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치운쿨라의 이해와 행진의 의미
1-1. 토마스 첼라노의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전기 안에서 포르치운쿨라 성 마리아 성당에 대한 언급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성인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에서 포르치운쿨라에 관하여 자주 언급한다.
하느님의 종 프란치스코는 몸집이 작고 마음은 겸손하였으며, 수도 서원에서 작은 형제였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작은 몫[portiuncula]을 차지하였으니, 이 세상의 어떤 것을 사용하지 않고는 그리스도께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떨어진 땅이 예부터 포르치운쿨라 portiuncula라고 불리었으니, 이는 하느님의 예언적 섭리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님 다음으로 모든 성인들의 머리가 될 만한 공로를 탁월한 겸덕으로 세우신 동정 성모께 봉헌된 성당이 이곳에 세워졌다. 이 성당에서 작은형제회가 태동하였다. 견고한 기초인 양 그 위에서 형제들의 수가 늘어 갔고 형제회의 고귀한 건물이 솟아올랐다.
성인은 이곳을 어디보다도 사랑하였다. 그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곳을 특별한 경의를 가지고 받들도록 명하였다.
그는 그 소유권을 다른 이에게 주고, 자기는 자기와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그 사용권만을 가짐으로써 이곳이 형제회의 겸손과 극도의 가난의 거울로 언제나 보존되기를 원하였다(2첼라노 18).
회개 생활 초기 프란치스코는 쓰러져가는 산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의 주님으로부터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사명을 받고, 세 개의 성당을 고쳤는데 그중 하나가 포르치운쿨라 성당이다. 그리고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미사 중 사도들의 파견 복음을 듣고 생활 양식을 발견한 곳도 이 포르치운쿨라 성당이다. 이에 대해 토마스 첼라노 전기는 이렇게 기술한다.
어느 날 바로 그곳 성당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복음 전파하도록 어떻게 파견하셨는지에 관한 복음이 봉독되었을 때, 거기에서 일을 거들던 하느님의 거룩한 이는 복음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미사가 끝나자 사제에게 가서 그 복음에 대한 설명을 겸손하게 청하였다.
사제가 모든 것을 순서대로 이야기하기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금도 은도 돈도 소유해서는 안 되고, 길을 떠날 때 식량 자루도 돈지갑도 빵도 지팡이도 가져가서는 안 되며, 신발도 두 벌의 옷도 가져 가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고 하자, 이 말씀을 듣고 거룩한 프란치스코는 즉시 하느님의 영靈 안에서 기뻐외쳤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
그러더니 거룩한 사부님은 환희에 넘쳐 자신이 방금 들은 영혼에 유익한 말을 완수하기 위해 서둘러 댔다. 그리고 자기가 들은 바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하는 데에 있어서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즉시 발에서 신발을 벗어 버리고 손에서는 지팡이를 치워 버리며 한 벌의 옷에 만족하고 허리띠는 가느다란 새끼줄로 바꾸어 버렸다. 이제 십자가와 흡사하게 생긴 옷을 손수 마련하였으니, 그로써 악마의 모든 환영幻影을 물리치기 위함이었다. 그는 매우 거친 옷을 마련하여 그로써 육신을 모든 악과 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다. 매우 초라한 넝마 옷을 마련한 것은 세상에서 아무도 그 옷을 탐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가 복음에서 듣게 되었던 다른 일들도 최대한의 열심과 존경으로 실행하려 애썼다. 그는 결코 복음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이 들은 바를 경탄할 만큼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것을 문자 그대로 부지런히 이행하고자 신경을 집중하였다(1첼라노 22).
그래서 복음 선포를 위한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을 생활 양식으로 삼고 살기 시작한 프란치스코와 초기 동료들이 복음 선포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처음에는 ‘리보토르토’라는 곳의 헛간에 머물곤 했는데 소유권을 주장하는 농부에 의해 그곳에서 쫓겨나자 프란치스코와 초기 동료들은 포르치운쿨라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포르치운쿨라는 프란치스칸의 못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생을 마친 곳도 이곳이다. 포르치운쿨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 첼라노 전기는 이렇게 전한다.
시에나에 있을 때 그는 배가 부어올랐고, 발과 다리도 부어올랐으며, 위장병은 악화되어 거의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엘리아 형제에게 아씨시로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1첼라노 105).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의 거룩한 영혼은 육신에서 해방되어 하늘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천상 지식이 처음으로 그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름이 부어진 그곳 아씨시에서 그는 죽었다. 비록 하늘나라가 이 땅 어디에나 세워져 있음을 알고 있었고, 하느님의 은총은 어느 곳에서나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믿고 있었으나, 포르치운쿨라의 성당 자리는 더욱 풍성한 은총이 충만하여 천사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임을 일찍이 체험하였다. 그는 가끔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들들이여, 절대로 이 자리를 떠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쪽 문에서 밀려나면 저쪽 문으로 다시 들어오시오. 이 터는 참으로 거룩하며 하느님께서 사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의 수가 얼마 안 될 때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여기에서 늘려 주셨습니다…”(1첼라노 106).
그는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느꼈다. 그때 그는 정신적인 아들로 생각하는 두 형제를 불러… 기쁨에 넘친 큰 소리로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경을 가져오라 명하였고, 요한복음의 다음 구절부터 읽으라고 하였다.… 이어서 곧 티끌과 재가 될 것이니 그는 자기의 가시 돋친 철고행대를 두르게 하고 또한 재를 뿌리라고 명하였다. 곧이어 많은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이며 지도자인 프란치스코의 주위에 몰려들어, 복된 죽음과 행복한 임종을 지켜보며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 지극히 거룩한 혼이 육신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빛 속에 받아들여졌고, 육신은 주님 안에서 잠들었다(1첼라노 109-110).
1-2. 포르치운쿨라 전대사
어느 날 밤 프란치스코가 아주 심한 육적인 유혹에 빠졌는데 그것을 물리치려고 그는 근처 떡갈나무 숲에 알몸을 던졌다. 떡갈나무들이 그의 피로 붉게 물들었는데 거기에 장미꽃이 피었다. 그리고는 천사들이 그를 포르치운쿨라로 인도하였다. 프란치스코가 거기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께서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제대 위에 나타나 악마를 거슬러 이긴 것에 대한 상급으로 죄인들을 위한 어떤 은사를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청하도록 초대하였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보속한 다음 성체를 영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일치와 이단의 근절, 그리고 거룩한 교회의 현양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총용서’[Perdono general] 또는 ‘전대사’[Indulgenza plenaria]를 받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청을 받아들여 당시 페루쟈에 머물던 호노리오 3세 교황으로부터 확인을 받도록 명하였다. 교황은 1216년 7월 31일 7명의 페루쟈의 주교들과 아씨시에서 만나 작은 성당을 축성하고 대사를 공포하였고, 예수님의 계시에 따라 쇠사슬의 성 베드로 축일인 8월 1일 저녁 기도부터 다음 날 저녁 기도 사이에 이 전대사 축일을 지내게 하였다.
이 특전은 아씨시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교황들에 의해 전 세계의 모든 프란치스칸 성당들에 확대되었고, 요한 바오로 2세교황은 1988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이 전대사로써 포르치운쿨라 축일을 풍요롭게 하였음을 상기하면서 교령으로 이 전대사를 거듭 확인하였다.
이 교령은 전대사를 받기 위한 조건으로 1) 성지를 포함한 작은형제회의 성당을 방문하여 2) 주님의 기도와 사도 신경을 바치고 3) 고백 성사와 영성체를 하고 4) 교황의 지향에 따른 기도를 바치도록 하였다.
2-1. 포르치운쿨라 행진
포르치운쿨라 행진은 8월 2일 포르치운쿨라 축일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는 물론 전 세계로부터 아씨시를 향해 행진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축일이 시작된 이래 전 세계 프란치스칸들은 800년 가까이 이 행진을 이어 왔고, 그러는 가운데 지역에 따라, 단체에 따라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행진 전통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기간도 각기 다르고, 경로도 다르며, 행진 중의 프로그램이나 체험 방식도 각기 다르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에 맞게, 나이든 사람들은 나이에 맞게, 특별한 그룹은 자기들의 특별한 성격에 맞게 프로그램과 기간과 경로를 정하여 행진을 해 왔다.
2-2. 한국에서의 포르치운쿨라 행진
한국에서 포르치운쿨라 행진과 축일 미사를 처음 봉헌한 것은 2006년 대전에서였다.
그런데 처음 실시한 다음 이어지지 않다가 다시 하면 좋겠다는 요청이 많아 3년 후 재개되었으며, 장소도 대전 목동 성당과 수도원이 좁고 불편해 현재의 산청 성심원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에서 포르치운쿨라 축일과 행진의 의미는 <지성>, <정화>, <은혜>로 요약된다.
우리가 이 축일을 통해서 전대사의 은혜를 받으려면 그에 합당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은혜를 받기 위한 공로를 쌓는 뜻이 아니라 은혜를 받는 자의 겸손하고 정성스런 태도를 갖추기 위한 것이다.
- 지성至誠 또는 치성致誠으로서의 행진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위해 100일 정성을 바치곤 하였다. 불가에서는 스님에게서 좋은 법문을 듣기 위해 3천배 절을 하기까지 하였다. 우리도 전대사를 받기 위해서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하고 실제로 정성을 바쳐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 은혜를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은혜를 내리실 때 은혜를 은혜답게 잘 받기 위해서이다.
정성을 들이는 한 방법으로서 우리는 각기 자기 프로그램을 가지고 행진을 한다. 개인적으로 행진을 할 수도 있고, 단체가 자기 단체의 특성을 살려 가면서 행진을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정의 평화 창조 질서 보전 위원회는 행진을 하면서 띠를 두르고, 환경과 관련한 행위를 하면서 할 수 있고, 청년들은 체험적인 요소를 많이 도입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행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행진은 지역에 따라, 그룹에 따라, 기간과 경로와 방식을 각기 정하여 알아서 온다.
- 정화淨化로서의 밤샘 기도와 고백 성사
8월 1일 저녁까지 전대사 특전 미사를 봉헌할 성심원에 도착하여, 영성 강의, 고백 성사, 그리고 밤샘 기도를 통하여 내적인 정화를 한다.
- 은혜恩惠로서의 전대사 특전 미사
미사는 전례서의 지침대로 가능한 한 성대하게 거행할 것이며, 이 미사 중에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특별한 봉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봉헌에는 공동의 결심을 봉헌할 수도 있고, 각자의 다짐을 봉헌할 수도 있으며, 특별 지향의 헌금 봉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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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포르치운쿨라의 이해와 행진의 의미”에 대한 설명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께서 정리하셨음 (‘길따라 주님따라 - 2015 포르치운쿨라 행진. 진도 팽목항에서 산청 성심원까지 - “ 2015년 행진기 13쪽 - 21쪽에 게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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