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의미
목차
1. 그때 일본이 없었다면
2. 한일병합은 일본의 어부지리
3. 근대화의 뿌리와 뼈대
4. 반일감정 조장의 원흉
5.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
6. 강제징용의 진실
7. 배울 것 많은 일본의 교훈들
8. 일본은 가장 밀접한 미래 동반자
1. 그때 일본이 없었다면
2004년 11월, 노무현이 갑자기 반외세 여론몰이를 했다. 하루에 40억 원씩을 쓰면서 유럽과 남미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미국을 비방했다. 이에 미국의 조야 인물들이 나서서 “한국 대통령이 막대기로 미국의 눈을 찌르고 다닌다.”라며 분노의 감정을 표했고, 미국의 신보수주의 인물들은 노무현을 ‘시간증 환자’(네크로필리아)라고 비판했다. 동맹을 내치고 시체에 불과한 북한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좌파와 언론들이 나서서 일본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외세는 악이고, 악이 곧 미국과 일본이었다.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의 희생양으로 고려대학의 저명한 석학 한승조 교수를 선택했다. 한승조 교수는 그 해(2004) 일본 잡지 [정론] 4월호에 ‘조선이 청나라나 러시아에 먹히지 않고 일본에 먹힌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했다. 1년이 지난 이 논문을 문제 삼아 한 교수를 멍석말이 한 것이다.
과연 한승조 교수의 논문 요지가 멍석말이 마녀사냥의 대상이었는가? ‘불행 중 다행’이라는 표현은 무슨 뜻이었는가? 만일 당시의 조선이 청나라에 먹혔더라면, 조선은 지금의 위구르나 티베트처럼 중국의 변방 지역이 되었을 것이고, 조선족처럼 소수민족으로 천대받고 있을 것이 아닌가? 만일 러시아에 먹혔더라면, 러시아의 공산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당시 조선은 어차피 먹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그나마 일본에 먹혔기 때문에 독립을 할 수 있었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조선인의 후예인 우리는 일본국 시민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먹고,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걸었기 때문에 원자탄 세례를 맞고 조선을 토해낸 것이 역사의 현실이다. 한승조 교수의 논문은 바로 여기까지였다.
여기까지에 무슨 허위사실이 있는 것이고 무슨 논리의 비약이 있는가? 그런데! 이 나라에 태어나 아무런 업적도 쌓지 않은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모두가 다 애국자가 되고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욕을 많이 하고 분노의 표현을 심하게 할수록 지식인이 되었고 양심가가 되었다. 고려대학교에서 수많은 후진을 양성하고 정부의 외교정책에 많은 기여를 했던 한 교수는 어느 한 순간에 날벼락을 맞았다. 한국판 인디언 원주민들에 의해 교수목에 매달려, 뭇 사람들로부터 돌멩이 공격을 당한 것이다. 그의 가족들, 아버지와 남편의 보호를 받다가 갑자기 가장을 원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99년 갑자기 한겨레21 고경태 기자가 구수정이라는 무명의 여성을 통신원으로 앞세우고, 한홍구와 강정구를 간판으로 내세워 주월 한국군을 베트남 학살자로 몰아갔을 때, 참전 용사들은 고엽제에 신음하면서도 부인과 자식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한승조 교수도 동류의 괴로움을 당했을지 모른다. 그와 그 가족은 아파트에서 살지 못하고 산간벽지에 여러 해 동안 귀양 가 있었다. 이것이 조선인 후예들이 물려받은 멍석말이 전통이었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코스모폴리탄, 세계인의 위치에서 객관적으로 내려야 한다. 아이들 싸움에 끼어들어 무조건 내 자식 편을 드는 비 문명인의 자세를 가진 사람은 역사를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을 잃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한승조 교수의 역사관에 돌을 던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코스모폴리탄 시각으로 개화된 사람들이 아니라 패거리 의식에 찌든 비 문명인들이었다.
1894~95년에 치른 청일 전쟁에서 만일 일본이 패했다면, 1904~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만일 일본이 패했다면, 우리는 지금 조선족으로 또는 고려족으로 푸대접 받으면서 가난한 생활, 비 문화권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조선족이 좋은가? 고려족이 좋은가? 아니면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이 더 좋은가?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게 된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 없을 것이다. 한승조 교수의 논문은 여기까지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적인 역사평가 내용에 대해 2005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왜 그렇게 비 문화권 인종처럼 거칠게 행동했는가?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은 어떤 국민인가? 경제 10대강국의 부유한 국민이고, 1980년대에 올림픽 역사상 가장 성대한 국제올림픽을 치렀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한강 문화권을 즐기고, ‘나는 한국인이다’ 자랑스럽게 휘젓고 다니는, 지구촌의 유지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던가? 저절로 이렇게 되었는가? 일본에서 해방된 지 15년이 지난 1960년의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나? 세계에서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거지 국가였다. 그 거지 국가에는 어떤 자산들이 있었는가? 논과 밭이 있었다. 그 외에 무엇이 있었는가? 학교, 도로, 철로, 항구 그리고 기업들이 있었다. 논과 밭은 하늘이 준 것이고 나머지 사회간접자본과 기업들은 누가 준 것인가? 일본이 36년 동안에 걸쳐 만들어 놓고 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했던 1948년, 대한민국 총자산은 겨우 27억 달러, 4억 달러는 논과 밭이었고 23억 달러는 일본이 놓고 간 자산이었다. 일본이 남기고 간 자산 23억 달러, 그것이 대한민국 전체 자산의 80%를 넘었다. 이 23억 달러어치의 사회간접자산마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인도보다 더 거지 나라가 돼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한강의 기적은 이 23억 달러의 자산 위에 쌓아올린 것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됐을 당시 일본은 한국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주었고 5억 달러는 차관으로 꿔 주었다. 1965년 한일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일본은 이 23억 달러가 일본에 귀속돼야 할 ‘귀속자산’(Vested Property)이라며 돌려달라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러다가 1965년 체결된 협정에서 이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 1965년에 추가로 받은 돈으로 무엇을 했는가? 한강 기적의 초석을 마련했다. 일본의 돈이 있었기에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됐다. 일본의 돈이 있었기에 포항제철, 호남정유, 나주비료 등 중화학 공업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포항제철, 등소평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면서 일본에 “중국에도 똑같은 제철소 하나 지어달라” 사정했지만 거부당한 세계적인 제철소, 일본 돈과 일본 기술, 일본의 기술지도와 소재와 부품과 설계와 스펙 자료를 가지고 모래밭 위에 세워진 기적이었다. 일본이 없었다면, 일본이 저 멀리 아프리카 희망봉에서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사는 나라였다면, 일본돈도 없었고, 일본기술도, 일본스승도, 자재도, 부품도, 설계도면도 없었다. 일본돈과 일본기술로 세계 제3위의 소양강댐과 충주댐을 건설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천재성과 용기는 바로 일본의 힘을 이용하는 데 빛을 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위해 미국의 힘을 최대한 이용했듯이,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위해 일본의 힘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일본을 빼고는 설명이 안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소원은 국산화! 독자적인 생산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창원, 구미, 울산, 인천, 안산 등에 대규모 공단을 설치하고, 세계적인 기능공을 양성한 후 외국 선진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했다. 공단의 대부분을 일본기업들이 채워주었다. 기술지도도 일본으로부터 가장 많이 받았다. 선진국에서는 한물 간 사양제품(sunset item)을 모방 생산시켰다.
기술자료 TDP(Technical Data Package)를 배로 실어와 기업들에 배당했다.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제품들이 가장 많았다. 일본의 소재, 일본의 부품, 일본의 생산기계가 아니면 공장이 쉬었다. 한강기적의 원동력인 대규모 공단, 일본이 빠져나갔다면 텅텅 비어있을 공간이었다. 산업인들이라면 이 일본의 중요성을 모두 인정할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이 없었으면 한강의 기적도 조국근대화도 없었다. 그런데! 왜 국민들은 일본을 증오하는가? 오염되고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아래한글에서 ‘일제’까지만 타자하면 자동적으로 ‘일제 강점기’로 표시된다. 일본이 아름다운 조선을 강제로 점령하여 물자와 육체를 강탈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선은 아름답지가 않았다. 아름답기는커녕 지옥이었다. 학대받는 백성을 살리려면 조선왕조는 빨리 망해야만 했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것이 아니라 주워 가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