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질하기
이동하(소설가)
1. 나의 손
생업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손이다. 작고 허약하고 어벙하다. 그런 손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나약하기 때문에 노동은 힘겹다. 재바르지 못하므로 주판알을 잘 튕길 수도 없다. 그림을 그린다거나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는 일 같은 건 숫제 상상해 보지도 않았다. 거기다 꼼꼼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계획서를 작성하고, 서류 뭉치를 뒤적이고, 말끔하게 정리하는 작업 따위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 어벙한 손으로 어떻게 밥을 빌어먹을 수 있을까? 내 스스로 들여다봐도 문득문득 용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게 가능했다면 그건 확실히 요행수였으리라.
K는 손재주를 타고난 친구다. 그가 지폐에 찍혀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를 아주 쏙 빼어 닮게 그려서 내게 보여준 것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의 일이었다. 몇 권의 만화를 출간한 것은 고교 때의 일이고, 지금은 쇳덩이를 다듬어 몇 톤짜리 직물기계를 제작해내고 있다. 진작부터 나는 그의 손이 만능이라고 믿어 버렸다. 연필을 쥐면 삽화가이고 망치를 들면 훌륭한 공작인이다. 그의 손은 미장이의 일도 척척 해내고, 전기기사나 도안사, 간판공, 목수, 정원사, 요리사 등등의 작업에도 결코 서툴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그가 세상사는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만능의 손을 나는 자주 빌려 썼다. 자주 빌려 쓴 정도가 아니라 소싯적에는 거의 매일처럼, 그리고 거의 온종일 함께 얼려 다녔기 때문에 나의 손이 해야 할 일을 거의 전부 그의 손이 도맡아 처리했던 셈이다. 예를 들면, 썰매나 팽이 등 놀이기구를 만드는 일부터 나의 방에 못질을 하거나 도배를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은 온전히 나의 것인 양 착각이 들 정도로 수고를 했다.
당연한 결과로서, 나의 손은 내내 버림을 받았다. 제대로 길들일 겨를이 없었으므로 그나마 잠재해 있을지도 모를 능력을 발휘해볼 기회마저 없었다. 손의 주인인 나는 일쑤 중얼댔다. “넌 안돼. 어벙하기 짝이 없단 말이야.”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K의 손앞에서 나의 손은 언제나 부끄럽고 무력했다. 비단 나만이 아니다. 다른 친구나 내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거리가 생길 때마다 그들은 곧잘 나에게 말했다. “K 어디 갔니? 그 친구 손을 빌리지 그래?” 그러면 나는 금세 기가 죽었다. 일거리를 감히 손에 잡았다가도 슬그머니 놓아버릴 수밖에 달리 재간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못질이라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 친구부터 먼저 생각한다. 저 양반은 친구 없으면 못질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핀잔을 아내로부터 일쑤 받게 마련이다. 때로는 아내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다. 사정이 그쯤 되고 보면 더 이상 뭉개고 앉아있을 도리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연장을 찾아들고 덤벼 보지만 역시 자신이 없다. 시작하기도 전에 엉성한 작업결과가 눈에 보이는 듯한 것이다. 땀을 흘리며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내 꼴을 지켜보며 아내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도 처자식 굶기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네요.”
아무렴. 옳은 지적이라고 나는 매번 수긍한다. 정말이지 이 어벙한 손을 가지고도 살아갈 수 있다니, 이놈의 세상사는 일이라는 것도 엔간히는 엉성한 놀음인가 보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듯 어벙하고 엉성한 기분!
생활을 하다보면 자주 벽 같은 것과 맞닥뜨리곤 한다. 우리네의 저 빤한 일상 속에도 군데군데 함정들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사람일 수도 있고 업무상 문제일 수도 있고 또, 정체가 모호한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와 맞닥뜨린 그 벽 앞에서 내가 일쑤 느끼는 감정은 바로 자신의 어벙함이다. 면벽한 채 속수무책으로 서있는 자신이 그렇게 어벙하고 무력해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낯익은 모든 사물들이 나와 안면을 바꾸고 돌아앉은 기분이다. 온통 낯이 설다. 목을 움츠리고 어깨를 늘인 채 나는 생각해 본다. 내가 처한 상황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맹랑한 일 같기도 하다. 따라서 결과가 어느 쪽으로 자빠지든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기분이 든다.
2. 몰취미에 대해
몰취미가 나의 취미다. 그러나 이 말은 다분히 역설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 더 정직하게 말한다면, 몰취미까지도 나의 취미가 되지 못하고 있다. 즉 어정쩡한 것이다. 삶이 또한 그렇듯이.
단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까지 완행열차를 타고 혼자서 원정했던 기억도 없지는 않다. 한때나마 선배작가를 따라 낚시를 다닌 일, 이른바 조깅을 한 철, 테니스를 한 달쯤 하다 집어치운 일-내게는 고작 그런 기억 밖에 남아있지 않다. 술은 족보에도 없으니 애시당초 늘 턱이 없고, 바둑은 시간만 축내는 일 같아서 첫걸음 배우다 팽개쳤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야 아무래도 무관하다. 생각나면 다시 시작해 볼 수도 있고 영영 외면해버린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없다. 단지 내가 찬탄해 마지않는 것은 우표딱지 한 장, 성냥갑 한 개의 수집에도 자기의 상당 부분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들의 그 순수한 열정이다. 어째서 그게 가능할까? 내게는 거짓 없는 하나의 경이이다.
쓰잘데없는 혹은 하찮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로서는, 소인 찍힌 우표딱지 한 장, 쓰고 버린 성냥갑 한 개에 대단한 의미나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 옛날 서화나 골동품 같은 목록이라 해서 별반 다를 게 없다. 물론 전자에 비해서는 보다 공인된 가치가 있음은 인정된다. 어떤 문화적 가치, 혹은 돈으로 환산되는 의미에서의 현실적 가치 등.
그렇다고는 해도 내게는 역시 그들의 열정이 이해되지 않는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다분히 관심의 문제다. 내게는 한결같이 무덤덤한 대상일 뿐인 것이다. 나의 일부를 던져 넣는 건 고사하고, 극히 한때의 관심조차도 기울이고 싶지 않는 그런 사물들인 셈이다.
사랑의 결여 같은 것을 종종 생각해 본다. 아무것에도 투신할 수 없는 마음-그것이 어떤 결함 때문이라면 그 결함이란 혹 사랑의 부재는 아닐까? 하찮은 어떤 사물에 대해, 자신의 삶과 이 우주에 대해. 모를 일이다. 단지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즉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볼품없는 돌멩이 하나에도 이렇다할 만한 흥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자기 존재의 전부를 내걸고 몰두할 수 있는 대상 역시 어디서도 찾아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 말이다. 나의 몰취미는 그러므로 나 자신의 어떤 결함 때문만은 아닌 듯도 싶다.
무료한 낮잠에서부터 문득 깨어나는 순간마다 이마를 차갑게 스치는 의식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것이다. 즉 나이를 문득 실감한다. 내게 주어진 그 빤한 시간 중에서 기왕에 사용해버린 부분과 남아있을 법한 것을 대비해본다. 갈 길은 아득한데 해는 기울고 호주머니는 거의 바닥나버린 여행자의 기분이다. 지금까지는 참 그럭저럭 해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는 일이나 하는 일이나 다 엉성하고 어정쩡하고 뭐, 그랬던 거다. 이제부터라도 좀 열심히, 뜨겁게, 코피 나게 살아봐야 할 텐데..., 좋은 소설도 쓰고, 기똥찬 사랑도 하고...
하지만 그런 순간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 이마를 차갑게 식히던 그 의식은 일상의 그 탁하고 뜨뜻미지근한 것에 금방 뒤섞여버리고 만다. 세상사 죄다 쥐뿔같다. 굳이 몸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아진다.
3. 완전함에 대해
한 달에 한 번쯤 아내를 따라 교회당엘 가본다. 두 아이 녀석들이 앞장을 선다. 무구함, 그 작고 때 묻지 않은 마음들이 어쩌면 나를 잘 인도해줄 것 같다. 그들 속에 좀은 쑥스럽고 좀은 엉성한 자세로 끼어 앉은 채 삶과 죽음의 문제를 잠시 생각해본다. 전혀 소득이 없진 않다. 일상의 폐쇄회로에서부터 내 의식은 잠시 벗어난다. 부담 없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혼의 나들이를 즐기는 거다.
완전한 것에는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어떤 심성 같은 것이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도 이런 순간이다. 혹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는 확실히 그런 일면이 있는데, 나의 경우도 그쪽에 속해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예컨대 종교란 예외 없이 완전한, 완벽한 내세를 제시하고 있다. 회의는 용납되지 않는다.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고 고민할 일도 없기 때문에, 따라서 살맛도 없을 것 같다. 완전한 내세, 그것은 곧 완전한 무의미란 생각도 든다.
어딘가 엉성하고 불완전하고 공허하며 무질서한 것-이것이 아침저녁으로 내가 만나는 현실이다. 그 세계는 때로 견고해보이고 또 때로는 더없이 엉성하고 헐겁게 느껴진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기도 하고, 조금은 엉뚱하다 싶은 것들이 엉뚱한 곳에 버젓이 버티고 있기도 하다. 꼭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일도 일어나지만, 아무래도 엉터리 같은 일 역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사물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한결같이 엄청난 개연성이 엿보인다. 거의 아무런 확신도 얻어낼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참으로 엄청나다. 10년 이상 한솥밥을 먹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결별을 선언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보장할 수는 없다. 한 생애를 투자하여 쌓아올린 작업이 마지막 순간에 무너질는지도 모른다. 이것 또한 도리 없다. 당하면 당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은 끝난다.
그렇다고는 해도 현실은 현실이다. 그것은 차갑고 단호하게 내 일상적 삶을 규제한다. 터럭 한 올도 무시할 수가 없다. 자로 재고, 무게를 달고, 철근과 시멘트로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세계인 것이다. 어느 구석이 엉성하고 어설프다는 말인가? 바늘 하나 꽂을 데가 없이 그 거죽은 견고하다. 필연만 지배하는 세계이다.
어쨌거나, 내게 오는 이 상반된 느낌 때문에 나는 도무지 당당할 수가 없다. 매사에 어정쩡하고 서툴고 엉성하다. 소심하게 주저하고 어설프게 덤볐다가 시행착오만 거듭한다. 산다는 일이 도무지 요령부득이며, 내 삶의 무대가 장터라면 내 꼴은 외수없이 촌닭 주제인 것이다.
피장파장인 셈이다. 엉성하기로는 나나 이 세계의 존재양식이 말이다. 그러므로 양자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삶이라는 것도 엉성한 것일 수밖에 도리 없는 노릇인 거다. 도무지 엉성하고 어설프고 서툰 나, 혹은 나의 삶-이것을 어디든 단단히 못질을 해야겠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낮잠에서 깨어난 순간처럼 때로는 불안하고 다급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디에다 못질을 할 것인가? 어디에다 내 전부를 걸어볼 것인가?
한 편의 소설을 쓴다. 혹은 분만하려고 낑낑대며 온통 몸살을 앓는다. 그러면서 은근히 자신에게 윽박지른다. 뭐하는 거야? 꾸물대지 말고 빨리 어디든 꽝꽝 두들겨 박으라구. 단단하게, 너와 너의 삶이 다시는 흔들리지 않게. 하지만 망치를 쥔 나의 손은 더없이 어설프기만 하다. 저 삶의 현장에 서있을 때처럼.
(문학사상, 1980)