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프의 장밋빛 인생
유수 설창환
“내 인생은 잿빛이었으나 내 노래는 장밋빛이었다.”
피아프는 자신의 이 말을 ‘장밋빛 인생’으로 승화시켰다.
피아프는 1915년, 프랑스의 한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길거리 곡예사였고, 어머니는 삼류 가수였다. 피아프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는 전쟁터로 징집되고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두고 가출해 버렸다. 피아프는 어린 시절을 춘희 틈바구니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그는 키가 142cm밖에 자라지 않아 후일, 참새라는 뜻의 피아프(Piaf)라 불렸다. 그의 본명은 Edith Giovanna Gassion이다.
피아프는 14살 무렵부터 아버지를 따라 길거리에서 노래를 시작했다. 어느 날 클럽 사장이었던 루이 르플레가 그녀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는 단번에 피아프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기 클럽에서 노래하게 했다. 덕분에 피아프는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 사장 르플레가 암살되는 바람에 다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다 이번에는 시인 레이몽 아소의 눈에 띄어 고급 클럽이었던 물랑루즈에서 노래하게 되었다. 아소는 피아프에게 경제적인 지원과 함께 연주에 필요한 모든 테크닉을 세세하게 지도했다. 덕분에 피아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 무렵 무명 가수였던 이브 몽탕이 클럽에 나타났고, 피아프는 잘 생긴 그가 마음에 들었던지 세심하게 지도했다. 그 덕분에 이브 몽탕도 빠르게 스타가 되었다. 둘은 결혼하였고 행복하게 살았다. 이 시기에 발표된 곡이 ‘장밋빛 인생’이다. 후일, 이 제목으로 피아프의 일생을 그린 영화도 제작되었다.
행복했던 결혼생활도 이브 몽탕의 배신으로 끝이 나고, 이번에는 세계 미들급 복싱 챔피언이었던 마르셀 세르당과 사랑에 빠졌다. 피아프는 공연차 미국에 머물고 있었고 파리에 있던 마르셀에게 보고 싶다고 연락했다. 마르셀은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던 중, 그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여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피아프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고 실의에 빠졌다. 후일 피아프는 자기가 만난 많은 남자 중에서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마르셀뿐이었다고 토로했다.
피아프는 그때의 심정을 노랫말로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적인 샹송 ‘사랑의 찬가’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져버린다 해도
그대가 날 사랑한다면 두려울 것 없으리
캄캄한 어둠이 내리고 세상이 뒤바뀐다 해도
그대가 날 사랑한다면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마르셀을 향한 애절한 노래였다.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고 프랑스의 대표적인 샹송이 되었다. 이렇게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슬픔을 노래하는 것으로 간신히 버티던 중, 이번에는 본인이 큰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그 고통을 참기 어려웠던지 술과 마약에 의존하게 된다. 피아프는 급격하게 건강을 잃어갔지만, 노래만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는 노래를 발표하여 다시 크게 히트한다.
이미 쇠약한 몸은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한 채, 길지 않은 48세의 일기로 1963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장례식에는 4만여 명의 문상 행렬이 줄을 이었고, 수많은 사람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저명한 시인 장 콕도도 그 모습을 보았고 너무나 슬피 울다 뇌출혈로 사망했다고 한다. 생전 장 콕도는 피아프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피아프 이전에도 피아프는 없었고, 피아프 이후에도 피아프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죽은 이후에도 그의 앨범은 매년 15만 장 이상 팔릴 정도로 그녀의 인기는 시들지 않았다. 보통 ‘오! 솔레미오’ 같은 이탈리아 칸초네는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하지만, 프랑스 샹송은 그에 비해 조금은 낯설다. 샹송은 프랑스의 대중적이고 전통적인 노래이다. 곡의 특징도 칸초네와는 좀 다르지만, 노랫말이 ‘프랑스어’이다 보니 발음에서 오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무언가 멜랑꼴리하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대구의 모 예술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는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사랑의 찬가’가 필수곡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이 노래는 학생들도 좋아하는 곡이었기에 나는 매년 3월이 되면 앞서 가르치곤 했다. 이 노래를 부를 때면 가르치는 선생이나 배우는 학생들 모두 가슴이 뭉클하였다. 노래하는 학생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애틋한 감정이었다. 나의 서툰 피아노 반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생들은 심취해서 불렀다.
“그대가 원한다면 하늘의 달이라도 따다 바치겠어요
그대가 원한다면 조국도 버릴 수 있고 친구도 버리겠어요
사람들이 비웃을지라도 나에겐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요”
가사가 매우 과장되었다고 느꼈으나 단지 시적인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다. 얼마나 사랑하면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때는 피아프의 일생을 잘 알지 못했다. 만약 자세히 알았더라면 훨씬 더 감동적이었으리라. 그런데 내가 퇴직할 무렵, 이 노래는 음악 교과서에서 거의 사라졌다. 혹 있더라도 요즘 학생들에게는 그 옛날의 뭉클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대중가요, 특히 랩 음악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에게는 단지 지루한 노래에 불과한 듯했다. 음악적 기호가 많이 변해감을 실감한다.
피아프의 삶은 매우 처절하고 치열하였지만, 그녀의 노래는 지극히 아름다웠다.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그가 떠난 지 6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즐겨 부르고 있다.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다. 치열하고 처절했던 그녀의 삶은 비록 잿빛이었으나 그녀의 노래가 장밋빛이었기에 그녀의 인생도 함께 장밋빛이었으라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