 사람들처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조엘 오스틴 목사는 인간을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존재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자칫 잘못 이해하면 인간이 스스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생각하게 만들어 성도들이 자신이 구원에 일부 공헌했다는 알미니안주의적인 사고의 착각을 가질 염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런 생각은 상대적으로 다른 가난하며 병든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보단 정죄의 눈빛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 인간을 철저히 실패하고 타락한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롬3:9-19 )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함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는 하나님께로 나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롬3:23-24/ 엡2:1-8/렘31:31-34/요14:26/요15:26/요16:13).
이를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그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성취 될 그 미래에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긍정적인 사고가 아니라 능동적인 사고입니다. 믿음에 의해서 격발 된 발휘된 행함 말입니다. (약2:22절 “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이처럼 믿음과 행함이 동전의 양면처럼, 손바닥과 손등처럼, 두 기찻길의 레일처럼 서로 불가분의 관계(an inseparable relation, 나눌 수 없는)에 놓여 있어서 그 믿음이 신자를 장악하여 하나님이 소원을 두시고 기뻐하신 뜻대로(빌2:13) 이끌어 가신다는 점입니다.
즉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의 관계이나 그 행함까지도 주님의 주권적 은혜로 가능함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기에,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믿음이 신자 안에서 격발되고 발휘되어서 행함으로 수반되는 동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열매 맺음의 신자의 삶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긍정심리학(肯定心理學, 영어: positive psychology)은 개인과 사회를 번영시키는 강점과 장점을 연구하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심리학의 한 분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것보다 일반적인 인생을 보다 충실히 하기 위한 연구가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 긍정심리학은 자신을 위한 삶과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같은 한 방향으로 놓이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보편적인 인간 본연의 삶에 이바지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 메시지의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그러나 반면에 우리 기독교적 가치체계 평가에서의 그러한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사고는 보편적인 인간을 극대화 하는 측면에서 보면 좋은 것을 수도 있지만 반면에 기독교적인 가치체계에서는 알미니안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아주 나쁜 가르침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간의 긍정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사고는 보다 개체 자연발생적인 능력 개발을 보다 중시하는 심리학의 한 분야로서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사고는 하나님과 대척점에 선 인본주의 사상의 토대가 되어 하나님과 대적 관계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는 것으로 성경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 때 사랑의 교회를 담임했던 고 옥한흠 목사는 주일설교를 통해서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일침을 놓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서 기독교의 본질이 되는 진리의 말씀을 교인들이 지겨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라고 서두의 운을 때면서
요즘 한국교회가 단 것만 좋아하는 어린아이처럼 기분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한다 라고 평가하면서 교인들이 그저 무엇이나 믿고 구하면 이룬다는 소원성취의 말이나 좋아하고, 예수 믿는 목적이 마치 무병장수에 있는 것처럼 기복신앙과 맘몬주의 사상에 물든 한국교회를 비판했습니다. 고 옥한흠 목사는 또 목회자를 향해서도 예수님을 바로 가르쳐야 된다 라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조엘 오스틴 목사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았는데 <긍정의 힘>과 <잘 되는 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개발하면 성공한다는 것과 긍정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인 것처럼 본질을 왜곡해 사람들을 혼란케 만드는 대표적인 인물이다고 성토하면서 다분히 심리학적이고 자기체면적인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성경 말씀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옥 목사는 이어서 조엘 오스틴이 전하는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 정말 심각하다고 이야기 하면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이 그게 무슨 진리입니까? 그게 무슨 복음입니까? 라고 되 물으면서 결론으로 긍정의 원천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시고 복음의 본질 또한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옥 목사는 죽음은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건널목입니다, 그러나 그 건널목은 넘어가는 곳이지 종점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데 그 때 정말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그 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라고, 자신의 교인들에게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늘 물어야 합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하여, 그리고 무엇을 좇아서,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살고 있는지 다시금 확인해 보는 것도 각자 자신의 몫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바울도 자신의 서신서에서 자신의 실상과 형편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아래와 같이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 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내가 생각건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찬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4:9)---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 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10-13)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