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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강해(2)
골 1:3~8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우리가 방금 읽은 3~8절의 말씀을 원문에서 확인해 보면,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을 한글로, 영어로 번역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보니, 나누어서 번역했지만, 원래는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3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사도 바울, 디모데, 함께 했던 동료들은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확인됩니다.
첫째, ‘들었기’ 때문입니다.
4, 8절에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에바브라가 알려준, 골로새 교회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었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를 방문한 적이 없습니다. 그곳에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믿음, 사랑, 소망’으로 연합된 교회가 존재한다는 소식에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참으로 기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둘째, 바울과 그의 동료가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던 이유는
‘6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바울의 강조점은 ‘이 복음’에 있습니다.
‘이 복음이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로새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에바브라’입니다.
그가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폴리스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서 신앙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근데, 에바브라가 전하는 소식을 듣는 중에, 바울 눈에 보였던 것은 복음 스스로 골로새 성도들에게 도달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복음을 전한 사람은 에바브라이지만, 오히려 바울 눈에는 복음 자체가 갖고 있는 역동성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문에서도 ‘이 복음이 여러분에게 도달하였고’로 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바울을 이방인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복음이 바울을 통하여, 에바브라를 그리스도인되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이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 성도를 세웠습니다.
고전 3:4~7절을 읽어 드립니다.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여기서,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에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표현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과 비교해 볼 때, ‘무가치하다’는 표현입니다. 즉, ‘자라남, 열매 맺음(골1:6)’은 오직 하나님만의 주권적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과 디모데는 에바브라가 전해 준 소식을 들을 때,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행하심’이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간직해야 할 중요한 믿음의 내용입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골로새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했습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4절부터 나오는데요, 4, 5절만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영어 성경을 보면, 4절은 ‘because’ 시작됩니다.
이유를 세 단어 요약하면,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순서가 우리가 흔히 알고 순서와는 다르죠? 우리 귀에 익숙한 순서는 고전 13:13에 나와 있듯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입니다.
근데, 바울은 여기서 ‘믿음, 소망, 사랑’이 아닌, ‘믿음, 사랑, 소망’으로 기록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에 확인해 보기로 하고, 이 세 가지 덕목을 모두 다루면, 시간이 너무 걸리기에, 오늘은 ‘믿음’에 대해서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첫째, ‘믿음’입니다.
우선, 바울이 에바브라를 통해 들은 것은 골로새 성도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대한 믿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추상적인 믿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막연한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목적어가 분명한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들었던 그들의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에바브로를 통해 들었으니, 바울은 참으로 감사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성도를 방문한 적이 없고, 그들을 만난 적도 없고, 그들에게 설교하거나 가르친 적도 없지만, 들려주는 소식을 들어보니,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너무나 분명히 하고 있으니,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이죠.
우리가 믿음을 얘기할 때, 제일 중요한 사실은 믿음의 대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바울은 고전15:1~5에서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적어 놨습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즉, 우리는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을 믿어야 하며,
‘성경대로’ 그분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처럼, 믿음은 대상과 내용이 분명해야 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소요리, 대요리 문답, 벨기에(벨직) 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을 꼭 공부해 보시길 바라며, 그중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1 문답을 보면, 이렇게 묻고 답합니다.
21문 :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답 :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확실한 지식이며, 동시에 성령께서 복음으로써 내 마음속에 일으키신
굳은 신뢰입니다. 곧 순전히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나에게도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지식에 대한 확신이며, 동시에 성령께서 복음으로써 내 마음속에 일으키신 굳은 신뢰를 말합니다. 확신과 신뢰,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막연하지 않고,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고전15장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증거하는 믿음은 말씀의 지식에 대한 확신 그리고 굳은 신뢰입니다. 성경대로, 역사적 사건으로 일어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묻히심, 부활입니다.
이런 복음의 내용 위에 서 있는 골로새 성도들의 소문을 들으니, 바울은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근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즉, 바울이 참으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던 이유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믿음의 유지’입니다.
골2장을 보면, 골로새 성도들을 미혹하려는 적극적인 시도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여기서 바울이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를 직접 거론하는 대신에, “누가”(2:8), “어떤 사람”(2:16), “아무도”(2,4,18)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아직은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 직접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골로새 성도들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혹은 각자의 삶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골2:5에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기뻐하면서 보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즉, 거짓 교사들의 위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골로새 성도들은 질서 있게 행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믿음이 굳건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의 신실함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 안에 숙제로 삼고, 잠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두 나라에 속한 백성입니다.
1:2에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골로새 성도들은 골로새라는 작은 도시의 백성으로 사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또한, 대만 한국 백성으로 사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20:21에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17:18에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7:21에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듯이, 예수께서 우리를 이 땅(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골1;13)신 그분이 다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동시에 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믿음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삶은 ‘성공’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조차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핍박, 조롱, 죽음이 연속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사업이 성공하고, 시험에 합격하고, 건강하고, 돈 잘 벌고, 자녀 건강하고, 부동산, 동산 등을 많이 소유한 것을 두고 성공이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실패한 인생을 사신 분입니다. 교회당이 크고, 많은 성도와 헌금을 두고 성공한 교회라고 간주한다면, 예수님은 실패한 목회자입니다.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분은 많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고,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며, 눈먼 자를 보게 하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요 21장 마지막 절(25절)에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라고 기록했습니다.
근데, 자신을 구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마 27:40에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이런 조롱 앞에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눅 23:34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삶은 예수의 보내 받으심과 닮아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사망의 권세 잡은 자가 있습니다.
세상 지혜와 가르침이 기독교 진리보다 더 현명해 보이고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세상에서 믿음을 유지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살려줄지언정 자신은 죽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조롱받더라도, 치열하게 보복하지 않는 것이며, 핍박과 고난을 받더라도, 원수갚지 않는 것이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선을 갚는 것입니다.
즉, 다른 말을 하면서,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저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마치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죠.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뭔가가 다른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만들어내는 신실함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고 계십니까?
인격과 행함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다른 ‘믿음’이 증명되고 있습니까?
세상에 기대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낸다면,
그때, 우리는 예수님이 받았던 질문과 유사한 질문을 받을 것입니다.
‘ ...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3)
즉, ‘너는 누구냐?’ ‘너는 왜 그렇게 사냐?’라는 동일한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