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사
1. 개요[편집]2014년부터 시작되어 2022년 전면전으로 번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다.
러시아는 과거 소련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옛 소련의 영역은 자신들의 영역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옛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들이 이러한 러시아의 팽창주의가 두려워 NATO에 가입한 것은 물론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국이었던 나라들도 NATO에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구소련의 중요한 구성국이였던 우크라이나도 초기에는 친러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머물렀으나, 점차 러시아가 후원하는 친러 세력들에 피로감과 회의감이 쌓여간 우크라이나에서 친러 진영들은 그 영향력을 잃어갔다. 끝내 유로마이단 혁명과 존엄의 혁명으로 친러정권은 우크라이나에서 붕괴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뚜렷하게 이탈하리라 여겨졌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러시아 내부에서는 경제적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푸틴 정권의 민족주의 운동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결국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우크라이나의 의지와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영향권에 종속시키려는 러시아의 욕망이 동시에 표면화됐다. 이는 공산주의와 냉전체재의 수혜자였으나 소련 해체 후 쇠퇴하고 있는 돈바스와 크림반도를 중심으로 호응을 얻었고,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이라는 유혈 사태로 발전했다.
이러한 분쟁에서 우크라이나가 친러 반군들을 소탕하지 못하고 지리멸절하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손쉽게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오판 + 나날이 커지는 민족주의/팽창주의 열풍에 심취하며 우크라이나 전역을 확보할 결심을 한다. 결국 2022년 2월 24일 현지 시각 새벽 5시 50분경, 러시아의 포병대와 미사일 부대가 전면적인 포격을 시작으로 "특수군사작전"을 선포, 러시아 기갑부대와 공수부대가 벨라루스-돈바스-크림반도 세방향에서 전격전을 시도하면서 본격적인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미국과 반미 세력 간의 신냉전과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의 갈등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국내에서는 러우 전쟁 혹은 우러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 침공" "대전쟁(2022~)" "반테러 작전/ATO(2014~2018)" 등으로 불리며, 러시아에서는 "특수군사작전/SMD(2022~)" "ZVO(CBO, 2022~)" 등으로 불린다
2. 배경[편집]2.1. 역사적 배경[편집]우크라이나는 본래 러시아, 벨라루스와 함께 루스족(동슬라브)으로 분류되는 민족의 국가였다.
실제로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 모두 자신들의 민족적 근간을 키예프 루스로 생각한다.[1] 하지만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이들의 운명이 나뉘게 되었고, 훗날 모스크바 대공국이 우크라이나 지역을 재정복하고 루스 차르국으로 다시 하나가 될 때까지 수백 년 동안 나뉘게 되었다.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이 다시 하나가 된 것이 16세기 경이었으나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이 외세로부터 재수복한 지역의 루스족 동포를 2등 국민 취급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들의 차별 때문에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유지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인들과 루스인들은 범슬라브 민족과 루스 문화권이라는 같은 틀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갈등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 치하에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 치명적인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2차 대전기에는 스탈린의 차별로 인해 불만을 가진 우크라인들이 나치의 침략에서 독일 편을 드는 등, 갈등이 매우 심화되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령이었던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할양하는 등, 우크라이나인들 달래기에 매진했으나, 이미 깊어진 골은 치유하기 힘든 수준이 되었다.
소련이 해체될 당시, 우크라이나는 발트 3국과 더불어 소련으로부터의 분리에 가장 적극적인 구성국이 되었다. 하지만 스탈린 시절 우크라이나의 공업화를 우크라이나인이 아닌 러시아인들이 했었고, 이런 기조를 후에도 유지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공화국에는 러시아계 혹은 친러시아 우크라이나인이 상당수 있었으며, 이들이 독립 당시 우크라이나를 지배했기에 우크라이나의 친러 기조가 기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민족은 반러 성향인데 국가는 친러 성향인 기형적인 구조는 유로마이단으로 해소되게 되었고,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