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저 하늘의 별들
– 금봉암 참선법회(2023.09.23.) 수행기 2
4. 75인치
큰스님이 좁은 방에 75인치 대형 텔레비전을 들여놓으셨다. 그걸 보았을 때 나는 좀 황당스러웠다. 몇 년 지나지 않아 큰스님이 입적하셨다. 당신 스스로 예상하셨던 때보다 일찍 가셨다.
제자들은 매달 4번째 토요일 금봉암 법당에서 참선법회를 열어 큰스님 뜻을 받들고 금봉암 살림을 꾸려가기로 했다. 그제야 75인치 텔레비젼에 깃든 큰스님의 혜안을 알게 됐다. 큰스님은 입적 후에도 살아생전 법문을 하시던 그 법당에서 법문을 계속해 주시려 한 것이다. 75인치 크기는 법당에서 시청하기에 알맞은 크기다.
큰스님은 내가 촬영한 <육조단경> 법문 영상을 보시고 법문을 중단하셨다. 같은 말씀을 반복하신다는 것을 모양과 소리로 직접 확인하신 것이다. 중단된 <육조단경>은 큰스님의 마지막 법문이 되었다. 그간 10번의 참선법회 동안 <육조단경> 법문 영상 편집본을 75인치 텔레비전으로 보며 참선 정진의 양식과 지도로 삼아왔다.
그런데 내가 눈 수술을 받게 되고 그뒤로 시력이 회복되지 않아 영상 편집이 어려워졌다. 이번 제11회 법회에는 영상법문 편집본을 새로 만드는 대신 그간 봤던 것 중 한편을 다시 보기로 했다.
5. 환속과 출가
목포거사는 작년에도 금봉암을 찾아와 출가의 뜻을 말했다. 중산스님이 출가처를 소개해주어 행자살이를 좀 하다가 환속했다 한다. 오늘 다시 출가 길을 나서서 우리를 만났다. 한번 환속과 두 번 출가다.
뉴욕주립대학 유일한 한국불교 전공자셨던 박성배 교수님이 생각난다. 2010년 내가 그 대학 방문교수로 있을 때, 나는 박교수님을 공경하고 극진히 모셨다. 교수님도 수행자였던 나를 특별히 아껴주시고 당신의 한국불교 강의실로 나를 초대하여 참선 지도를 담당케 했다. 박교수님은 두 번 출가하고 두 번 환속한 사연으로 유명하다. 처음 환속하여서는 동국대 교수로 되돌아갔다면 두 번째 환속의 귀결은 미국유학이었다. 교수님은 그간 사연을 거듭 나에게 이야기했다. 세간과 출세간에서 교수님이 경험한 번민과 고통은 상상을 넘어섰다. 번뇌가 얼마나 격하게 끓었으면 두통약 ‘뇌선’도 듣지 않아 세숫대야에 얼음물을 받아 머리를 담가야 했을까. 출가로 세간 인연과 관계를 근절했다 하더라도 출세간 승가에서 새로운 인연과 관계가 만들어지니 간단찮은 삶이 재현되는 법. 환속하게 되면 출세간에서 만들어진 인연과 관계를 다시 끊고 지워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출가와 환속을 거듭하신 박교수님의 마음으로 목포거사를 바라본다. 우리는 목포거사의 재출가가 부디 세간 인연과 관계를 철저히 끊은 것이 되기를 기원하며 박수를 보낸다. 중산스님은 ‘박수 받으며 출가하면 큰스님 된다.’는 덕담을 내린다.
6. 오랑캐 땅 나무꾼
내가 가져간 것은 첫 번째 편집본 <육조단경> 법문영상이다. 나무꾼 육조 혜능이 출가하는 대목에서 시작하니 출가 길에 오른 목포거사에게 길잡이가 되어 도움을 줄 듯하여 기뻤다.
스승 오조 홍인이 묻는다.
“너는 어느 곳 사람이냐?”
육조 혜능이 답한다.
“제자는 영남 신주의 백성입니다. 저는 다른 어떤 것을 구하는 게 아니라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고우 큰스님이 추임새를 한다.
“여기 여러분 중에 부처되기 위해 여기 왔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스승 홍인이 짐짓 꾸짖는다.
“너는 오랑캐 땅 영남 사람인데 어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혜능이 가슴 깊은 곳 믿음을 보인다.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지만 부처의 성품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스승이 일부러 만들어내 보인 허점을 정확하게 찔렀다.
스승 홍인은 혜능을 방앗간 일을 하게 한다. 몸집이 작고 가벼운 혜능은 큰 바위를 등에 짊어지고 디딜방아에 오른다. 그제야 디딜방아가 내려온다.
키작고 못생기고 배경 신통찮은 혜능이 키크고 잘생기고 그 누구도 범접못할 지식을 갖췄으며 수많은 추종자까지 거느린 신수를 맞받아치는 대목은 더 장쾌하다.
신수가 게송을 지어 벽에 붙인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고우 큰스님이 핵심을 말해주신다.
“신수의 게송에는 닦을 것이 있고, 닦는 놈도 있다.”
글자 모르는 혜능이 입으로 게송을 읊는다.
‘보리란 본래 나무가 없고/ 거울도 받침대가 없다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어느 곳에 티끌 먼지가 있으리’
혜능이 ‘본래성불’을 그대로 보였다. 씩씩하고 명징한 되받아치기가 나의 신명을 북돋운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시원한 바람이 관통하는 듯하다.
스승 홍인은 혜능이 깨달은 것을 안다. 스승은 그날 삼경에 혜능을 불러 <금강경> 요체를 법문해주시고 인가한다. 그리고 혜능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고향 쪽으로 보낸다. 삼년 동안은 입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그 뒤로 법을 널리 펴서 중생을 구활하라 당부하며.
혜능이 스승을 하직하고 남쪽으로 걸어간다. 두달 동안 걸어가 대유령에 이른다. 포악한 장군 출신 혜명이 거기까지 뒤따라 왔다. 내심 가사를 뺏어가기 위해서다. 혜능이 미련없이 가사를 던져준다. 혜명이 들어보았지만 들려지지가 않는다. 혜명이 말한다.
“제가 멀리 따라 온 것은 법을 구하기 위함이요, 이 가사를 구함이 아닙니다.”
그러자 혜능이 전광석화처럼 소리친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 네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그 충격에 혜명도 깨닫는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 그때, 그때 또렷이 돋아나는 나의 본래면목. 이 대목에 이를 때마다 나는 몸을 떤다. 간절히 알려고 하며 화두 의심에 남은 생을 던지려는 사람에게 이 언구는 어두운 길 하늘 별빛을 대신하는 나침반이 된다.
물론 혜능 사후 그 제자들이 스승의 압도적 수월성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서사를 꾸린 흔적이 있긴 하다. 그래서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이란 구절은 교학적으로 흐른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 앞에 우뚝 서게 된 혜능의 삶과 말씀은 우리를 성성하게 만들어 주시니 조계 후예로서 어찌 감사하지 않을까. 큰스님의 음성과 표정으로 전해지는 그 대서사는 더욱더 웅장하고 활발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