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사의 질문에 대한 학생의 답변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시크교가 유행하였어요.
② 타지마할을 건축하였어요.
③ 보로부두르를 축조하였어요.
④ 우르두 어가 널리 사용되었어요.
⑤ 산스크리트 문학이 발달하였어요.
<정답> ⑤ 굽타왕조 (파탈리푸트라, 힌두교 확산, 인도 고전 문화 발전 등)
<세계사. 금성. 2014. 107쪽>
쿠샨 왕조가 멸망한 이후, 이민족의 침입으로 혼란하였던 북인도는 굽타 왕조에 의해 통일되었다(320). 굽타 왕조는 북인도 전역을 통일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엿으나 중앙아이아 유목민인 에프탈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고(550), 북인도는 다시 분열되었다.
7세기 초에 한때 북인도를 재통일한 바르다나 왕조는 불교를 보호하였으며, 당이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도 사신을 교환하였다. 이 왕조가 붕괴된 후 인도는 다시 분열되었고, 8세기부터는 서북쪽에서 이슬람 세력이 침입하였다.
굽타 왕조 시대는 인도 고전 문화의 황금기였다. 이 시기에 힌두교가 민족 종교로 발전하였고, 문학, 미술 등의 분야에서는 인도 고유의 색채가 강조되었다.
이 시기에는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 내는 과정에서 민족 의식이 부활하여 브라만교의 전통이 강화되면서 힌두교가 성립하여 점차 확산되었다. 힌두교는 브라만교를 바탕으로 민간 신앙과 불교가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종교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인데, 특정한 창시자가 없으며, 체계적인 교리도 찾아 보기 어렵다. 지역에 따라 다양한 신을 숭배하는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를 각각 우주를 창조, 유지, 파괴하는 신으로서 중요하게 여겼다. 힌두교에서는 카스트에 따른 의무 수행을 중시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을 담아 편찬된 "마누 법전"은 인도인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불교는 힌두교에 눌려 쇠퇴하였다. 불교를 지지해 주던 왕과 귀족이 혼란기에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계급성이 강한 힌두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란다 사원을 중심으로 불교 교리 연구는 계속되었다.
문학에서는 브라만 계급의 언어인 산스크리트 어가 공용어가 되면서 산스크리트 문학이 발달하였다. 인도의 전설과 설화를 담은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마누 법전"과 함께 힌두교의 중요한 경전 역할을 하였다. 미술에서는 간다라 미술과 인도 고유의 특색이 융합된 굽타 양식이 나타났으며, 아잔타 석굴 사원의 불상과 벽화가 대표적이다. 이 양식은 중앙아시아와 중궁르 거쳐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
이 시기 인도인들은 영(0)과 10진법을 사용하여 아라비아 숫자 형성에 기여하였고, 정확한 원주율 계산법을 발견하였다. 지구가 둥글고 자전한다는 사실과 월식이 일어나는 원리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자연과학 지식은 이슬람 세계에 전해져 이슬람 자연 과학이 발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① 시크교가 유행하였어요. - 무굴제국
② 타지마할을 건축하였어요. - 무굴제국
③ 보로부두르를 축조하였어요. - 인도네시아 사일렌드라 왕조
④ 우르두 어가 널리 사용되었어요. - 무굴제국
<세계사. 금성. 2014. 211쪽>
16세기 초 바부르는 아프카니스탄 지방을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정복 전쟁을 벌였다. 북인도를 통일한 그는 델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무굴 제국을 세웠다(1526).
그의 손자인 악바르 대제는 데칸 고원을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하였고, 관료제와 지방 행정 기구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를 똑같이 관료로 임명하고, 다른 종교의 신자에게 부과하던 인두세(지즈야)를 폐지하는 등 다른 종교에 관대한 정책을 펼쳐 힌두교도 전체에게 황제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무굴 제국은 이후 약 1세기 동안 번영을 누렸다.
17세기 후반 아우랑제브 황제는 남인도를 점령하여 무굴제국 사상 최대 영토를 확보하였으나 지나친 정복 활동으로 인해 재정의 어려움이 나타났다. 더구나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를 배제하는 정책을 펴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고, 인두세를 부활하는 등 힌두교를 탄압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펀자브 지방의 시크교도와 중부 인도 마라탄 동맹의 반란은 제국을 크게 위협하였다. 이때부터 각지의 토호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고, 프랑스와 영국이 인도의 동서 해안 지방에 침투하여 무굴제국은 점차 쇠퇴하였다.
무굴제국은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해안 지역에는 무역항이 발달하였고, 내륙 곳곳에는 시장과 도시가 들어섰으며, 화폐 경제도 활성화하였다. 특히, 대외교역이 호라발하여 인도양 무역을 통해 무굴 제국의 생산품 뿐만 아니라 중국, 동남아시아, 페르시아, 이집트의 물품도 거래하였고, 이를 통해 많은 부를 쌓았다.
무굴제국의 수출품으로는 면직물과 향신료가 대표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면직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멀리 유럽에까지 팔려 나갔다.
한편, 15세기 말 이후부터 유럽 인들이 향신료를 찾아 인도양 무역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이, 17세기 이후에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인도의 서남부 해안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고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여러 상품을 수집하여 유럽에 판매하였다.
무굴제국에서는 이슬람 문화와 힌두 문화가 융합되어 힌두 · 이슬람 문화가 발달하였다.
종교에 있어서는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융합된 시크교가 등장하였고, 회화에서도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세밀화가 인도 양식과 조화를 이룬 무굴 회화가 발달하였다. 그림의 소재는 인물이나 궁정 생활, 풍경 등이었다.
공식 문서가 외교 용어에는 페르시아어가 사용되었지만, 그 밖의 경우에는 우르두 어를 널리 사용하였다. 건축물로는 타지마할이 유명하다. 타지마할은 샤 자한 국왕이 왕비인 뭄타즈 마할을 추모하여 건립한 궁전 형식의 묘지로, 전형적인 이슬람 양식인 돔형의 지붕과 힌두 · 페르시아 미술의 특징인 세밀활를 잘 보여 준다.
<세계사. 금성. 2014. 109쪽>
베트남 북부의 안남은 한 대 이래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당이 멸망한 10세기에 독립하였다. 이런 이유로 일찍부터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은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에 속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한다.
베트남 중남부의 참파는 힌두교를 수용하였고, 해상무역으로 번영하여 한때 북부 베트남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메콩 강 유역에서는 크메르 족이 세운 진랍이 6세기 중엽에 부남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진랍은 9세기에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후 앙코르 왕조로 이어졌는데, 앙코르 톰, 앙코르 와트와 같은 문화유산은 당시의 번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앙코르와트 : 12세기에 세워진 사원으로, 원래는 힌두교의 신인 비슈누 신을 섬기는 사원이었으나, 후에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건축 양식은 인도의 영향을 받았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 양식 등에 앙코르 왕조의 문화적 독창성이 나타난다.
타이 지역에서는 6세기에 세워진 드바라바티가 상업 및 문화 교류를 통해 동남아시아에 인도 문화를 전달하였다.
수마트라 섬 동부에서는 7세기에 스리위자야 왕조가 나타나 믈라카 해협을 지배하고 동서 교역으로 번영하였다. 스리위자야 왕조에서는 불교가 발달하여 구법승이 자주 왕래하였고, 바닷길을 이용한 동서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인도 · 중국 · 이슬람 상인들이 교류하는 상업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스리위자야 왕조는 이들과의 교역을 통해 불교와 힌두교를 차례로 수용하였다.
자와 섬에서는 8세기에 샤일렌드라 왕조가 일어나 해상 무역으로 번영하였다. 샤일렌드라 왕조는 일찍부터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불교를 받아들여 크게 발전시켰다. 자와 섬에 세워진 보로부두르는 불교 미술의 걸작품으로 일컬어진다.
* 보로부둘 : 자와 섬 중앙에 세운 대승 불교 사원이다. 수많은 작은 탑의 집합체이면서 그 자체가 거대한 탑 모양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