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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터진 틈
김동원 시인·평론가
미래파, 그리고 두 개의 시선
과연, 현대 젊은 시인층에 파죽지세로 파고든 미래시는 무슨 암호 길래 그토록 광분하는 것일까. 20세기 초 이탈리아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에 의해 제창된 이 전위적 예술운동은,〈미래주의의 기초와 미래주의 선언〉이라는 기치 하에 새로운 예술사조의 출현을 예고한다. 그것은 과거 유산과의 결별, 언어의 절대 자유, 문명 예찬 등을 그 본령으로 삼고 있다. 여기엔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마야코프스키 등도 가세한다. 그리고 21세기,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에도 새로운 문풍이 불었다. 평론가 권혁웅에 의해 점화된 ‘미래파’ 논쟁은 <미래파>(《문예중앙》2005년 봄호)란 제하의 글이 계기가 되어 이후 문단에 보편화된 바 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소위 미래파 시인들을 옹호하며, 젊은 시인들의 낯선 어법, 새로운 상상력을 주목하며, 그들의 행보가 미래 한국시의 대안이 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미래파에 대한 반발 또한 팽팽하다. 우선 미래시는 기괴하다. 기존의 구문법을 파괴하며 구두점을 무시한 절름발이 언어이자, 언어의 절벽이다. 프랑켄슈타인어이자 헛소리이다. 한국 근현대시에서 도외시된 접신된 무의식의 흐름, 비약과 과감한 생략, 언어유희와 풍자, 성도착과 음습한 귀신적 몽환, 온갖 부조리한 사회악적 상징 기호와 언어 마디를 극 미세 이미지로까지 해체한 것은 부정적이나, 지층에 각인된 연대기를 분석해 우주적 상상까지 곧바로 치고 들어간 언어의 힘은 가히 환상적이다. 분명 미래시는 기존 시의 인식 벽을 일시에 깨부수는 파천황이 있다. 일찍이 두보도「강물의 기세가 마치 바다 같아서 급히 짧게 쓰다 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라는 시에서〈내 말에 사람이 놀라지 않으면 죽어도 쉬지 않으리 語不驚人死不休〉)라고 말한 바 있지만, 경천동지할 언어의 세계는 분명 미래파의 로망이다. 허나 실존적 삶은 죽음과 뒤죽박죽 섞여들기 때문에 늘상 불안정하다. 사실 이상의 「오감도」나 일군의 미래시 공통분모는 이런 인간 불안 위기의식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최근 미래파 시들은 뭔가 불안한 질주 광처럼 무서운 속도로 궤도 이탈이 감지된다. 처음보다 더한층 파격으로 치닫고 있으며, 시의 절제미와 균형이 턱없이 허물어지고 있다. 이들의 시적 성과물을 과대 포장해 부추기는 기성 평론가나 시인들 역시 집단 무의식의 체면에 걸린 듯하다.
이제 미래시가 시(詩)냐 비시(非詩)냐의 담론은 무의미하다. 이상의「오감도」가 발표된 지 88년이 지난 지금, 한국시사에 실험시는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를 한번 되돌아보라. 내가 체감한 미래시의 시적 상상력은 대단한 강자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과 소통하지 않는 해독 불가능한 실험만을 위한 배설의 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시는 시로서 온전히 새로운 유기체로 진화해 나갈 때 독자의 가슴을 울리며 진면목을 갖게 된다. 대다수 독자에게 외면된 미래시가 일부 평론가와 미래파에 의해 자화자찬되는 그런 풍토는 오래갈 수 없다. 그 폭풍 같은 미래시의 고갱이가 천하 기물임에도 불구하고, 소통의 관점에선 여전히 세상과 불통하고 있다. 미래시가 한국현대시의 한 차원 높은 세계로 진화하려면 그 나라의 모국어(母國語)를 다루는 시인의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
우선, 미래시파의 한 주자인 여정의 몇 편의 시들을 관통하기 전, 미래파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을 들춰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정진규는 〈현대 젊은 시인은 대개 크게 두 가지로 보는데, 흔히 미래파라고 하는 황병승, 김민정 같은 시인들이다. 또 하나는 어떤 보수적 세계라 할 수 있지만, 시의 본성이랄 수 있는 서정적 본질을 현대화하는 흐름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양자를 아우르는 흐름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황․김 등이 새롭기는 하다. 신선하다. 그러나 안심이 안 된다. 왜냐하면, 새롭다는 것은 그런 현실적 구조와 표현이 새롭다는 것이지 시에 담긴 사유의 뿌리가 깊게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살펴보니 그들은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를 갖고 시로 구조화하고는 있지만 개인이 가진 사유의 근거가 애매하다. 옛날에도 그 당시마다 모더니즘 같은 실험정신은 있었다. 50년대 후반기 동인에서 경험했다. 조지훈은 실험시가 새롭지만 위험하다고 말했다. ‘패(敗) 즉 역적이요, 성(成) 즉 군왕’인 것이다. 상당히 위험하다. 얼마나 오래 갈까. 시로써 설득력을 가질까라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서정적 본질을 현대적으로 끌어가는 시인들로는 문태준, 유홍준, 이덕규가 생각난다. 일차적으로 안심은 된다. 그들 역시 변형과 몸 바꾸기가 있긴 하지만 계승된 면모와 근거가 있다. 익숙한 대목도 있다. 서정적이라는 게 결국은 익숙한 거 아니겠는가. 반면에 자기 자신을 너무 유형화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실험성의 약화가 자기 자신을 유형화하는데, 이름을 가리고 보면 누구건지 모르게, 그런 면도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선배)들 때보다 말의 운용이나 시의 구조 형성에 대단히 미시적인 데까지 언어를 가지고 가는 훌륭한 점이 있다. 우리 시가 그만큼 내밀화됐다는 뜻이다. 발전적 면모다. 흔히들 ‘감각’이라고 말하는데, 감각의 산물만은 아니고, 뭔가 언어에 대한 추구와 사유의 접합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김광일, 『시보다 더 매혹적인 시인들』 p199, 문학세계사, 2008)에서 보듯이, 시의 새로움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시의 사유와 방법, 전통과 모더니티의 문제에 속한다. 양자의 접합이 중요하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미래파 시들은 후자에 지나치게 경도해 있다는 생각이다.
이 장에서 미래파 시인인 여정의 유니크한 시와 세계를 1시집『벌레11호』(2011, 문예중앙)와 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2016, 민음사)을 중심으로 나름의 분석/감상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인간복제
손님♀와 점원♂의 대화볼륨이 점점 높아진다.
손님♀는 옵션으로 노란머리에 파란눈동자를 가진 아기를 주문했고
점원♂는 옵션으로 파란머리에 노란눈동자를 가진 아기를 만들었다.
점원♂는 파란머리에 갈매기표시 노란눈동자에 갈매기표시가 된 견적서를 내보이며 손님♀를 코너로 몰아붙인다. 코너에 몰린 손님♀는 점원♂가 표기를 잘못했다며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 옆에 있던 주인♂는 우리 가게에서는 몇 세기가 지나도록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없다며 한마디를 거들고 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손님♀는 머리에 플로피디스크를 꽂고 음성기록파일들을 복사해 주인♂에게 건네준다. 검색하게 한다.
“옵션으로 노란머리에 파란눈동자를 해주세요.”
음성기록파일에 주인♂가 코너로 몰려버린다. 손님♀는 소송을 걸겠다고 하고 코너에 몰린 주인♂는 新옵션을 몇 개 더 추가해 주문한 아기를 새로 만들어주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림도 없다던 손님♀가 견적서에 갈매기 다섯 마리를 더 그려 넣는다.
新옵션 추가 ― √ 볼륨조절성대 √ 피부색조절장치
√ 도수조절수정체 √ ♂↔♀변환장치
√ 업그레이드무료쿠폰 1장
그래도 화가 덜 풀렸는지 손님♀는 베이비스토어를 나오면서 주인♂에게 한마디 더 쏘아붙인다.
“앞으론 아기를 함부로 다루지 마세요.”
베이비스토어를 나오자 손님♀는 깔깔대며 웃기 시작한다.
하늘에는 바코드를 붙인 갈매기 다섯 마리가 승리의 V字를 그리면서 도심 위를 유유히 날고 있다.
―여정,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 전문
근대와 현대 추상시의 경계를 나는 이상 이전과 여정 이후로 가른다. 이 둘의 공통점은 전시대의 서정시법을 새로운 화법으로 치고 나온 일이다. 하여 기존 시 체계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주체를 제시한 것은 혁명적이다. 이상의 시가 개인적 자폐와 근대적 폐쇄성에서 머물렀다면, 여정은 이상(李箱)적 자의식에 매몰되지 않고, 현대적 서정을 미래과학에 자신의 시를 접속한다. 시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은 미래에 충분이 일어날 개연성이 있는 인간복제를 시의 주제로 다뤘다. 그의 첫 시집 『벌레 11호』 속에 수록된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은 2000년 10월 『현대시학』에 발표된다.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은 2005년 개봉된 영화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일랜드>를 연상시킨다. 2019년을 배경으로, 자신들을 지구 종말의 생존자로 믿고 있는 링컨6-에코(이완맥그리거)와 조던2-델타(스칼렛 요한슨)가 주인공이다. 그들은 인간을 복제한 클론이다. 클론의 목적은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일회용 소모품이자 제품에 불과하다. 장기 교체는 철저히 부자만 할 수 있는 자본 논리로 부각된다. 클론의 몸에서 적출된 장기는 병든 부자 인간 장기와 교체되며, 갑작스런 사고로 아이가 죽으면, 복제된 클론이 그 아이의 삶을 대신한다. 대리모는 영아를 낳자마자 곧바로 살해되어 무참히 버려진다. 우연히 링컨6은 장기를 적출당한 동료 클론이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여자 클론 조던과 탈출을 시도한다. 아일랜드는 인간들이 복제 당시부터 클론의 머릿속에 주입한 환상의 섬이며, 존재하지 않는 곳이자 죽임을 당하는 가상공간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이기적인 인간 본체가, 부조리를 자각한 복제된 클론 링컨에게 죽임을 당하는 역설이 묘하다.
인간 복제는 인간의 역사에선 획기적 사건임엔 틀림없겠으나, 윤리적인 측면에선 부당할 수도 있겠다. 원본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도구로, 복제인간의 장기를 마구잡이로 적출해도 되는 것인가. 소나 말처럼 그들을 노예처럼 혹사시켜도 되는가. 복제인간이 원본인간과 동일한 유전정보를 가졌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라는 의문점이 그것이다. 한편, 인간복제 기술이 허용되길 현실에서 고대하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불임부부, 난치병 환자, 여타의 희귀병으로 고통 받는 수많은 환자들에겐 인간복제야 말로 복음이다.
인간복제와 기계 문명에 대한 비판과 성찰, 폭로와 경고가 담긴 여정의 시집 『벌레 11호』 4부에 수록된 「ABC침대 위의 ♂♀」, 「콘센트♀의 하루」, 「아기 5호, 그룹사운드 베이비파워, 그리고……」는 과학적 미래시의 전형이다. 특히, 「아기 5호, 그룹사운드 베이비파워, 그리고……」는 인간의 체외수정(정자은행, 난자은행)을 상상력과 버무려 비판적인 목소리로 현대를 질타한다. 이 시는 또, 상업적 목적으로 출생이 선택되고, 판매의 목적으로 아기들이 양육되는 참담한 현실과 비인간화에 대한 미래에 닥칠 비극의 노래이다.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은 「아기 5호, 그룹사운드 베이비파워, 그리고……」보다 훨씬 앞선 미래사회의 이야기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보았듯, 링크 머신을 통해 인간의 의식으로 아바타 몸체를 원격조종할 수 있는 인간과 판도라 행성의 토착민 나비(Na’vi)의 DNA를 결합해 만든 새로운 하이브리드 생명체보다 훨씬 진화된,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 속의 상업용 복제아기는 충격적이다. 마음대로 아기를 만들어 대량으로 판매하는 미래사회는 가상현실이 실재보다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손님♀는 옵션으로 노란머리에 파란눈동자를 가진 아기를 주문했고/점원♂는 옵션으로 파란머리에 노란눈동자를 가진 아기를” 잘못 만든 것이 다툼의 발단이다. ♀(여자), ♂(남자)로 읽어야만 해석되는 기호는 아주 참신하다. “주인♂는 우리 가게에서는 몇 세기가 지나도록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없다”는 말에서 보듯, 시 속의 화자 ‘손님♀’, ‘점원♂’, ‘주인♂’은, 원본인간이 수백 년 동안 복제인간의 장기를 적출해 생명을 연장해 살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시, 「베이비스토어에서 생긴 일」은 아기(생명)를 대량생산 할 수 있는 미래 공간과 요구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옥식각신 싸우는 광경을 우스꽝스럽게 설정한다. 이런 시대에 “앞으론 아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손님♀의 말은 해학과 풍자적 수법을 통해 독자의 의표를 찌른다. 점점 상업화 기계화 프로그램화 기호화 되어가는 현대를, 또 더 그렇게 되어갈 수밖에 없는 미래를, 여정은 과학적 미래시라는 독창적 그릇 속에 담았다.
언제나 시대가 언어를 규정한다. 나름, 현대시에서 ‘전통’의 계승은 중요한 덕목임에는 틀림없지만, ‘실험’의 파격성이 기상천외한 예술로 진화하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미래시파는 초현실주의에 뿌리를 박고 기존 서정시를 박차고 전혀 다른 차원의 예술적 시법을 건설한다. 물론 이런 미래시파는 크게 보면 현대시사의 한 유파이겠지만, 이성과 의식의 통제와 지배를 거부하며 무의식적으로 언어를 마구 뿌려 되는 수법이야말로 현대시의 진일보이다. 마치 표현추상주의 화가 잭슨 폴록이 우연히 ‘자신의 몸짓과 물감통의 반복 운동’을 통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미를 발견한 것처럼, 미래시파 역시 그들의 무의식의 세계를 한국 현대시사에 마구잡이로 뿌려대고 있다.
결론적으로 여정을 포함한 일군의 미래파의 시적 출현은 1999~ 2000년 세기말이 인간에게 준 엄청난 불안 의식과 비인간화된 인간 종말이 과연, 미래사회에는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불확정성에 대한 의문을 시를 통한 인간의 새길 찾기의 한 방법으로 제시한 젊은 시인들의 시적 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겠다.
말言과 말馬
1998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작인「자모의 검」이 “시집의 맨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을까? 우선 이 시의 미학적 특질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에 스며들어 있는 비틀린 관습적 도상들에 주목한 필요가 있다. 이를 테면, ‘검’, ‘귀’, 그리고 ‘혀’ 등의 단어에서 우리는 기독교적 모티프와 그 인유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강동호 시집 해설)
혹자가 말하길, 입속은 자객들의 은신처란다. 그들이 즐겨 쓰는 무기는 ‘영혼을 베는 보검’으로 전해오는 자모의 검이란다. 을씨년스런 날이면 자객들은 검은 말을 타고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느 심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단다. 천지를 울리는 말 발굽소리, 어느 귓가에 닿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성의 칼집을 벗어던지고 자모의 검을 빼어 든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한 영혼의 목을 뎅거덩 자르고 나면 자객들은 섬뜩한 미소로 조의금을 전하고 또 다른 심장을 향해 말 달려간단다. 그날에 귀머거리는 복 있을진저, 자객들의 불문율에 있는 ‘귀머거리의 목은 칠 수 없다’는 조항에 따름이라.
혹자가 말하길, 자모의 검에 찔린 사람들은 귀부터 썩어간단다. 귀가 썩고, 뇌가 썩고, 심장이 썩고, 썩고 썩어 생긴 가슴의 커다란 구멍으로 혹한기의 바람이 불어대고 수많은 까마귀 떼의 날갯짓이 장대비처럼 내린단다. 그 부리에 생살이 뜯기고 새하얀 뼈를 갉히며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단다. 그날에 수다쟁이는 화 있을진저, 더 많은 까마귀 떼를 불러들임이라.
자객들의 말 발굽소리 요란한 날이면 너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손으로 귀부터 틀어막고 묵직한 바위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낮춰라. 그리하면 자객들이 탄 검은 말들이 너희를 비켜가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 이말로 더불어 너희가 그날에 ‘복 받았다’ 일컬음을 받을지니 부디 그날에 너희에게 복 있을진저. 혹자의 말이니라.
― 여정,「자모의 검」전문
무엇보다「자모의 검」이 찬사를 받는 이유는, 말(말馬 ․ 말씀言)이란 동음이의어를 교묘히 부려 쓴 중의적 화법 때문이다. 시는 물질로 응결된 말(言)의 상징(象徵)이다. 말은 잘만 쓰면 천 년을 간다. 펜이 칼보다 강한 이유이다. 사람의 입 안에는 말의 도끼가 숨어 있다. 상대의 가슴을 벤 말은 반드시 뱉은 자의 목을 노린다. 천하의 역발산도 한번 귀에 박힌 말은 뽑아낼 수가 없다. 좋은 시는 말 속에 진검(眞劍)의 칼끝을 겨눈다. 여정은 인간세상의 부조리한 혓바닥을 향해 “자모의 검”으로 단숨에 승부했다. 그의 시집『벌레11호』(2011, 문예중앙)에 수록된「자모의 검」은 정심(正心)에서 정언(正言)이 나옴을 일깨워준다. 입은 화를 불러들이는 문이요, 세치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천하의 대세를 말 한마디로 승패를 가늠할 수 있으며, 말에 문이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 말은 자음과 모음이 한 쌍의 음양으로 움직인다. 하나의 사물에는 반드시 하나의 말이 있다. 우주 창조는 말로써 만들어진 기물(奇物)이다. 여정은 “귀머거리”만이 이런 말의 저주를 피할 수 있으니, 귀 있는 자들은 “두 손으로 귀부터 틀어막고 묵직한 바위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낮춰”서 검은 말을 탄 자객의 칼날을 피해야 함을 역설한다.
말은 귀로 듣고 마음이 새긴다. 꽃은 입술이 닫혀 있을 때 가장 매혹적이듯,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어느 곳에 있으나 편안’(명심보감)하다. 말을 잘 쓰면 살인도 면하고, 욕은 먼저 자신의 입을 더럽힌 후에 나간다. 옳은 말은 언제나 옳고 틀린 말은 언제나 틀렸다. 시를 ‘절(寺)에서 쓰는 말(言)’이라고 해석한 까닭은 시가 상징과 화두로 짜였기 때문이다. 여정의「자모의 검」은 깨달음과 상징 시어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시는 말이 어떻게 천국과 지옥으로 오가는지를 상징화했다. 하여,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 이말로 더불어 너희가 그날에 ‘복 받았다’ 일컬음을 받을지니 부디 그날에 너희에게 복 있을진저.”
페러디
원래 패러디(parody)란 말은 '대응노래(counter-song)', '파생적인 노래'라는 뜻의 고대 희랍어 'parodia'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풍자시인 히포낙스가 그 시조(始祖)로 알려져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詩學)』에도 용어가 등장한다. 현대의 패러디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시․소설에서부터 음악, 영화, 광고, 정치인의 희화화(戱畵化)까지 전 방위적으로 확산되어, 창작의 새 영역으로까지 받아들여지는 추세이다. 이미 만들어진 작품의 내용이나 형식을 모방하되, 모방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새롭게 만들어 창조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표현 기법이 패러디이다. 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원작을 변형하거나 과장하여 웃음을 선사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지며, 인터넷상에서 매일 각종 패러디가 범람한다. 그 사회가 엄숙할 수 록 패러디의 효과는 극대화되며, 기존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풍자나 해학과 버무려 독자로 하여금 나태한 일상을 뒤집어보는 시각과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흔히 ‘페러디’ 하면 모방이나 표절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러나 모방이 단순히 원작을 흉내 내는 것인 데 비해, 패러디는 원작에 변형을 가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모방과 다르다. 그리고 표절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원작자의 허락 없이 도용하는 것인 반면에, 페러디는 원작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그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패러디는 원작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새로운 미적 체험을 하도록 해 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모나리자’와 이것을 패러디한 뒤샹의 ‘수염 달린 모나리자’가 그 예이다. 뒤샹은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넣었다. 왜 그렇게 한 것일까.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그때까지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뒤샹은 모나리자가 지닌 근엄한 이미지를 우습게 만들어 틀에 박힌 아름다움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방민호,『지학사』)
이 장에서는 이상의「오감도(烏瞰圖)」를 패러디한 여정의「깡패, 정의의 사자, 막다른 골목, 그리고Ⅰ」를 들여다볼 것이다.「오감도」시편은『조선중앙일보』를 통해 30편 연재로 기획되었다. 1934년 7월 24일 첫 연재가 시작되자마자,「오감도」의 파격은 조선 문단을 경악케 하였다. 독자들의 거센 비난과 항의에 직면한다. 결국 8월 8일자에 15회를 싣고 중단된다. “「오감도」시편들은 그 전편에 ‘거울’ 모티프가 깔려있으며, 마지막 시편인「시제15호」에서는 거울 세계와의 전쟁이 매우 드라마틱하게 묘사되”어 있다.(신범순)
서정시만 탐독하던 20대에「오감도」를 처음 접한 나는 황당무계했다. 띄어쓰기 무시, 숫자와 특수 암호투성인 그 시는, 듣도 보도 못한 형태의 파격 그 자체였다. 한 번 의문이 들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밤낮없이「오감도」의 난해성을 파헤치려고 몰두했다. 난 그 후,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가 뒤범벅된 이 시를 끌어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나름의 해답을 구해 보려 노력했다.
혹자는 “도로”는 경제 침탈 및 수탈의 목적으로 건설된 일제의 야욕을, “막다른 골목길”은 식민지 치하의 암울함을 상징한다고 본다. “무서워하는 아해”를 핍박당한 조선 민중으로 친다면 시의 뜻은 의외로 단순해진다. 반면 나는 처음 이 시의 실마리를 13이란 숫자에서 찾아보았다. 서양인에게 가장 불길한 숫자로 인식되었으니까. 식민지 청년의 우울과 불안, 일제 폭거에 대한 공포의 무의식적 발로를 13이라는 숫자와 자연스레 연결시켰다. 그리고 1더하기 3이 죽을 사(死)라는 얼토당토안한 추론도 해보았다. 그래서 난 어떤 시인이 규정한 ‘정자들의 무서운 질주’를 “무서워하는 아해”의 인간 본능으로도 파악해 보았다. 의문점이 하나 둘 풀리자, 왜 이상은 시 제목을 하필「오감도(烏瞰圖)」라고 붙였을까 또 궁금했다.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나는 그때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도면’이「조감도鳥瞰圖」인 줄도 모를 만큼 시의 초입이었다. 한때 이상이 총독부 내무국 건축 기수로 일한 걸 떠올리면, 건축 용어 조감도에서 시제를 따온 걸 금방 유추할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지금도 많은 분은「오감도」가 도통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시를 감상할 때 ‘독자가 알지 못하는 시가 과연 좋은 시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여러 번 반복해서 읽다 보면, 시 속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숨은 뜻이 오롯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얼마 전 새 이야기를 읽다가 불현듯 이상의「오감도(烏瞰圖)」가 떠올랐다. 조선 사람은 흉조라고 부른 반면, 일본인들은 길조로 여겼다. 그럼「오감도」는 만면에 웃음 띤 일본이 까마귀로 상징되어, 하늘 위에서 조선을 삼키려고 내려다보는 섬뜩한 시가 아닌가. 연상이 그곳까지 뻗치자 13이란 숫자 역시 단순히 인간 본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전에는 조선 8도로 불리던 국토의 경계가 1896년(고종 33년)에 13도로 개편된 사실을 발견하였다. 내 머릿속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13인의 아해”는 다름 아닌 식민치하 막다른 길에 내몰린 조선 13도의 불행한 민초를 의미했던 것이다. 이상은 백 년 전 벌써 조선을 영구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하려는 일본의 무서운 침략 야욕을 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우선, 예리한 직관의 시론가 이승주가 페러디의 한 양상으로 바라본, 이상의「오감도(烏瞰圖)」와 여정의「깡패, 정의의 사자, 막다른 골목, 그리고Ⅰ」을 엿보자. “패러디는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표현하는 수법 또는 그러한 작품”을 가리키는 말로, 일반적으로 시적 의도나 메시지를 함축적인 표현이나 방법에 비해서 보다 직접적인 비판이나 풍자로 전달하고자 한다. 패러디의 효과는 원작의 완성도와 인지도에 비례하며 또한 그 원작이 대중들에게 익숙할수록 그 효과도 증폭되는데, 그것은, 선거 때 후보자들이 자신의 공약을 홍보하거나 자신에 대한 유권자들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유행가의 가사를 개작하여 유세에 활용함에 있어, 그 노래가 생소한 창작가요보다는 대중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노래일수록, 가사와 리듬이 귀에 익숙할수록 그 효과가 큰 것과 같다고 하겠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오감도(鳥瞰圖) 시(詩)제1호」 전문
깡패 1호가 Ⅰ를 끌고 막다른 골목으로 가고 있소
막다른 골목에서 Ⅰ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소
비명소리를 타고 나타난 정의의 사자 1호가 Ⅰ를 구해내고 있소
깡패 1호는 막다른 골목을 뚫고 달아나고 있소
막다른 골목이 정의의 사자 1호를 깡패 2호로 만들고 있소
막다른 골목에서 Ⅰ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소
비명소리를 타고 나타난 정의의 사자 2호가 Ⅰ를 구해내고 있소
정의의 사자 1호는 깡패 2호가 되어 달아나고 있소
막다른 골목이 정의의 사자 2호를 깡패 3호로 만들고 있소
Ⅰ의 비명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소
비명소리를 타고 나타난 정의의 사자 3호가 Ⅰ를 구해내고 있소
정의의 사자 2호는 깡패 3호가 되어 달아나고 있소
막다른골목의Ⅰ가정의의사자3호를무섭다고그러오
막다른골목의Ⅰ가정의의사자4호를무섭다고그러오
막다른골목의Ⅰ가정의의사자5호6호7호를자꾸자꾸무섭다고그러오
정의의사자8호는막다른골목이무섭다고그러오
정의의사자9호는막다른골목이무섭다고그러오
정의의사자10호11호12호는막다른골목이자꾸자꾸무섭다고그러오
막다른골목은끌려오는Ⅰ가무섭다고그러오
막다른골목은늘어나는Ⅰ들이무섭다고그러오자꾸자꾸무섭다고그러오
막다른골목을빠져나간Ⅰ가다른막다른골목에서들려오는Ⅰ의비명소리를듣고있소Ⅰ의비명소리가막다른골목을빠져나간Ⅰ를정의의사자13호로만들고있소정의의사자13호가Ⅰ의비명소리가들려오는막다른골목으로달려가고있소
―여정, 「깡패, 정의의 사자, 막다른 골목, 그리고 Ⅰ」 전문
여정의 「깡패, 정의의 사자, 막다른 골목, 그리고 Ⅰ」는 이상의「오감도(鳥瞰圖) 시(詩)제1호」를 패러디하고 있다. 시적 배경 “막다른골목”도 같고, “무섭다고그러오”와 “~(좋/있)소”와 같이 어조와 표현도 같으며,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제1의아해, 제2의아해, 제3의아해, 제4의아해…’와 ‘깡패 1호, 깡패 2호, 깡패 3호’, ‘정의의 사자 1호, 정의의 사자 2호…’와 같이 시적 대상을 수(數) 기호로 호명하고 있음도 동일하다. 한마디로 여정의 시는 패러디를 통해, “막다른 골목”에서는 I (‘I’는 우리말로 읽으면 ‘아이’이며,「오감도(鳥瞰圖) 시(詩)제1호」의 “아해”는 ‘아이(兒)’의 한자어이므로, “l"는 이상의 시의 “아해 ” 라고 볼 수 있겠다. 또, 영어 문장에서 주어 ‘l'를 우리말로 옮기면 ‘나’이므로, 여기서는 ‘나’ 또는 ‘우리’를 가리킨다고도 유추할 수 있다.)나 깡패나 정의의 사자나 모두가 서로가 서로가 됨으로써(정의의 사자가 깡패가 되고, 깡패에게 당하는 I는 다시 정의의 사자가 됨.)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게 되는 악순환의 상황과 그 “막다른 골목”이 환기하는 욕망과 공포, 정의와 양심의 인간 본능을 풍자한다.
한편, 패러디가 창작이기는 하고 때에 따라서는 요긴한 시적 표현의 수단이기는 하되, 일반적으로는 모태가 된 원작의 울림과 감동, 가치를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굳이 값을 매기자면 유일무이한 창작물인 조각이나 회화 작품보다는 다수의 복제가 가능한 판화의 값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승주 著,『현대시 창작백과』)
위에 인용된 여정의「깡패, 정의의 사자, 막다른 골목, 그리고 Ⅰ」는 그의 첫 시집『벌레 11호』(문예중앙, 2011)에 수록되어 있다. 이승주는 시어 I를 “(영어 문장에서 주어 ‘I’를 우리말로 옮기면 ‘나’이며, 여기서는 ‘나’ 또는 ‘우리’를 가리킨다고 유추할 수 있다.)”로 해설했지만, 필자는 영어 I를 이상의「오감도(鳥瞰圖)」에 사용된 “아해”의 현대어 표기인 ‘아이’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1연 1행 “깡패 1호가Ⅰ를 끌고 막다른 골목으로 가고 있소” 를 풀이해보면, ‘깡패 1호가 Ⅰ(아이)를 끌고 막다른 골목으로 가고 있소’처럼 자연스러운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정의의 사자”들은 “Ⅰ(아이)”를 구한 후 왜 모두, “깡패”로 돌변하는지, 그 인간 근본에 대한 물음과 까닭을 유추해 보아야한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병적 파탄의 고리를 집요하게 파헤쳐 들어갈 때,「깡패, 정의의 사자, 막다른 골목, 그리고 Ⅰ」의 시 읽기의 묘(妙)에 가닿을 수 있다.
그럼 시속의 “막다른 골목”에서 “정의의 사자”가 갑자기 “깡패”로 돌변하고, ‘깡패’가 ‘I(아이)’를 왜 폭행하는지, 이 풀길 없는 현실 모순의 상징인 막장 드라마를 들여다보자. 이 시의 공간 설정에서 ‘I(아이)의 절박한 비명소리’를 통해, 도와주는 척 하며 도리어 사회적 약자를 부당하게 짓밟는 모순의 구조가 시 이해의 핵심이다. 또 이 시는, 이런 시적 페러디를 빌어 인간 전체에 만연한 비인간성에 대한 총체적 무감각을 강력히 고발 규탄하는 시적 알레고리가 절묘하다. ‘I(아이)의 절박한 비명소리’는 바로 ‘나’와 ‘너’에게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절규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부조리한 인간 군상들의 비인간성이 한 꺼풀씩 벗게 됨을, 고도의 시적 역설로 숨겨놓았다. 시인은 인간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악마의 탈을 꺼내 쓸 수 있음을 시를 읽는 타자에게 경고한다. 믿었던 ‘정의’가 도리어 ‘비정의’와 야합해 우리들의 “Ⅰ(아이)”들을 무서운 “비명”의 거리로 양산하여 내몰고 있는 현대사회의 비틀린 허점을, 시인은 다음 시행에서 예리하게 찔렀다. “막다른골목은끌려오는Ⅰ가무섭다고그러오 / 막다른골목은늘어나는Ⅰ들이무섭다고그러오자꾸자꾸무섭다고그러오”
즉, 여정은 이상의「오감도(鳥瞰圖)」를 페러디 하여,「깡패, 정의의 사자, 막다른 골목, 그리고 Ⅰ」를 통해 독시자로 하여금 새로운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한편, 약자들을 법망의 사각지대로 무차별 내모는 참담한 현실의 모순구조에 대해 분노할 것을, 역설로 되물었다.
변신과 벌레
1시집『벌레11호』(2011, 문예중앙)는 등단 후 무려 13년 만에 나왔다. 그의 시편들을 한 문단 한 문단 읊조리면, 뼈를 깎은 시어의 탁마가 수정처럼 빛난다. 2002년『현대시』2월호에서「벌레 11호」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순간 카프카(체코 프라하 1883년~1924년)의 소설『변신』속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와「벌레 11호」속의 화자와 한 겹으로 보였다. 등단 전 시인의 암투병과 두 차례의 결핵은, 시어의 행간과 고뇌 속에고통의 화인(火印)으로 고스란히 찍혀 있다. 이런 독한 알약과 병력은 카프카(그 역시 결핵이었다.)와 여정에게 끊임없는 불안장애와 콤플렉스, 환각과 환시를 안겨다 주었으리라.
半 지하방에서 꿈틀댄다. 12시를 향해 기어가는 시침 위에서 꿈틀댄다. 꿈틀대자마자 결핵약을 먹는다. 10개의 환약들이 식도를 타고 꿈틀댄다. 나는 10개의 환약들에 끌려다닌다. 수정체를 뚫고 급습하는 벌레 1호, 실내화를 신은 발로 밟아 죽인다. 책상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 2호, 책상 위에 놓인『죽음의 한 硏究』를 번쩍 들어 쳐 죽인다. 벌레 3호는 볼펜심으로 콕 찍어 죽인다. 벌레의 주검 앞에 냉소를 던진다. 입안에서「헌화가(獻花歌)」가 꿈틀댄다. 철쭉꽃이 피어난다. 참꽃이 아닌 그 개꽃이 피어난다.
밥그릇에 담겨 꿈틀댄다. 밥알들이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댄다. 식탁 위를 달려가는 벌레 4호, 입안에 든 숟가락을 번개같이 빼내어 쳐 죽인다. 오물오물 씹히는 밥알들이 벌레 4호 같다. 콩나물이 꿈틀댄다. 파김치가 꿈틀댄다. 그 사이로 지나가는 벌레 5호, 젓가락으로 집어 들어 그 사이에 끼워 죽인다. 벽이 꿈틀댄다. 의자가 꿈틀댄다. 가만히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방바닥에 가만히 있던 벌레 6호, 드러눕는 등짝에 짓눌린다. 나도 몰래 죽인다. 살갗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 7호, 8호, 9호, 이리저리 뒤척이며 꾹, 꾹, 꾹, 눌러 죽인다. 천장이 꿈틀댄다. 몇 켤레 구두가 내 머리 위에서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댄다.
벌레 10호, 잠을 뚫고 들어와 꿈속을 기어 다닌다. 투명한 재떨이를 들어 가만히 얹어놓는다. 서서히 죽인다. 죽은 벌레 10호를 재떨이에 담아 한 번 더 태워 죽인다. 꿈속에서도 꿈틀댄다.
―여정, 「벌레 11호」 전문
『변신』을 숙독하면서,〈왜 그레고르 잠자가 하필이면 벌레로 변했을까?〉를 자문했다. 소시민의 출구 없는 절망적 삶을 카프카와 여정은 은유의 화법으로 치고 나온 것일까. 아무리〈변신〉을 하려고 발버둥쳐도, 아버지(가난, 직업, 사회, 국가, 세계)로 상징된 거대한 폭거의 그물에 걸려, 뛰쳐나갈 수 없음을 두 작가는 알고 있었을까. 결국 사과 한 알에 맞아 고독하게 죽는 카프카의 ‘벌레’나 끊임없이 “半지하방에서 꿈틀”대며, ‘벌레’를 죽여야만 하는 ‘나’의 숙명은, 어쩌면 자신들의 환경에 묶여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현대인의 고뇌를, 인간 실존의 근원적 약점을 꿰뚫어 본 것은 아닐까. 하여, ‘벌레’는 자아를 잃은 현대인의 그로테스크한 자화상이자 불안한 실존의 표징으로 읽힌다. 이장욱은 표사에서 시집『벌레 11호』(2011, 문예중앙)의 의미를 이렇게 적었다.〈이것은 바코드 시대의 카프카일까? 모니터 킨트 이상(李箱)일까? 의미심장하게도, 그의 이름은 벌레 11호이다. ‘벌레’라는 카프카적 존재와 ‘11호’라는 이상식 기호의 음습한 합체, 그 언어는 순수하지도 않고 명징하지도 않다. 일반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없다. 악성코드들에 감염되고 오염됨으로써만 존재하는 시인의 언어.〉이다.〈이제 벌레 11호의 일은 이 불구의 세계를 온몸으로 기어가는 것 자체이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 나는 이제 이 긴 의태어들을, 이 아픈 문자들을,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읽으려고 한다. 그것이 벌레 11호를 만나는 가장 깊은 방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가령 시인이 달을 일러 “달아 나다. 너를 키워낸 엄마다.”(「달아나다」,『벌레11호』, 문예중앙, 2011)라고 말할 때, 그것은 명명이 도주되는 시, 명사(실체)와 동사(운동)가 서로의 자리를 바꾸는 시에 대한 선언이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이 젊은 시인의 가능성이 미처 다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조금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그의 첫 시집은 2011년에 나왔으며, 그때는 그의 때 이른 통찰이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는 너무 일찍 도착했으되, 그의 시집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 그는 시대를 뒤늦게 예언한 선지자였던 셈이다. 다행히 두 번째 시집은 그리 늦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자신의 속도에 세계를 맞추게 되었다.”(권혁웅, 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2016, 민음사) 작품 해설 중에서)
5년 만에 여정이 들고 나온 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2016, 민음사)를 이상(李箱)이 읽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사건이다. 이번 시집은〈고통에 찬 육체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 육체와 정신의 불협화음〉이자,〈텍스트가 너무 쉽게, 빠르게 전해지는 이 시대의 경계에서 느끼는 혼란과 불안, 그 속에서 찾아온 자아의 분열〉등을 담은 시집으로 정의된다. 내가 여정의 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2016, 민음사)를 받아 들고, 시 행간 속에 숨어있는 여러 겹의 화자를 하나씩 벗겨내고 있는 동안, 봄 개나리가 신천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개나리의 노랑을 벗겨내고, 냇물에 비친 양털구름을 벗겨 내고, 그 물 따라 흘러가는 초록을 벗겨내는 동안, 또 한 번 나는 그의 자서란 감옥 속에 갇혀 나를 여러 겹 벗겨 내어야만했다.
〈달과달사이·한번쯤은마음을나누는사람이고싶었다…달과달사이·거울이왔다·깨졌다…달과달과…달사이·거울들어왔다·깨졌다·깨졌다…깼다·꿈으로돌아갈·꿈이될·시간이다…달과달과달과…달사이·나는·우리는·또변할수있다〉
새벽에 일어나 수십 번 단어와 문단 사이, 말줄임표와 가운뎃점 속에 숨겨 둔, 여정의 시어의 뼈와 살을, 내 심장의 피에 적셔 발라 먹었다. 그리하여 나도〈달과달사이·한번쯤은마음을나누는사람이고싶었다〉달과 달이 서로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따스한 언어의 불을 쬐며, 깨진 거울 속을 밤낮으로 오갔다. 그의 말처럼 언어〈그 너머〉란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여, 언어는 태초부터 절벽 이전과 절벽 이후였는지도 모른다.〈언어 그 자체가 물질이다〉는 그의 말에 기립박수를 치다가, 문득 나는, 여정의 자서를 부채에 시니컬한 고딕 캘리체로 붓으로 썼다. 그를 만나면 전해 주리라 생각하다가,〈…달과달사이·거울이왔다·깨졌다…달과달과…달사이·거울들어왔다·깨졌다·깨졌다〉그리고 나는 꿈을〈…깼다·꿈으로돌아갈·꿈이될·시간이다…달과달과달과…달사이·나는·우리는·또변할수있다〉그에게 전해줄 부채가 내 서재 한 켠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것처럼, 현실과 꿈의 간극은 빙벽만큼이나 춥다. 그래서 천지만물은 변한다, 아니 변할 것이다. 하여, 봄도, 우리도, 언어의 행간 속에서「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가 될 수 있다.
나의 정신병동에 프리다 칼로가 헨리포드 병원의 침대 하나를 옮겨 온다. 침대에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누워 있다. 나의 병실로 들어서자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서 탯줄이 흘러나온다. 내 배꼽이 사라지고 나는 그 탯줄에 매달려 그녀의 배 위로 떠오른다. 그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내가 허공에서 가부좌를 하고 두 눈을 감는다. 3, 내 몸은 건강하다((세 번 반복한다)). 2, 내 마음은 편안하다((세 번 반복한다)). 1, 몰입 상태로 들어간다((세 번 반복한다)). 나는 지금 엘리베이터 안에 있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간다. 10, 9, 8, ((더 깊이)), 7, 6, 5, ((더 깊이, 더 깊이)), 4, 3, 2, 1,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자궁이다.
자궁 안에서 詩를 쓴다. 그녀의 뼈가 한 줄 한 줄 약해진다. 詩가 되지 못해 몸부림친다. 그녀의 진통이 심해진다. 미칠 것 같아 그녀의 배를 찢고 뛰쳐나간다. 탯줄을 끊고 달아난다. 그녀의 내장이 몸 밖으로 흘러내린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계속 피를 흘리고 있다. 담당 간호사가 급히 내 뒤를 쫓는다. ((이봐요, 보호자님, 보호자님)), 보호자님이 내 뒤를 쫓는다. ((이봐요, 보호자님, 보호자님))이 내 뒤로 점점 멀어진다. 나는 문이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간신히 탄다.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올라간다. 1, 2, 3,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면 다시 10층이다. 10층은 옥상이다.
나의 정신병동의 보호사들이 옥상 철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 두드림에 옥상도 울렁대고 바닥도 울렁댄다. 그녀가 없으면 커져 버리는 내가 옥상 바닥 끝에서 가부좌를 한다. 하늘도 어수선하고 땅도 어수선하다. 두 눈을 감는다. 점점 작아진다. 허공으로 몸이 떠오른다. 머리가 무거워 머리가 먼저 내려간다. 엘리베이터도 따라 내려간다. 10, 9, 8, 7, 6, ((더 깊이, 더 깊이)), 5, 4, 3, 2, 1, ((꽝))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면 포토샵이다.
그녀의 포토샵 窓에는 프리다 칼로의 도로시 해일의 자살(1939)이 걸려 있다. 다른 窓을 열고 두 명의 내가 들어온다. 그녀는 도로시 해일의 자리와 자세를 나에게 내어 준다. 두 명의 나는 그녀의 안내대로 그 자리로 가서 그 자세를 취한다. 그녀가 두 명의 나를 미친 사람 보듯 한다. 그리고「어느 정신병자의 꿈(2010)」으로 저장한다. 그녀가 포토샵 窓들을 모두 닫는다. 그녀가 문을 열고 작업실을 빠져나간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 또 다른 나에게 말을 한다. 그렇게 해서 옥상까지 오를 수 있겠어? 물론이지! 하며 또 다른 내가 허공으로 솟구친다. 머리가 무거워 발부터 올라간다. 엘리베이터도 따라 올라간다. 1, 2, 3,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면 병실이다.
나의 병실에는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두 명의 내가 그려진 그림 하나를 걸고 있다.
―여정, 「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전문
우선,「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를 오독하기 위해서는, 독자는 멕시코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의 절규를 들어야 한다. 칼로의 그림『나의 탄생』(1932, 금속판에 유채, 30,5×35,0cm, 개인소장) 앞에 서면 참혹하다. 핏물이 배인 침대위에서 흰 천을 덮어쓴 여자의 자궁 밖으로 내민 물컹거린 아기 머리가 보인다. 신식민주의적인 모더니즘에 대항한 이 리얼리티는, 남성 문화에 갇힌 칼로의 고뇌를 대변한다. 일곱 살에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된 칼로는, 열아홉 살에 전차 사고를 당해 평생 동안 서른두 번의 수술 끝에,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 화가로의 삶은 잔인했지만, 고통의 피를 찍어 그린 예술은 찬란했다. 1984년 멕시코 정부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국보로 분류한다.
그림「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속에는, 정신병자인 ‘나’를 위해 병실 벽에 프리다 칼로가 헨리포드 병원의 침대 하나를 옮겨 오는 것이 보인다. 침대에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누워있다.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선 핏물이 흘러나오고, 나는 탯줄에 매달려 버둥거린다. 시의 산고(産苦)를 은유하기 위해, 주체인 ‘나’를 자궁 밖에 고개를 내민 참혹한 타자(他者) 아기와 수정시킨다. 오독을 용서한다면, ‘정신병동’이란 가상공간은 더할 나위 없는, 매력적인 시의 가면이다. “내가 허공에서 가부좌를 하고 두 눈을 감는” 까닭은, 시의 자궁에 도달하기 위한 노정이다. 자궁의 상징은 “詩가 되지 못해 몸부림”치는 장소이자, “그녀의 배를 찢고” 뛰쳐나가는 시적 발광의 성소(聖所)이다. 하여,「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속에 여럿 ‘나’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는, 예술의 본질이 고해(苦海)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포샵 窓에 프리다 칼로의 그림「도로시 해일의 자살」(1939)을 걸어 놓아도 무방하다. 이런 추상 언어의 붓질과 색감, 시 행간 사이의 비극과 음영은, 결국 ((더 깊이, 더 깊이)) 내려가는 선(禪) 호흡에서 잠깐, 모인다. 알고 보면, ‘나’, ‘그녀’, ‘칼로’, ‘도로시 해일’은 자궁을 통해 치유될 수밖에 없는 고통을 감싼 여성성이다. 결국, 여정의 시는〈세상에 없던 전면적인 언어 실험〉이며,〈물질의 구성요소를 쪼개어 원소를 구분하고 다시 원소끼리의 조합으로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는 과학자의 호기심 어린 연구〉처럼 재배치된다. 여정의 이런 언어 실험은, 언어를 형태소의 최소 단위로 쪼개고, 단어와 기호를 혼합하고, 색채와 시선을 분산하여, 수많은 점으로 찍어 놓은 그림 액자 속의 작은 ‘나’가 된다. ‘나’는 현실의 벽으로 인식된 띄어쓰기, 고정된 행간 속의 논리적 관념을 이중괄호로 무화시키며, ‘시선’를 다초점으로 분열시켜 독창적인 시의 색체가 된다.
달과 달맞이꽃
「달맞이꽃((2012))」은 언어를 비극 쪽으로 가리킨다. 달맞이꽃의 꽃말은 그리움이다. 사랑을 잃고 죽어서 피어난 처녀의 색은 노랑이다. 여정의 시에서 노랑은 ‘점멸’이다. 독한 결핵 알약을 먹고 본 노랑 천국이다. 아니, 고흐의 미친 해바라기 속의 그 노랑이다. 글자들이 노랗게 흔들흔들 춤을 추는, 그 환각이다. 노랑은 모순이자, 음악의 D장조이다. 하여 뾰족한 노랑은, 날카로운 불안한 감정이다.
아내가 조금 늦는다.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먹구름이 낮게 깔린 저녁, 달((들))이 뵈지 않는다. 아내와 나란히 걸었던 그 둑길이 달((들))처럼 떠오른다. 달맞이꽃 흐드러지게 피었던…
…돌아오던 길이었다. 내 가슴은 달맞이꽃으로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핸들을 잡은 손이 가볍게 바람을 탔다. 파란불이 노란불로 바뀐 줄도 모르고, 달맞이꽃인 양, 달맞이꽃인 양…
…아내가 오지 않는다.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저녁 8시와 9시 사이, 어김없이 어둠을 끌어 앉고 돌아오던…
…아내가 돌아오면 다물었던 입술이 달싹거린다. 입술 사이로 말들이 망울을 터뜨린다. 달덩이 같은 아내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현관문 열리는 소리, 지금 창밖에는 노란 달((들))이 먹구름 사이로 얼굴을 삐죽((삐죽)) 내밀고 있다. 아내의 부드러운 음성이 내 귓가에 달빛처럼 내려앉는다. 달빛((들))처럼.
―여정, 「달맞이꽃((2012)) ―2002·『미네르바』에 핀「달맞이꽃」을 기념함」 전문
시,「달맞이꽃((2012)) ―2002·『미네르바』에 핀「달맞이꽃」을 기념함」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달맞이꽃으로 비유된 남편의 슬픈 사랑 이야기다. 여정의 감성을 여지없이 보여준 이 시를 읊고 있으면,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던 애절하고 로맨틱한 영화, 제리 주커 감독의 「사랑과 영혼」(1990, 미국)이 연상된다. 그 속에 등장하는 몰리(데미 무어)와 샘(패트릭 스웨이지)은 서로 사랑하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연극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샘은 괴한의 칼에 맞아 죽게 된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비극적 상황에서 샘은, 몰리가 외치는 애절한 부르짖음 “Don’t you leave me Sam. Hold on 제발, 나를 떠나지 마 샘”을 듣고, 천사를 피해 그녀 곁에 맴돈다.
한편, 여정의「달맞이꽃((2012))」의 시적 상황은「사랑과 영혼」의 반대이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아내가 죽는다. 시적 화자인 남편은 살아남아 휠체어에 앉아 죽은 아내를 그리워한다. 남편으로 은유된 달맞이꽃은 밤마다 달이 된 죽은 아내를 쳐다보며 슬퍼한다. 달맞이꽃은 애달픈 사랑이야기의 상징이며, 밤에 피었다가 아침이면 노란 꽃잎이 입을 다물고 만다. 마치, “파란불이 노란불로 바뀐 줄도 모르고,” 그렇게 죽은 아내가 된 달맞이꽃은 하늘에서 아프다. 말줄임표 속의 그 흐느낌은 더 깊고 아프다. “…아내가 돌아오면 다물었던 입술이 달싹거린다. 입술 사이로 말들이 망울을 터뜨린다. 달덩이 같은 아내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미처 이별을 다 말하지 못한 남편의 심장의 떨림이 괄호와 두 번의 말줄임표 속에 고스란히 느껴진다. 사랑스런 아내의 말이 꽃망울처럼 터뜨린다는 시적 표현은 역설이 기막히다. 자신의 잘못으로 죽은, 아내의 죽음을 시적 화자는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여, 현관문이 열리면 제일 먼저 눈과 귀가 거기로 쏠린다. 그러면, 창밖에는 노란 달이 죽은 아내가 되어 먹구름 사이로 얼굴을 삐죽삐죽 내민다. 달빛은 아내의 부드러운 음성이 되어 화자의 귓가에 내려앉는다. 영원히 그렇게 아내를 기다리며 남편은 달맞이꽃이 되어 달을 쳐다본다.
점묘 그리고 쇠라
여정은 어느 대담에서 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미술을 많이 알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내 시의 형식은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1859~1891)의 점묘법에 기초하고 있다. 내 시에서의 점묘는 인터넷이 가져온 파편화와 그 혼란의 와중에서 생겨난 당대 현실을 반영한다. 쇠라가 빛과 점, 선과 색채의 조합을 통해 현실을 캔버스에 담았듯이, 나 또한 단어와 기호를 전면적으로 재배치한 시를 쓴다. 하여, 나의 시작(詩作)의 궁극은, 실존과 서정의 모색이다.”
점묘는 19세기 후반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인상주의 미술을 추진한 유파에 그 뿌리가 닿는다. 대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한 인상주의는, 태양 아래서 빛과 색책, 대기의 변화무쌍한 양상을 미묘하게 묘사했다. 1874년 나달의 사진관에서 8회의 전시회를 연, 모네, 드가, 모리조, 기요맹, 고갱, 시슬레, 르누아르, 세잔은 인상파로 불려진다. 이 유파는 또, 세잔, 반 고흐, 고갱의 후기 인상파(신인상파)로 진화하면서 조르주 쇠라의 점묘에서 정점을 찍는다. 쇠라의 점묘는 햇빛 아래에서 펼쳐지는 당대의 일상생활 특히 여가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점은 인상주의와 같으나, 다채로운 원색을 그대로 캔버스 위에 작은 붓 터치로 찍어서, 관람자의 눈을 통해 혼합된 색의 세계를 정지된 화면처럼 보여주었다. 쇠라를 이은 시냐크는 이러한 기법을 색채 광선주의라고 불렀고, 색채를 섞지 않고 나누어서 칠한다는 의미로 분할주의, 무수한 색점(色點)을 찍는다는 의미로 점묘법이라고도 했다. 쇠라가 그림의 형태, 구성, 색체를 중요하게 생각했듯, 여정 또한 시,「178피스 퍼즐;「불면」―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을 기념함」에서 점묘법을 “한 텍스트에서 의미를 품은 언어들을 점(point)으로 독립시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점점이 토막 난 단어들의 묶음에서도 의미의 연쇄는 생겨난다.”(권혁웅)
아래에 소개한 시「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역시, 점묘법의 한 갈래로 보면, 반복된 쉼표를 통한 순수하고 정확한 언어 분할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이러한 문장 잇기의 은유놀이는 언어의 기하학적 체계를 떠올리게 하며, 시작품의 다층적 깊이를 섬세하게 확보한다. 언어와 언어가 물고 가는 적확한 연결 방식은, 행간 속에서 유장한 내재율을 만들어, 문장의 독특한 느낌을 비벼낸다. 이런 시법은 쇠라가 점묘법을 통해 보여준 대비의 효과를 극대화할 뿐 아니라, 문장의 형태와 윤곽을 점묘로 찍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럼,「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을 살펴보자.
나는 새벽 5시에 게임 종료된 하루살이백수다, 나는 낮 12시에 개켜진 이불이다, 빈집이다, 나는 전기밭솥에서 금방 꺼낸 밥공기다, 냉장고에서 꺼낸 밑반찬이다, 수저다, 나는 개수대에 던져진 빈 그릇이다, 지저분해진 수저다, 나는 소화기관에서 배설기관까지 걸어 다닐 운동화다. 운동화에 걸쳐진 셔츠다, 모자다, 나는 짤랑거리는 동전이다, 자동판매기에서 금방 꺼낸 커피다,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다, 연기다, 나는 심심해서 나를 만지작거리는 핸드폰이다, 음성변조 장난 전화다, 귀신 목소리다, 나는 휴지통에 버려진 종이컵이다, 꽁초다, 재다, 나는 낮 1시를 걸어가는 길이다, 티셔츠에 그려진 2개의 해골바가지다, 나는 홈플러스 남대구점이다, 승객을 기다리는 개인택시들이다, 테이크 아웃 커피 전문점이다, 나는 KG&G 대구 본부다, 뼈다귀 해장국집이다, 나는 음식물 쓰레기통 주변을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다, 맛있어 보이는 카키색 깃털의 양무새다, 새빨간 입술이다, 남자다, 나는 낮 1시30분에 앉아 있는 벤치다, 노곤함이다, 지루함이다, 갈 곳 없는 바람이다, 강증이다, 나는 버튼에서 방금 태어난 캔 음료다, 찌그러진 빈 깡통이다, 나는 찌그러진 허공 속을 걸어가는 낮 2시다, 앞산에서 내려오는 황사 마스크다, 나는 2개다, 3개다, ……나는 다세대주택이다, 희미하게 나를 지우는 자동문 유리다, 나는 버려진 책들에서 건져 낸 뭉크/칸딘스키/아소르/마그리트 공동 화집이다,《현대세계미술대전집》11번이다, 금성출판사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는 불안이다, 절규다, 뼈가 있는 자화상이다,즉흥 19다, 즉흥 30이다, 나는 푸가다, 노랑=빨강=파랑이다, 나는 밝은 땅 위의 형상이다, 비통해하는 사나이다, 지옥의 행렬이다, 나는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춘 대문 열쇠다, 현관문 손잡이다, 나는 나를 통째로 먹는 거짓 거울이다, 과대망상광이다, 최후의 절규다, 나는 낮 2시20분에 다시 돌아온 내 방이다,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영역 Ⅷ이다, 나는 개켜진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티셔츠다, 모자다, 공동 화집 표지다, 나는 가면들에 둘러싸인 자화상이다, 충혈진 눈이다, 야비한 웃음이다, 왼쪽 눈으로만 흘리는 피눈물이다, 나는 제임스 시드니 앙소르다, 나는 낮 2시50분에 새로 생성된 제임스앙소리다, 나는 다시 처음이다
―여정,「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전문
2011년 오월 수성못 근처, 카페 파스쿠찌에서 시인 여정을 만났다. 그때 나는 1시집『벌레11호』에 푹 빠져 살았다. 모호함과 낯선 시어들로 가득 찬 그의 시는, 안개여서 좋았다.「네게 거짓말을 해봐?!」,「자화상」,「미완의 노을」에 대한, 행간의 느낌을 몇 시간이고 물은 것 같다. 그의 시는 성서를 관통하고 있었다. 직관을 통해 사물을 논리적 언어로 받아먹는다는 미각을 느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에 대한 많은 담론을 주고받았다. 현대 사회에 대한 그늘과 비극에 대한 그의 인식은, 놀랄 만큼 예리했다. 특히,「자모의 검」,「비가」,「필락 말락 해바라기氏」속의 비극 관(觀)은, 온몸으로 병마(病魔)와 살아온 젊은 시인의 통증이 느껴졌다. 미래 과학에 대한 상상력의 깊이와 시적 혜안은, 접신된 자의 눈빛이 보였다. 결국 그는, 시가 아닌 방식으로 시를 쓰고자했다.
그 후, 초침과 분침이 엇갈려 우리에겐 무량(無量)의 시간이 공간에서 흘렀다. 이따금 통기타를 들으러 언더그라운드들이 모이는 이춘호 가인의 ‘유목민’에 들르면, 어둑한 구석에 그가 보였다.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빙긋 그는 웃었고, 나는 손을 들어 흔들었다. 언제나 노래가 끝나기도 전 골목으로 그는 사라져버렸다. 많은 밤과 낮이 또 5년을 갈랐다. 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를 들고 나올 때까지, 나는 참으로 그의 시집을 기다렸다. 그가 보내온 시집을 매화 꽃잎을 따서 헤아리듯 여러 달 걸려 탐미했다.「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밖의 여정을, 비가 뿌리는 앞산 숲 속 정자에서 또, 만났다. 바보처럼 나는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 다시 물었고, 그는, 더 깊고 집요하게 자신의 시 세계를 설파했다. 계속 하늘에선 시가 뿌렸다. 아니 비가 뿌렸다. 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은 저마다 웅얼거렸지만, 우리는 정자 한가운데 앉아 따끈한 대추차를 홀짝거리며, 시어들이 말라가기 전, 시담(詩談)을 펼쳤다. 2시집 덕분에 점심을 먹었고, 또 비와 비 사이에서, 하늘이 시를 뿌리는 것을 보며 서로의 갈 길로 멀어졌다.
예술가는 자화상을 남긴다. 붉은 색 분필로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아!’ 하는 탄성밖엔 낼 수가 없다. 깊게 패인 주름, 내면을 관(觀)한 자의 우수에 찬 젖은 눈빛은, 두렵고도 신비롭다. 고흐의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켄버스에 유화, 60×49cm, 1889sus, 코톨드 미술관 소장) 은 섬뜩하다. 고흐는 1889년 생레미 정신요양원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거울에 비친 이 그림을 그렸다. 왼쪽 귀를 잘랐지만, 거울 속에 비친 그대로 오른쪽 귀에 붕대를 한 것처럼 그렸다. 시인 여정 역시 위태롭고 아픈「자화상」(1시집)을 썼다. 그 당시 그에게 자화상은 “도화지가 자궁”이었다. 하여, 연필을 놓고 지우개를 집어 든다. 그리곤 자신을 “지울까 찢을까 잠시 망설인다”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은, 수십 개의 개체로 분할된다. 코드를 뽑는 순간 ‘나’는 게임 종료된 하루살이백수이다. 새벽 5시까지 화자를 따라가며, 이 시대의 바코드를 사색했다. 아니, 낮 12시에 개켜진 이불이 된 여정을 생각했다. 빈집에서 혼자 밥이 된 그는, 기막힌 은유다. 전기밭솥에서 금방 꺼낸 밥공기였다가. 냉장고에서 꺼낸 밑반찬이었다가, 금새, 수저로 변신한다. 시는 온갖 입구이자, 온갖의 출구이다. 날줄과 씨줄로 엮인 이 하루의 언어의 거미줄은, 시 속 화자의 복사이미지이자, ‘동전’이며, ‘커피’이며, 휴지통에 버려진 ‘종이컵’이다. 그 모든 것이자, 그 모든 것이 아닌「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이다. 이런 현대인의 다층적 이미지는,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벗겨도 벗겨도 또 나오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틈’이다. 알고 보면「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은 한 개인의 하루를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생(生)과 사(死)의 바코드이자, 현대 사회의 안팎의 문제이자, 현실세계와 가상현실의 모순의 경계이다. 이것은 바코드화된 자연의 비유이자, ‘나’의 또 다른 은유이며 환(幻)이다.
하여, 우리는 묻게 된다. “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기호의 본질은 무엇인가? 레이디 메이드와 미니멀리즘 그리고 팝 아트가 횡행하는 현대의 예술은 서정의 영기가 존재하지 않는 그저 단순한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본의 묘리에 종속되었으며, 마침내 코드로 무장하기에 이른다. (…) 현대 예술은 ― 너, 나 그리고 우리는 비트적거리는 게걸음을 걸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예술혼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해받기를 원하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미지의 기호에 함몰된 채, 모든 것은 환유적 기호의 운동으로 환원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자 자기만의 몽상의 세계에 귀의한 채 미적 기호를 아주 내밀한 의식의 코드로 무장한 채 이해의 저편에 예술을 위치시키게 된다.”(김석준 평론가) 그래서 화자는 말한다. 나는 “새빨간 입술이다.” “찌그러진 깡통이다” 끝없이 분열하는 “2개다, 3개다” 결국 시인은 화자를 통해 현대인의 ‘불안’과 ‘절규’를 지옥의 행렬로 은유한 것이며, 과대망상광이 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불확실성의 알레고리를 드러낸다. 하여, 오비디우스의『변신이야기』처럼, 현대의 군상들은 모두 “가면들에 둘러싸인 자화상”이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제각각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는 슬픈 시의 변신이라 하겠다.
시마詩魔
“애써, 불러 본다. 목련개나리라일락벚나무에 핀 목련개나리라일락벚꽃아―/다시, 불러 본다. 벚라일락개나리목련나무에 핀 벚개나리라일락해바라기달맞이목련꽃아―//봄은 꽃의 이름을 잃었고 나는 나무의 이름을 잃었다.//나는 빈 가지를 축 늘어뜨리며 수런수런 봄 핀다.”( 여정,「봄, 너무나 개인적인, 꽃」중에서)
시인의 천명은 시다. 하여 그들은, 기꺼이 광야에 두 팔을 벌리고 시의 번개를 맞는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의 고통이 없어질 때까지 천형을 견딘다. 시의 구멍은 서늘하고 아프다. 시어의 목을 잘라야 시가 핀다. 피를 뿜는 시마(詩魔), 그 귀신과 뒹구는 것이 시다. 밤낮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야하는 것이 시다. 여정의「히·스·테·리―케이블TV∥드라마채널·66」을 읽으면, 어린 날 보았던 죽은 고모의 염(殮)에서 흘러나오는 축축한 핏물 같다.
∥외롭다…외풍이심한방·따뜻한체온한점·그립다…이불을폭덮어쓰고·둘둘만다…어머니·사랑합니다…어머니는·나를마지막으로자궁을들어내셨다…나는·어머니를마지막으로사랑을접었다…유난히바람이많고많은·날이다…이불을더세게둘둘만다…나는한번도사람답게살지못했다…고치를짓는한마리누에처럼·자궁을떠도는한마리정충처럼·늘·미완의길을헤매었다…무서웠다…진공토련기에서잘이겨진시간과·돌아가는물레의어지럼증과·가마의불구덩이를·지나·마침내완성되었을때…내가어떤그릇이되어…어느도공의손에의해·산산조각부서져야할그완성도…운나쁘게살아남아·일상의반복을담아내며씻기고더럽혀져·이가나가거나깨어져·마침내·버려져야할그완성도…나는 무서웠다…어머니·저는·들어낸·당신의자궁속을·떠도는…떠도는자궁속을·영원히헤메는·한마리정충입니다·이불을둘둘만이곳은·외풍이심한미완의자궁입니다…꿈을꾼다·둘둘만이불은고치가되고…나는그것을뚫고허공을날아오르는나방이되고…나방은커다란꽃을향해날아가나비가되고…꽃속에·폭·내려앉은나비의양쪽날개는·성별이다른쌍생아가되고…커다란꽃은·허공을떠도는자궁이되고…쌍생아의깊은잠은·누에의잠이되고…누에의화려한꿈은·둘둘만이불이되고…이불속의나는·점점·번데기가되어깨어난다…먹기도싫고움직이기도싫고싸기도싫은·마비의날들이계속된다…그래도·어머니·마비된나를품고떠도는당신은…한없는·사랑입니·다?·한없는∥하지만·어머니…나∥가·고·싶·어·요…
―여정,「히·스·테·리―케이블TV∥드라마채널·66」전문
그래서 여정의 시는 “∥외롭다…” 한갓 언어일 뿐인데, 시가 이렇게 아파도 되는 것인지. 아니, 그렇게 참혹해도 되는 것인지, “이불을폭덮어쓰고·둘둘만다…” 아무리 시인이 불 속에 던져진 자(者)일 지라도, 시「히·스·테·리―케이블TV∥드라마채널·66」의 행간은 고해(苦海)다. 하여 묻는다. 자본주의는 시의 악령인가, 천국인가. 위의 시를 파면 팔수록 행간 그 자체가 맨손으로 기어오르는 빙벽이다. 어째서 시인은 고통의 손톱을 긁으며, “고치를짓는한마리누에처럼·자궁을떠도는한마리정충처럼·늘·미완의길을헤매”다녀야만 하는가.
막스 피카르트는 말했다. “현실의 세계와 시의 세계 사이에서 시인은 살고 있다. / 그는 시의 세계를 대리한다. 그는 시의 세계를 위해 시를 쓴다. / 시는 시인을 떠나 시의 세계로 가버리고 시인은 현실에 홀로 남는다. / 두 세계의 가운데서 시인은 고독하다. / 다음 순간 새로운 시가 그에게 오지만, / 다시 그를 떠나 시의 세계로 가버린다. / 그러면 시인은 다음 시가 올 때까지 다시 고독하게 홀로 머문다.”(『인간과 말』중에서)
피카르트는 시인을 ‘사물과 언어’가 지나가는 고통의 통로로 보았다. 하여 시는, “진공토련기에서잘이겨진시간과·돌아가는물레의어지럼증과·가마의불구덩이를·지나·마침내완성”된다. 사물의 보이지 않는 파동과 언어 입자 사이에 시의 환(幻)이 존재하듯,「히·스·테·리―케이블TV∥드라마채널·66」속의 외로운 화자는, 그래서 끝없이 모성을 찾는다. 모성이야말로, “당신의자궁속을·떠도는…떠도는자궁속을·영원히헤메는·한마리정충”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성소(聖所)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시인은 산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꿈을꾼다” 그 꿈은 “허공을날아오르는나방이되고…나방은커다란꽃을향해날아가나비가되고…”, “마비된나를품고” 떠돌다 궁극엔 어머니의 사랑에 안긴다.
그 사랑의 문 앞에서 절규하는 젊은 시인은 히스테리컬하다. “어머니…나∥가·고·싶·어·요…” 이 구절에서, 불현 듯 피에타(Pietà, 1498-1499. 미켈란젤로 조각상)가 겹쳐진 것은 무슨 연유인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에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여 진, 예수 그리스도의 축 처진 두 팔. 죽어서 비로소 부활한 그 경이로운 삶의 역설. 그렇겠다. 여정은「히·스·테·리―케이블TV∥드라마채널·66」을 통해, 어미야말로 이 우주의 부활 공간임을 직관한 것이다. 하여, 불안한 현대인에게 성모 마리아가 그랬듯, 그 고귀한 ‘모성’을 돌려주고자 한 것이다.
幻환, 혹은 비극적 홀황
처음으로 돌아간다. 여정의1시집『벌레11호』(2011, 문예중앙), 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2016, 민음사)는, 아무리 읽어도 내게 있어도깨비장난 같다. 화자는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며, 이승과 저승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음허(陰虛)한 존재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줄곧 중국 남송의 선승 무문혜개(無門慧開)가 말한, 행간마다 화두를 뚫어야 보이는 독참(獨參)이 떠올랐다. 여정의 시는, 시를 만나면 시를 죽이고, 시인을 만나면 시인을 죽여야만 얻는, 관(觀)이 들었다. 시를 말하는 자는 시를 모르고, 시를 아는 자는 말하지 않듯, 그의 시의 경계는, 선(善)도 되고, 악(惡)도 되었다.
그의 시속 괄호와 말줄임표의 의미는,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고해(苦海)의 탁마가 있다. 시속 화자는 우주의 ‘반물질’처럼 언어인 사물과 함께 태어났으나 충돌하여, 둘 다 빛으로 소멸하고 없었다. 그의 시는 보기는 하되 보지 못하고, 듣기는 하되 듣지 못하였다. 하지만, 여정의 시가 현대의 기호(언어 기호, 음악 기호, 그림 기호, 영상 기호…)로 가득하다할 지라도, 기의(시니피에)와 기표(시니피앙) 사이에 존재한다. 시의 행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촘촘히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으며, 보이지 않는 은유의 맥박이 뛰는 개인적 상징 시어로 가득하다.
‘무의식은 언제나 의식의 터진 틈 사이에서 흔들거리며 제 모습을 나타낸다.’(라깡) 하여, 여정의 시엔 “장차 하늘이 사람에게 대임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심지를 괴롭히고 그 근골을 지치게 하며 그 체부(體膚)를 굶주리게 하여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맹자) 성취하듯, 천명의 흐느낌이 들린다. 곡비(哭婢) ― 그는 우주 만상의 비극을 대신해 우는 자(者)인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오독(誤讀)의 강을 건너야 비로소 풀리는 기호의 뗏목이다. 그는 새롭게 열리는 천 년 미래의 기미를 찰라 속에 언어로 바코드해 두었다. 하여, 그의 시편 속에, 행간의 숨결 속에, 흘러가는 그 모든 행(行)과 연(聯)의 인연 속에, 언어는 기척한다. 그 기척이야 말로, 여정이 추구해온 물질의 언어이자 서정의 세계이다. 나는 미래시의 첨단에 서 있는 여정이, 기존 서정시를 타살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서정의 아바타를 키워냈다고 본다. 물론 아무리 아름다운 시일지라도 궁극엔 헛것이며, 그 헛것의 본질은 여정 시의 비극적 아름다움의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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