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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1:1-17(8)) 하나님과 연애하면 지구를 이긴다.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우리 오늘의 번제 아가서 1장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어제는 아가서 1장을 읽기는 했습니다만 아가서 전체에 대한 개요를 말씀을 드렸고 오늘 본격적으로 아가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1장1절 부터 17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가운데 우리는 1절부터 8절 까지만 같이 읽습니다.
1. 솔로몬의 아가라
2.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5.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 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7.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같이 되랴
8. 여인 중에 어여뿐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새끼를 먹일지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과 연애하면 지구를 이긴다.> 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과 연애하면 지구를 이긴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은 믿음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연애하는 단계에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 지구위에서 지구가 정한 방식대로 지구와의 경쟁에 이겨서 한 번 폼 나게 잘 살아보자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서 믿는 것이지만, 그렇게 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지구위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이기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지구를 이기고 지구를 들 수 없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지구를 이기자는데 있는 것이지 지구 속에서 지구위에서 벌어지는 경쟁에서 1등해서 내가 누구보다도 돈을 더 많이 벌고 누구보다도 더 유명해지고 누구보다도 더 높아지고 누구보다도 더 매끈하게 형통하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이 없어도 하나님이면 나는 행복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지구를 이기는 것이고 이 이김을 위해서 믿는 겁니다. 이 이김을 표현하라고 살려 두고 계십니다.
예수님 믿었으면 죽는 것이 제일 유익이지요. 하나님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보다 더 큰 복락이 이 땅위에 어떻게 형성될 수가 있겠습니까? 더 큰 것은 불가능합니다.
죽는 것이 최고인데 왜 살려두시느냐? 지구를 이기고 돌아오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연애하면 지구를 번쩍 들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오늘 술람미 여인의 마음상태를 읽다보면 바로 이 메시지가 우리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표현이 계속 나옵니다. 솔로몬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에 대한 표현이 어떻게 나옵니까? 2절에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라고 합니다.
'그대 사랑'이라고 표현해야 하는데 왜 '너의 사랑'이라고 표현을 했는지 몰라요?
‘그대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한다.’라고 해야 맞지요.
‘입 맞추기를 원한다'는 것은 이 술람미 여인이 키스를 밝혔다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솔로몬과 함께 있고 싶다'는 겁니다. 솔로몬을 향한 간절한 마음의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3절 경우도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네 기름이 향기롭다’라는 것은 기름은 주로 몸에 바르는 것인데 몸에 바르는 기름이 향기로워봤자 우리 식으로 말하면 '폴로향수가 냄새가 좋다. 샤넬5가 좋다.'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잖아요. 솔로몬이 몸에 기름을 바릅니다. 즉 솔로몬의 존재자체가 향기롭다는 거예요. 이름이 향기롭다는 것인데 완전히 취해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회 보는 사람이 ‘자, 오늘 다음 분을 모시겠습니다.’라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배용준씨!’라고 하면 일본 아줌마들이 와~ 하잖아요. 그 이름만 들어도.
또 연애하실 때 여러분의 애인 이름이, 예를 들어 고속터미널 방송에서 ‘홍길동씨를 찾습니다. 홍길동씨는 데스크로 나와 주세요.’라고 하면 내 애인이 김길동이었다고 하면 깜짝 놀라잖아요. ‘길동’이라고 만해도 마음이 두근두근 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도 보면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라고 하는데 이것을 원문대로 말하면 ‘왕이시여 나를 당신의 방으로 이끌어 들여 주세요.’라고 간절히 탄원하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4절이 좀 뒤죽박죽되어 있어서 이해를 잘 못하실 거예요. 제가 알기 쉽게 다시 한 번 의역을 해 드릴게요.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이것을 원문에 보면 제일 처음 나오는 문장이 아닙니다. 제일 처음에 ‘너는 나를 인도하라’라는 게 무슨 뜻인가 하면 '그대여, 내 앞에서 그대가 한 번 달려 보세요.'라고 하는 것이고 쉽게 말하면 ‘나 잡아 봐라’라고 하면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나와 예루살렘 여자 모두가 달려갈 것입니다. 당신이 나 잡아보라고 하는데 도대체 안 쫓아갈 여자가 누가 있겠습니까?’라는 말인데 그 중에서 '나를, 나만을, 당신이 나 잡아봐라 하면 나도 예루살렘 여자들도 다 쫓아 갈 텐데, 왕궁에 있는 모든 여자들이 다 쫓아 갈 텐데, 당신을 사랑하고 흠모하고 쫓아갈 텐데 그 중에서 나만을 당신의 방으로 이끌어 들여 주세요'라고 하는데 오! 굉장하지요.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라는 말은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모든 아가씨들이라면 당신의 매력에 빠져서 헥가닥 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 잡아봐라’라고 하면 모두가 다 쫓아갈 것인데 ‘그 중에서 나만을 당신의 방으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하는 뜻입니다.
제가 언젠가 아침 일찍 고속도로를 달려서 어머니를 뵈러 가다가 휴게소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아침 일찍 갔어야 했기에 아침을 휴게소에서 하려고, 휴게소 바깥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그 휴게소의 스피커에서 아침부터 아주 요란한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노랫소리가 들려오는데 아휴~ 막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거예요. 그 노래의 가락도 그렇고 노래의 가사도 그렇고 뽕짝인데 너무너무 유치해서 이렇게 얘기하면, 제가 되게 고상한 사람 같지만 (고상하지는 않지만) 그 노래는 아, 정말 유치하다고 말할 수 있겠더라고요.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요.
여러분! 가사를 한 번 기억나는 대로 해 볼게요.
“나를 사랑으로 채워줘요, 사랑의 빠데리가 다 됐나 봐요, 당신 없인 못살아, 정말 나는 못살아, 당신은 나의 빠데리”라고 하는데 아, 이걸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나 혼자 있었기에 망정이지, 누구랑 같이 있었으면 서로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를 뻔 했어요. '빠데리'가 뭐예요? 빠데리가. 그나마 유식하게 배를리 하던지?
‘당신은 나의 배를리’ 영어식 발음으로.
‘당신은 나의 빠데리’라고 하는데 여러분 이상하지요? 꼭 스컹크 방귀냄새를 맡고 너무너무 쓰려서 입을 막 비비는 표범처럼, 너무 민망하고 유치해서 그 소리가 좀 안들렸으면 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한 마디 한 마디 ‘나를 사랑으로 채워줘요, 사랑의 빠데리가 다 됐나 봐요.’라는 가사들이 마음을 파고드는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설득력 있게 마음에 와 닿는지요.
사랑이 별겁니까? 애인이 별거예요? 빠데리죠. 나를 충전시켜주고 내게 힘을 주는 그 빠데리가 애인 아닙니까? 다른 게 없어요. 마지막 구절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 봤어요. 여러분! 어떤 줄 아십니까? 나는 이런 노래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인터넷을 찾아봤는데 어떻게 찾았냐면 “사랑의 빠데리”라고 찾았는데 있더라고요. 젊은 여가수가 불렀더라고요. 마지막 소절을 보면 ‘내겐 당신만이 전부에요, 당신이 너무 좋아 완전 좋아요.’라고 하는데 이 가사 봐요. '당신이 너무 좋아 완전 좋아요.' 이걸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썼는지 몰라요.
‘하나뿐인 내 사랑, 둘도 없는 내 사랑, 당신이 짱 이랍니다.’라고 하는데 정말 짱 이지요.
‘아무리 힘든 날에도 당신만 있다면, 힘들지 않아, 나는 슬프지 않아, 당신 곁이라면.’라고 하고 다시 또 올라가서 ‘나를 사랑으로 채워줘요, 당신은 나의 빠데리’라고 또 노래가 반복돼요.
여러분! 여기서 ‘내겐 당신만이 전부에요.’라는 이런 말들이 왜 이렇게 마음에 파고드나 했더니 제가 설교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까 ‘당신’이라는 말을 ‘하나님’으로 바꿔 보았어요.
'내게 하나님만이 전부에요. / 하나님이 좋아 완전 좋아요. / 하나뿐인 내 사랑, 둘도 없는 내 사랑 / 하나님이 짱 이랍니다. / 아무리 힘든 날에도 하나님만 있다면 힘들지 않아 나는 슬프지 않아 당신 곁이라면.'라고 바꿔 보니 신앙고백이 됩니다. 이 유치한 노래가.
'당신'이라는 말을 하나님으로 바꾸고 나니까 이건 유치한 게 아니라,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 별첨부록으로 첨가시켜야 되겠더라고요. 하이델베르크 소요리 문답 가운데 괄호로 묶어서 ( )는 나의 빠데리다. 문제내야 되겠더라고요. 세례 받을 때 요리문답 하잖아요?
그 요리문답안의 문제 중에 ( )은 나의 빠데리. ( )은 나의 빠데리.
누구냐? 예수님, 하나님
여러분! 그런데 말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지금 이런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그리움에 벅차서 ‘아! 그립다. 내게 입 맞추면 좋겠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좋겠다. 보고 싶다. 당신은 나의 빠데리다. 완전히 나는 당신에게 취해 있다. 당신만 있으면 된다. 예루살렘 처녀들이 정직함 가운데서 솔로몬을 좋아할 것이다.’라고 그랬잖아요. 어제 말씀드린 대로 정직함 안에서 마땅히 좋아한다.
'정직함'이라는 게 뭐예요? '사랑의 빠데리'라는 노래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아무리 힘든 날에도 당신만 있으면 힘들지 않아, 내겐 당신이 전부야.’라는 게 정직함입니다.
당신이 함께 있으면 돈이 생기니까, 당신이 함께 있으면 건강해 질 수 있으니까, 당신이 함께 있으면 형통할 수 있으니까, 이것은 정직함 가운데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간절한 사랑의 고백과 하나님을 향한 그리워하는 마음,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 그대로 우리가 하나님과 주님을 향하여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예표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한 그리움이 그러한 사랑의 감정이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과정이 있어요. 술람미 여인의 이 고백을 1절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습니까?
보세요. 5절에 보면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라고 하는데 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 4절에서 “왕이시여 나를 당신의 방으로 끌어들여 주세요.”라고 하는 말은 장희빈 같이 야심에 찬 여자,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정치꾼과 외교가가 아닌 다음에는,그냥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이게 그냥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수넴이라고 하는 술램이라고도 하고 술람이라고도 하는데, 이 술람미 여인이 바로 수넴의 시골구석에 있는 가시내예요. 어디 시골에 있는 가시내가 왕을 향하여 ‘왕이여 나를 개인적인 사적인 방으로 끌어들여 주세요.’라는 이 따위 말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이 능지처참 감 아닙니까? 그리고 능지처참이라고 하는 신분상의 어떤 위계질서만이 문제가 아니고 이 아가씨 스스로가 열등감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왕에게 이런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열등감과 자격지심과 이런 것들이 바로 5절에 반영이 되고 있는 거예요.
시골에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솔로몬과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5절에 보면 “예루살렘 여자들아 나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검다고 흑인이라서 검은 게 아니에요. 다음절 읽어 보니까 오빠들이 자기들의 포도원을 지키라고 맡겼고 그래서 내가 하루 종일 햇볕에 나가 포도원 지키느라고 이렇게 검게 변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올리브기름을 예쁘게 발라가면서 암갈색으로 윤기 나게 선탠을 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아주 예쁠 수도 있어요. 그런데 햇볕에 그을려 버린 겁니다. 시골에 계신 어르신들을 보면 피부가 빨리 늙어 버려요. 햇볕에 그냥 노출되어버리니까. 가꾸지 못했다는 겁니다. “나의 포도원을 가꾸지 못했다고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6절에 보면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내 몸을 가꾸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올라와 보니까 예루살렘 여자들은 하얗습니다. 그 당시 비비크림 콜드크림을 다 바르지 않았겠습니까? 왕궁에 있는 여자들 보니까 다 예뻐요. 자기처럼 거무칙칙한 게 없어요. 왕궁에 들어왔을 때 아마 여자들이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어머, 쟤, 뭐야?’라고 이러지 않았겠어요? 옷차림이며 피부색이며 행색이며.
더군다나 더 의심이 가는 것은, 9절에 보면 솔로몬이 이 술람미 가시내를 바로왕의 병거의 준마에 비교합니다. 이집트 전역에서 제일 멋있는 말을 골랐겠지요. 제일 우수한 말을 골랐겠지요. 바로왕의 병거를 끄는 말이니까. 그러나 그 말이 아무리 멋지다고 해도 우수하다고 해도 아가씨에게 말 같다는 말이 말이 됩니까? 아가씨를 말로 비유하는 것이 이게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아니면 솔로몬이 독특한 취향을 갖고 있는 겁니까? 이게 시골에서 포도원지기 하느라고 근육이 생기고 씩씩하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처럼 이렇게 쪽 빠진 세련미라고는 없습니다. 그것을 좋게 말한다고 한 것이 바로왕의 병거를 끄는 준마 같다고 하는데 이건 욕이라고 봐요.
우리나라 시어머니들이 이 말띠 가시내를 며느리로 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런 열등감과 자격지심 객관적으로 봐도 자기가 예루살렘 여자들에 비해 예쁘지 않아요. 하얗게 생기고 세련되고 아름다운 왕궁에 있는 예루살렘 여자들과 비교해보면 정말 창피하지요. 그런데 그 열등감을 극복합니다. 다른 여자들과 비교해서 생기는 열등감도 극복을 하고 왕과 시골여자라고 하는 신분상의 격차에서 오는 열등감도 극복을 합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에 여자들 간에 통용되던 미의 가치기준을 딛고 올라서버리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열등감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솔로몬의 지극정성 어린 사랑의 고백이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솔로몬이 불렀습니다.
‘술람미 여인이여, 내가 그대를 사랑하노라 / 에이, 왕께서 농담하시네. 아, 저 옆에 있는 저 여자들 봐. 옆 눈으로 힐끔거리면서, 저렇게 예쁜 여자들 놔두고 왜 나를 말도 안 돼?’
청동거울로 자기를 들여다보니 거무칙칙합니다. 옆에 있는 예루살렘 여자들 얼굴이 하얗고 이목구비가 빼어나고 얼마나 야들야들하고 예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사내머슴 같아요. 그런데 왕이 날보고 예쁘데요. '왕께서 수넴 시골에 있는 나를 에이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라고 하는데 이틀째 얘기하고 삼일 째 얘기하고 사일 째 얘기하고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얘기를 하고 사랑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술람미 여인의 마음이 열리면서 ‘솔로몬 왕이 진짜 나를 사랑하나? 오, 진짜인가 보네! 오! 나를 사랑하네. 수많은 예루살렘 아가씨들이 솔로몬 왕을 좋아하지 않을 여자가 누가 있겠느냐? 그런데 진짜 게달의 장막 같이 시커먼 나를 세련되지 않은 나를 좋아한단 말이냐? 아, 내가 솔로몬의 휘장 같이 되었구나!’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게달의 장막'이라는 것은 '시커먼 장막'을 말합니다. 베두인들 유목민들이 쓰는 흑염소가죽으로 만든 장막을 말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휘장이라는 것은 왕이 소풍 나갔을 때 경치가 좋은 곳에 천막을 칩니다. 그때 장막 끝에 달아 놓는 장식들이에요. 얼마나 아름다웠겠어요. 아름다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솔로몬의 마음에 맞아야 돼요.
그러므로 게달의 장막같이 시커멓게 되었을지라도 솔로몬의 여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건 무슨 뜻이냐? 객관적으로 통용되는 미의 기준을 들이댈 경우에 예루살렘 여자들 중에 나보다 예쁜 여자가 많이 있지만 나는 게달의 장막 같이 시커멓게 되었을 지라도 솔로몬의 여자가 되었고 솔로몬의 휘장이고 솔로몬의 휘장 같이 되었다. 솔로몬의 여자라는 겁니다.
솔로몬의 여자의 취향이 특이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많은 세련된 여자들만 보다가 투박하고 거무칙칙한 시골 아가씨를 보니까 거기서 아마 생동감을 느꼈는지? 어쨌든. 여러분! 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나도 한 번 잘 살아 봐야 돼. 나는 돈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명예가 없는 사람이야. 나는 지금 10년 목회를 하고 있는데도 교인이 50명도 안 돼. 이 지구가 만들어 놓은 가치관에 의해서 끊임없이 우리는 이런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돈이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이 돈을 놓으면 큰일 나. 명예가 있고 인기가 있는 사람도 이 인기와 명예를 놓치면 큰일 나. 명예와 인기를 얻었던지 못 얻었던지 돈을 벌었던지 벌지 못했던지 전부 이 지구 위의 가치에 눌려 살고 속박되어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사랑을 받은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통용되는 미의 기준을 제쳐버리고 ‘내가 바로 솔로몬의 여자다.’라고 선언을 하는 겁니다. 솔로몬의 사랑의 힘이 그를 받쳐주는 것이에요.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연애 아닙니까? 연애가 성립하려면 사랑의 고백을 받아야 되잖아요.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지구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쟁에서 1등 하려고 믿는 것이 아니잖아요. 누구보다도 돈 버는 경쟁에서 잘 뛰고, 대학 들어가는 경쟁에서 잘 뛰고, 건강하게 잘 사는 경쟁에서 잘 뛰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좀 목적을 분명히 하자고요. 이 세상과 지구를 이기려고 믿습니다. 이기려고 믿어요. 그런데 현실이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신라호텔에서 식사하자는 제안을 받습니다. 신라호텔 가서 제 돈 주고 못 먹어요. 식사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갔는데 발렛파킹을 시킬 수가 없어요. 쉽게 말해서 차가 창피해서 저도 그렇더라고요. 거기다 딱 갖다 놓고서는 정말 바빠 죽겠고 시간이 없어서 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또 신라호텔 앞에 주차할 곳이 없어요. 거기 면세점 앞에 가면 쫓아내요. 저리가라고. 그러면 꼭 차가 나빠서 쫓아내는 것 같아요. 안 그러면 저 밑에 있는 주차장에 세우고 올라가야 돼요. 아예 일찌감치 와서 세우고 올라가요. 창피해서 주눅 들어요. 그러니 돈 없이 살겠습니까?
자식들 데리고 식구들 데리고 나들이 갔는데 나는 티코 타고 가고 옆에는 벤츠타고 내렸어요. 그 벤츠타고 내린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을 봅니다. 어떻게 보겠습니까? 아, 정말 창피해서 못 살지요. 이게 현실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변하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그 마음에 확신이 서면 지구에서 말하는 모든 가치를 다 물리치고 나는 하나님의 여자다. 나는 솔로몬의 휘장이다. 세상눈으로 보기에는 내가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내가 돈이 없고 정말 번 것 없고 학식 없고 명예 없고 내 교회 목회20년이 돼도 100명도 안 되지만 내가 누구냐? 게달의 장막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하나님의 여자다. 솔로몬의 휘장이라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지구를 제쳐 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지구를 제친 예가 어디서 나타나는가?
제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본문 사도행전의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아까 얘기했듯이 신라호텔 앞에서 차만 어떠해도 주눅이 드는 우리들이 왕 앞에서 ‘당신이 나처럼 되라’고 하는데 거지같은 상태에서 사도바울의 말이 이해가 됩니까? 괜히 허풍 아닐까요? 허세 아닐까요? 아니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에 주눅 드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못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 있어야 됩니까? 아니요. 사랑의 빠데리 노래의 가사가 뭡니까?
‘내게 당신만이 전부예요, 당신이 너무 좋아요, 완전 좋아요, 아무리 힘든 날에도, 당신만 있으면 힘들지 않아요.’라고 하는 게 세상 사람들이 연애할 때 하는 고백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자들이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애인으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이 지구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힘든 일 때문에 억눌려서 꼭 바보같이 빈둥거리겠습니까? 비실거리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랑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뭐예요? 하나님을 내 은밀한 밀실로 모셔 들여서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밀실로 받아 들여서 둘만의 관계를 갖고 싶어 하시는 이러한 사랑을 확증해 주신 사건이 십자가사건이요. 그러한 사건을 받아들이게 해 주는 사건이 십자가사건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솔로몬이 사랑의 고백을 하듯이 술람미 여인이 그 사랑의 고백 앞에서 ‘에이, 나를 사랑할까? 나를 사랑할까?’라고 의심합니다.
'에이, 난 의심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데.'라고 하시는데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이끄시고 계심을 믿는다면 지금 이 아침에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 근심은 왜 생기는 겁니까?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사랑하실까? 하나님이 사랑하면 끝난 것이잖아요. 왕이 사랑하면 끝난 것이잖아요. 그 인생이 뭘 걱정할일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랑을 안 받아들이고 안 믿는 거예요.
하나님의 그 사랑의 고백을 애인의 사랑의 고백으로 받아들였다면 우리 마음에 지금의 걱정과 근심과 불평과 불만이 생길 수가 있다? 없다? 없다 입니다. 아직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가치가 정한 것들이 없으면 지구의 가치에 속박돼서 벌벌 떨고 불안하고 공포에 쌓이고 화가 나고 원망스럽습니다. 이것이 다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사건이 십자가사건 아닙니까?
이 세상의 가치와 이 세상의 모든 관계에 대해서 죽어야 돼요. 그래야 당신만이 전부가 돼요. 사랑의 빠데리라는 가사처럼 당신만이 나의 전부예요. 당신만이 나의 전부가 되려면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해서 십자가 붙잡고 죽어야 당신만이 나의 전부가 될 것 아닙니까? 당신만이 전부가 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으로 확인되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말하는 거예요.
내가 이 지구위의 가치기준으로 볼 때는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거무칙칙하고 못 생겼다고 사람들은 말할 지라도 나는 솔로몬 되시는 하나님의 여자다. 누가 나를 뭐라고 할 것이냐? 그리고 나갑니다. 돈 많은 사람들에게 뭐라고 얘기 합니까?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구를 번쩍 드는 거예요. 지구를 이긴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에 설복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정복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설득될 때 우리는 지구를 이길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생기는 모든 세상 가치기준들 때문에 생기는 걱정들 다 물리칠 수가 있어요. 뭐가 없다. 뭐가 없다. 우리자식 좋은 대학 못 들어갔습니까? 이 지구가 정한 좋은 대학? 걱정 없어요. 하나님의 여인으로 만드세요. 하나님의 술람미 여인으로 만드시면 돼요. 그것을 위해 기도하시면 됩니다. 아직 마흔이 다 돼 가는 딸이 시집 못 가고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좋은 사윗감 만나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을 내 딸의 애인으로 소개하시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세요. 하나님과 연애하면 지구를 이기고 지구를 이기면 지구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허물지 못할 행복을 찾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게달의 장막 같은 저희들을 주님의 십자가로 불러 주시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지구에 대해 죽는 마음 갖게 하시고 하나님이 나의 전부가 되어서 다가와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정복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는 하나님의 여자다.’라고 외치며 이 지구를 번쩍 들며 사는 사람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